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휴왕 2년(AD.245)

 

2월 소문(召文) 8세주가 경덕사주(景德祀主) <용운龍雲>을 받들었다.

 

<달문達文(214-?)>이 반정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벌휴伐休>는 비품(非品, 왕의 될 골품이 아님)으로 왕위를 훔쳤다.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옳다.”고 하였다.

 

감문(甘文), 아슬라(阿瑟羅), 사벌(沙伐) 등이 장차 응하려 하였다.

 

왕이 걱정하였다.

 

우두상(右頭上) <흥선興宣>이 말하기를

 

“작은 도적은 어린아이를 보내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기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걱정하는 바는 사로잡을 수 없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달문達文>은 형금(兄今, 아달라)의 아들이다.

 

아들이 비록 병사를 제 마음대로 할지라도, 아버지가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느냐.

 

소문의 세주(世主)는 모두 인척(姻戚)이다.

 

비록 미도(迷途)에 있더라도 가히 지도하여야 한다.

 

누명을 씌우는 것을 옳지 않다.

 

양군이 상대하면 잘못이 없는 백성들은 화를 입는다.

 

어찌하여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신에게는 두 명의 병관이 있으니, 가히 이 임무를 맡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누구냐.”라고 물었다.

 

(흥선이) 말하기를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 (218-301)>는 소문국을 익숙하게 잘 알고

그 인심을 얻었으며, 비록 젊더라도 너그럽고 어질어서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팽구彭仇>의 아들 <구수혜仇須兮>는 공성(攻城)전에 뛰어나므로

두 사람이 서로 한번 공격하고 한번 습격하면 곧 가히 지켜낼 수 있으니,

그르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구도>와 <구수혜>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치도록 하였다.

 

<구도>는 귀산(龜山)에서 동북으로,

<구수혜>는 아화옥(阿火屋) 대로로 곧 바로 향하였다.

 

양군은 상호 완급(緩急)으로 계책을 행하였다.

 

<구도>가 여무대(女巫隊)를 일으켜 관문을 지키는 자를 습격하고

그 도읍으로 직행하였다.

 

<우을牛乙>이 내응(內應)하여 란을 일으켜서 드디어 평정하였다.

 

7세주에게 모두 <우을牛乙>을 따르도록 명하고,

골문장부(骨門丈夫)를 택하여 남편으로 삼도록 하였다.

 

<달문>의 처자는 경도(京都)에서 벼슬살이를 하도록 하였다.

 

 

11월 소문(召文) 감국(監國) <산을山乙>이 76세로 죽었다.

 

소문 사람들이 신(神)처럼 모시며, 을공사(乙公祠)를 세웠다.

 

 

<용운龍雲>은 소문국왕 묘초의 여동생이다.

 

<달문達文>은 <아달라>와 <문군文窘>사이에서 214년에 태어났다.

 

<달문>이 <벌휴>의 아버지 <석추昔鄒>가 성골이 아니므로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소문국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소문국의 민심을 얻고있는 소문국 <묘덕妙德>의 딸 <운모雲帽>의 지아비인 <구추>와 공성전에 능한 <구수혜>와 <산을山乙>의 아들 <우을牛乙>이 합세하여

소문국과 <달문>을 토벌한다.

 

 

 

 

※ 참고 <화랑도의 뿌리는 召文國>

 

 

屈公騎虎 故其徒稱虎徒奉鳳凰大母

吉公騎牛 故其徒稱牛徒奉紇古大母

乙公騎白羊 故徒爲羊徒奉金剛大母

是爲古三徒 

 

黑齒之徒 奉道生大母爲鷄徒

木我之徒 奉阿世大母爲狗徒

突山之徒 奉玉帽聖母爲馬徒 

是爲後三徒

羊徒 有奉阿惠聖母者與後三徒 爲四友 

 

金剛之徒 多不振 唯有城東及召文 

<박창화 필사본 위화진경> 

  

           

 

<굴공屈公>은 호랑이를 탔기에 그 무리를 호도(虎徒)라 불렀으며

<봉황鳳凰>大母를 받들었다.

 

<길공吉公>은 소를 탔기에 그 무리를 우도(牛徒)라 불렀으며

<흘고紇古>大母를 받들었다.

 

<을공乙公>은 백양을 탔기에 그 무리를 양도(羊徒)라 불렀으며

<금강金剛>大母를 받들었다.

 

이들을 고삼도(古三徒)라 한다.

 

<흑치黑齒>의 무리는 <도생道生>大母를 받들어 계도(鷄徒)가 되고,

<목아木我>의 무리는 <아세阿世>大母를 받들어 구도(狗徒)가 되고,

<돌산突山>의 무리는 <옥모玉帽>聖母를 받들어 마도(馬徒)가 되니,

 

이들을 후삼도(後三徒)라 한다.

 

양도(羊徒)에서 <아혜阿惠>聖母를 받드는 자들은

후삼도와 더불어 사우(四友)가 되었다. 

 

<금강金剛>의 무리는 세력이 많이 약하여

오직 성동(城東)과 소문(召文)만을 차지했다.

 

 

 

화랑도는 선도(仙徒)이다.

 

선도(仙徒)의 무리들은 저마다 각각 신라사회를 구성하였던 골족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막강한 지방의 세력을 가진 집단이다.

 

이들이 마침내 양도(羊徒)를 중심으로 통합되는데,

양도(羊徒)는 <금강金剛>大母를 받드는 <산을山乙>로부터 시작하고,

성동(城東)과 소문(召文)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화랑의 시작은 <위화랑魏花郞> 풍월주이다.

 

<위화랑魏花郞>은 신라에 의해 패망한 소문국의 후손이다. 

 

소문국은 비록 서기245년 신라에게 패망하였지만,

신라에서 감국(監國)으로 들어온 <산을山乙>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들의 후손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게 한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선도의 통합은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힘의 통합을 의미하고,

그 힘의 통합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소문국의 후손 <위화랑魏花郞>이 있었고,

그를 후원하였던 소문국의 후손 황후 <연제蓮帝>가 있었고,

지증왕과 <연제蓮帝>의 아들인 법흥제가 있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