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대제7년{AD203}계미,

 

3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빌었다. 

 

상이, 국상<을파소>와 함께 조용히 국사를 논의하다가,

 

한숨지으며 이르길;

 

“앞서 간 형이 내게 형수를 맡기며 아들을 낳아달라고 하셨건만,

7년이 지나도록 낳지를 못하여 형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효의 하나요.

 

<발기>와 다투다가 나라의 서쪽 땅을 잃었으니 불효의 둘이요.

 

태후께서 자정하시어 내외의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이를 말리지 못하니 불효의 셋이오.”라 하였다.

 

이에 <을파소>가 아뢰길;

 

“하늘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왕의 일들은 운 아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춘추 아직 젊으시니,

꼭 소후가 있으셔야 하오며, 그리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길;

 

“상국께서는 과연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구려.

지난 보름날 밤 꿈에 천제를 뵈었더니

역시 소후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소.

허나 소후가 없으니 어쩐 단 말이오.”라고 말하였다.

 

<을파소>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는 아뢰길;

 

“신이 밤에 천문을 보았더니 빈 하늘에 용광이 서렸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였더니만,

주통촌(酒桶村)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촌장은 <연백椽栢>이라 하는데,

본래 관노(灌奴)의 명족(名族)으로, 충성심과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을 아끼고,

신을 섬기며 나라에 보은할 줄도 압니다.

 

들어보니, 정숙한 딸이 있으며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내리신 뜻 아니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연백椽栢>이란 자가 과연 괴왕(槐王)에게 제사하고 딸을 낳았는데,

무당이 말하길 필시 왕후가 될 것이라고 하였기에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다고 하였으며, 지금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상이 이윽고 미행하여 그녀를 거두었다.

 


8월, 국상 <을파소>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을파소>는 훌륭한 재상 <을두지>의 후손이고, 부친 <을어乙魚>는 <서하>태수일 때

외척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었다.

 

<을파소> 역시 강직하고 굳세어 뜻을 굽히지 않고는

<채소采素>와 함께 산중에 숨어살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고국천제>가 불러내어 국상을 시키니 7정(七政)을 행하였다.

 

임금을 옳게 섬기고, 백성을 옳게 보살피며, 현자를 기용하고,

사람을 올바로 가르쳐 키우며, 좋은 기술과 재주를 함양하고,

농사와 수렵에 힘쓰며, 변방을 굳게 지켰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전차로 나라 안의 큰일이었던 <발기{發岐}>의 반란을 달래어 가라앉혔으며,

잃어버린 나라의 서쪽 땅에 대하여는 급하지 않게 좋은 계책으로 복구하였고,

나라의 후사가 끊길 것을 걱정하고는

상이 소후를 맞게 하여 <동천제>를 낳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동천제와 <통桶>후는 상시로 <을>공을 은인으로 여겨서

초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 시절 세상 사람들은 <우소于素>와 <을파소> 및 <연백椽栢>을 '3왕'으로 여겼는데,

<우소于素>를 신선지왕(神仙之王), <을파소>를 정교지왕(政敎之王),

<연백椽栢>을 은일덕행지왕(隱逸德行之王)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들은 평소 서로 간에도 잘 지냈다고 한다.

 

<고우루高優婁>가 국상이 되고, <상제尙齊>가 대주부가 되었다.

 

<우루優婁>는 <고루高婁> 후손 <고복장高福章>의 조카이며,

<을파소>와 함께 숨어살다가,

<을파소>가 세상으로 나오매, 따라 나와 패자와 대주부를 지냈고,

<을파소>가 죽으니 <을파소>의 뒤를 이었다.

 

모친은 <을파소>의 여동생이다.

 

<상제尙齊>는 <상경尙庚>의 아들이고, <우루優婁> 처의 오빠이다.

 

처 <어고於姑>는 <명림답부>의 딸이며, 예쁘고 지혜가 있어서,

상이 잠저에 살던 시절에 여러 번 찾아갔었고,

상이 등극하자 선궁(仙宮)으로 맞아들여 딸을 낳았으나,

<우>후의 투기로 쫓겨나서 남부에서 살고 있다가,

<우>후의 기세가 꺾이자, 도성으로 돌아왔다.

<고구려사초>

 

 

산상대제가 즉위한지 7년이 되어도

우후(于后)는 물론 주변의 누구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산상대제는 우후의 질투심으로 여자를 가까이 하기도 힘들었다.

 

산상대제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을파소>에게는 기회가 찾아왔다.

 

무당집의 딸이 주태후가 되어 외척이 나라를 휘두르고 있는 시절이다.

 

<을파소>는 미천한 집안의 여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을파소>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미천한 집안이라 할 수있는

주통촌의 딸을 산상제에게 소개한다.

 

그녀가 주통촌장의 딸 괴화(槐花189-248)이다.

 

주통촌(酒桶村)은 고구려의 남부 관노(灌奴)지역이고

과거 한남왕(汗南王) 온조가 다스렸던 옛 환나국에 있었다.

 

아버지는 연백(椽栢)이고 어머니는 어씨(於氏)이다.

 

그들은 괴왕신(槐王神)을 섬기며 대대로 술통을 만드는 비천한 집안이었다.

 

<괴화>가 황자 <교체>를 낳은 후에도 황궁에서는 그녀를 주통녀(酒桶女)라 불렀다.

 

우후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을파소가 괴화(槐花)를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후를 두려워한 산상대제는 <괴화>를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든 사건이 교시사건인 것이다.

 

고구려는 천제에 사용할 제사용 돼지를 전국에 산재한 사당에 가두어 길렀는데,

주통촌 인근 사당의 돼지가 주통촌으로 도망하였다.

 

제사용 돼지는 상처를 내면 안 되므로 모두가 우왕좌왕 하는 중에

건장한 체격의 <괴화>가 단번에 잡아 대령하였고

산상대제는 이를 핑계로 주통촌을 방문하여 <괴화>와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환나소수(桓那小守) <상관尙寬>을 <괴화>의 동생 <괴래槐萊>와 혼인시키고,

그에게 명하여 황제의 여인이 된 <괴화>의 집안을 보호하라 한다.

 

교시사건이 있은 지 반년이 지난 209년 5월,

우후는 <교화>와 산상제의 관계를 눈치채고 군사를 동원하여 환나를 습격한다.

 

환나소수 <상관>이 중앙군 우후의 군사를 막아낼 수 없었다.

 

다급해진 <괴화>는 남장(男裝)을 하고 도주하였으나 이내 <도승渡丞>에게 잡힌다.

 

<괴화>를 잡으면 죽이라는 우후의 명에 따라 <도승>이 <괴화>를 죽이려하자

뱃속의 태자가 죽게 되면 <도승>의 일가가 멸족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에 도승이 그녀를 살려주게 되고

그 해 9월 <교체郊彘(209-248)>라 불리는 아들을 낳고 그녀는 소후(小后)가 된다. 

 

그녀의 아들 <교체>가 고구려 제11대 황제 동천대제이다.

 

227년 5월, 산상대제가 춘추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주통후는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동천대제가 이를 말리고 다시 后로 봉하게 된다.

 

주통후는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태후가 되지 못하였다.

 

우후가 금천태후(金川太后)가 되고 주통후는 향부소후(香部小后)가 되었다.

 

아들인 동천대제의 황후도 우태후가 동생 <우술于術>이 낳은 딸

<명림전明臨鱣>으로 결정하였다.

 

우태후가 살아있는 동안 주통후는 아무런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우태후는 주통후를 을파소의 손자인 <을소개>에게 하가(下嫁)시켜 버린다.

 

이 <을소개>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을보>이고

<을보>의 외손자가 고구려 제15대 미천대제가 된 <을불>대왕이다.

 

주통후가 태후가 된것은 우태후가 234년 9월에 죽고 난 이후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6세였다.

 

태후가 되자 타고난 성품은 속일 수 없는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바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녀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 동천대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병에 걸려 죽어가는 그녀의 대변을 찍어 맛보고(嘗糞),

피를 내어 그녀를 살려낸 아들이었다(刺血).

 

고구려는 246년 방심을 하다가 <관구검毋丘儉>에게 치욕의 일격을 당한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모든 수모를 겪은 뒤,

주통녀라 불리던 <괴화>이고 후녀였던 주통촌 출신 연태후는

248년 7월 어느 더운 날에 설사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산상릉에 합장되어야하나 주통촌(酒桶村)에 우선 묻었다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나중에 동천릉(東川陵)에 합장된다.

 

산상릉에는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우후가 묻혀있었다.

 

죽어서도 그녀는 살아 생 전 그녀를 괴롭히던 우후와 같은 곳에 있기 싫었을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