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八月, 始行<月歌會>, 以<沾解>女<精>為<月仙>. 是, 本古俗, 今為<羅>俗.

上, 欲慰<月精>, 而行之.

 

 

중천대제 5년(252년) 추8월, 비로소 월가회(月歌會)를 행하고,

<첨해沾解>의 딸 <월정月精>을 월선(月仙)으로 삼았다.

 

이것은 본시 옛 풍속이었었으며, 오늘날에는 신라의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상은 <월정月精>을 위로하려고 그 자리에 행차하였다.

 

 

 

<월정月精>은 <첨해沾解(274-324)>의 딸이 아니고 <벌휴伐休(189-256)>의 딸이다.

 

<첨해沾解(274-324)>는 <옥모玉帽(238-311)>와 <내해奈解(230-291)>사이에서

274년에 태어났다.

 

삼국사기의 신라 기년과 맞추기 위하여 후세에 누군가에 의하여

<벌휴>가 <첨해>로 수정되었다.

 

 

 

十月, <沾解>, 與其<玉帽>, 来朝于境上. 上, 與<鱣>后・<月精>, 迎于<河>上, 大宴三日, 賜<玉帽>貂裵・金釧・硨磲・香盒・真珠項飾・珂勒・白馬等四十餘事, 盖為<月精>母. 故上以太后尊敬之, 欲納後宮, <鱣>后妬之不得. <沾解>将皈, 上, 握手泣別親扶<玉帽>上車, 遂賜<竹岺>之地而皈<羅>, 人皈化者八千余戶. 世為兄弟之國, 書于鐵券.

252년 10월, <첨해>가, <옥모玉帽(238-311)>를 모시고,

나라의 경계까지 찾아와서 래조하니,

상이 <전鱣>>[태]후와 <월정>을 데리고 河上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사흘간 크게 연회를 벌여주었으며,

<옥모>에게는 치렁치렁한 담비가죽 옷과 금팔찌・옥귀고리・향합・진주머리장식・

백옥목걸이・백마 등 40여 가지의 선물을 주었다.

 

대략 <월정>의 모친을 위함이었다.

 

이미 상은 <옥모>를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옥모>를} 후궁에서 거두고 싶어하자, <전鱣>[태]후가 이를 시샘하여 그리하지는 못하였다.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상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며

각별하게도 친히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하더니만,

이윽고 죽령의 땅을 하사하여 신라 땅이 되게 하였더니,

이에 돌려보낸 이들이 8,000여 호나 되었다.

 

평생토록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고 쇠판에다 새겼다.

 

 

 

<옥모>와 함께 고구려에 래조한 사람은 <첨해>가 아니고 <벌휴>이다.

 

이때 <벌휴>가 중천에게 15살의 <옥모>를 황후로 소개한다.

 

<옥모>의 미모에 반한 중천은 <옥모>가 <벌휴>의 딸 <월정>의 모친이 되니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옥모>를 후궁으로 거두고자한다.

 

 

六年癸酉, 春正月, 送人參・甘草・膃臍・駱駝于<玉帽>太后, 親書慇懃, 曰;

“更逢于<白玉樓>中.” <羅>人, 不觧其意, 欲作<白玉樓>以迎上,

借玉于我, 送釼匹治工十二人. 命置五部以示範. 去年<河>上之會,

上, 見<羅>人劍戟精銳, 命<沾解>送之. 至是至.  

二月, 命弓匠行[左石右族]祭.  

四月, 遣使于<玉帽>太后問起居, 送黃金五百兩・錦絹各百匹・羊五千頭.

是月, 有龍見于<玉帽>宮東池, <金城>臥柳自起. <玉帽>親書于上, 曰;

“昔, 我「月白仙皇」, 駕雙魚而登仙, 植杖開花至今不絶, 去年夢敎妾事陛下, 得寵隆厚賜, 以<竹嶺>之地為妾湯邑. 父臨<沾>, 夫臨臣妾. <周>室備王母瑤池之儀, <漢>家有<呂雉>・<冒頓>之典. 臣妾, 窈有慕焉, 納女後宮. 願, 得皇子皇女, 世世作親, 永為舅甥.” 上, 大喜, 南向跪拜, 曰;“吾太后真聖人也. 國有如此大聖, 龍見柳起, 不亦宜乎.”

6년{AD253}계유,

 

춘정월, 인삼・감초・물개배꼽・낙타를 <옥모>태후에게 보내주면서,

 

“백옥루(白玉樓)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은근한 글을 손수 써넣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말뜻을 몰라서 백옥루(白玉樓)를 만들어서 상을 맞이하고자

우리에게서 옥을 꿔갔으며, 인필(釼匹){칼과 칼집}을 만드는 치공 12명을 보내왔다.

 

명을 내려서 {이 야공들을} 5부들에게로 나누어 보내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지난해 河上에서 만났을 때,

상은 신라 사람들의 칼과 미륵창이 정교하고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첨해>에게 보내달라고 명하였더니, 지금 도착하였던 것이었다.  

 

 

2월, 활 만드는 장인에게 명하여 촉제를 지냈다.  

 

 

4월, <옥모>태후에게 사신을 보내, 다시금 일상의 안부를 물었다.

 

황금 5백 냥, 비단・명주 각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내주었다.

 

이 달에 <옥모>의 궁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고,

금성의 누운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옥모>가 친히 상에게 글로 쓰기를;

 

“예전에 저의 월백선황(月白仙皇)께서 쌍어(雙魚)를 타고 선계로 올라가시며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꽃이 피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지난해엔 꿈속에서 가르침을 받아서 폐하를 섬겼더니

총애와 융숭한 선물을 받게 되었고 죽령 땅도 첩의 탕읍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첨해>를 어루만지셨더니 지아비께서 신첩을 어루만지셨으며,

주(周)실에 왕모의 아름다운 연못을 준비한 예법이 있었더니

한(漢)실에선 <여치呂雉>와 <모돈冒頓>사이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신첩도 마음속으로 원하는 바 있어서 제 딸을 후궁으로 보내드렸던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황자와 황녀를 보시고,

세세토록 장인과 사위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상은, 크게 기뻐하며 남쪽을 향해 무릎 꿇어 절하며, 말하기를;

 

“나의 태후께서는 진정한 성인이시다. 나라에 이와 같은 큰 성인이 있으셨으니,

용이 현신하고 버드나무가 일어선 것 역시 마땅하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是年, 五・六・七月, 不雨, <沾解>禱其祖庙而雨, 穀不登而民饑盜熾. 上, 命發船百隻,

送 麥·粟·粱←等三千石于<玉帽>太后, 曰;“自離母側, 去益思慕. 聞値荒年民多不炊.

慈母之情當何如哉. 爰命有司送此, 不腆如助, 賑給幸何如之.” <玉帽>, 答, 云;

“<堯>九雨・<湯>七旱, 乃妾之謂也. 「仙皇」以来百姓謳歌. 又有陛下之寵,

乃發龍柳之祥. 豈意妖蘖猜作. 妾崇爱我夫皇逮漕天糧拯我黎庻, 俾妾佩銘.”

 


이 해, (신라에서는) 5・6・7월 내내 가물고 비가 아니 와서,

<첨해>가 조상의 묘에 빌었더니, 비는 내렸지만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이 굶고 도적이 불길같이 일었다.

 

이에 상이 명하여 100척의 배를 띠워 맥・속・량・두 등 3천석을

<옥모>태후에게 보내며 말하길;

 

“모친의 곁을 떠난 이래 더욱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불을 지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어지신 어머니의 정이야 지금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에 관리에게 명하여 이것들을 보내드리니, 도움치고는 넉넉지 않은 것이오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시겠는지요.”라 하였다.

 

<옥모>가 답하기를;

 

“요 임금 9년 큰비와 탕 임금 7년 가뭄이 이제 첩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황이래로 백성들은 풍요로이 살아왔었습니다.

 

또한 폐하의 총애가 있었더니, 용과 버드나무의 상서로움이 나타났었습니다.

 

어찌 요사스런 재앙이 시샘하여 일어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첩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 부황께서 멀리서 하늘같은 양식을 보내주시어

저의 백성을 구제해주셨으니, 첩은 각골난망입니다.”라 하였다.

 

 

 

벌휴왕 10년(A.D.253)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여, <옥모玉帽>를 가희(歌姬)로 하였다.

 

<골정骨正(207-285)>의 총애를 얻어 임신을 하였다. 왕이 골정을 꾸짖었다.

 

 

 

벌휴왕 11년(A.D.254)

 

 

정월 <흠실欽室>을 이벌찬, <백면白面>을 품주로 하였다.

 

 

4월 <구도仇道>의 딸 <옥모玉帽>를 <골정骨正>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7월 <가권可權>을 이벌찬, <황발黃發>을 품주로 하였다.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옥모玉帽>가 <골정骨正>의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조분제(助賁帝)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 구름과 기이한 향기가 흘렀다.

 

왕이 특별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우리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임신하고 태어난 날이 모두 달이 밝았다.

 

그런 연유로 <조분助賁>이라 이름 지었다.

 


八年乙亥, <古爾>, 侵<沾解>, 戰于<槐谷>西.

九月, <羅>一伐飡<翊宗>戰死. 十月, <濟>移攻<烽山城>. <玉帽>, 親至境上, 請救.

上, 與<月>后・<鳳>太子, 會于<河>上. 命<穆萇>伐<古爾>.

<古爾>乃觧<烽山>而請和, 兩軍持久. <鳣>后生<莫>公主.

8년{AD255}을해,

 

<고이>가 <첨해>를 침략하여 괴곡(槐谷)의 서쪽에서 싸웠다.

 

9월에 신라의 일벌찬 <익종翊宗>이 싸우다가 죽었고,

 

10월엔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으로 옮겨서 공격하니,

<옥모>가 손수 국경으로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월月>후와 <봉鳳>태자를 대동하고, 河上으로 나와서 만났고,

<목장>에게 명하여 <고이>를 치게 하였더니,

<고이>는 봉산(烽山)의 포위를 풀고 화친을 청하였고, 양군은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고이>는 <구수>로 <첨해>는 <벌휴>로 바뀌어야한다.

 

 

九年丙子, 春三月, 上親送<玉帽>于境上, <沾解>来迎. <沙道海>上有三大魚出, 長三丈高丈二尺. 人, 以三聖之瑞, 歌曰;“天有三星, 地有三聖, 海有三魚.”  

秋八月, <玉帽>生皇子<達賈>. 上, 遣使, 冊<玉帽>為皇后, <沾解>為皇子.

十月, 祭天, 送肉于<玉帽>. <玉帽>, 择宗室女三人, 献之. 命置于天宮・月宮・東宮.

聞, 是月之晦, <羅>日食.  

 

 

9년{AD256}병자,

 

춘3월, 상이 친히 <옥모>를 국경까지 나와서 전송하였고, <첨해>가 와서 맞이하였다.

 

사도해(沙道海) 위쪽에 큰 물고기 세 마리가 있었는데,

길이는 3장에 높이는 1장 2척이었다.

 

사람들은 성인 셋이 나타날 징조라 하며, 노래하기를;

 

“하늘엔 별 셋이 있고, 땅에는 성인 셋이 있으며, 물에는 물고기 셋이 있다.”라 하였다.  

 

추8월, <옥모>가 황자 <달가達賈>를 낳았다.

 

상은 사신을 보내서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는 황자로 삼았다.

 

 

10월에 하늘에 제사하였고, <옥모>에게는 고기를 보냈다.

 

<옥모>가 종실의 딸 셋을 가려 뽑아 바쳐 와서, 천궁・월궁・동궁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달 그믐에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중천이 황자로 삼은 것은 <첨해>가 아니고 <조분(254-329)>이다

 

 

 

벌휴왕 13년(A.D.256)

 

정월 <구도仇道>를 이벌찬, <호매好買>{벌휴와 자황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十年丁丑,  夏四月, 與<玉帽>會, 獵于<大嶺>. 上, 射一鹿, 命<玉帽>射之. <玉帽>曰;

“陛下射之, 鹿已伏. 妾當受之献于天.” 名其地為<献天溝>. 國人立<二聖祠>于其上.

後人有詩, 曰;“庙岺春風, 鹿自肥献天, <玉>后佩皇皈.”  時, <百濟>, 大旱, 樹木皆枯.

人以為二聖合, 西泽乾. “黑竜與蒼竜交, 白竜焦.”之謠行.  

 

10년{AD257}정축,

 

하4월, <옥모>와 만나 대령(大嶺)에서 사냥하였다.

 

상이 사슴 한 마리를 쏘고 나서, <옥모>에게도 그 사슴을 쏘라고 명하니,

 

<옥모>가 말하기를;

 

“상께서 쏘셔서 사슴은 이미 쓰러졌습니다.

응당 소첩은 그것을 거두어 하늘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 땅의 이름은 헌천구(献天溝)가 되었다.

 

나라사람들이 헌천구(献天溝) 위쪽에 이성사(二聖祠)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사당 고개에 춘풍이 부니, 사슴은 자신을 살찌워서 하늘에 바쳤고,

<옥>후는 황상을 모시고 돌아갔다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백제는 크게 가뭄이 들어 수목이 모두 말랐다.

 

사람들은 두 성인이 교합하여 서쪽 택지의 물이 말랐다고 하였으며,

 

“흑룡{고구리}과 창룡{신라}이 교합하니, 백룡{백제}이 애태운다.”는 노래가 번졌다.  

 

 

 

十一年戊寅, 春二月, <末曷><長羅湯>等, 與<古爾>相通, 欲共伐<沾解>.

命伐<長羅湯>斬之, 捕<古爾>使及其土物送于<沾解>.

<古爾>, 以其所受海馬十匹, 換使.  

五月, 上送<玉帽>于<海>上. 自<大嶺>獵後, 二聖同居<沸流>行宮, 至是, 從海路皈國. 有歌, 曰;“山有花兮, 水有魚. 奈何, 朕躬無花魚.” 上泣, 玉帽亦泣.

 

 

11년{AD258}무인,

 

춘2월, 말갈의 <장라탕長羅湯> 등과 <고이>가 상통하여 함께 <첨해>를 치려하였다.

 

명을 내려 <장라탕長羅湯>을 쳐서 목 베었고, <고이>의 사신을 사로잡았으며,

<고이>의 토산물은 <첨해>에게 보냈다.

 

<고이>는 이전에 받았던 해마 10필로 사신을 바꾸어 갔다.  

 

 

5월, 상이 <옥모>를 海上에서 돌려보냈다.

 

대령(大嶺)에서 함께 사냥한 이후 두 성인은 비류행궁에서 함께 지냈었고,

이때가 되어 海路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상은

 

“산에는 꽃이 피고, 물에서는 물고기 헤엄쳐 노는데,

어이하여 내게는 꽃도 물고기도 없단 말인가.”라 노래하였다.

 

상이 눈물 흘렸더니, <옥모> 또한 눈물 흘렸다.

 

 

<고이>는 <구수>로 <첨해>는 <내해>로 바뀌어야한다.

 

 

十二年乙卯, 春正月, 遣<椽邦>于<玉帽>, 賜衣・肉・匹段・玉佩・薬物等百事. 封<沾解>為<新[羅]國>皇帝・<東海>大王・右衛大将軍, 賜金・銀印二顆.  <玉帽>生皇女<雲>公主.  

二月, <尙齊>子<克> 為尾署大加, 製五色璫・磚及紋尾・熊脚等,

送于<新羅>, 命修<玉帽>新宮. 上, 送黃金千兩・白金萬兩・工人二百名于<玉帽>,

聞<羅>有旱・蝗・多盜, 命<穆濬>送穀二萬石・牛羊八千頭・酪酒・皮幣・雜物無算.
<沾解>送<吳>人釼師・蠶師各二人.  時, <駕洛><居登>殂. <麻品>立,

與其母<慕貞>来献土物. 從<羅>使徃返.  

 

 

12년{AD259}을묘,

 

춘정월, <연방椽邦>을 <옥모>에게 보내어

의・육・포목・옥패・약물 등 백 가지를 하사하고,

<첨해>를 신라국 황제・동해 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고,

금・은 도장 2개를 내려주었다.

 

<옥모>가 황녀 <운雲>공주를 낳았다.  

 

2월, <상제尙齊>의 아들 <극克>을 미서대가(尾署大加)로 삼아,

5색당(五色璫)・전과문미(磚及紋尾)・웅각(熊脚) 등을 만들어서 신라로 보내고,

<옥모>의 새 궁전을 고쳐주라 명하였다.

 

상이 <옥모>에게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인을 보내주었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이 일어 도둑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목준穆濬>에게 명하여 곡식 2만 석, 소와 양 8천 두, 짐승 젖으로 담근 술,

피륙으로 만든 옷가지 등과 잡다한 물건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게 하였다.

<첨해>가 吳나라 칼을 만들고 양잠을 가르치는 벼슬아치를 각각 2인씩 보내왔다. 

 

이때 가락의 <거등居登(162-259)>이 죽었다.

 

<마품麻品>이 섰으며, 모친인 <모정慕貞>과 함께 찾아와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의 사신을 따라왔다 돌아간 것이었다.

 

<첨해>는 <내해(230-291)>로 바뀌어야 한다.

 

 

十三年庚辰,  二月, 「北部」大使者<穆平>卒, 年七十二.  

命「五部」採金<東海>捕膃狗, 送于<玉帽>. <鱣>后諫, 曰;

“妾聞<衛>王嗜<夏姬>為其子所弑. 今, 陛下, 妾<玉帽>而子<沾解>. 是,

抱老狐而柔勁猫也. 妾不敢忘其危也.” 上曰;

“臣, 有此疾, 每貽母憂. 然, 臣有母后, 豈敢溺於彼哉. 倂合之計耳.”

七月, <玉帽>, 遣使献土物, 曰;“頼我夫皇造此新宮. 欲迎天子. 叙此鴦情.” 上欲徃之,

<鱣>后諫, 曰;“陛下若去, 妾當墮樓.” 上, 不得已, 答曰;

“吾妻之國, 夏, 雨, 山崩四十余所. 秋, 星孛東, 以示餘蘖. 非無「<尾生>之信」,

謹戒「<衛><靈>之轍」. 卿若涉<溱>, 應有「孝橋」. 願, 入<巫山>, 再結雲雨.”

九月, 如<卒本>, 祀<東明庙>, 行<巨婁祭>.


13년{AD260}경진,

 

2월, <북부>의 대사자 <목평穆平>이 나이 72살에 죽었다.  

 

명을 내려서 5부는 금을 캐고 동해는 물개를 잡아 <옥모>에게 보내주라고 하였더니,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신첩은 위(衛)왕이 <하희夏姬>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었다 는 얘기를 들었소.

 

지금 폐하는, <옥모>를 첩으로, <첨해>를 아들로 삼고 있소.

 

이것은 늙은 여우를 품에 안아주고 사나운 고양이를 달래려는 격이오.

 

신첩은 이 일의 위험함을 감히 잊을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아뢰길;

 

“신에게 이런 병이 있어서 매번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하지만 신에게는 모후께서 계시온데,

{제가} 어찌 감히 <옥모>에게 푹 빠져버리기만 하겠습니까.

 

<신라>를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입니다.”라 하였다.  

 

 

7월, <옥모>가,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친애하는 지아비 황상(<중천제>)의 도움으로 이렇듯 새 궁전을 지었습니다.

 

천자를 여기에 모시고 싶습니다. 이렇게 원앙이 암컷의 정을 써서 보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상이 그곳으로 가보려 하자,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폐하가 거기에 가시면, 첩은 응당 누대에서 투신하겠소.”라 하였다.

 

상은 하는 수 없어 답하여 아뢰길;

 

“제 처의 나라가 여름엔 비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고,

또한 가을엔 혜성이 동쪽으로 뻗쳐서 재앙이 남아있음을 알렸습니다.

 

<미생尾生>의 믿음{어리석은 믿음}이 없지는 않으나,

위(衛)<령靈>의 철(轍){어머니의 병病 때문에 <미자하>{靈公의 男色美少年}가 <위>

<영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급히 달려가다 행적(철)을 남긴 실수와 관련된 고사}」은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경께서 진수(溱水){춘추전국 시절에 <鄭>나라를 흐르던 하천}>를 건너시겠다면,

응당 효교(孝橋){<미자하>가 어머니를 위해 <위><영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건넌

그 강의 다리}>를 놓아드릴 것이니,

원하건대 무산(巫山){원래 巫山은 四川省 巫山縣의 남동쪽 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에 들어가시어서 다시금 대업을 이룰 기회를 매듭지어 주십시오.”

라 하였다.  

 

 

<첨해>는 <조분>으로 바뀌어야한다.


 

十四年辛巳, 春二月晦, 上, 與<玉帽>, 會于<卒本海>上, 觀漁.

聞<羅><達伐城>以柰麻<克宗>為城主.  命<南部>採蔘以尉<玉帽>.
三月, <古爾>, 請和于<沾解>, 送女及馬, 却之. 時, <古爾>, 以<真可>為內頭,

<優豆>為內法, <高壽>為衛士, <昆奴>為朝廷, <惟己>為兵官.

皆云, <羅>・<麗>相婚, 非國家之福. 離間而請和者也.
十二月 二十八日, <沾解>暴殂. <助賁>婿<味鄒>立, <玉帽>之弟也.  上書請立, 曰;

“姪皇棄國. 群臣以臣監國. 臣才庸劣不足以立. 姊后・兄皇, 宜择可人.”

上, 與<玉帽>同寢于<檀宮>, 聞此急報, 問於<玉帽>, 曰;

“爾弟<味鄒>謹厚長者也. 不亦可乎.” <玉帽>泣, 曰;

“妾已負國從夫, 夫皇之心乃妾之心也.” 上, 乃使<明臨於潤>, 封勅徃<羅>, 封<味鄒>為<新羅國>皇帝・<東海>大王・右衛大将軍, 賜金・銀印・袌・冕. 此乃壬午正月二十五日也.
<索頭>, <伊鹿肥>遣子<沙漠>于<魏>, <魏>留之.

14년{AD261}신사,

 

춘2월, 그믐날, 상이 <옥모>와 함께 졸본해 위 쪽에서 만나

고기잡이 하는 것을 돌아보다가, 신라의 달벌성(達伐城)이

내마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부>에 명하여 삼을 캐서 <옥모>를 위안케 해주었다.

3월에 <고이>가 <첨해>에게 화친을 청하며 딸과 말을 보냈으나, 물리쳤다.

 

이때, <고이>는 <진가真可>를 내두좌평으로,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가 신라와 고구리가 서로 혼인을 하는 것은

나라{백제}에 복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간하고자 청혼한 것이었다.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292-362)>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옥모>와 단궁(檀宮)에서 동침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는, <옥모>에게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기가 가장 나으니, 또한 해 볼 만하지 않겠소?”

 

라 물으니, <옥모>가 눈물 흘리며 답하길;

 

“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아비이신 황상의 뜻이 소첩의 뜻이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明臨於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 황제・ 동해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그날이 바로 임오년{AD262} 정월 25일이었다.

 


 

15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첨해15년(261년) 12월 28일에 <첨해>가 갑자기 병이나서 죽었다는 기록을

후세에 누군가가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첨해>는 324년 12월 28일에 죽었다.

 

 

十五年壬午, 正月, 會<明臨>氏・<椽>氏・宗戚女子, 宴<玉帽>皇后于<大角宮>.  

聞<沾解>喪, 上, 與<玉帽>, 擧哀于<檀宮>.  

二月, 上, 與<玉母>皇后, 如「溫湯」. 命画<玉帽>像十幅, 立<鷄林聖母祠>, 揭之.

幷祀<閼智>・<勢漢>・<阿道>・<首留>・<旭甫>・<仇道>六祖.

上, 與<玉帽>, 献酌于<仇道>, 曰;“久聞<仇道>大王之英雄矣. 今為吾父. 可不敬愛歟.”

<玉帽>曰;“妾亦願<東明>神祖之庙.” 上, 許之, 乃如<卒本>, 生<檀>太子.  

秋七月, 上, 與<玉帽>, 畋于<箕丘>, 得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羅>使来献土物, 言;“是年, 三月, 龍見宫東池. 七月, <金城>西門災, 延燒民家百余區.”

15년{AD262}임오,

 

 

정월, 그믐날에 <명림明臨>씨와 <연椽>씨 및 종척의 여인들을 <대각궁>에 모아놓고

<옥모>황후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첨해>를 장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은 <옥모>와 함께 <단궁>에서 거애하였다.  

 

2월, 상은 <옥모>황후를 데리고 온탕으로 가서,

<옥모>의 초상 열 폭을 그리게 하고는, 계림성모사를 세워서 거기에 걸어 놓았다.

 

여섯 조상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를 한데모아

제사토록 하였다.

 

상이 <옥모>와 함께 <구도>에게 술을 따라 올리더니, 말하길;

 

“<구도>대왕이 뛰어나게 용맹하셨음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고,

 

지금은 나의 부친{장인}이 되셨는데,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되겠소?”라 하였다.

 

이에 <옥모>가 말하길;

 

“첩 또한 훌륭하신 조상님이신 <동명>의 사당에 가서 술을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이를 허락하자, 졸본으로 갔다가, <단檀>태자를 낳았다.  

 

 

추7월, 상은 <옥모>를 데리고 기구(箕丘)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동11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금년 3월에 궁궐의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으며,

7월에는 <금성>의 서쪽 문에 불이 났는데,

민가 100여 구역을 연이어 태웠다.”고 하였다.

 

<옥모>의 아버지 <구도>는 301년까지 살았다.

 

 

十六年癸未, 春正月, <味鄒>, 遣使献土物, 曰;“以伊飡<良夫>為舒弗邯兼知內外兵馬事.” 乃<玉帽>之命也. 二月, <味鄒>, 祀其祖庙, 祔<仇道>葛文王. 上, 遣<門夫>太子, 傳香.  四月, 上, 與<玉帽>, 入山宮, 謁<鱣>太后.  命「五部」採金.

16년{AD263}계미,

 

춘정월, <미추>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길;

 

“이찬 <량부良夫>를 서불감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옥모>의 명이었었다.

 

2월에 <미추>가 자신의 조상 사당에 제사하고, <구도>갈문왕 사당에 함께 모셨다.

 

상은 <문부門夫>태자를 보내어 제사지낼 향을 전하였었다.  

 

4월, 상과 <옥모>가 산궁(山宮)으로 들어가 <전鱣>태후를 찾아뵈었다.  

 

5부에 명하여 금을 캐게 하였다.

 

 

三月 玉帽太后崩于海宅 返葬于奈解陵 分骨于骨正陵

初 足達妻雲帽 私通于仇道而生后 異香滿室

夢見玉耶生金花 故名玉帽 及長 美而善歌舞 十六列于歌仙 行月歌 衆仙慕之

骨正太子 引歸于宅 而幸之有娠

玉帽請爲妻 而骨微不得 欲自焚而死

伐帝乃命 骨正行吉 生助賁帝 又事奈帝生尼今

尊爲太后 力扶召文遺臣

時人以后爲馬精 春秋七十四

<박창화 필사본 沾解尼今紀>

 

(첨해 2년, 서기311년) 3월

 

옥모태후가 해택(海宅)에서 돌아가시어 내해릉(奈解陵)으로 옮겨 장사지냈고

골정릉(骨正陵)에 뼈를 나누었다.

 

옛날에 <족달足達>의 처 <운모雲帽>{召文國 妙德의 딸}가

<구도仇道 (218-301)>와 사통하여 后를 낳았는데

이상야릇한 좋은 향이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에서 옥야(玉耶)가 황금 꽃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연유로 <옥모玉帽>라 이름 지었다.

 

자라서는 아름답고 노래와 춤을 잘 하여

16번째 가선(歌仙)으로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많은 선도(仙徒)들이 그녀를 탐내었다.

 

<骨正207-285>태자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누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옥모>가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으나 골품이 확실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으려 하였다.

 

벌제(벌휴제)가 이에 <골정>에게 혼인을 하라 명하였고

<조분제助賁帝(254-329)>를 낳았으며

또 <내해제內解帝(230-291)>를 섬겨 지금의 니금(沾解(274-324))을 낳았다.

 

태후(太后)로 높여졌으며

(어머니의 나라였던) 소문국(召文國)의 구신(舊臣)들을 힘써 도왔다.

 

당시 사람들이 후를 마정(馬精)으로 삼았다. 춘추 74세였다.




 

※ 참고   -  옥모<玉帽> 一代記

 

 

아달라 26년(238년) : 알지의 6세손 구도(218-301)와 소문국 묘덕왕의 딸이며

                              족달의 처인 운모 사이에서 태어남.

 

벌휴8년(251년) : 신라가 <월정月精>을 고구려에 보냄.

 

벌휴9년(252년) : 옥모가 중천대제와 만남. 죽령 땅을 하사받음

 

벌휴10년(253년) : 중천이 백옥루에서 만나자고 하며 황금 500냥, 비단 명주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냄.

 

벌휴11년(254년) : 옥모와 골정이 혼인함. 조분을 낳음(옥모=골정)

                           월정이 태자 봉을 낳음(월정=중천)

 

벌휴13년(256년) : 달가를 낳음(옥모=중천)

                          구도가 이벌찬이 됨   

 

내해원년(257년) : 중천과 옥모가 대령에서 사냥함.

 

내해2년(258년) :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니 옥모가 중천에게 구원을 요청함.

 

내해3년(259년) :  운 공주를 낳음(옥모=중천)

                         옥모궁 축성을 위하여 황금 천냥, 백금 만냥, 공인 200명을 보냄.

 

내해5년(261년) : 홍모를 낳음(옥모=골정) 

 

내해6년(262년) : 중천이 옥모의 초상 열폭을 그리게하고 계림성모사를 세움.

                         단(檀)태자를 낳음(옥모=중천)

 

내해18년(274년) : 歌仙이 됨.

                          첨해를 낳음(옥모=내해)

 

내해21년(277년) : 유모를 낳음(옥모=내해)

                           홍모가 우로를 낳음(홍모=내해)

 

내해24년(280년) : 중해를 낳음(옥모=내해)

 

내해30년(286년) : 홍모가 아이혜를 낳음(홍모=내해)

 

조분4년(295년) : 유모가 유황을 낳음.(유모=조분)

 

조분16년(307년) : 아이혜가 명운을 낳음.(아이혜=조분)

 

첨해원년(310년) : 아이혜가 광원을 낳음.(아이혜=조분)

 

첨해2년(311년) : 옥모사망(74세)

 

 

 

※ 참고  <옥모>의 가계도

 

 

妙德(소문국왕)     郁甫(감알지의 후손)                 伐休(189-256)

   |                       |                                           |

雲帽                = 仇道(218-301)  伐休(189-256)   伊買(211-235)

                      |                          |                      |

                 玉帽(238-311)  = 骨正(207-285) = 奈解(230-291) = 然弗(224-270)

                                       |                     |                      |

                                    助賁(254-329)    沾解(274-324)     達賈(256-292)

 

 

 

 

 

<옥모>에 대한 고구려사초와 신라의 기록이다.

 

고구려사초 중천대제기는 절반 이상이 옥모에 대한 기록이다.

 

중천대제기에 나오는 신라 백제 기사는 후세의 누군가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신라와 백제의 기년을 맞추기 위하여

가필과 수정한 부분이 상당히 있어 우리를 혼린스럽게하고 있다.

 

중천대제기에 나오는 첨해, 조분, 미추, 고이왕은 다른 왕으로 바뀌어야한다.

 

삼국사기는 <옥모>에 대하여 단 한줄의 기록

갈문왕 <구도>의 딸이며 <조분>이사금의 어머니 김씨 옥모부인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중천대제는 선제인 동천의 유명에 따라 고구려 서부지역인 요동과 현도, 낙랑에 대한魏,晋과의 지배권 다툼을 일단 접어두고 신라와 백제로 눈길을 돌린다.

 

이에 신라와 백제는 긴장 할 수밖에 없었고 벌휴는 중천에게 그의 딸을 바치고

중천은 그녀를 다의(茶儀)로 삼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이 <월정月精>이다.

 

신라는 언제나 골녀를 주변국에 보내어 색공으로 주변국을 통합하여왔다.

 

이번에 <벌휴>와 <옥모>가 보낸 <월정>도 그들이 쓰는 미인계(美人計)였다. 

 

신라의 의도대로 중천은 생전 하지 않던 신라지역의 풍습인 월가회를 열고

<월정>을 월선으로 삼는다.

 

그 <월정>이 마음에 들었던 중천은 <벌휴>에게 황후를 데리고 만나자고 한다.

 

<벌휴>는 15살의 <옥모>를 황후로 소개한다.

 

그러니 <벌휴>의 딸인 <월정>은 <옥모>의 딸이 되는 것이다.

 

 

15살의 <옥모>는 29살인 중천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중천은 신라의 황후를 후궁으로 삼으면 신라를 통채로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흘간이나 연회를 열고 금팔찌를 비롯해 40여 가지나 되는 선물을 주며

<옥모>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따라갔던 <明臨鳣>太后가 반대하는 바람에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중천은 신라로 돌아가는 <옥모>에게 죽령을 탕읍(湯邑)으로 주게 된다.

 

<벌휴>와<옥모>의 미인계가 적중한 것이다.

 

죽령은 고구려 대무신제 27년(서기 54년)에 고구려의 <호동>이

낙랑왕의 딸을 꾀어 자명고(自鳴鼓)를 찢게 하여 점령했던 옛 낙랑국의 땅이다,

 

그 땅을 지금 신라가 미인계로 차지한 것이다.

 

낙랑국이 멸망하여 그 유민이 지금의 죽령(소백산)으로 이주할 때

말갈족은 그들의 터전을 잃고 남하하여 신라의 북변을 노략질하게 된다.

 

죽령은 남옥저의 땅이었으며 말갈 역시 이 땅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였다.

 

신라도 말갈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 죽령의 땅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아달라왕은 서기 239년에 옥돌을 바치며 죽령을 달라고 하였으나

동천대제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마지막 방법으로 미인계를 쓴 것이다.

 

 

 

-  신라의 옥모(玉帽) 황후와 고구려 중천왕(中川王)의 연애대전

 

 

삼국시대 때에 고구려가 신라에 '퍼주기' 전략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퍼주기' 구조는 '핵무기' 중심이 아니라

신라의 '절세 미인'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라의 미녀황후에 반했던 인물은 고구려의 중천대제이다.

 

신라의 미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1백 척의 배로 온갖 구호품을 신라에 보내는가 하면,

중천은 그 신라의 미녀 황후와 사슴 사냥을 같이했다 하여

고구려에 이성사(二聖祠) 사당을 짓는가 하면,

그녀에게 바치는 '산유화'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녀의 외가댁은 소문국(召文國, 현재의 의성 안동지역)으로서

신라의 <옥모(玉帽)>였다.

 

중천은 <옥모>와 함께  <옥모>의 조상이자 신라 김씨 왕실의 조상들인

김알지까지의 여섯 시조들을 제사하도록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를 짓기까지 했다.

 

중천은 온천에 함께 갔다가 옥모상 열폭을 그리게도 했을 만큼

완전히 <옥모>에게 넋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신라의 황후이다.

 

중천이 <옥모>의 아버지 <구도>를 자신의 부친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자

<옥모>는 중천의 시조인 동명사당에 술을 따르고 싶다고 화답한다.

 

그러나 중천의 이와 같은 <옥모>에 대한 연모는 고구려 중신들에게는

신라를 복속하는 의미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미 주몽이 소서노를 유혹하여 졸본부여를 손아귀에 넣어 고구려로 둔갑시킨 이래

그의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낙랑공주를 휘어잡은 호동왕자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중천제가 신라의 옥모황후를 통하여 신라를 복속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화랑들을 한 손에 휘어잡던 신라 원화의 오랜 전통으로

옥모황후가 중천제를 홀리고

고구려의 제물들을 신라로 가져오는 전략이 먹혀들게 되었을까?

 

신라에 기근이나 홍수 재해가 생길 때마다 고구려에 그 내용이 전달되고

중천은 엄청난 양의 구호재물을 신라로 보낸다.

 

신라의 천재지변들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중천에게 구호재물을 받아내기 위한 쇼였을까?

 

신라는 조공을 바치는 폼만 잡고

오히려 재물은 고구려가 신라에 엄청난 양을 제공하고 있다. 

 

고구려 중천이 신라에 왕을 봉하면서 옥모황후에게 허락을 받고

'新羅國皇帝'라는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신라와 고구려는 조공관계가 분명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색공(色供)과 고구려의 재공(財供) 대결의 결과는 

이제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12대 중천대제가 죽고 나서도 고구려에는 옥모사당이 남아 있었고 

19대 영락대제(永楽大帝) 때까지도 왕이 옥모상에 배알하기도 한다. 

 

고구려가 신라 황후의 사당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에서 절을 하는 역사적인 장면은 

오늘날 분단시대에서 과거 김일성 동상에 절을 하던 

남한의 모 인사들의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왕조의 관찬으로 이루어진 사서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하면서

대외적인 사대주의적인 기록 외에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간의 국제관계에서도

중요한 사료들을 배제한 흔적이 많이 있다.

 

특히 유교적인 관점으로 기록한 김부식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사실들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내용의 하나가 신라의 옥모황후와 고구려의 중천제와의 국제연애 내용이다.

 

이 내용은 화랑세기의 저자 남당 박창화의 유작들에 방대하게 남아 있는

그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고구려와 신라의 연애대전이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쪽 남녀는 속으로 각각의 꿍꿍이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전략적인 꼼수였을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의 소떼 몰이 방북 이래

김대중 -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천문학적 퍼주기를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그 반대 현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중천제와 신라의 옥모황후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나려(羅麗) 국제 연애대전이었다.  

 

옥모에 대하여서는 삼국사기에 한 건의 기사에서

그녀가 실제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중천제에 대하여서 기록할 때 신라의 옥모에 대한 일체의 기록을 생략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왕이 신라의 왕후를 탐한 결과가

나쁜 결과를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남당 박창화의 유작 가운데 <고구려사략>의 내용에는

중천제와 옥모가 같이 흰 사슴 사냥을 한 내용을 

김부식이<삼국사기>에서 어떻게 생략되었는지 그 내용은 내용과 같다. 

 

秋七月,上與玉帽畋于箕丘, 得白獐.

冬十一月, 雷地震. 羅使來獻土物言,

是年三月, 龍見宮東池. 七月, 金城西門災, 其燒民家百余區.

<中川大帝紀>

 

추7월, 상은 <옥모玉帽>를 데리고 기구(箕丘)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동11월, 뇌성이 들리고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금년 3월에 궁궐의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으며,

7월에는 금성의 서쪽 문에 불이 났는데, 그 불이 민가 100여 채를 태웠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김부식은 <삼국사기> 중천왕(中川王) 편에

다음과 같이 옥모와 관련된 일체의 내용을 지워버리고 있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三國史記>

 

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箕丘)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옥모황후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三十五年,春三月, 王薨. 助賁尼師今立,一云諸貴諸賁 姓, 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 骨正一作忽爭葛文王. 母, 金氏玉帽夫人,仇道葛文王之女妃,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 遺言以壻助賁繼位. 王身長, 美儀뢰表,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북한본』.趙炳舜.『三國史節要』>

 

내해35년(230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조분 이사금[제분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이 석씨이고,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의 아버지는 갈문왕 골정(홀쟁이라고도 함)이다.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玉帽夫人)이다.

 

그녀는 갈문왕 구도(仇道)의 딸이다.

 

왕비는 아이혜 부인이다.

 

그녀는 나해왕의 딸이다.

 

전 임금이 죽음을 앞두고, 사위 조분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왕은 키가 크며 외모가 훌륭하고,

일이 생기면 명석한 판단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고구려 12대 중천왕에 대하여 <삼국사기> 권 제17 고구려본기 중천왕 편에서도

김부식은 옥모는 일체 이름을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를 필사한 남당 박창화의 유작들에는

신라의 옥모황후는 고구려 신라 관계의 중심에 서 있으며

양국의 병권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넘어가는 그 핵심 고리가 되어 있다.

 

그러고도 옥모는 많은 세월 후에도 고구려왕가의 神으로서 예배되고 있었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신라 11대왕 조분니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92-309)의 어머니였다.

 

옥모(玉帽)는 신라 13대 미추왕의 아버지 구도(仇道) 갈문왕에게 시집 온

소문국(召文國)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낳은 딸로서 김씨이다.

 

소문국(召文國)은 벌휴왕 2년(245년)에 신라에 병합된 여왕 제도를 가졌던 나라였다. 

 

지금의 경북 의성군 지역에 속한 곳으로 신라 때는 문소군이고 고려 때는 의성부였다. 

 

안동 의성 지역에 여왕국의 흔적이 있다는 등의 소문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물왕 2년 11월에 왕이 옥모성모제(玉帽聖母祭)를 행했다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옥모는 성모로서

신라에서 후대 왕들이 제사한 신으로 받들어졌던 것을 볼 수 잇다.

 

여기에서 말하는 神이란 신라의 왕통 계승에 깊이 관련되는

모계혈통의 중요한 선조 황후의 혈통을 의미하는 大元神統의 神을 의미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화랑세기>에서 신라의 주요 황후들의 혈통의 근원이 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의 딸은 홍모(紅帽)이고 홍모(紅帽)의 딸은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阿爾兮)의 딸은 미추왕의 황후인 광명(光明)이고

 미추대왕(味鄒大王)은 옥모의 혈통인 광명부인을 황후로 삼으면서

옥모의 모계혈통만이 황후로 삼기를 천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옥모는 신라에서 眞骨正統의 원조이다. 

 

 

味鄒大王以光明爲皇后詔後世曰非玉帽之姻統 則不爲皇后 故世以斯統爲眞骨正統

玉帽夫人乃召文國王女雲帽公主于仇道公而生者也非古之眞骨也 

<화랑세기>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姻統)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 하였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소문국(召文國)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낳은 딸로서 옛 부터 진골은 아니다.   

 

가야왕실 출신으로서 진골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도

어머니 만명부인이 진골정통이기에 신라의 진골이 되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서현이 신라의 진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의 완전한 진골정통은 아니었다.

 

그처럼 옥모는 소문국의 왕녀 운모공주가 신라로 시집와서 낳은 딸이기에 

신라의 정통 진골은 아니었지만,

신라의 모계 황후 계보의 인통(姻統)의 대통이 되어있다.

 

인통(姻統)은 신라의 왕통 계승에서 왕비를 배출하는 철저한 모계의 혈통 라인이다.

 

신라의 왕통 계승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모계 혈통이 있는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그것이다.

 

대원신통은 어머니가 신궁(神宮)의 최고 여사제 혈통을 말한다.

 

왕위 계승은 성골중심으로 이루어 졌지만 왕비와 왕후 간택은

모계혈통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왕실의 남자들의 신분도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어미의 혈통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되

다만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해서만 그렇게 어머니 혈통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신라의 왕통은 母傳女傳이 근본 구조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의 중천대제를 완전히 매료시킨

신라 조분니사금의 어머니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신라의 황후들의 인통(姻統)의 원조였다.

 

그런 신라의 황후가 고구려의 12대 중천대제의 열정적인 연정을 불러일으켜

당대 나려관계의 국제 연애 과정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제 남당 박창화의 유작들의 세계에서 신라의 옥모황후와 고구려의 중천제가

격돌하는 희대의 연애대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신라사략에 나타나는 옥모에 대한 기록은

벌휴왕(재위 244-256년) 때의 기사인 <伐休紀(벌휴기)> 에서 먼저 등장한다.

 

벌휴왕 10년 10월 월가(月歌)를 거행했을 때

<구도仇道>의 딸이었던 <옥모玉帽>를 가희(歌姬)로 하였다고 했으며,

벌휴왕의 2남인 <골정骨正>의 총애를 얻어 임신을 하였는데,

벌휴왕이 <골정>을 책망하였다.

 

이미 벌휴왕 자신이 <옥모>에게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4월에 왕은 <옥모玉帽>를 <골정骨正>과의 혼인을 허락하고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玉帽生骨正子 是爲助賁帝 有瑞雲異香 上奇之 曰

“此兒必興吾家” 其娠産皆以月明 故曰助賁

 

<옥모玉帽>가 하얀 까치가 품에 날아드는 태몽을 꾸고

<골정骨正>의 아들을 낳았는데,  곧 장차 신라 11대 왕인 조분제(助賁帝)이며,

벌휴왕이 손자 조분을 안고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을 필히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들인데 그 태어난 날에 달이 하도 밝아

이름을 <조분(助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달이고 딸이 오히려 해에 해당하는 것을 신라의 왕후 칭호에서도 볼 수 있다.

 

<조분>이 왕이 되어 딸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이 <광명光明>인 것은 태양의 여신을 의식한 것이며

13대 미추이사금의 황후가 된 바로 그 광명황후(光明皇后)이다.  

 

<골정骨正>의 처인 <옥모玉帽>가 <내해>왕의 아들을 낳았는데 

<첨해沾解>라 이름 짓고 <내해>왕이 아들을 씻어주었다.

 

신라에는 자식이 태어나면 그 아비기 씻어주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은

마치 바이블의 세례의식과 유사하다.  

 

<옥모玉帽>는 다시 내해왕의 딸 <유모乳帽>를 낳았는데,

이번엔 왕이 아닌 그녀의 남편인 <골정骨正>에게 아기를 씻게 했다.

 

아마도 이번에 낳은 딸은 실제로는 골정의 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옥모가 그녀의 남편인 골정에게 명령하여 딸 유모를 씻게 했다

표현한 기록이다.

 

<옥모>의 아들 <조분>왕이 즉위하자

그는 어머니 <옥모>를 높이어 태후(太后)로 하고,

외조부 <구도仇道>를 태공(太公)으로 높이었다.

 

제8대 아달라왕이 박씨인데 그 뒤에 왕위에 오른 벌휴왕은

탈해왕이 죽은 뒤 115년 만에 석씨(昔氏)로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도 제11대 조분이사금 (助賁尼師今)을 

"석씨인 벌휴 이사금의 손자"로서" 그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玉帽夫人)이며,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고 쓰고 있다.

 

아들 조분왕 7년 때에 태후의 위치에 있던 옥모는

그녀를 위한 병권이 왕에 의하여 주어졌으며 그 군대를 마도(馬徒)라고 했으며

돌산대제(突山大祭)를 행했다. 

 

조분왕 12년(303년) "마도(馬徒)는 옥모태후를 주(主)로 받들었다"

고 한 것을 보면, 원화를 주(主)로 삼는 화랑도 이전에

여성 지도자를 주군으로 삼은 마도(馬徒)가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미추이사금기>의 미추왕 15년(339년)에

"마도(馬徒)는 옥모(玉帽)태후를 모시던 무리이고,

구도(狗徒)는 구도세신(仇道世神)을 모시던 무리이다.

 

그런 까닭으로 구도(狗徒)는 마도(馬徒)를 딸이라 하며 놀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옥모가 구도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도(馬徒)는 옥모태후는 황후(后)이고,

구도(狗徒)는 신하라고하며 욕하지는 않았다.

 

 

初內禮太后以祇摩帝女 久在帝位 誓于伐休帝 曰

“非吾子孫 不得立 玉帽太后 亦以天神正統”

<味鄒尼今紀>

 

일찌기 내례(內禮)태후가 지마(祇摩)제의 딸로 오랫동안 제위(帝位)에 있었는데,

벌휴(伐休)제에게 경계하는 말로

 

“나의 자손이 아니면 왕을 세울 수 없다.

옥모(玉帽)태후 역시 천신정통(天神正統)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옥모태후를 '천신정통'으로도 표현하고 있는데 대원신통을 의미하며,

대원신통은 때로 인통 또는 천지신통으로도 표현된다. 

 

김알지의 후손이며 미추왕의 아버지인 <구도仇道>의 계통과

<구도仇道>의 딸 <옥모>의 계통을 신라의 진골 계통의 두 원류로 삼는 것은

신라가 아닌 <옥모>의 외가댁인 소문국(召文國)의 천신(天神) 전통이었지

신라의 옛날 진골개념이 아니라고 이벌찬 <세기世己>의 상소문으로 기록한 것을 

<奈勿大聖神帝紀>에서 볼 수 있다. 

 

 

我國眞骨之法 眞骨帝后 生子女曰眞骨 今以玉帽仇道系 爲眞骨二流 是用天神召文之說

而非古眞骨之義也 自今唯以神后子女不問父品而定爲眞骨 而無使煩論諸系 而相惑生弊 

 

우리나라의 진골(眞骨)의 법은,

진골인 왕과 후가 낳은 아들과 딸을 진골이라 하였는데,

오늘날 <옥모玉帽>와 <구도仇道> 계통을 진골의 두 가지 흐름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천신(天神), 소문(召文)의 설(說)을 쓰는 것이지 옛날 진골의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신후(神后)의 자녀만이

그 아비의 골품을 묻지 아니하고 진골로 정하여,

모든 계통으로 하여금 번거로운 논의를 함이 없게 되어 

서로 의심함이 생겨나는 폐단이 생겼다.

 

신후(神后)의 위치란 대원신통의 모계혈통을 의미하며

신후(神后) 자녀만이 아비의 골품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신후가 관계하는 모든 남자들의 자식들은

모두 자동으로 진골이 된다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벌찬 <세기世己>의 개혁론은

신라의 오랜 관습과 황후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신교일치의 '神國의 나라' 신라에서

신후(神后)란 사실상 皇帝 위에 존재하는 女皇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영향이 <옥모>를 통하여 고구려에도 전해졌으니 

나중엔 <옥모>황후에 대한 사당을 지어 참배할 정도였다.

 

<中川大帝紀>는 사실상 신라의 <옥모황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옥모>에 대한 중천왕의 열애기로 점철되어 있다.  

 

다음은 고구려 중천왕 6년(AD. 253)에 중천왕이 만나고 싶다는 연애편지와 함께 

신라의 <옥모>황후에게 보낸 선물공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칭호도 신라왕실에서 쓰는 <옥모>태후(玉帽太后)를 그대로 쓰고 있다.

 

 

六年癸酉, 春正月, 送人參·甘草·膃臍·駱駝于玉帽太后, 親書慇懃曰;

"更逢于<白玉樓>中."

<中川大帝紀>

 

6년(AD253) 계유, 춘정월, 인삼·감초·물개배꼽·낙타를 옥모태후에게 보내주면서,

 

"백옥루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은근한 글을 손수 써넣었다.

 

그리고 다시 석달 후 4월에 중천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옥모황후에게 안부를 다시 묻고 함께 보낸 그 선물 물량을 보면

 

"황금 5백 냥, 비단·명주 각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옥모의 답장을 받은 고구려 중천제는

신라 땅을 향하여 절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上大喜南向跪拜曰;"吾太后, 眞聖人也. 國有如此, 大聖龍見, 柳起, 不亦宜乎."

 

이에 상이 크게 기뻐하며 남쪽을 향하여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나의 태후께서는 진정한 성인이시다. 나라가 이와 같고, 크고 훌륭한 용이 나타나고,

버드나무가 일어섰다니, 이 역시 옳다 아니 하겠는가!"라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중천제가 신라의 <옥모>황후에게

특별한 연심이 있다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같다.

 

그해 5월에서 7월까지 신라에는 가뭄이 들자 

백성들이 굶고 도탄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구려 중천제는 그 후원물자의 이름으로 <옥모>태후에게

1백척의 배에 양곡 3천석을 보내면서 <옥모>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다시 전한다.

 

上命發船百隻, 送麥·粟·梁等三千石, 于<玉帽>太后, 曰; "自離母側, 去益思慕. 聞値荒年,

民多不炊,慈母之情當何如哉. 受命有司, 送此. 不腆如助, 賜給幸何如之."

 

이에 상이 명하여 100척의 배를 띠워 맥·속·양·두 등 3,000석을

 

<옥모>태후에게 보내며 말하길

 

"모친의 곁을 떠난 이래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불을 지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어지신 어머니의 정이야 지금 어련하시겠습니까!

 

저의 관리에게 명을 내려 이것들을 보내옵니다. 도움치고는 넉넉지 않은 것이오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시겠는지요."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옥모>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皇遠漕天糧{極}我黎庶, 婢妾佣銘." 

 

황제께서 멀리에서 보내신 하늘같은 양식이 저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이르렀습니다.

 

이 부족한 첩은 이에 대하여 사람을 시켜서 돌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신라는 이러한 중천제와 <옥모>와의 관계를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에도 이용한다.

 

백제 구수왕이 봉산성을 공격해 오니,

<옥모>가 친히 국경으로 가서 고구려의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중천제는 백제의 <구수>왕을 위협하기도 했다.

 

신라의 <옥모>황후는 외교적인 활동이라 하더라도

고구려의 중천제를 아주 자주 방문하여 만났다.

그것은 조공관계가 아닌 분명 연심으로 인한 상호간의 만남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도 공개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중천제 9년의 기사를 보자.  

<中川大帝紀>에는 신라의 옥모황후가 고구려에 와서 중천제와 만나고 

신라로 <옥모>황후를 송별하는데 사람들은 

 

"하늘에 세 별이, 땅엔 세 성인이 바다엔 세 마리 물고기가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분명히 이 기록은 고구려 왕실의 기록이라고 할 때 신라의 <옥모>황후에 대한

중천제가 얼마나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여 신라는 전통적으로 황후의 통치력이 강하였으며

왕은 그 수행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때였으며,

<옥모>황후는 신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중천제와 신라의 옥모황후는

국제간의 최고 통치자간의 수뇌 연애에서 그 선물 또한 일방적이다.

 

조공으로 말하자면 고구려 임금이 신라에게 보내는

중천제는 <옥모>황후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는데

표범피·금팔찌·옥귀걸이·향합·진주·별모양 머리장식·백옥목걸이·백마등

사십여 가지가 등장할 정도였다.

 

<옥모>황후가 신라로 돌아가려 할 때 중천제는 그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며 

이별을 해놓고도 다시 또 <옥모>를 부여잡기도 했다. 

 

<옥모>가 고구려에 가서 중천제를 만날 때는 바다를 이용하여 올라갔고

중천제는 강상에서 옥모를 만났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강에 배를 타고 나와서 <옥모>황후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천제의 속셈은 북부여에서 아내를 두고 쫓겨난 <주몽>이

아홉 살 연상이었던 졸본부여 여왕이었던 과부 <소서노>를 유혹하여

졸본부여를 송두리채로 빼앗아 고구려로 만들었던 것을 복사하려한 것일까? 

 

중천제는 <옥모>황후를 유혹하여 신라를 복속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황후들이 또한 누구인가.

 

수많은 무사 화랑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여걸들이 아니었던가.

 

신라는 신라대로 그들의 전통적인 황후들의 남자후리기 솜씨를

중천제에게 마음껏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시조 <주몽>이 졸본부여의 실권자 <소서노>에게

졸본부여를 완전히 장악하고 소서노와 그녀의 전남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인

<비류>와 <온조> 형제와 딸 <감아>를 완전히 내쫓아버린 것은

온조의 백제 역사 내도록 소서노가 주몽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처로 남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나라를 복속시키는 고구려의 패턴은 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는 왕실의 딸들을 작은 나라들에 보내어 그 영향력으로

가야, 소문국 등을 복속시켰다.

 

정반대로 고구려 왕실에서는 고구려의 <주몽>이 <소서노> 쪽의 자식들을 배제하고 

졸본부여를 빼앗은 모델로 남아 있게 되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光明大帝)는 그의 치세 3년(BC 17년) 째에 

한족의 치희와 화희(禾姬)를 받아들였으나 결국 화희와 치희 둘 사이에

진주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의 싸움으로 그들은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황조가를 지었던 것은 처량한 닭쫓는 개와 같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과연 신라의 <옥모>황후에 대한 고구려의 중천제는 어떠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을까?

 

중천제는 <옥모>와 사냥을 같이 하기도 했는데

그 사냥한 자리에 두 성인이 사냥했다 하여 이성사(二聖祠)라는 사당을 짓기도 했다.

 

과연 두 남녀는 신라와 고구려를 등에 지고

상대의 나라에 대한 속 꿍꿍이가 따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창화의 <中川大帝紀>를 계속 따라 가보자.

 

夏四月, 與玉帽會, 獵于大岺(琿春之□岺山). 上射一鹿, 命玉帽射之, 玉帽曰; “陛下射之,

鹿已伏. 妾當受之,獻于天.” 名其地爲<獻天溝>, 國人立二聖祠于其上,後人有詩曰;

“廟岺春風, 鹿自肥獻天, 玉后佣皇歸.” 時, <百濟>大旱, 樹木皆枯.  人,以爲二聖合,

西(溄)乾, 黑龍與蒼龍交, 白龍焦之, 謠行. 

<中川大帝紀>

 

여름4월, <옥모>를 만나서 대령에서 사냥하였다.

 

상이 사슴 한 마리를 쏘고 나서, <옥모>에게도 그  사슴을 쏘라고 명하니,

<옥모>가 (거절하여) 말하기를;

 

“상께서 쏘아 사슴이 이미 쓰러졌습니다.

응당 소첩은 그것을 거두어 하늘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땅의 이름은 '헌천구(獻天溝)'라고 했고,

나라사람들은 그 땅에 <이성사>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사당 언덕에 춘풍이 부니, 사슴은 자신을 살찌워 하늘에 바쳤고,

<옥모>황후는 황상과 함께 돌아갔다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에 백제는 크게 가물어 수목이 모두 말랐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성(二聖)께서 교합(交合)하여 그 열기에 서봉(西溄)의 물이 마르고,

흑룡(고구리)이 창룡(신라)과 교접(交接)하니,

백룡(백제)의 애태움이(백제땅에) 노래처럼 번졌다.”고 했다.

 

고구려의 왕으로서 중천왕은 <옥모>황후와 이별할 때 부른

꽃도 물고기도 없다고 표현한 산유화 노래는 유리왕의 황조가보다 더 애절하다.

 

五月, 上送玉帽于海上. 自大岺獵後, 二聖同居沸流行宮. 至是, 從海路歸故國. 有歌曰;

“山有花兮, 水有魚. 奈何,朕躬無花魚.”, 上泣, 玉帽泣.  

<中川大帝紀>

 

5월, 상(중천왕)이 <옥모>를 해상에서 돌려보냈다.

대령(大岺)에서 함께 사냥한 이후로 비류(沸流)의 행궁에서 함께 지내다가,

이때가 되어 바닷길을 통하여 신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상이

 

“산에는 꽃이 피고, 물에는 물고기 헤엄쳐 노는데,

어이하여 내게는 꽃도 물고기도 없단 말인가.”

 

라고 노래하고 눈물 흘리니, <옥모>도 눈물을 흘렸다.

 

<옥모>가 가고나면 꽃도 물고기도 없다는 산유화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로

이러한 기록이 제후국이나 조공국의 황후에게 하는 태도는 분명 아니다.

 

이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세레나데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신라의 <옥모>황후의 아들 <첨해>왕을 봉했다고 하면서도

<고구려 사략>에서의 신라에 대한 국명은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이니

그것은 고구려 자신만의 기록상으로 봉했다고 한것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十二年乙卯, 春正月, 遣<椽邦>于<玉帽>, 賜衣·肉·匹·假玉·佣·藥物等百事.

封沾解爲新羅國皇帝∇海大王·右衛大將軍,賜金銀印二顆.

 

 

12년(AD259) 을묘, 춘정월, <연방(椽邦)>을 <옥모>에게 보내어

의복·고기·가축·보석·일꾼·약물 등1백 가지를 보냈다.

 

<첨해>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고, 금은 도장 2개를 내렸다.

 

이 기록을 보면 신라의 첨해왕을 고구려의 중천왕이 황제로 봉했는가 하면,

고구려가 조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물품을 신라로 보내고 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尙齊子克爲(尾)署大加, 製五色璫·磚及紋尾·熊脚等, 送于新羅, 命修玉帽新宮.

上送黃金千兩·白金萬兩·工人二百名于玉帽.聞羅有旱蝗多盜,

命穆濬送穀二萬石·牛羊八千頭·酪酒·皮幣·雜物無算.

  

<상제尙齊>의 아들 <극克>을 미서대가(尾署大加)로 삼아,

5색 귀고리(璫)·벽돌(磚)과 문미(紋尾)·웅각(熊脚) 등을 만들어서,

신라로 보내고 <옥모>황후의 새 궁전도 고쳐주게 하였다.

 

상이 <옥모>에게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인을 보내주었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이 일어 도적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목준穆濬>에게 명하여 곡식 2만 석, 소와 양 8천 두, 짐승 젖 술,

피륙으로 만든 옷가지 등과 잡다한 물건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게 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에 궁전을 지어주고 곡식 2만석에 소와 양 8천두,

기술자 2백 명을 신라로 보낸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는

중천이 신라의 <옥모>황후에게 연모의 정에 고개를 숙이는 것에 걸 맞는

퍼주기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러한 고구려와 신라의 국제 관계 현상은 

세계 외교사에서 그 양태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어쩌면 신라는 가물고 황충이 일어 도적이 많다는 사실을

화려한 외교적 언어로 구사한 전략에서 만들어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모든 힘을 기울여 신라에 퍼주기 위하여

곰을 캐고 바다에서 물개를 잡아 신라의 <옥모>황후에게 보낸다. 

 

이러한 퍼주기가 고구려 조정 내에서도 종사가 위험하다는 문제로

중천왕의 어머니인 전후(鱣后)가 우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천제는 그에 답하면서 신라 병합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과연 옥모에 대한 그의 사랑을 위한 병합이 핑계일까

아니면 병합을 위한 사랑이 핑계일까.   

 

 

命, 五部採金, 東海捕膃狗, 送于玉帽, 鱣后諫曰; "妾聞『衛王嗜夏姬, 爲其子所弑.』

今陛下妾玉帽而子沾解. 是,抱老狐, 以柔勁猫也. 妾不敢忘其危也. 上曰;

"臣, 有此疾, 每胎母憂然. 臣, 有母后豈, 敢溺於彼哉. 倂合之計耳."

 

명을 내려서 5부는 금을 캐고 동해에서는 물개를 잡아 옥모에게 보내주라고 하니,

 

전후(鱣后)가 간하여 이르길,

 

"신첩은 위왕(衛王)이 <하희夏姬>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지금 폐하는 신라의 <옥모>를 첩으로 삼고 <첨해>를 아들로 삼았소.

 

이것은 늙은 여우를 품안에 안아주어 사나운 고양이를 부드럽게 하려는 격이오.

 

신첩은 이 일의 위험함을 감히 잊지 못하겠소."라고 하였고,

 

이에 상은

 

"신(臣)에게 이 병이 도질 때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당연하십니다. 

신(臣)은 모후께 어찌 옥모에게 푹 빠지는 모습만을 보이리이까"

라고 하여 신라에 대한 병합지계를 언급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중천이

신라에 대한 병합지계(倂合之計)를 가진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신라에 대한 행해진 많은 퍼주기에서

왕의 모후가 그 전후 맥락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중천왕은 신라황제국의 <옥모>태후에게 

물질적으로 병합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을까?

 

그가 <소서노>에게 성공한 <주몽>이 되었다고 믿었을까?

 

중천왕이 <주몽>처럼 현지를 방문하지는 않고

물질로 신라 백성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중천왕에 대한 이러한 물질 공세를 신라의 <옥모>황후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옥모>도 <소서노>가 되었을까? 

 

아니면 낙랑공주의 마음을 빼앗아놓고도 끝내 창을 거꾸로 땅에 비스듬히 꽂아놓고

스스로 달려가 박혀 죽은 호동왕자처럼

그 끝은 중천왕은 그의 어머니 전후(鱣后)의 말처럼

<하희夏姬>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은 위왕(衛王)처럼 되었을까?

 

<옥모>는 유유히 중천왕이 주는 것마다 받아 챙기고는

깎듯이 사례의 편지를 쓰면서 중천왕이 신라를 방문하기를 요청하는데도

중천왕은 <주몽>이 졸본부여에 간 것처럼 신라로 가지는 못한다.

 

그의 모후인 전(鱣) 태후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七月, 玉帽遣使獻土物曰; "賴我夫皇造此新宮, 欲迎天子叙此. 鴦情."

上欲往之, 鱣后諫曰;

“陛下若去, 妾當隨樓.” 上不得已答曰;

“吾妻之國, 夏, 雨山崩四十余所. 秋, 星孛東. 以示,

餘蘖非無『尾生之信』.謹戒『衛靈之轍』. 卿若涉溱, 應有『孝橋』,

願入『巫山』再結雲雨.”

 

 

7월, <옥모>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전하여 말하기를

 

"내 부황(夫皇)께 힘입어서 이렇듯 새 궁전을 지었습니다.

천자를 여기에 모셔서 더욱 빛내고 싶습니다. 원앙이 암컷의 정을 보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상이 그곳(신라)으로 가려 하자, 전태후(중천왕의 모후)가 간하여 말하길

 

"폐하가 거기에 가시면, 신첩도 응당 따라갈 것입니다."라 하였다.

 

상은 하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처의 나라가 여름엔 비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고,

또한, 가을엔 혜성이 동쪽으로 뻗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 여분의 새 싹(옥모)이 저에게

'미생의 믿음(尾生之信)'이 없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위령지철(衛靈之轍)'로써 저를 조심스레 훈계하시면서

경(모후)께서 (저와 함께) 진수를 건너고자한다면, 

'효교(孝橋)'를 놓아드려서 무산(巫山)으로 들어가

다시금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중천은 신라로 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천에게 신라는 졸본부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을까?

 

끝까지 <옥모>가 홍수에 떠내려 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라로 말하고 있다.

 

위의 중천의 말에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춘추시대 노나라 때의 미생이라는 사람이 그의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홍수 물이 불어나는 대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떠내려갔다는 신의를 말한다.

 

마지막 줄의 의미는 전태후가 신라로 함께 가겠다면

 

"효의 다리를 놓아 무당의 산으로 들어가서 운우지정을 나눈다"는 뜻은

 

신라로 모후도 따라 온다면 신라의 무속적 전통에 따라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증(蒸 )하는 근친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옥모>의 신라 방문 요청을 포기하는 말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중천제는 신라를 방문하려 했다는 의도는 있었으나

신라병합은 본심이 아닐 수도 있어 

<옥모>황후만 자꾸 고구려로 불러들여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옥모>황후를 사모한 나머지

중천왕은 <옥모>황후의 초상화를 열 장이나 그리게 하는가 하면,

고구려에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라는 사당을 지었다는 것은

신라의 황후가 고구려에 사당을 갖게 했다는데서 주목된다.

 

그렇게 하면 <옥모>황후가 신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란 사실상 신라의 모든 시조성모를

고구려가 받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일까?

 

 

二月, 上與<玉母>皇后如溫湯, 命畵玉帽像十幅, 立鷄林聖母祠, 揭之,

幷祀閼智·勢漢·阿道·首留·旭甫·仇道六祖.

 

(중천왕 15년) 2월, 상은 <옥모>황후를 데리고 온탕으로 가서,

옥모상(玉帽像) 열 폭을 그리게 하고는,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를 지어서,

거기에 걸고는, 여섯 조상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 즉

육조(六祖, 신라 김씨 왕실의6대시조들)를 함께 제사토록 하였다.

 

급기야 신라의 시조묘까지 고구려에 세우게 된 중천은

<옥모>황후의 초상 열 폭을 그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하도록 하고 있다.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는

신라의 최초 김씨 왕인 미추왕의 육대조 시조들을 의미한다.

 

아직 미추왕이 즉위하기 이전임으로

여기에서는 <구도>의 딸인 <옥모>황후의 6대 조상들로서

이들 여섯 시조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중천은 다음과 같이 <옥모>황후의 아버지 <구도仇道>像 앞에 술을 올리며

자신의 부친으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구도>가 중천의 갈문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록에는 <구도>대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上與<玉帽>獻酌于仇道曰; "久聞仇道大王之英雄矣, 今爲吾父可, 不敬愛歟."

玉帽曰;"妾亦願東明神祖之廟." 上許之, 乃如卒本生檀太子.

 

상이 <옥모>와 함께 <구도仇道> 신상에 술을 따라 올리며 말하길,

 

"<구도>대왕이 영웅이셨음을 들은 지 오래되었고,

금은 나의 부친으로 하여도 괜찮을 것인데,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 하니,

 

<옥모>가 말하길;

 

"첩 또한 동명신조 사당(東明神祖之廟)에 가서 술을 따르고싶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고는 졸본으로 가서 <단檀> 태자를 낳았다.

 

신라의 김씨왕이 등극하기 이전에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 사당이 고구려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사당에 중천이 <구도>신상 앞에 술을 따라 올려 <구도>를 그의 부친으로 삼았다. 

 

더불어 <옥모>황후는 졸본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주몽>의 사당인  

동명신조지묘(東明神祖之廟)에 술을 따르러 갔으며 거기에서 아들을 낳기까지 했다.

 

과연 이들은 상호간의 장인과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식까지 낳았다.

 

그리고는 그 칭호를 <단檀>태자라고 하기까지 했다.

 

단(檀)이라고 한 것은 단군에 대하여

신라의 <옥모>황후에게도 그 어떤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중천제와 <옥모>황후는 사냥을 하고 신라의 사신이 찾아와서 

신라의 천재지변이 있었고 궁궐 서쪽 문에 화재가 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궁궐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신라에 후원물자를 또 보내라고 말하면서도

신라에 새 왕이 들어설 것 같은 조짐이 있다고 의도하여 말한 것일까?  

 

秋七月, 上與玉帽畋于箕丘, 得白獐. 冬十一月, 雷地震. 羅使來獻土物言, 是年三月,

龍見宮東池. 七月, 金城西門災,其燒民家百余區.

  

 

(중천대제 15년) 추7월(AD. 262년),

상은 <옥모>와 함께 기구(箕丘)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동11월, 뇌성이 들리고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금년 3월에 궁궐의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으며,

7월에는 금성의 서쪽문에 불이 났는데, 그 불이 민가 100여 채를 태웠다."고 하였다.

 

중천제를 이어 13대 서천제 때에는 중천재과 옥모황후 사이에서 난 <달가達賈>가

한동안 환영받지 못한 상황이 되어 있었으나 옥모황후의 후광으로 안국군에 봉해져

병권이 <달가>에게 주어졌을 때 고구려인들에게는 오히려 환영받는 입장이었다.

       

서천제가 죽자 우후가 거짓조서로 봉상제를 세우고

병권을 안국군에게서 빼앗으니 탄식하는고구려의 궁중 사람들이 많았다.  

 

<옥모>와 중천의 관계는 결국 고구려의 위기 상황으로 갔다가 끝이 난 셈이다. 

 

<고구려사략>의 고구려 14대 <봉상제기(烽上帝紀)>에 따르면

봉상제의 조서(AD 292년) 3월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元年壬子, 三月, 詔曰;“安國君達賈, 素以他族, 庸品, 敢窃兵權, 累危.

朕躬其賜死, (籍)其家.”

 

원년(AD292)임자, 3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안국군 <달가>는 본바탕이 다른 족속이고,

용렬한 성품인데도, 감히 병권을 훔쳤으니, 위험스러웠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짐이 몸소 그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 집안을 몰수한다.”라고 하였다.

 

분명 고구려에서 <옥모>와 <달가達賈>는 신라의 피로 존재하고 있었다.

 

봉상제와 우후의 쿠데타 직전 <달가>의 신하들이 신라로 피신할 것을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옥모>황후의 아들 <달가>는 자결하고 만다.

 

고구려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신라 혈통 안국군은

그렇게 고구려에서 생을 마감했다.   

 

 

初, 達賈之臣仙潔勸除雉葛, 而不聼. 至是, 其臣以竟又勸出奔新羅, 而不聼, 曰;

“吾欲殉先帝.” 遂從容而盡.  門夫太輔, 尙婁左輔, 椽方右輔, 椽眼氏為皇后.  

以安國君妻陰氏賜奸臣猿項.  

六月, 倭寇羅陷沙道城,一吉飡大谷擊退之. 七月, 羅旱蝗.

 

 

일찍이, <달가>의 신하였던 <선결>이 <치갈>을 없애자고 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르렀더니,

그 신하가 막바지에 다시금 신라로 피하여 나갈 것을 권하였지만,

이번에도 아니 듣고는, “나는 선제를 따라 죽을 것이오.”라고 말하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자진하였다.  

 

<옥모>황후의 영향력은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5대 미천대제가 즉위하자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美川大帝紀>의 기록대로 미천대제는

<옥모>의 아들 안국군 <달가>의 병권을 빼앗은 결과

나라가 오히려 황음하게 되었다고 우태후를 비판한다.

 

그 사연은 서천제가 죽자 우태후가 안국군 <달가>에게서 빼앗은 병권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왕위에 세우고자 하는 신라 방식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서천제가 죽자, 우태후 일당은 그 시신을 숨겨 발상을 비밀에 붙였다.

 

그런 다음 먼저 안국군의 병권을 자신의 형제들에게 옮겨 놓고는,

거짓조서로써 <치갈>을 세우는 음모를 기도했다. 

 

급기야는 우태후가 국정을 전횡하였다.

 

후산의 쿠데타로 옹립된 봉상제는 그러한 우태후의 권력으로 인하여

 

"궁실은 간사한 무리들로 흘러넘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태후가 나라를 상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도탄에 빠진 죄상"

이라고 비난했다.

 

신군부가 우태후를 죽이려했으나 봉상제는 서천제의 애후라 하여 보호하고

서천제의 능원에 거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우태후는 능원에서 다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그 일로 인하여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신라의 <옥모>황후의 영향력이 고구려에 지속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19대 <永楽大帝紀>에 따르면 <옥모>사당은

고구려 왕실에서 왕과 왕후들이 후손을 낳아달라고 참배하는 사당이 되어 있다.

 

<하모霞帽>后가 자식을 못낳자 왕과 <하모>후가 용산(龍山)에서 득남을 기원했으며

평양으로 돌아가서는 신라의 황후인 옥모상을 배알하여 참배하고 빌었다. 

 

霞曰; “妾受寵多, 而未能産者. 皇靈未祐也. 諸祈莫如事祖. 願謁東明神庙.

上, 乃與霞帽如龍山禱子, 迴平壤謁玉帽像.

 

<하모霞帽>后가 말하길

 

 "소첩이 총애를 많이 받고도 아직 낳지 못하는 것은

황령(皇靈)께서 살펴주시지 않으심 입니다

 

아무리 빌어보아도 조상신을 섬김만 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동명신묘를 알현하였으면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상(영락왕)은 <하모>후와 함께 용산(龍山)에 가서 아들을 빌었으며,

평양으로 돌아와서는 옥모상(玉帽像)을 배알하였다.

 

여기에서 고구려 영락왕과 <하모>후의 평양의 옥모상 배알은

중천이 세운 신라 김씨 육조 사당인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에서의 일이다.

 

거기에 중천제 때에 옥모상 12폭을 그려 옥모상의 부친인 <구도>에서 <김알지>까지 

신라의 김씨 육조들을 모셔놓았기 때문이다.

 

중천왕과 <옥모>황후의 영향이 신라에서도 있었으나

<눌지>왕 때에 완전히 제거된 것은

고구려에서 <옥모>황후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양상이다.

 

20대 장수왕때의 기록인 <장수대제기(長壽大帝紀)>에 따르면 

신라의 보금왕(실성왕이라고도 함)이 친고구려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라의 눌지(장차 눌지왕)가 일으킨 쿠데타로 실권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박창화의 <장수대제기(長壽大帝紀)>의 기록은 

보금(실성왕)의 죽는 과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였던지

신라 현지의 상황과는 달리 단지 독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四年丁巳, 五月, 訥祇殺宝金而自立. 正月, 宝金, 使訥祇・曉辰入朝, 賂于邊将而害之.

邊将, 恐朝廷, 而不敢害之. 事遂發. 上, 命評部・賓部, 治其罪. 訥祇, 含而皈之,

與天星共謀而鴆金.  

<長壽大帝紀> 

 

4년(AD. 417) 정사년, 5월,

 

<눌지訥祇>가 <보금宝金>{實聖王}을 죽이고 자신이 보위에섰다

 

정월에, <보금宝金>이 <눌지訥祇>와 <효진曉辰>을 입조하라 해 놓고

변방 장수를 시켜서 이들을 해치우라고 시켰는데,

그 변방 장수가 조정(조정의 반고구려 민심)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을 해치지 못하였더니, 그 일이 드러나게 되었다.

 

상(보금왕)은 평부와 빈부에 명하여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눌지>는 입 다물고 돌아가서 <천성>과 공모하여

<보금>을 짐독으로 해치운 것이었다.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長壽大帝紀)>의 이 내용은

신라사략의 <실성기(實聖紀)>에는

독살이 아닌 보금(실성왕)이 성루에서 투신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성왕이 먼저 눌지를 제압하려 했다가 변방의 장수가 <눌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눌지>편에 서면서 <실성>왕은 역 쿠데타를 당한 셈이다.

 

실성왕(보금)의 죄명 가운데는 태후(보반태후)에 대한 불경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의 <옥모>태후와 고구려의 중천왕과의 연애대전의 결말은

이렇게 신라왕조에서는 친고구려파들을 청소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물왕때에 이르러서도 옥모성모제(玉帽聖母祭)를 행했다.

 

신라와 고구려의 대결은

<옥모>태후의 영향을 어떻게 정리했는가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계림성모사'지 만들어 <옥모>성모와 신라김씨 육조를 모시기까지 하고

<옥모>황후의 아들에게 병권까지 주어 그 영향력을 나중까지 유지했던 고구려는

신라에서의 친고구려세력에 대한 분명한 정리를 했던 눌지왕의 자세를 보인 경우와는

차이가 있었다.

 

<눌지>태자를 옹위하여 친고구려계 <보금>을 몰아낸 <보반>황후의 활약은

<옥모>황후가 결국 중천왕과의 연애대전에서 승리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낭산으로 도망쳐서 끝까지 버터보고자 했던 보금왕(실성왕)이

성루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투신 자살한 것은

중천왕의 고구려가 결국 투신 자결한 것과 같이 된 것이다.

 

<실성>왕의 투신자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과 그대로 일치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 투신자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포위에 압박을 견디다 못해

성루에서 투신자살한 케이스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 정치적 구조에 있어서 친북(친고구려) 정책과 함께

그 부인이 고구려 공주'다는 것과 토박이 신라 종실 인물들을 제거하려 한 사건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배경 구조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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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