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月 上畋于狐川 謁酒桶陵 有感而疾作 不能言而崩 葬于烏壤之岡

先是 上與酒后占此地 至是 同壙異室

 

淵后赴燒而殉 鱣皇后,蠶后,麥氏,葉氏等 皆欲赴火 號泣擗

踊太子與桶公主,要公主 扶諸后救之

然 朝士,後宮,民女之殉于陵前者不絶 掩柴相連

人以爲柴原 百姓歌之曰; “多情天子 化爲龍, 陵前掩柴 總天花”

<박창화 필사본 東襄大帝紀>

                                                                                           

 

9월(AD 248)에 상(동천대제)이 호천(狐川)에서 사냥하고, 주통릉을 찾아뵈었다.

 

낌새가 있더니 병이 났고 말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동천(東川) 오양(烏壤)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전에 상이 주(酒) 后와 함께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제 같은 무덤의 다른 방에 묻혔다.

 

연(淵)后가 달려와 분신하여 죽었고,

전(鱣) 황후, 잠(蠶) 후, 맥(麥)씨, 엽(葉)씨 등이 모두 불로 뛰어들려 하였으며

소리 내어 울며 가슴을 쳤다. 

 

용(踊) 태자가 통(桶) 공주, 요(要) 공주와 함께 后들을 붙들어 구하였다. 

 

그러나 조신(朝臣), 후궁, 일반 여자들이 능 앞에서 따라 죽는 일이 끊이지 않으니,

섶을 이어 (시체를)가려 주었다.

 

사람들이 이를 시원(柴原)이라 하였고, 백성들은 노래하기를

 

“정 많은 천자가 용이 되니, 능 앞 섶으로 덮인 곳에는 내내 하얀 눈만 내리는구나.”

라고 하였다.

 

 

 

동천대제는 이름 없는 가문의 어머니를 두었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지극정성을 다해 효도하였으며 모두에게는 따뜻한 정이 많은 임금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고구려에서는 순장이 금지되었지만

동천대제가 짐독으로 죽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따라 죽어

섶으로 시체를 가렸으므로 이를 시원(柴原)이라고 하였다.

 

 

 

제의 휘는 <연불然弗(224-270)>이고 동천(東川)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명림전明臨鱣(205-269)>后로 태보<명림식부明臨息夫>의 딸이고,

갑진년{AD224} 2월에,

꿈속에서 산궁(山宮)이 있던 마을 골짜기에 불이 퍼지는 것을 보고 제를 낳았다.

 

자라서는 의표(儀表)는 뛰어나게 시원스러웠고,

차분하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지략이 있어 무리를 잘도 이끌었다.

 

그런데 <관구검>의 난리를 겪고 난 후,

동천(東川)이 서안평으로 급하게 진공하였음을 후회하면서,

상에게 “<魏>와는 싸우지 말고, 내정을 잘 살피되,

<신라>와 <백제>는 복속하라.”고 타이른 까닭으로,

용병함엔 신중하였으며, 다만 전렵(畋獵)과 황색(荒色)하기로 그 삶을 마쳤다.

 

그러나 동천(東川)을 섬기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유지를 저버리지 않았음에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예물預物>과 <사구奢勾>가 난을 일으킨 것은 불륜에 따른 것이어,

한탄할 일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세상은 유도(儒道)는 아직 흥하기 전이었고,

황노(黃老){道敎}는 즐기며 사는 것만 맡았었으니,

다만 장생불사와 부국강병을 제일로 여겼을 뿐이었다.

 

 

원년{AD248}무진,

 

9월, 대행제가 호천(狐川)땅에서부터 병을 얻어 돌아와서,

태자를 불러서 신검을 넘겨주고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채 조금 있다가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고, 이때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동10월, 동천(東川)에 장사하였다.

 

<전鱣>황후가 따라죽으려 하자,

상이 붙잡아 따라죽지 못하게 말리고 천궁황태후로 높였다.

 

이외의 다른 후궁들은 대행의 시절과 같게 하였다.

 

<요要>공주는 상황후로, <잠蠶 >씨는 중황후로, <엽葉>씨는 하황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동생 <예물預物>과 <사구奢勾> 등이

선제가 짐독을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고,

관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상이 <예물預物>과 <사구奢勾>를 해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끝내 어지러이 쏟아지는 화살 아래에서 죽어 구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여 주었으며, 이들은 후하게 장사하여 주었다.

 

눈이 많이 내리자, 상이 <朱>后의 궁으로 찾아 갔다.

 

<朱>后{주남朱南(204-285)가

 

“신첩은 나이가 이미 마흔 다섯이니, 무덤이나 지키게 하여 주시지요.”

라고 말하였으나, 상은 들어주지 않았다.

 

 

 

 

 

 

※ 참고 - 중천왕 즉위교서 벽비

 

 

[中川王 卽位 敎書 八稜碣石]

 

正始武侵 宮百殊 固諫 慾鎩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護殊百位麓酋 委台七年十月

繼明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禮樂

世百濟高麗殊 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儉 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國宮 前臣 高伏儉鎩 城北王盲

記天地之中銘存永世隨登愿此碑永立

以傳百世紹示百殊城民

 

246년 동천왕은 신하들과 자살(慾鎩)하기 위해

망명에서 돌아와 고도(固都)를 높이고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드렸다.

 

<흘계訖繼>를 보내어 읍도를 새로 세우도록 하고 246년 10월에 양위한다.

 

(선왕은) 현도와 비류를 다스리는 호영동국리였던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안태천세예악하고 고구려 백제왕은 백성을 위했던 천부조 추모왕을 대신하였다.

 

가을 8월에 보기 이천병사로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혁현령(峴岭)에서 싸워

수 천리를 공격했고 항복한 적이 수천이었다.

 

동천왕의 유신들이 동천왕을 따라 자살하여 왕릉을 시체로 가렸으니,

이 충절을 천지에 기록하여 이름을 높이고

(시원에) 비석을 세워서 백세후 백성들에게 알린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