發岐의 亂과 公孫度의 고구려 서부지역(요동,낙랑,현도) 점령

 

 

十九年丁丑, 三月, <漢>人来投者日增. 命置官, 勞之授職.  五月, 上, 崩於<金川宮>.

春秋四十三. 葬于<故國川>. 帝, 以英勇之姿, 不樂為政, 沈酒聲色, 不能令終, 惜哉.

<고구려사초>

 

 

고국천제19년(AD197)정축,

 

3월, 투항하여 오는 한인(漢人)의 수가 점점 늘어가니,

관리를 두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직책도 주었다.  

 

5월, 상이 금천궁(金川宮)에서 춘추 43세에 죽었다.

 

고국천(故國川)에 장사했다.

 

제는 외모가 뛰어나고 용감하였으나, 국정을 돌보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주색에 빠져 끝을 좋게 맺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었다.

 

 

帝, 諱<延優>, 亦曰<位居>, <新大>之別子也. 母, <朱>太后, 夢黃龍纒其身而交之.

<新大>奇其夢, 而當夕生之, 生而視人. 聰慧美容儀, <于>后, 愛之密相通,

及<故國川>崩, 秘其喪而密迎帝于宮中, 矯詔而立之, 然後發喪.

<故國川>之胞弟<發岐>, 以嫡兄當立而不得立, 乃發兵圍宮城而爭立.

國相<乙巴素>曰;“國本已定. 爭之者賊也.” 國人乃戴帝而討<岐>.

<고구려사초>

 

 

제의 휘는 <연우延優> 또는 <위거位居>이며, 신대제의 별자{서자}이다.

 

모친 <주朱>태후가 꿈에 황룡과 몸을 섞어 교합하였다기에,

그 꿈을 이상히 여기어 바로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자 바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커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외모가 멋져서,

<우于>후가 제를 좋아하여 남몰래 상통하였었고,

고국천제가 죽으매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제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나서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밖에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복아우 <발기發岐(158-197)>는,

<연우延優>의 적형(嫡兄)이어서 마땅히 제위에 섰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고 제위를 다퉜다.

 

국상 <을파소乙巴素>는

 

“나라의 주인은 이미 정해졌소. 제위를 다투는 자는 적이오.”라 하였고,

 

나라사람들은 제를 받들고 <발기發岐>를 쳤다.


<岐>走<杜訥>而自立, 求救于<公孫度>曰;“小國不幸, 兄死, 嫂姦矯詔立弟. 願大王助我.

得國則必報.” <度>曰;“烝母妻嫂, <句麗>之常習. 今, <發岐>, 不得妻其嫂,

而見奪于其弟, 格以禮者爭立也. 乘此機會, 聲言助<岐>而襲之, 可得其國也.”

其小厥曰;“<麗>有名臣<乙巴素>, 不可深入而衝其備. 宜與<岐>衆掠西邊而有之,

上策也.” <度>, 乃以兵三万, 聲言助<岐>, 而奄有<盖馬>・<丘利>・<河陽>・<菟城>・

<屯有>・<長岺>・<西安平>・<平郭>等郡, 而不助<岐>. <岐>憤而發疽. 帝, 憂<度>将侵,

遂築<淌南山城>, 常與<于>后, 居之, 以爲密都.

<고구려사초>

 


<발기發岐>는 두눌(杜訥)로 도망하여 스스로 제위를 칭하고는,

<공손도公孫度>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말하길;

 

“소국(小國)은 불행합니다. 형이 죽자, 형수가 가짜 조서로 동생을 제위에 세웠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라 하였다.

 

<공손도>가

 

“고구리에서는 증모처수{烝母妻嫂)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며,

지금 <발기>는 형수를 처로 삼지 못하고 동생에게 빼앗겼다.

 

예법을 따지며 제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때를 틈타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하고 기습한다면

그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겠다.”고 말하자,

 

<공손도>의 아들은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서

깊숙이 들어가 방비가 튼튼한 것을 치는 것은 가당치 않으니,

<발기>의 무리와 함께 고구리의 서쪽 변방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공손도>가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고 하면서,

개마(盖馬)구리(丘利)・하양(河陽)도성(菟城)둔유(屯有)장령(長岺)

서안평(西安平)평곽(平郭)군 등을 엄습하여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는 않았으니,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제는 <공손도>가 곧 쳐들어 올 것이 걱정되어 창남산성(淌南山城)을 쌓고

<우>후와 함께 항상 그곳에 머물렀으며, 그곳을 밀도(密都)로 삼았다.

 

 

 

※ 참고

 

두눌(杜訥) : 엣 황룡국의 도읍지, 서도(西都)인근

 

증모처수{烝母妻嫂) :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친모 이외의 여자나 형수 및 제수를

                              처로 거두는 것

 

창남산성(淌南山城) : 옛 구다국의 창수(淌水)이남에 쌓은 城.

 

밀도(密都) : 난리를 피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도성(都城)

 

 

 

이 시기 後漢은 전국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봉기하자

많은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하여 <공손도>와 고구려에 의탁하게 된다.

 

고국천제 <남무>의 황후 <우于>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고국천제는 <을파소>를 등용하여 외척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코자 하였으나

말년에는 주색에 빠져 정치는 오로지 우씨일파가 독차지 하였다.

 

고국천제가 죽자 형제상속의 원칙에 의하여 최장자이자 적통인 <발기>는

당연히 자기가 다음의 황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여기고 방심하였다.

 

그런데 <우于(156-234)>황후는 <연우延優(173-227) >를 좋아하여

<남무>의 죽음을 숨긴 채 <연우>를 제위에 세운다. 

 

<연우>는 신대제 백고가 궁인 <주진아朱眞兒(155-221)>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주씨는 무(巫) 집안의 딸로서 궁인으로 궁에 들어와 탕을 만들고 차(茶)를 다렸었다.

 

발기의 어머니 목도루(穆度婁)의 딸 <수례守禮>는 졸본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연우>는 비(妃)의 아들이었고 <발기>는 황후(皇后)의 아들이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사람이 있었고 <발기>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발기를 낳은 어머니 <수례(133-188)>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목씨 가문에 힘이 되었던 <명림답부>마저 저 세상의 사람이 된지 이미 오래다.

 

우후는 <발기>의 처인 언니 <우간>을 통해 <을파소>를 꾀었고

고국천제를 떠나보낸 <을파소>는 새로운 권력 배경이 필요했다.

 

그가 우씨 일가와 손을 잡고 <발기>를 치는 것이다.

 

<발기> 일당은 두눌로 도망하여 <공손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공손도>는 <발기>를 도우는 척하며 고구려의 서부지역을 차지해 버린다.

 

 

추모 이후 200년 동안을 지배하며 漢과 국경을 다투던 고구려의 서부지역이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고 통채로 <공손도>에게 넘어가고

고구려는 산상대제 13년(209년) 난하를 건너

대릉하 상류인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하게 된다.

고구려는 요동을 상실한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구다국에 창남산성을 쌓고 밀도를 두어 이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서의 구다국은 이미 공손도의 손에 넘어가버린 상태였다. 

 

 

- 슬프다, 발기의 난이여!

 

  

발기의 난은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하북성 요동을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대륙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울러 고구려라는 균형추를 상실한 대륙은

그 후 5호 16국 시대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발기의 난은 김부식의『삼국사기』와 중국의 정사인『삼국지』에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대하는 두 사서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는 ‘발기의 난’이 별다른 파장없이 마무리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반면,

『삼국지』는 ‘발기의 난’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분열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발기의 난을 요약해 보자.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년) 때의 일이다.

 

고국천왕이 후손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왕에게는 우씨라는 아름다운 황후와

<발기>, <연우>, <계수>라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왕후 우씨는 초상난 것을 비밀로 하고,

밤에 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發歧>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손이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이어야합니다.” 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하늘이 정하는 운수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예(禮)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핀잔을 주었다.

  

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곧 둘째 동생인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아재(叔)를 보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연우>가 더욱 예의를 차리며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 되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바래다주시오.” 하였다.

 

<연우>가 그 말에 따랐다.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병력을 동원해서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치기를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네가 차례를 뛰어 넘어 임금 자리를 빼앗는 것은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까지 목베어 죽일 것이다.” 하였다.

  

<연우>가 3일간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보고 알리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모의하고 즉위하여

천륜의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하러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공손도>가 그에 따랐다.

  

<연우>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는데,

漢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배자를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차마 지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계수>가 형제간의 정으로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이 한 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하였다.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가 소리 내어 슬피 울며 그 시체를 거두어 풀로 덮어 매장하고 돌아왔다.

 

왕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자리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기를

 

“<발기>가 다른 나라 병력을 청하여 자기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막대하다.

지금 그대가 그를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자살하자 매우 슬피 우는 것은 도리어 과인이 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하였다.

 

<계수>가 안색이 바뀌며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 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하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어진 마음으로 악을 잊으시고,

형의 상례(喪禮)로써 장사지내면 누가 대왕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관부에 나아가 죽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자리에 앉아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과오를 알겠다.

 

대는 자신을 책망하지 말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왕자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기쁨이 극치에 달하여 그만 두었다.

  

가을 9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발기>의 시체를 받들어 모셔오게 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왕이 본래 우씨로 인하여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삼국사기』‘산상왕’ 편>

 

 

『삼국사기』의 위 기록을 보면,

왕후 우씨가 거짓 왕명을 내세워 고국천왕의 첫 번째 왕위 계승자인 <발기>를

따돌리고 둘째인 <연우>를 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거짓 왕명을 빙자한 왕후 우씨와 <연우>의 반역행위로

<발기>가 분개했음은 당연하다.

 

그 당시 당대의 효웅이었던 <공손도>가 요동 땅의 일각을 장악하고

천하를 향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발기>는 <공손도>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찾으려 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자살함으로써

<발기>의 난은 뒤탈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으로 되어있다.

 

 

과연 그럴까?

 

 

중국 정사인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196~219년)년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므로

현토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위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는 산상왕 원년인 197년이다.

 

반면 『삼국지』는 공손강(재위 204~221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발기>가 산상왕 원년에 전쟁에 패하여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산상왕 원년인 197년부터 수년간 발기의 세력과 산상왕 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삼국사기』도 고국천왕편에 위『삼국지』와 같은 기록을 싣고 있다.

 

고국천왕을 혹은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漢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삼국사기』‘고국천왕’편>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지』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로 말하는

공손강 재위(204~221년) 때인 209년,

고구려는 별안간 환도성으로 천도를 감행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지』의 기록에 더 신뢰가 간다.

  

결국 <발기>의 난은 <발기>가 형이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 서부지역인 연노부(涓奴部)와 함께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자 고구려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 땅을 공손강에게 들어 바친 가슴 아픈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머나먼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했으며,

대륙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잃어버린 하북성 요동을 되찾을 때까지 2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요동 땅에서 대륙백제와 공손씨가 흥기하고,

모용선비가 일어나 대륙을 호령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포비(疱婢)에서 太后가 된 朱眞兒

 

<주진아朱眞兒(155-221)>는 마산(馬山)에서 대대로 무당을 지낸

주씨(朱氏)가문 출신인데 아버지는 <주로朱輅>이고 어머니는 <주번朱番>이다.

 

또한 <주로朱輅>는 <주문>의 별자이니 호화태후의 조카가 된다.

 

그녀가 궁으로 들어간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이모 <주경朱京>이 요리를 잘하여 임금의 음식을 담당하는 봉례상식(奉禮尙食)으로

선발되어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도 이모를 따라 들어가 탕국을 끓이는

궁인(포비,疱婢)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신대제 <백고>를 알게 된 때는 그녀가 열여섯 신대제는 나이 쉰이었다.

 

황후 <수례>의 눈치도 있고 궁인 신분의 여인을 후(后)로 맞기도 어려워

신대제는 그녀를 수왕당 봉례로 삼고 거기에서 그녀와 밀회를 즐겼다.

 

계축년(173) 정월, 신대제의 축하를 받으며 연우태자가 탄생하였다.

 

태자가 태어난 방안은 향기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녀는 이제 당당히 수왕당을 나와 마산궁(馬山宮)에 입궁하게 된다.

 

신대제는 외톨이와 같은 마산궁비 주씨와 아들 <연우>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태자 <남무>를 불러 그들을 지켜주라 신신당부를 하게 된다.

 

고국천제는 마산궁비 주씨를 천후(天后)로 올리고자 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주씨는 우씨와 <을파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고국천제가 질환에 시달리던 어느 날,

 

우후가 주씨에게 급히 연락을 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한다.

 

아들이 없는 우후에게는 주씨가 필요하였다.

 

우후는 <연우>태자를 옹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제의 후계자 1순위는 <발기>였다.

 

<발기>가 아니어도 <진기晋岐>태자도 있었다.

 

결코 <연우>의 차례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짜 조서를 만들어 <연우>를 황제로 등극시킨다.

 

<을파소>를 비롯한 대신들도 이를 인정한다.

 

주씨는 우후를 시켜 <발기>를 방문하게 한다.

 

우후의 방문으로 방심하였던 <발기>는 모든 상황이 끝났음을 알게 되자

분노에 치를 떨며 군사를 동원한다.

 

300여명의 군사가 궁궐을 기습하고 모든 것을 원상복귀 시키려하였다.

 

하지만 <발기>의 아내 <호천虎川>마저 <발기>를 버리고

주씨에게 달려와 급습계획을 알리게 된다.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눌에 있던 발기를 <계수>가 정벌하니 배천(裵川)으로 도망가다 죽게 되고

그의 아들 <박고駁固>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며 고기를 낚으며 인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남편을 고발했던 <호천虎川>과 <발기>의 재산은 <을파소>의 차지가 되고

우후의 아버지 <우소于素>는 주태후의 사신(私臣)이 된다.

 

외척 타파를 빌미로 국상의 지위에 발탁되었던 <을파소>가

고국천제의 죽음 이후 다시 외척과 결탁하게 되는 것이다.

 

주씨의 천하가 되자 궁인 시절 그녀를 겁탈한 <수례>의 동생

<목등穆登>에게 복수를 하고자 조카 <주동朱同>을 시켜 그의 재산을 뺏고자 한다.

 

하지만 목씨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많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주태후에게 <우소于素>와 놀아날게 아니라

옛정을 보아 다시 자신과 놀아나는 게 어떠냐고 비아냥거린다.

 

놀란 산상대제 <연우>가 황급히 이를 말린다.

 

자칫 나라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주태후는 다시 몰래 사람을 보내 <목등>을 죽이려하였지만

<최숙最熟>이 이를 알고 간하여 간신히 멈추게 된다.

 

사태를 수습하기위해 산상대제는 <목등>을 다시 대사자(大使者)로 복위시키고

주태후와의 화해를 간신히 성사시킨다.

 

<목등>은 백배 사죄하여 목숨을 구걸하게 되자

주태후는 딸 <춘春>을 <목등>의 아들 <목능穆能>에게 시집보내게 되니

그때서야 <목등>의 아내 <진안珍安>도 한숨을 돌리게 된다.

 

박창화 필사본 본기신편열전에서는 그녀를

 

“팔이 길고 이리의 눈을 가졌는데 늙어가면서 더 철면피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치희의 아름다움(雉姬之美)”이라고 묘사한 명림답부의 말처럼

젊은 시절의 그녀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던 여인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사납게 변해버린 모양이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황후 우씨와의 반목이었다.

 

정권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씨와 손을 잡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217년 태보의 직을 두고 <주곡朱曲>과 <우목于目>이 싸우자

산상대제는 <우목>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는 우씨가(于氏家)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후 우씨는 주씨를 버리고 명림씨(明臨氏)와 손을 잡게 된다.

 

220년 7월, 산상대제는 우후와 <우술>을 데리고 주태후가 있는 산궁을 방문하여

주태후에게 <명림전明臨鱣>을 동궁의 비로 삼겠다고 하니

주태후는 주씨 가문의 <주남朱南>을 정비로 삼고 <명림전>을 첩으로 하라 고집한다.

 

하지만 산상대제 일행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심지어 돌아갈 때

<명림전>을 동궁과 함께 수레에 태워 보내면서 <주남>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주태후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화가 난 주태후가 동궁의 어머니인 주통녀(酒桶女 189-248)를 죽이고

동궁을 바꾸라고 하지만 그녀의 명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주희朱希>가 그녀의 곁에서 달래줄 뿐이었다.

 

그녀가 마산산궁(馬山山宮)을 지을 때 그 산궁은 화려하고 웅장하였지만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둡고 추운 쓸쓸한 곳이 되어버렸다.

 

221년 정월 주태후는 춘추 67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하게 되고

재궁(榟宮:관)을 산궁에 3년간 봉하였다가 신대릉(新大陵)에 장례를 치렀다.

 

무당의 딸로 태어나 이모를 따라 궁궐로 들어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끝내는 태후의 위치에 올라 고구려를 휘어잡았던 철의 여인 <주진아朱眞兒>였다.



<두눌과 창남산성 및 공손도의 요동지역 정벌과 고구려의 천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