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郡烏丸承天下亂 破幽州略有漢民合十餘萬戶

袁紹皆立其酋豪為單于 以家人子為己女 妻焉

遼西單于蹋頓尤強 為紹所厚 故尚兄弟歸之 數入塞為害

公將征之 鑿渠 自呼沲入泒水 泒音孤 名平虜渠

又從泃河口泃音句 鑿入潞河 名泉州渠 以通海 

 <삼국지 위서 무제기>

 

삼군 오환이 천하가 어지러운 틈을 타 유주를 파하고,

한나라 백성 합계 10여 만 호를 장악하였다.

 

<원소>가 함께 그 추호를 선우로 세우고, 가신의 자식을 자신의 딸로 삼아 시집보냈다.

 

요서 선우 <답돈>은 세력이 특히 강하여 <원소>의 후한 대접을 받았기에,

<원상> 형제는 그에게 의탁하여 여러 차례 새(塞)로 들어와 해를 입혔다.

 

공(조조)이 장차 그를 정벌하고자 도랑을 팠는데,

[호타]로부터 [고수]로 들어가는 것은, (고의 음은 고이다) [평로거]라고 불렀으며,

또한 [구하]의 입구로부터 (구의 음은 구이다) 도랑을 파 [노하]로 들어가는 것을

[천주거]라고 했는데, 이로서 해(하)와 통했다.

 

건안 10년(205년) 조조는 군사와 양곡을 운송하기 위해 천주거와 평로거를 굴착한다.

 

建安十年鑿渠自滹沱河入汾 名平虜渠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는 호타하에서 분하로 들어가는 곳에 평로거를 뚫었다고 한다.

 

평로거는 천진해 지역이 아니고  산서성 삭주지역에 평로거를 뚫어

황하와 호타호를 연결하여 대(代)지역으로 연결한 것이다.

 

 

조조가 205년에 원소와 손잡은 요서 오환을 치려고 [평로거]를 뚫은 사건을 말한다.

 

 

 

헌제 건안12년(정해년, 서기 207년)

 

3월 <조조>가 오환을 치려 하자, 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이 오랑캐에 도망갔을 뿐입니다.

이적{오랑캐}들이 탐욕스러운데다 그와 친한 게 전혀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침입하여 정벌에 나서면,

<유비>가 분명히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습격하라 할 테니

만일 변고가 생기면 뉘우쳐도 소용없습니다."

 

<곽가>가 말했다.

 

"주공께서 비록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고 있지만 오랑캐들은 그 멀리 떨어진 것을 믿고

틀림없이 방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무방비를 틈타 급습하면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원소>가 民夷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四州의 백성들은 우리의 위세에 눌려 복속하는 것이지

아직 은덕을 베풀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를 버리고 남쪽 정벌에 나서면,

<원상>이 오환의 물자를 이용해 그 죽은 주공{원소}의 신하들과 오랑캐를 불러

함께 움직이면, 백성들이 모두 호응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답돈踏頓>의 마음을 움직이고  개유(凱覦)의 계책을 이뤄

청주와 기주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앉아서 담론이나 즐기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 스스로 재주가 <유비>를 감당하기에도 모자란 것을 압니다.

 

막중한 임무를 <유비>에게 맡기면 그를 제어하지 못할까 두렵고,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유비>를 제대로 쓰는 게 못 됩니다.

 

비록 우리가 나라를 비워놓고 원정한들 주공께서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조조>가 그 말을 따랐다. 행군하다 역(易) {땅이름}에 이르러 <곽가>가 말한다.

 

"병귀신속(兵貴神速)입니다.

지금 천리길을 가서 적을 습격하는데,

치중(置重)이 많아서는 신속히 이기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들이 알아차려 방비를 할 게 틀림없습니다.

 

치중(置重)을 놔두고 가볍게 무장하여 길을 서둘러 가서

적이 예상치 못할 때 덮치는 게 낫습니다."

 

원래, <원소>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전주田疇>를 무종(無終)에서 부르며

그에게 장군 印을 주며 <안집安輯>을 거느리게 하였으나 그가 모두 거절하였다.

 

<조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자 하간(河間) 사람 <형옹邢顒>이 그에게 말했다.

 

"황건적이 일어난 이후, 20년 남짓에 해내(海內)정비(鼎沸)하여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을 하고 있소. 지금 듣자니 <조> 공께서 법령이 엄정하오.

백성들은 난리가 지긋지긋한데다 난리가 극에 달하면 평정될 것이니

이 몸이 먼저 물러갈까 하오."

 

마침내 그가 짐을 꾸려 향리로 돌아갔다.

 

<전주(田疇)>가 말했다.

 

"<형옹邢顒>은 天民{백성}의 선각자다!"

 

<조조>가 <형옹邢顒>을 기주(冀州) 종사(從事)로 삼는다.

 

오환이 쳐들어와 고을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주田疇>가 분노해 그들을 토벌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랐다.

 

<조조>가 사자를 보내 <전주田疇>를 부르자 <전주田疇>가 문하들을 몹시 재촉했다.

 

<문인門人>이 물었다.

 

"예전에 원공(袁公)께서 선생을 사모해 예를 갖춰 5번이나 부르러 와도

선생께서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조공(曹公)께서 사자를 한번 보냈는데도

선생께서 서두르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전주田疇>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그대가 알 수 없는 까닭이오."

 

마침내 사자를 따라 <조조> 군대에 다다라,

수령(蓨令)에 임명돼, 군대를 따라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당시 여름에 비가 내려 해안지대가 물에 잠기고 흙탕물에 길이 끊겼다.

 

게다가 오랑캐들이 요충지를 틀어막아 <조조> 군대가 전진하지 못했다.

 

<조조>가 그 점을 걱정해 <전주>에게 물었다.

 

"이 길은 여름에 늘 홍수가 나서 얕은 곳은 수레와 말이 다니지 못하고,

깊은 곳이라 해도 배가 다니지는 못하여 해결하지 못한 지 오래 됐습니다.

 

옛날에 북평군(北平郡)평강(平岡)에서 다스려

도로가 노룡(盧龍)을 나가 유성(柳城)에 달했습니다.

 

건무황제이래, 그곳을 빼앗겨 단절된 게 200년에 이르렀지만

아직 길이 조금 남아 있어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오랑캐 장수는 우리 대군이 당연히 무종(無終)을 지나

진퇴양난에 빠졌다 생각해 그 마음이 해이해져 방비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조용히 군사를 돌려, 노룡(盧龍) 입구로부터 백단(白檀)의 험준한 지형을 지나,

텅빈 곳으로 나가, 지름길로 이용해 그 무방비를 덮친다면

<답돈蹋頓>을 싸우지도 않고 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가, 훌륭하오! 라고 말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가 큰 나무들을 베어 물 옆길 가에 깔고 말하였다.

 

"지금 여름인데 날씨는 덥고 도로는 끊겨

잠시 가을 겨울까지 기다려 다시 진군하겠소."

 

정찰에 나선 오랑캐 기병이 그것을 보고 참으로 대군이 물러간다 생각했다.

 

조조가 명령하여 <전주>가 그 무리를 이끌고 향도가 된다.

 

조조 군대가 서무산(徐無山)을 올라 산을 파고 골짜기를 매워 5백여 리에 달했다.

 

백단(白檀)을 경유해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을 건너

동쪽으로 유성(柳城)을 향했다.

 

2백여 리를 남겨두고 오랑캐가 <조조>군대가 오는 것을 탐지했다.

 

<원상>과 <원희>가 <답돈蹋頓>, 요서의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등과 기병 수만을 이끌고 맞받아 치러 나왔다.

 

8월에 조조가 백랑산(白狼山)에 올라 갑자기 오랑캐 무리와 마주쳤는데

그들의 군세가 몹시 성대하였다.

 

그가 치중을 후방에 두고 와 갑옷을 걸친 이가 적어 측근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가 높이 올라가 바라보니 오랑캐 진영이 정비가 안 돼 있었다.

 

이에 그가 군사들을 총돌격시켜 쳐부수는데 <장요張遼>를 선봉으로 삼았다.

 

오랑캐 무리가 크게 무너져

<조조> 군대가 <답돈蹋頓>과 다른 왕들과 부하들을 베어죽이니,

오랑캐나 한족 투항자들이 20만 남짓에 달했다.

 

요동의 선우 <속복환速僕丸>이 <원상>, <원희>와 더불어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달아났다.

 

그 무리는 그래도 수천 기에 달했다.

 

누군가 <조조>에게 그들을 추격할 것을 권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버리라 시켰으니

병사들을 수고시킬 것 없소."

 

9월,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유성(柳城)으로부터 돌아왔다.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죽여 공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그가 정예한 용사들을 마구간에 숨긴 뒤 <원상>과 <원희>를 불러들였다.

 

그들이 미처 앉기도 전에 <공손강>이 복병들을 소리쳐 불러 그들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그들의 머리를 잘라 <속복환>의 잘린 머리와 함께 <조조>에게 보냈다.

 

장수들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공께서 돌아오시자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를 보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평소 <원상>과 <원희>를 두려워 했소.

내가 그를 압박하면 그들이 힘을 합칠 것이요

느슨하게 하면 서로 다툴 것이었소. 돌아가는 사정이 그랬소."

 

<조조>가 <원상>의 머리를 높이 매달고 삼군에게 명하였다.

 

"감히 그를 위해 우는 자는 처형하라!"

 

<견초牽招>가 홀로 제사를 올려 슬프게 울자

<조조>가 그를 의롭게 여겨 무재(茂才)로 천거했다. 

 

그때 날씨가 춥고 메말라 2백리를 가도 마실 물이 없었다.

 

게다가 군량이 모자라 말 수천 필을 잡아먹었다.

 

땅을 30 길을 파서야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조조>가 지난번에 출병을 말린 사람들을 찾았다.

 

모두 그 이유를 몰라 사람마다 두려워하였다.

 

조조가 그들 모두를 크게 포상해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출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히 이겼소.

비록 성공했지만 하늘이 도와서요. 돌이켜보면 칭송받을 만하지 못 하오.

 

여러분이 간언한 것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었으니 이에 상을 내리오.

 

이 뒤에도 말을 꺼내는 것을 어려워 마시오."

 

 

<답돈蹋頓>은 요서오환의 수령 <구력거丘力居>의 조카로 꾀가 많고 지략이 빼어나며

사납고 용맹해 여러 부족의 장로들은

모두 그를 흉노제국의 전설적인 선우 <모돈>에 비견했다고 한다.

 

<구력거>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누반婁班>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카인 <답돈>이 대신 즉위하여 세력을 이어받았다.

 

<답돈>은 망명객들을 받아들이고 수백년 간 분열을 거듭하며 3부로 갈라져 있던

요서, 요동속국, 우북평 오환의 통합을 이루어 이들을 모두 다스렸고

당시 오환은 중국 북부의 기마민족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원소袁紹>와 <공손찬公孫瓚>이 싸웠을 때

<원소>가 <공손찬>과 여러 차례 거듭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이때 <답돈>은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며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후 <원소>는 조서를 꾸며 <답돈>을 비롯한 오환 3부의 지도자들을

선우(單于)로 삼았고 일족의 여식을 양녀로 삼아 <답돈>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누반>이 장성하자 <답돈>은 <누반>에게 선우를 이어받게 하고

자신은 왕이 되었는데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오환의 선우로 여겨질 만큼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선 <원소>가 죽고 후계자인 <원상袁尙>은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답돈>에게 망명해 왔다.

 

<답돈>은 <원상>을 보호하며 <원상>이 재기하도록 도왔고,

그 결과 모든 기반을 잃은 일개 망명객에 불과했던 <원상>은 군사를 이끌고

거듭 변경을 침입하고 <원소>의 구신들을 사주해 <조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임명한 자사와 태수들을 살해하며

수십만의 유주(幽州) 백성들을 오환으로 끌고 가는 등

<조조>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어 <원소> 사후

사실상 <조조>의 유일한 적수로 여기던 <유표劉表> 이상의 위험인물로 평가되었고,

심지어는 <원상>을 방치할 경우에 <조조>의 새 거점인 기주(冀州)의 유지 가능성조차

논의되기에 이른다.

 

더 이상 피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조조>는 마침내 오환 원정을 결정했다.

 

당시 <조조>군은 무종(無終)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인 유성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나

큰 길은 비로 인해 끊겼던 데다,

여러 샛길들은 <답돈>과 <원상>의 군대가 선점하고 철저히 지키고 있어

고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조조>는 이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평소 오환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재야의 명사로 지냈던 <전주田疇>는

<조조>가 오환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리를 모아 <조조>에게 합류했는데

그는 2백 년 동안 이용이 끊겨 있었던 고로(古路)를 안내하며 진군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작전을 완전히 수정하여 노룡(盧龍)방면의 길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를 향해 잠행한다.

 

이때 조조는 철수를 위장하고 있었고,

오환은 노룡을 통한 샛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조조군이 사라지자 몇차례의 척후 끝에 실제로 <조조>가 철수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총사령부인 유성(柳城)에서 불과 2백리 지점에서

조조의 대군이 포착되자 <답돈>과 <원상>은 경악하여 황급히 <조조>와 맞섰다.

 

게다가 이때 <답돈>은 백랑산에 올라갔다가

때마침 <조조>와 갑작스럽게 조우하였는데,

당시 <조조>는 본대에서 이탈해 있어 거느린 군사는 적었으나

고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답돈>의 군사들은 제대로 대오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조조>는 <장료張遼>에게 명해 <답돈>을 공격하게 했고

여기서 <답돈>은 <조순曹純>의 부하들에게 생포당하여 참수되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데다 졸지에 지도자까지 잃은 오환족은

허무하리만큼 철저히 붕괴되었고,

<원상>은 <누반> 등의 오환 지도부를 이끌고 다시 망명을 거듭하게 된다

 

 

※ 참고

 

개유(凱覦) : 노리고 엿봄

병귀신속(兵貴神速) : 군사작전은 귀신처럼 재빠른 게 중요함

치중(置重) : 군수물자

해내(海內) : 천하

정비(鼎沸) : 솥의 물이 끓는 것 같이 어지러움

서무산(徐無山) : 유주 계현 평곡현에 있는 산

선비정(鮮卑庭) : 선비족의 영역이란 말로,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오원, 운중에서 동쪽으로 요수(지금의 조백하)까지를 말함.

 

백랑산(白狼山) : 백석산과 낭아산의 별명이 백랑산이다.

 

 

 

 

 

<조조의 북정로>

 

 

조조는 유성을 근거로 한 원씨형제와 오환들을 치기 위해 대군을 발동하면서

상대에게 일찍 알려지면 미리 방비를 단단히 하게 될까봐 최대한 기밀을 유지한 채

200리까지 근접했던 것으로 되어있다(다른 기록에는 100리라고도 한다).

 

1)이 때문에 조조군은 산서성 태행산맥 뒤편으로 잠행하여 북진한 후

선비정의 동부에 해당되는 삭주의 동남 대(代)를 경유하여,

 

2) 산서성 영구(靈丘) 방면으로 나와

우북평 평강을 거쳐 동으로 유성으로 향한 것이다.

 

3) 8월에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는데 백랑산이란 지명은 남아 있지 않고

두 개의 지명 백석산과 낭아산을 합성한 지명으로 갈석산을 말한다.

 

이때 고구려는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산상대제 13년(209년)에 환도성(今 조양)으로 천도하여

광개토태왕이 다시 요동을 수복하는 200년의 세월을 기다려여만 했다. 

백제는 구지왕 3년(190년)에 공손도의 딸 보루(宝婁)를

구지왕 30년(217년)에는손강의 여동생 보고(宝皐)를 잉첩으로 받아들여

공손강과 함께 고구려를 견제하게되고 신라는 일성왕 때이다.

고구려의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요동에 강력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데

조조의 북벌이 이루어 졌을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조조는 왜 평로거와 천주거를 뚫었나?

 

 

"17세기의 저명한 군사기술자중 한 명의 계산에 따르면

 

100라스텐(1라스텐은 1.97~2.03)의 밀가루와

 

300라스텐의 목초를 운반하기 위해선 배는 9척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같은 양을 육로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600대 이상의 짐수레가 필요했다고 한다.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수상 운송은 육상 운송에 비해 훨씬 저렴하고 손쉬웠다.

 

 

로마를 예로 들면, 몇몇 저자들은 그 비율을 1:50으로 추산하는데

 

말은 크기가 대동소이하지만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수치가 확대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물이나 수레로 물자를 옮기는 비용은

 

같은 양의 짐을 선박으로 운송할 때보다 50배 가까이 더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물자의 가격이 싸고 양이 많을수록 그 격차는 커지게 된다.

 

 

그 결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가능하다면 수상 운송을 통한 보급품의 수송을 선호했다.

 

 

육상 병참선은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군사보급에 관해 철저히 연구한 조너선 로스의 견해를 들어보면,

 

대략 5세기 동안 전선에서 100마일 후방에 위치한 기지로부터

 

육상으로 물자가 보급된 경우는 단 3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말이 끄는 수송수단에 의존하는 군대의 이동거리 한계는 100마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거리는 훨씬 짧다.

 

 

우리에게 알려진 로마 제국 시기의 군단 기지 가운데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강변에 자리 잡았는데 여기에는 아주 훌륭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보급전의 역사>

 

 

 

 

두마리 소가 끄는 수레는 450kg의 짐을 하루에 16km 끌 수가 있다.

 

 

성인남자의 하루 필요 칼로리는 2500kal 백미 100g360kal이고

 

즉 병사 한 명이 하루에 소비하는 쌀은 700g이다.

 

 

조조군을 3만명이라 가정하면 700g x 3= 2100g

 

즉 하루에 21t의 쌀을 소모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소가 없다면 사람이 끌어야하며

 

쌀뿐만 아니라 말에게 먹일 건초 마초까지 더하고

 

또한 수송대를 호위할 병사들 까지 필요하니 인력소실은 더 커질 것이다.

 

 

 

반면 조운은 1척당 약 쌀1000(72t) 을 수송할 수있다.

 

<전쟁으로 읽는 삼국지>

 

 

 

관도전 당시에도 원소는 황하하류를 장악하여

 

조조에 비해 훨씬 유리한 보급상태로 전쟁에 임할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뿐만 아니라 각 전투에서 조운을 이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 볼수있다.

 

 

 

9(204) 봄 정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9, 금호대(金虎臺)를 만들었다.

 

수로를 뚫고 창수(凔水)를 끌어들여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황하와 통하게 했다.

 

 

 

공이 이를 장차 정벌하고자 하여,

 

수로를 뚫어 호타(呼沱)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게 하고

 

이를 평로거(平虜渠)라 명명했다.

 

 

 

또한 구하(泃河) 입구로부터 로하(潞河)로 들어가게 해

 

천주거(泉州渠)라 명명하고 바다로 통하게 했다. (206)

 

<삼국지 위서 무제기>

 

 

 

 

조조는 이조거,평로거,백구,수양거등을 뚫어 업성을 공략할 때 이용하였으며

 

또한 둔전책을 위한 용수 공급을 위함이기도 하였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 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 비었고,

 

백성들은 갈 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증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등애전>

 

 

전쟁에서 보급로의 행군로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