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왕 16년(AD.228)

 

1월 召文(소문국)의 묘덕왕(妙德王)이 죽었다.

 

<홍봉紅鳳>,<벽해碧海>,<황운黃雲>,<난옥暖玉>,<보운宝雲>,<목단牧丹>,

<묘운妙雲>,<호와好蛙>, 팔세주(八世主)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나라 안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여주(女主) <초운楚雲>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곧, <산을山乙(170-245)>에게 명하여 선도(仙徒) 2천명을 이끌고

<반술盤述>과 함께 소문(召文)으로 들어가게 하여, 그 난리를 평정시켰다.

 

<초운楚雲>의 아들, <묘초妙楚>를 세워 왕으로 삼았고,

<산을山乙>로 하여금 소문(召文)을 위해 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다.

 

<산을山乙>은 풍운(風雲)을 보고 점을 잘 쳤고,

사람들의 거짓과 바름을 판단할 수 있었고, 흰 수염은 무릎을 가릴 정도였다.

 

소문인(召文人)들은 그를 봉하여, 묘왕(庙王)으로 삼았다.

 

세칭, 을공(乙公)이라는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2월 골녀(骨女) 8인을 봉하여, 소문세주(召文世主)의 公子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팔세주(八世主)의 처를 골문(骨門)의 선자(仙子)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7월 소문왕(召文王) <묘초妙楚>가 입조하여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였다.

 

왕(帝)의 딸 <다례多禮>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소문(국)을 살펴보면 예왕(穢王)의 뒤로 처음에 용왕(龍王)이 6년,

호왕(虎王)이 2년, 자성여주(紫聖女主)가 20년, 자성의 신하 봉왕(鳳王)이 7년,

아들 월왕(月王)이 11년, 아들 벽왕(碧王)이 19년, 아들 자제(紫帝)가 52년이며,

사방을 정벌하여 위엄이 동서(東西)를 떨쳤다.

 

아들 취제(翠帝)가 17년, 아들 소문(召文)이 8년을 재위하였다가 폐위되었다.

 

자제(紫帝)의 서자(庶子) <산운(山雲)>의 침비(枕婢) <탈탈(脫脫)>이

<산운>의 아들 <경덕(景德)>을 낳았다.

 

<산운>이 <탈탈>을 <취제>에게 바쳤는데,

<취제>가 (탈탈을) 총애하여 후(后)로 세웠다.

 

<취제>가 죽자 <탈탈>은 스스로 신후(神后)라고 칭하였다.

 

<소문>을 맞이하여 새남편(繼夫)으로 삼았는데,

<소문>이 나약(懦弱)하여 <탈탈>이 기뻐하지 않았다.

 

<소문>과 그 어머니 소씨(召氏)가 <탈탈>을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탈탈>이 이에 그녀의 아들 <경덕>을 세워 65년을 재위하였다.

 

문물(文物)이 크게 흥하였다.

 

아들 문무왕(文武王) 혹은 난제(暖帝)라고 칭하였는데 재위 20년,

아들 문단(文丹)이 서서 2달 만에 폐위되고, 문단의 동생 목단(牧丹)이 서서 15년,

아들 보문(宝文)이 서서 25년, 아들 경문(景文)이 서서 30년,

아들 비패(翡貝)가 즉위하였다.

 

숙부 숭덕(崇德)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3년 만에 폐위되었고,

숭덕이 스스로 서서 7년, 아들 윤명(允明)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선정(仙政)을 행한지 12년 만에 죽었는데 합이 18년이다.

 

윤명이 3년 만에 폐위되고,

윤명의 처 호묘(好妙)가 스스로 왕(帝)이라 칭한 것이 13년,

그녀의 아들 묘덕(妙德)을 세웠다.

 

호묘가 윤명의 서제(庶弟) 쌍덕(雙德)과 상통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묘덕은 인자하였으나 위엄이 없었다.

 

8세주(八世主)가 그 땅을 나누어 점거하고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재위가 33년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묘덕은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수차례 사신을 보내 입공을 하면서 신하라고 칭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소문국을 구국(舊國, 역사가 오래된 나라)이라고 하여 우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우리의 번국으로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므로,

경(京, 서울)에 집을 하사하였다.

 

<산을山乙>은 이 공으로 작위가 각간(角干)이 되었다.

 

<호묘>{묘초의 할머니}는 평소 <산을>을 흠모하여 그의 처가 되기를 구걸하였으나,

왕(帝)은 <묘덕>을 위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역시 허락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