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왕 21년(AD.212)

 

2월, 왕이 월궁(月宮)에서 죽었다.

 

지후(只后)가 태자에게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내례內禮>를 정궁황후로, <한개汗介>를 부후로 하였다.

 

 

4월 제(帝)를 사릉문(蛇陵門) <애례愛禮>황후의 오른쪽에 장사를 지냈다.

 

<지진내례 只珍內禮>황후 역시 불속으로 뛰어들어 따라 죽었다.

 

신금(新今, 아달라)이 울면서 금지할 뿐이었다.

 

먼저 스스로 칼로 찌르고 불속에 몸을 던지매, 끝내 그 절개를 막을 수 없었다.

 

사릉문에 함께 장사를 지내고, 그 사당을 세워 일성니금묘(逸聖尼今廟)라 하였다.

 

춘추 78세였다.

 

 

왕(帝)이 젊었을 때는 여색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선금 (지마)에게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스려 귀하여짐에 미쳤다.

 

신체가 크고 편안하며, 여자를 총애함이 심히 넓었다.

 

젊었을 때는 백옥처럼 아름다웠는데, 사람들이 모름지기 희롱함이 없었다.

 

꽃을 희롱하여 모량댁낭군(牟梁宅郞君)이라 하였다.

 

붉은 입술(朱唇), 분을 바른 얼굴(粉面), 자주색 옷(紫衣), 녹색 인끈(綠綬)을 매고

대백마(大白馬)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면,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하였다.

 

나이 70고령에 미침에도 씩씩한 힘이 쇠하지 아니하여,

하루에 한 말의 쌀과 한 근의 고기를 먹었으며,

이로써 백세까지 남들보다 오래도록 살 것(遐壽)이라 하였다.

 

결국 <한개汗介>에게 빠지게 되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관리)를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근면하였으며,

북쪽의 두메산골을 넓히고, 남쪽의 이웃나라와 사해(四海)에 위엄을 더하였다.

 

가히 태평성천자(太平聖天子)라고 설명할 수 있다.

 

흠모함은 성스러움에서 비롯하였다.

 

 

처음 <지소례支所禮>의 처 <모리毛利>神母가 과부로 지낼 때

재화와 보물을 선금(先今, 일성)에게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 <지진내례只珍內禮>가 또한 선금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꿈에 대노신군(大盧神君)이 황적(黃赤)색 호랑이를 타고

보월주(寶月珠)를 주어, <지진내례>가 받아 삼키었다.

 

그런 연유로 선금에게 말하니, 지금이 길한 때라 하여 이에 합방하고 왕(帝)을 낳았다.

 

빼어나고 기이한 정채(精彩)가 있었다. 이에 적통(嫡統)을 이었다.

 

 

지진내례는 이골(二骨)의 성모(聖母)가 된 시초다.

 

천궁(天宮)의 자리에 올랐다.

 

선금이 죽자 스스로 성은을 중히 여겨 (선금을) 따라 죽었다.

 

사부(私夫) <석추昔鄒>의 무덤에 분골(分骨)하라는 유명(遺命, 유언)을 남겼다.

 

왕이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명에 의하여 분골하였다.

 

그로 인하여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높이었다.

 

이로써 같은 어머니의 동생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있고,

무릇 좋아하는 바가 있어 반드시 다투더라도 함께 하였다.

 

<벌휴> 역시 지성(至誠)으로 왕을 섬겼다.

 

아닌게 아니라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형의) 마음으로 삼았다.

 

오로지 왕을 따르며 좋아하였다.

 

왕이 태자일 때, 선금에게 어긋날까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히 <한개汗介>와 가까워졌다.

 

선금이 관계(預)를 가지지 못함에 이르자 서로 팔생(八生)을 약속하였다.

 

은밀히 새보(璽宝, 옥새)를 가지고 살았다.

 

<벌휴>가 간하여 말하기를

 

“부금(父今, 아바마마)은 아직 엄한데, 형은 어찌 스스로 급한가?”라고 하였다.

 

<한개>가 은밀히 왕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어린 아이(小兒, 벌휴)가 너의 자리를 엿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홍개洪介>{벌휴의 장모}를 속였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은 다른 뜻이 없다. 너는 어찌 시새움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이에 벌휴를 정(井, 궁궐)에 들어와 살게 하고, <한개>를 아첨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대위(大位, 제위)에 오르기에 이르자,

벌휴의 처 황씨(黃氏)와 <자황紫凰> 모두 권처의 직위를 내려,

정(井)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에 2군(二君, 두 명의 군주)이라 칭하였다.

 

 

2월 선금이 죽었다.

 

왕과 지후(只后, 지진내례)가 즉위하여, 조회를 받았다.

 

지후(只后)가 <판억板檍>을 이벌찬으로, <마원馬元>을 품주로 하였다.

 

 

3월 <내례內禮>와 <한개汗介>를 좌우후(左右后)로 삼았다.

 

지후(只后)의 명으로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고,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4월 지후(只后)가 왕과 내후(內后, 내례)와 도산(桃山)으로 (가서 조상을) 알현하고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후는 성골정통(聖骨正統)이니, 가히 나의 자리를 전달할 수 있다.”라고 하며,

이에 적복(翟服)을 더하였다.

 

스스로 신에게 의탁하기를 기도하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

 

하늘에 원통함은 없다고 하며, 선금을 장사지냄에 이르자 끝내 따라 죽었다.

 

유명(遺命)을 쫓아 양정(壤井)에 분골(分骨)하였다.

 

 

 

※ 참고

 

정채(精彩) : 정묘하고 아름다운 빛깔, 생기가 넘치는 활발한 기상

이골(二骨) : 두 성골, 즉 혁거세의 골과 탈해의 골

적복(翟服) : 황새의 깃털로 만든 의복

 

 

지진내례가 석추를 갈문왕으로 벌휴를 태자로 봉하여

박씨계와 석씨계의 이골(二骨)이 화합하게 된다,

 

신라는 모계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여왕의 나라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