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대제13년{AD282}임인,

 

추9월, <장화張華 (232-300)>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자,

마한(馬韓)은 <장화張華>에게 붙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사초 서천대제기>

 

 

AD 280년 晉이 吳를 멸하여 중원을 통일하자

한반도 서남해 영산강유역의 마한 신미제국(新彌諸國)이

晉과 통교하게 된 것을 말한다.

 

3세기 후반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의 모습은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신미제국(新彌諸國) 관련 기사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 기사는 동이 마한(馬韓)의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이

282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은

마한지역 안의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한 20여국인데,

이들 나라들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므로

서남 해안을 끼고 노령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영산강유역의 마한연맹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마한사회에서는 토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세력이 주변 평야지대의 농경민을

통치하였으며 사후에 거대한 옹관고분의 피장자가 되었던 사회였다.

 

4세기 이전의 사실을 기술한『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전의 마한 기록에

"마한사람들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며 우마는 모두 장례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마에 대한 마한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은

백제와의 전투력에 있어서 열세에 놓이게 하였다.

 

백제의 기병은 영산강유역과 같은 평야지대에서

마한의 보병보다 기동성이 높았을 것이며

무력 사용면에 있어서도 그 효과가 뛰어났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은 한강유역에서 성장한 기마민족 백제에 의해

점차 잠식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백제는 마한의 잔존 토착세력들을 병합해 가는 과정에서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백제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적인 통치가 행해지던 지역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한지역의 토착세력들은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백제에 통합되어 갔다.

 

이는 마한 토착세력의 백제에로의 통합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의 왕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영산강유역은

물론 가장 나중에 백제에 편입되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