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초(景初) 2년(238년)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했다.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溫)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와 고구(故舊)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사마의)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 노래를 읊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리를 깨끗이 하고 팔황(八荒-온 세상)을 총제(總齊-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해 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문의(文懿-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賊)이 정예병을 다하여 이를 향해 나와 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賊)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 적(賊)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陣)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賊)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文懿-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神)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 홍수가 나서 물이 평지에서도 수척에 이르자

삼군(三軍)이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선제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賊)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司馬)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上庸)을 공격할 때는 8부(部)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사(將士-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한 달로 1년을 도모하는 셈이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 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지금은 적의 군사가 우리보다 많아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며,

큰 비가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아 공력(功力)을 펼칠 수 없으니,

비록 급히 서두른다 한들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경사(京師)를 출발한 이래 적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하진 않았으나

다만 적이 달아나는 것을 걱정했소.

 

적의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우리의)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우마(牛馬)를 약탈하고 땔나무 캐는 것을 노략질한다면

이는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오.

 

무릇 병(兵)은 궤도(詭道 기만술)이고 일의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하오.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이 때문에 비록 굶주리고 곤궁해도

속수(束手-손을 묶고 항복함)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순(楯), 로(櫓), 구(鉤), 동(橦)을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무렵 색이 희고 망렵(芒鬣-빛나는 갈기털? 꼬리?)이 있는 장성(長星-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梁水)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文懿)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相國) <왕건王建>,

어사대부(御史大夫)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면박(面縛) 할 것이라 청했다.

 

(선제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王建>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文懿)에게 고했다.

 

“옛날 초(楚)나라와 정(鄭)나라는 대등한 나라였으나

<정백鄭伯>은 도리어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며 초나라 군을 영접했다.

 

나는 왕의 신하(王人)로 지위가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은 나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니

어찌 초나라,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리!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文懿)가 다시 시중(侍中)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선제가 <위연衛演>에게 말했다,

 

“군사(軍事)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것 뿐이다.

 

너희는 면박(面縛)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낼 필요는 없다.”

 

문의(文懿)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돌출(突出)하자

선제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梁水) 가의 장성(長星)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신구(新舊)를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인골을 쌓은 것. 일종의 전승기념비)을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복주(伏誅-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戶), 30여 만 구(口)를 거두었다.

 

당초 문의(文懿)는 숙부인 <공손공公孫恭>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綸直>, <가범賈範>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고간(苦諫-간절히 간언함)하니 문의(文懿)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선제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墓)를 봉(封-흙더미를 쌓아 북돋음)하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경예(鯨鯢-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文懿)에게 괘오(詿誤-연루되어 그르쳐짐)된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中國人)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선제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길,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물(官物)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장리(將吏-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계(薊)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곤양(昆陽)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무양, 곤양. 둘 다 예주 영천군 소속)

 

당초 선제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르길,

 

“내 얼굴을 보시오”라 하여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선제에게 조령을 내려 편도(便道-지름길)로 가서 관중(關中)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옥(白屋)에 이르렀을 때 선제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수조(手詔-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합(閤-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선제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추봉거(追鋒車)를 타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백옥(白屋)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嘉福殿) 와내(臥內-침실 안)로 인도되어 어상(御床-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선제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曺叡)가 선제의 손을 잡고 제왕(齊王,曹芳)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 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曹爽>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제왕(齊王-조방曹芳)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侍中), 지절(持節), 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올라

<조상曹爽>과 함께 각기 군사 3천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朝政)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曹爽>은 상서(尙書)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선제를 대사마(大司馬)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선제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太傅)로 삼았다.

 

입전불추(入殿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 검리상전(劍履上殿) 하도록 하니

한나라 때 <소하蕭何>의 고사(故事-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 비용은 관(官)에서 대어주었고,

세자(世子) <사마사司馬師>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자제(子弟) 세 명을 열후(列侯)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선제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子弟)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

 

 

 

※ 참고 <관구검毌丘儉>

 

<관구검(?-255)>은 姓이 관구(毌丘)이고 이름이 검(儉)이다.

 

<관구검毌丘儉>은 자(字)가 중공(仲恭)이고 하동(河東) 문희(聞喜) 사람이다.

 

부친인 <관구흥毌丘興>은 황초(黃初 위문제 조비 220-226년) 중에

무위태수(武威太守)를 지내며 반란자는 치고 복종하는 자는 어루만져

하우(河右=하서,황하 상류의 서쪽으로 무위, 주천 등 당시의 북서쪽 최변경 지역을

가리킴)를 개통(開通)하니 그 명성이 금성태수(金城太守) <소칙蘇則>에 다음 갔다.

 

(주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적(賊) <장진張進>과

배반한 호(胡,흉노)를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해졌고

(조정으로) 들어와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서평에서 <국연麴演>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금성태수 <소칙蘇則>에게 토벌되어 항복한다.

 

그 뒤 魏王을 이어받은 <조비>가 양주(涼州)를 처음 설치해

<추기鄒岐>를 자사(刺史)로 파견하자 <국연麴演>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주천군의 <장진張進>, 장액군의 <황화黃華> 등도 모반해 서로 호응하는 한편,

무위의 세 종족의 胡가 무위군 일대를 침범해 도로를 끊는데,

금성태수 <소칙>, 장군 <학소> 등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진병해 胡를 격파하고

무위태수 <관구흥>을 구원한 뒤, 계속 진격해 그해 5월에 하서지방을 다시 평정한다.

<문제기 장기전, 소칙전>

 

 

<관구검毌丘儉>이 부친의 작위(→고양향후)를 물려받았고

평원후(平原侯)의 문학(文學)이 되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가 우림감(羽林監)으로 올랐다.

 

(명제가) 동궁(東宮,태자)일 때부터의 오랜 교분으로써 매우 친대(親待)를 받았다.

 

(외직으로) 나가 낙양(洛陽) 전농(典農)이 되었다.

 

당시 (명제가) 농민들을 취해 궁실(宮室)을 짓자 관구검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이 생각건대 천하를 위해 급히 제거해야 할 것은 두 적(賊)(촉, 오)이고

급히 힘써야 할 것은 의식(衣食)입니다.

 

실로 두 적(賊)이 멸해지지 않은 채 사민(士民)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한다면

비록 궁실(宮室)을 아름답게 꾸민다 해도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올랐다.

 

청룡(靑龍 위 명제 233-236) 중 황제가 요동(遼東) 토벌을 꾀하니

관구검에게 간책(幹策,재간과 모책)이 있다 하여 그를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옮기고

도요장군(度遼將軍), 사지절(使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의 직을 더했다.

 

(경초景初 원년인 237년) 유주(幽州)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양평(襄平)에 도착해

요수(遼隧,양평의 남서쪽 지명)에 주둔했다.

 

우북평(右北平) 오환(烏丸)의 선우(單于) <구루돈寇婁敦>,

요서(遼西) 오환의 도독 솔중왕(都督 率衆王) <호류護留> 등

지난 날 (조조가 요서를 정벌할 때) <원상袁尙>을 뒤쫓아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구루돈寇婁敦>이 동생 <아라반阿羅槃> 등을 보내 궐(闕)로 나아와

조공(朝貢)하게 하니 그 거수(渠帥) 20여 명을 봉해 후(侯), 왕(王)으로 삼고

각기 차이를 두어 수레와 말(馬), 견직물과 채색비단을 하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역격해 <관구검>과 싸우니 불리하여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듬해(경초2년=238년),

 

황제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중군(中軍,중앙군)과

<관구검> 등의 군대 수만 명을 통수하게 해 <공손연>을 쳐서 요동을 평정했다.

 

<관구검>이 그 공으로 안읍후(安邑侯)로 올려 봉해져 식읍이 3,900호에 달했다.

 

정시(正始: 제왕齊王 조방曹芳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동천대제}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좌장군(左將軍) 가절(假節) 감예주제군사(監豫州諸軍事,예주의 제반 군무를 감독)

영(領,겸직의 의미)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올랐다가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전임했다.

 

<제갈탄諸葛誕>이 동관(東關)에서 싸워 불리하자

이에 영을 내려 <제갈탄>과 <관구검>(의 임지와 관직)을 서로 바꾸니,

<제갈탄이> 진남(장군), 도독예주(都督豫州,예주 도독)가 되고

<관구검>이 진동(장군), 도독양주(都督楊州)가 되었다.

 

오나라 태부(太傅) <제갈각諸葛恪>이 합비(合肥)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관구검>이 <문흠文欽>과 함께 이를 막았고,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사마의의 동생}>가 중군(中軍)을 지휘해

동쪽으로 와서 포위를 풀자 <제갈각>이 퇴환했다.

 

당초 <관구검毌丘儉>은 <하후현夏侯玄>, <이풍李豊> 등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전장군(前將軍) <문흠文欽>은

(249년 사마의에 의해 숙청된) <조상曹爽>의 읍인(邑人,동향인)으로,

효과추맹(驍果麤猛)하여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총상(寵賞)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이 날로 심해졌다.

 

관구검이 이를 헤아려 <문흠>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정원(正元) 2년(고귀향공, 255년) 정월,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彗星)이 나타나 서북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오(吳), 초(楚)의 분야에서 떠올랐다.

 

<관구검>, <문흠>이 기뻐하며 이를 자신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다.

 

마침내 태후(太后)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경왕(司馬景王,사마사司馬師)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로 주둔하던 회남(淮南)의 장수(將守,수비장)들을 위협하고

아울러 크고 작은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歃血)하며 칭병(稱兵,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 <문흠>은 스스로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항(項,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游兵)으로 활약했다.

 

대장군(大將軍){사마사}이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을 통수해 <관구검>군을 치고,

따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인) <제갈탄諸葛誕>을 시켜

예주(豫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안풍진(安風津,)에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은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초(譙), 송(宋) 사이로 출병하여 그의 귀로(歸路)를 끊게 했다.

 

대장군은 여양(汝陽,여남군 여양현)에 주둔하며

감군(監軍) <왕기王基>에게 전봉(前鋒,선봉)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남돈(南頓,여남군 남돈현)에서 <관구검>군을 기다리게 했다.

 

이제 제군(諸軍)들이 모두 견벽(堅壁)한 채 더불어 싸우지 않아

<관구검>, <문흠>은 진격하여 싸울 수 없고 퇴각하자니 수춘이 습격 받을까 두려워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계책이 궁해져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은 집이 모두 북쪽(→중국 내지)에 있어

뭇 사람들의 마음이 저산(沮散)하여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지니

오직 회남(淮南)에서 새로 귀부한 농민(農民)만이 그를 위해 부려질 뿐이었다.

 

대장군이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를 보내

태산(泰山)의 제군(諸軍) 만여 명을 지휘해 낙가(樂嘉)에 이르러 약세를 보여

그를 유인하고는 대장군이 곧이어 수(洙)로부터 도착했다.

 

<문흠>이 이를 알지 못하고 과연 밤중에 와서 <등애> 등을 습격하였는데

때마침 날이 밝아 대군(大軍)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이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대장군이 효기(驍騎)를 풀어 추격하여 그를 대파하였고 <문흠>은 달아났다.

 

이 날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중에 달아나고 무리가 붕괴하였다.

 

신현(愼縣,여남군 신현)에 도착했을 때

좌우의 사람과 병사들이 점차 <관구검>을 버리고 떠났고

<관구검>은 홀로 동생인 <관구수毌丘秀>, 손자 <관구중毌丘重>과 함께

물가의 풀숲에 숨었다.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일반백성인 <장속張屬>이 나아가 활을 쏘아

<관구검>을 죽이고 그 목을 경도(京都)로 보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수>, <관구중>은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갔다.

 

장사(將士)들 중 <관구검>, <문흠>에게 위협받아 뒤따랐던 자들은 모두 투항했다.

 

<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은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는데

앞서서 <관구검>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 꾸미는 것을 알고

몰래 가속(家屬)들을 빼내어 거느리고는

신안(新安,홍농군 신안현)의 영산(靈山) 위로 달아났다.

 

이를 따로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구검>의 삼족을 멸했다.

 

<문흠文欽>이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에서 <문흠>을 도호(都護), 가절(假節), 진북대장군, 유주목(幽州牧),

초후(譙侯)로 삼았다

 

 

요동 <공손도>의 손자이자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은

숙부 <공손공>이 뒤를 잇자 이에 불만을 품고 228년 반란을 일으켜

그 자리를 빼앗았고 위나라의 황제 <조예>에 의해 양렬장군 요동태수로 봉해졌다.

 

이후 대사마에 봉해지지만 이에 만족치 못하고

237년 반대하던 <가범>과 <윤직>을 처형하고 스스로를 燕왕이라 칭하고

연호를 고쳐 소한이라 했으며 궁전을 세우고 관직을 두며 북방을 어지럽혔다.

 

이는 곳 유주 자사 <관구검>에 의해 위나라 조정에 보고되고

<공손연>은 대장군 <비연>을 원수로 삼고 <양조>를 선봉으로 세워

15만 대군을 일으켜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사마의>가 <조예>에게 요청해 기병과 보병 4만을 이끌고

<호준>을 선봉으로 새워 요동에 영채를 세운다.

 

이에 <비연>과 <상조>가 영채를 거두고 군사를 다그치며 출발하자

<사마의>는 <하후패>와 <하후위>에게 군사를 주어 요수 가에 매복하게 했고

결국 <비연>과 <상조>는 크게 패해 수산에서 <공손연>과 합류해 군사를 재정비했다.

 

그러나 <하후패>에 의해 <비연>이 죽고

<공손연>은 양평성으로 후퇴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가을비가 한 달 내내 내리고

좌도독 <배경>이 <사마의>에게 영채를 앞산 위로 옮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우도독 <구련>이 같은 제안을 하지만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한다.

 

<사마의>는 조정에 사자를 보내 군량을 요청하고

<공손연>은 식량이 떨어지자 상국 <왕건>과 어사대부 <유보>를 보내

<사마의>에게 항복할 뜻을 전하나 처형당하고

<공손연>은 시중 <위연>을 보내나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온다.

 

그러자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군사1000명과 함께 성을 탈출하지만

<호준>, <장호>, <악침>, <하후패>, <하후위>에게 포위당해

<사마의>에게 잡혀와 처형당한다.

 

<호준>이 먼저 양평성에 입성해 <공손연>의 가족과

그와 공모한 관리들을 모조리 색출해 처형했는데 그 수가 70명에 달했고

<사마의>는 민심을 다스리고 그 지역 일대를 정비하게 된다.

 

당초 <공손연公孫淵>의 형 <공손황公孫晃>은

<공손공公孫恭>의 아들 자격으로 낙양(洛陽)에 인질로 잡혀 와 있었다.

 

<공손연>이 아직 반기를 들기 전에 여러 차례 장차 반란이 있을 것을 알리면서

<공손연>을 토벌해 줄 것을 청했다.

 

<공손연>이 반기를 들자 황제가 <공손황>을 차마 기시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보내 감옥에서 죽이고자 했다.

 

이에 정위(廷尉) <고유高柔>가 상소를 올려 간하여 말했다.

 

"신이 사적으로 듣건대 <공손황公孫晃>은 이전에 여러 차례 자진하여

<공손연>이 장차 반란할 것임을 진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흉적 <공손연>의 친속이기는 하나

그의 본심을 헤아려 가히 용서할 만합니다.

 

무릇 <공자>는 <사마우司馬牛>의 우려를 이해했고

<기해祁奚>는 <숙향叔向>이 무죄임을 밝혀내

고대의 미의(美義)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신은 <공손황公孫晃>이 진실로 미리 보고했다면 응당 그의 죽을죄를 용서하고

만일 스스로 보고하지 않았다면 응당 기시(棄市)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관대히 하여 그를 용서하거나 엄히하여 그의 죄행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옥중에 가둬두어 자살케 하는 것은 주변국들에게 의심을 살 소지가 큽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결국 사자에게 금설(金屑)을 넣은 술을 가지고 가

<공손황公孫晃>과 그의 처자식에게 마시게 한 후

관과 수의를 보내 집에서 염하게 했다.

 

 

※ 참고

 

면박(面縛) : 양손을 결박하여 항복함

 

입전불추(入殿不趨) : 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찬배불명(贊拜不名) : 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 : 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음

 

속마현거(束馬縣車) : 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

 

각석기공(刻石紀功) : 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

 

동관(東關) : 오나라와의 국경인 유수구 북쪽의 요새

 

효과추맹(驍果麤猛) : 용맹 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움

 

총상(寵賞) : 총애와 포상

 

삽혈(歃血) : 희생의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

 

유병(游兵) : 유격병, 기동부대 

 

저산(沮散) : 꺾이고 흩어짐

 

효기(驍騎) : 용맹한 기병

 

 

 

<공손연>이 15만 대군을 동원해 중원으로 쳐 들어갈 때

<공손연>의 사령부가 있는 곳이 양평이다.

양평은 결코 지금의 요양이 아니다.

 

 

 

<사마의의 공손연 공격 및 관구검의 환도성 공격>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