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州刺史毌丘儉 以高句驪王位宮數為侵叛 督諸軍討之 位宮敗走 儉遂屠丸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之臣得來 數諫位宮 位宮不從 得來歎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자치통감>

 

 

고구려왕 <위궁>이 수차 우리에 반하여 침범을 하자

유주자사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위궁>이 패하여 도망하였고 <관구검>이 마침내 환도를 도륙하였다. 

 

참하고 사로잡은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

 

구려의 신하 <득래得來>는 여러 번 <위궁>에게 간하였으나 <위궁>이 따르지 않자

 

<득래>가 한탄하여 말하길

 

“여기 서서 바라보니 장차 이 땅에는 쑥갓만 자라는 땅이 되겠구나.” 라고 했다. 

 

마침내 밥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묘를 훼손하지 말고 그 나무도 베지 말고

그 처자들을 잡으면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 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삼국사 고구려본기>

 

처음에 <득래>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이 중국에 반하여 침범하려고 할 때

수차례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갓이 자라는 것을 보겠구나."

 

하고는 끝내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묘를 훼손하지 말고 그 나무도 베지 말고

그 처자들을 잡으면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上苦其不退曰 國老只可養疾 撫孫可也 何預征伐如是耶 命進肉羹而飮之

<고구려사초>

 

상이 그(목능)가 물러나지 않음을 싫어하여 말하길 

 

“국로께서는 오직 병을 잘 돌보아서 손자를 토닥거리시어야 합니다.

어찌 정벌에 대해 이리 참견하시는지요?"라 하였다.

 

명하여 고깃국을 내어오게 하고 드시라하였다.

 

 

 

위나라 장수 <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깨뜨리자 고구려 왕은 沃沮로 달아났다.

 

그 후에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옥저에 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通典>

 

 

서기 242년 요동을 장악한 사마의(司馬懿)가 고구려와 대치하자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한다.

 

동천대제가 군사 10만으로 요서의 서안평을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안평대전이다.

 

244년에는 <관구검>이 현도를 침공하자 보기 2만명으로 3천여급의 목을 베었다.

 

이름하여 비수대전이다. 

 

마침내 서기 246년 8월 관구검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범해 온다.

 

산상대제가 즉위할 때 발기가 고구려의 서쪽 땅을 <공손도>에게 바치지만 않았어도

고구려가 魏를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고구려 서부지역은 동호와 숙신등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魏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백제도 공손씨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창끝을 겨누고 있었으며, 비리가 부여(서부여)를 칭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고구려의 신하가 있었다.

 

대평(大評)의 직위에 있는 <득래得來>가 아니고

일품(一品) 공(公)의 지위인 좌보 <목능>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 그해 정월 면직되었다. 

 

하지만 동천대제가 서안평을 공격하려하는 것을 알고

대평 <득래>와 함께 입조하여 아직 국력이 충분치 않아 때가 아님을 간하는 것이다.

 

동천대제가 말을 듣지 않자 <목능>은 자신도 황손임을 내세우며

황제가 내어준 고깃국도 물리치고 재삼 출병하지 말라 간언해보지만

황제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목능>의 손녀인 <잠蠶>后가 두려움에 떨며

할아버지를 억지로 모시고 나왔으나 <목능>은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만다.

 

그가 바로 주태후(산상대제의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목등>의 아들이다.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노여움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안평대전에서 크게 승전을 하자 동천대제도 노여움을 거두고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며 국공 태보의 예로 장사지내주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고구려가 중국에 반하여 침범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정벌한 것을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중국에 반하여 침범했다고하니 김부식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심할 뿐이다.

 

 

 

동천대제가 주후(朱后), 엽비(葉妃), 맥비(麥妃) 등을 데리고

서천(西川)으로 가서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둘러보고,

두눌원(杜訥原, 옛 황룔국의 도읍지, 西都인근)에서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관적(毌賊, 관구검)이 우회하여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근于根>이 일단 막았지만 수에서 밀릴 뿐만이 아니라 적이 매우 강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을지라도 고구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동천대제는 급히 철기 5천을 이끌고 양구(梁口)의 서쪽에서 적을 대파한다.

 

하지만 <관구검>의 대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우근>은 전사하게 되고,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사용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이어 남쪽 방어선마저 뚫리게 되자

후(后)와 비(妃)들을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경기병 천여 명만 이끌고 동천대제는 압록원(鴨淥原)으로 후퇴하지만

<주전朱全>의 군대마저 무너지자 동쪽으로 다시 물러나 옹구(壅口)로 피신하게 된다.

 

마침내 난이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고구려의 도성 환도성(丸都城)이 함락 당한다.

 

그제서야 동천대제는 <목능>의 말을 듣지 않고

성급히 위(魏)의 서안평을 공격하였던 것을 후회하지만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공손씨의 연(燕)이나 손권의 오(吳)를 이용하여

충분히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던 기회를 다 놓쳐버렸던 것이다.

 

할 수없이 맥비의 친정인 죽령(竹嶺)으로 피신하였다.

 

그를 지켜야할 군사들은 거의 다 전사하였다. 비참한 패전이었다.

 

동부우태 <밀우密友>가 남은 군사를 모아 싸웠고

동천대제 또한 산골짜기로 몰래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싸우니

모두들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합쳤다.

 

하지만 병사라 해봐야 농민이고 산에서 사냥이나 약초를 캐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위(魏) <왕기王頎>의 정예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급한 상황에 <유유紐由>가 거짓항복으로 적장 <왕기>를 죽이고

가까스로 전세를 뒤집었으며 <관구검>의 난은 진정되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천대제는 그가 무시하였던 <목능>의 충언을 생각하고

<목능>을 태보(太輔) 안국공(安國公)으로 추증하였으며,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 굶어 죽었다고 기록된 <득래得來>는 대주부(大主簿),

<목능>의 아들 <목장>은 중외대부(中畏大夫)가 되었다.

 

<관구검>의 침공은 동천대제에게 큰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요동에서 천리나 떨어진 평양(今 요양)으로 천도하게 되고

이후 동천대제는 魏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정사(政事)에 염증을 내고 사냥과 여색에 빠지게 되었고, 

끝내 독살의 의심을 받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호전적 국가였다. 그러나 그 패기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동천대제와 함께 죽령으로 피신한 고구려인들은

그대로 죽령에 남아 신라에 귀속된다.

 

그리하여 신라에는 화화(華夏),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으며,

沃沮, 不耐, 韓, 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通考에서 인용>

 

 

 

 

※ 참고  - 동천왕 벽비

 

 

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 東川王十一年

위 명제 청룡계축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237년

 

王詔 峴睍宮 三太邑長入漢魏 步騎二百 回都 [捐]冊 廣欲 答

(불내성의) 동천왕이(현도성의 비전 도교) 현현궁(峴睍宮)을  찾아오라고 하여서,

삼태읍장이 보기병 이백으로 위나라 현현궁에 들어갔다가 도성에 돌아와

(마힐도) 책을 바쳤다.

<광욕廣欲>{삼태읍장,불교도}이 답했다.

 

煙雲丘壑扶筇登蟦 []外其所於水山深間 [王四] 摩詰道 形今[]

연기와 구름이 가득하여 오르기 어렵고, 산과 물이 깊은 곳,

방외(方外){도사들이 사는 곳}에서 왕(석가)이 태어난 4월에

마힐도(摩詰道오늘도 굳세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因 相傳諸譜

우리 사졸들이 성곽을 약간 깨고 성 안에 들어가니

인연 있는 일곱 가문 안에서 여러 책이 전해옵니다.

 

[尙]意不可自秘引世出[一冊]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流芳益點倫

뜻을 알 수 없어서 스스로 비밀스러운데

선대의 오래된 유적에서 책 한권이 세상에 나왔고,

특이하게 향기를 남기고 방점을 더한 체필로서 상세합니다.

 

以啓傹 怢陵 芥王幸安次 三塞 始獲 習元

(이 책의) 가르침으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

돌릉(怢陵)의 개왕은 (현현궁) 채에 세 번 행차하여 원(元)을 익혔다.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以]百三十三歷 輯宗渲引之 

46수(殊)가(마힐도를) 금하여서 (마힐)도의 궁실(宮室)이 끊어졌는데,

133년이 지나서 집종(輯宗) <선(渲)>이 이끌고 있다.

 

以公世天地蹈事師之風須萬 前郞衆 始異焉

<선渲>公이 세상에 나와서 바람을 부리니 만인이 따르고

낭중들 앞에서 기적을 행했다.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祖宮前室 [借]百殊 規 止

짐승들도 이상한 기미를 보여서 떨어져 (쓰러져) 죽으니

(서천왕의) 조왕인 동천왕전실께서 백수(동천왕)의 이름으로 멈추게 하여

짐승들의 죽음이 그치었다.

 

繼明帝逐多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樂

비류에 도읍하였던 호영동백수사사 “유리명제 축다”를 이어서

예악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世高麗殊 代天祖 鄒牟王 慾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하늘의 아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이어서

(동천왕은) 자살(慾鎩)하여 불내성을 보전하려 하였다.

 

往 尉那巖城 繼造三千國 卒本邑都 以祭祀祖 尉那岩 東 記告後人

(서천왕이)국내 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이어받아 성을 세워 제를 올리고,

위나암성 동쪽에(동천왕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린다.

 

復國都 再造昌 天府宮拜謁 日月祭 示天地

다시 국도(불내성)을 세우고, 천부궁(天府宮)을 세우고, 천지에 일월제를 지냈다.

 

衆邑長 百長 國殊 誠意立壁碑 永傳 百世存祖

모든 읍장과 백장 국수등의 정성으로 벽비를 세워

백세에 알려 후손들이 조상을 존경토록 한다.

 

 

※ 참고

 

현현궁(峴睍宮) :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던 도사들의 도장

 

마힐도(摩詰道) : 석가모니의 속가 제자 유마힐에서 유래하며,

                       유마힐은 선종을 일으켰다. 선종의 수련가

 

 

돌릉(怢陵) : 시원의 동천왕릉

 

집종(輯宗) : 마힐도의 수장 직명

 

자살(慾鎩) : 살신공양으로 치성함

 

 

 

※ 참고  - 동천왕 양위교서 벽비

 

正始武止 宮 不從固諫 食蒿而死 殊 還亡命慾鎩 存其固都 將誠 不耐城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 宣

 

246년 위나라의 침입으로 피신한 동천왕은

(피신처에서 영원히 은거하여서) 쑥이나 뜯어먹다가 죽자는

신하들의 충간을 따르지 않고,

망명에서 돌아와 고도(固都)에서 스스로 자살(慾鎩)하여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받치려했다

 

환도에 돌아와서 보고 <흘계訖繼>를 평양으로 내보내어

새로 도성(東川王 平壤, 서풍현西豊縣 양천凉泉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을 짓게 하고

왕위를 양위한다.

 

246년 왕 선포함.

 

宮=百殊=殊麓酋=東川王

부여의 풍속은 패전하면 왕이 쫓겨나는데 동천왕도 신하들이 은퇴를 주장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