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대제5년{AD274}갑오,

 

 

추8월, <{서}晉>이 유주(幽州)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요서>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晉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

<고구려사초>

 

 

<범양>・<상곡>・<북평>과 <요서> 및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는

고구려와 동호(오환), 선비, 晉의 경계지임을 알 수 있다.

 

낙랑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우리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낙랑이라는 땅을 중원의 제 국가들이 한때 차지하고

그들이 태수를 임명할 때는 낙랑군으로 相을 임명할 때는 候國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인이 기록한 중국의 정사(正史)인 진서(晉書)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晉書

卷一十四 志第四

 

平州 案禹貢冀州之域 于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 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 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평주(平州)는 우공(禹貢)을 살펴보면 기주(冀州)지역이다.

 

주(周)나라 때부터는 유주(幽州)와 경계하였으며

한(漢)나라 때는 우북평군(右北平郡)을 포함시켰다.

 

후한 말,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 하였다.

 

그 아들 <강康>과 강의 아들 <문의文懿>{공손연}에 이르러

요동을 마음대로 차지하여 동이(東夷) 아홉 종족들이 모두 복종하고 섬겼다.

 

魏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있게 하였으며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幽州)로 삼았다.

 

<문의文懿>가 멸망한 후에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있게 하였다.

 

 

 

함녕2년(276년) 10월,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등의 5군국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전체 縣은 26縣이고 戶는 1만8천1백戶였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군은 평주(平州)라고 되어있다.

 

실재 중국지도출판사에서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당시의 평주(平州)를 지금의 요하에서 한반도 중북부까지로 설정해놓았고

기주(冀州)는 하북성의 중남부 지역으로 설정해놓았다.

 

이는 낙랑과 대방을 황해도와 평안도지역으로 비정한 이병도의 원죄이다.

 

낙랑은 역사서의 기록과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평주의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은 고구려의 서부지역이다.

 

평주는 하북지역으로 고구려와 晉의 경계지이고

범양, 상곡, 북평은 동호(오환),선비와 晉의 경계지였다.

 

고구려는 언제나 동호(오환)과 선비를 고구려의 번국(藩國)으로 여기고 있었다.

 

313년 미천대제 을불에 의하여 낙랑이 고구려에 복속될 때까지

요서, 요동속국(창려), 요동, 현도, 낙랑과 대방은

마치 쇠사슬에 얽힌 고리 모양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甲午 晉 世祖 武皇帝 泰始 10년(274년) 吳歸命侯 鳳凰 3년(274년)

봄 정월 乙未에 일식이 있었다. 「通鑑」을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윤월 丁亥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으로부터는 첩잉(妾媵)으로써 正嫡을 삼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幽州를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解題 : 幽州는 7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范陽郡 지금의 涿州, 雄州, 易州, 覇州 4州의 땅이다.

燕國 지금의 涿州, 薊州 2州의 땅이다

北平郡 지금의 經州, 薊州, 檀州, 營州 4州의 땅이다. 

上谷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廣寧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代郡  지금의 雲中路의 奉聖州, 蔚州, 儒州 3州의 땅이다.

遙西郡 지금의 平州, 景州 2州의 땅이다.

平州는 5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다.

宋나라 때는 營州에 소속되었는데 安東都護府의 땅이다.

<四庫全書 史部 編年類 大事記續編 券24>

 

 

大事記續編은 元末 明初의 학자 <왕위王褘(1322-1373)>가 편찬했으며 총 77권이다.

 

漢武帝 征和 4년(BC89년)으로부터 시작해서

宋 德祐 2년(1276년)까지 1,3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解題를 통해 역사 사실에 대한 異同을 고증하여 자못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저서이다.

 

박창화 필사본의 내용과 사고전서 大事記續編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도 남당유고를 위작이라 할 수 있을까?

 

幽州를 분할하여 설치한 平州의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

宋나라 때의 營州 安東都護府에 소속한 땅이라고 밝히고 있다.

 

宋나라 때의 안동도호부는 어디 인가?

 

송나라 때 <락사樂史>가 지은 태평환우기에

營州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營州는 殷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燕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군 지역이었으며

秦. 漢시대는 요서군 지역이었고, 16국시대는 선비 모용황의 도읍지였으며,

隋.唐시대에는 營州에서 柳城郡으로 다시 柳城郡에서 營州로 변천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영주는 지금의 북경과 보정시 사이에 있었다.

 

이 일대가 隋.唐.宋 시대에는 營州로, 秦.漢 시대에는 요서군으로

殷시대에는 고죽국으로 불렸던 것이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고종 때 평양(今 노룡)에 처음 설치되었고

나중에 요동군 故城, 新城, 平州 등지로 옮겨 다녔으며

최후에 요서 故郡城으로 옮겨 폐지되었다.

 

요서 故郡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요서군은 본래는 幽州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北魏 시기에 幽州를 분할하여 만든 平州 지역에 요서군을 새로 설치하므로써 幽州에 있던 요서군의 城이 요서 故郡城이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平州는 어디인가?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이 지역은

"춘추시대에 山戎의 고죽국, 白狄의 肥子國 2國의 땅이었고

秦.漢시대엔 우북평 및 요서 2郡의 땅이었으며

唐나라 때는 북평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平州로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北狄總述 條에는 연나라 장성의 서쪽 출발지점인 造陽에서

동쪽 끝인 襄平까지는 1400여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양에서 동쪽으로 1400여리는 오늘날의 潮河나 난하를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上谷, 漁陽, 右北平, 요서, 요동 등은 潮河나 난하 以西 지역이다.

 

 

 

<평주(平州) 및 계(薊), 창려, 노룡의 이치(移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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