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왕 3년(AD.215)
5월 통로(通路) <돈부敦父>가 계립령(鷄立岺)을 열어,
공을 이루자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해大解>가 (통로의 직을) 대신하였다.
7월 가야(加耶)의 세주(世主) <아수阿修>가 방물(方物)을 바쳤다.
통설은 계립령(鷄立岺)이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 이름이라 한다.
충남 아산시 명암리 밖지므레 유적에서 계형토기(鷄形土器)가 발견되었으며,
215년 7월의 기사에 대가야가 토산물을 바치어 오는 것은
계립령의 개통으로 나라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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