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대제31년{AD227}정미,

 

여름 5월, 상이 서도(西都)의 금천궁(金川宮)에서 춘추 55세에 죽어,

산산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제는 초호(初號)가 동천대왕, 휘는 <위궁位宮> 또는 <하위거夏位居>,

아명은 <교체郊彘>이며, 산상대제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향부소후(香部小后)인 주통촌주 <연옹(椽翁)>의 딸이었다.

 

외모와 얼굴이 우아하고 출중했으며, 백성과 하급 관리를 아꼈다.

 

또한, 용력도 있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무술을 좋아하여 병사들도 새로이 조련하였고,

동명(東明)의 큰 뜻도 있었으며, 즐겁거나 노여워도 표시내지 아니 하였다.

 

시녀가 잘 못하여 고깃국을 어의에 엎질렀을 때에는 다만

‘네 손을 다치지 않았느냐.’를 물을 뿐이었다.

 

<于>후가, 그 도량을 가늠해보려고, 제가 밖으로 나간 틈에,

애마의 갈기를 잘라버렸었던 즉,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더니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져주면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심히 가련하구나.”라고 하였었다.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이나 제의 인자함과 관대함의 크기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이사냥을 즐겼고, 궁실을 지어 여색에도 빠졌었다.

 

국내외 정벌도 많이 하였었는데, 이러하더니만 뜸하여졌었다.

 

 

원년{AD227}정미,

 

하5월 7일 밤, 산상대제가 종창으로 몸이 문드러져 금천궁에서 죽으니,

<우>황후가 급히 태자를 불러 빈소에서 상제(喪祭)를 올리고,

태보<목등>・ 좌보<우목>・ 우보<상제>・ 국상<고우루>・

중외대부<명림식부>를 불러서

내전으로 들어가 태자 즉위예식을 치렀다. 보령 열아홉이었다.

 

우림의 백료들이 섶을 불 놓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동쪽 하늘이 밝아왔다.

 

하6월, <명림답부明臨息夫>의 딸 <전>씨를 황후로 올려

황림궁(皇林宮)이라 하였고, <于>후를 금천(金川)태후로 하였다.

 

향부소후(香部小后)는 주통후로 하고 연(椽)씨라는 성(姓)을 내렸다.

 

추7월, 대행을 산상릉에 장사하고 간령(艮嶺)에 사당을 세웠다.

 

<우목于目>을 태보로, <상제尙齊>를 좌보로, <식부息夫>를 우보 겸 섭정대왕으로,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군신들이 대각궁(大角宮) 짓는 일을 계속하자고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애초에 산상대제가 <전>후를 위하여 무늬 옥을 캐어 이 궁궐을 짓다가,

환후를 얻어 위독하여져, 중지하였었다. 이제 와서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이 황후와 함께 친히 독려하였다.

 

보옥과 향내 나는 나무로 치장하고 꽃으로 에워쌌고,

새들이 달리고 헤엄쳤으니, 그 사치함이 극에 달하였다.

 

 

금천궁, 황림궁, 대각궁은 서도(西都)에 있는 궁궐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