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대제16년{AD285}을사,

 

춘정월, 비리왕(卑離王)><의려依慮>가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하여 자살하자,

그 권속들은 <돌고咄固>에게로 도망하여 왔다.

 

양(羊)을 나누어 주고 안주토록 하였다.

 

그 시절 <모용강慕容剛>이 피살되자,

<모용외慕容廆>는 <섭귀涉皈>의 아들 <계>가 그 무리를 이끌게 하였다.

 

<모용외慕容廆>는 자신의 어미를 처로 삼았다.

 

3월에 대방(帶方)을 쳤더니 백제 사람들이 달려와서 구원하기에,

공격을 백제로 돌려 그들의 성 두 개를 빼앗았다.

<고구려사초 서천대제기>

 

世祖武皇帝中太康六年(乙巳 公元二八五年)..........

又東擊扶餘 扶餘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廆夷其國城 驅萬餘人而歸 

<자치통감>                   

 

또 동으로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으며

그 자제들은 도망가 옥저(沃沮)에 의지했다. 

 

<모용외>는 그 국성(國城)을 멸하였으며 만여 명을 붙잡아 데리고 돌아갔다.

 

 

 

서기285년 모용외가 비리{자치통감은 부여로 기록}를 침공했다.

 

과거 북부여연맹의 종주국이었던 비리(부여)는 선비의 신흥세력인 <모용외>에게

그 국도를 내어주고 그 왕 <의려>는 자살한다.

 

수많은 백성들이 <모용외>에게 끌려갈 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탈출하여

흑수말갈인 양맥과 숙신{자치통감은 옥저로 기록}에 있던 <돌고>에게 삶을 구걸한다.

 

 

비리국은 BC60년 <왕불旺弗>이 부여를 비리(卑離)로 바꾼 이후

<보공簠公>, <소노素奴>로 이어오다 광명대제 10년(BC10년) 고구려에 흡수된다.

 

그 후 태조황제 11년(122년)에 <위구태尉仇台>가 독립하여 서부여를 세워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로 이어져왔는데

285년 <모용외>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고 그 왕손들은 양맥으로 피신하였다.

 

<모용외>가 비리를 공격하여 그 도읍지를 점령하자 고구려가 이 틈을 노려

대방군을 공격하니 백제는 대방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정한다.

 

283년 모용섭귀의 아우 모용내가 모용섭귀를 죽이자 모용외는 요동으로 피신한다.

 

2년 후인 285년 모용부{자몽}로 돌아 온 모용외는 세력을 키운 후 비리를 침공한다. 

 

 

 

 

<비리(서부여) 위치도) 

 

 

  

 

- 부여의 액소더스

 

한(漢), 조위(曺魏)이래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국가안위를 도모하던 서부여는

서기 265년 사마염의 진(晉)이 건국되자 晉에 의지하게 된다.

 

서기 285년 선비족의 모용외가 강성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晉의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부여가 정복된다.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남은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다음 해 서기 286년 <의려依慮>의 아들 <의라依羅>가

晉의 도움을 받아 부여를 재건한다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모용선비는 부여인을 제 멋대로 붙잡아서 중국에 노예로 판다.

 

晉書는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했으나

백성을 지킬 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구세주를 갈망할 말세 중의 말세였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상식적인 역사를 넘어 논리를 비약시켜야 된다.

 

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자살한 것이 아니고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였고

서기 297년경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13년(298년) 가을 9월,

 

한(漢)이 맥인(貊人)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한(漢)나라는 265년 사마염에 의하여 이미 멸망하였다.

 

여기서 한(漢)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의라>등의 보우트 피플들이다.

 

 

정주(正州)는 <의려>왕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외>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불현듯 생각하니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 간 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

 

은밀하게 아들 <의라>에게 뒤를 맡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넜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三神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에게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북옥저로 도망쳐 몸을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으나,

이때부터 <모용외>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서부여 왕계는 구태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 – 현(玄)으로 이어진다.

 

모용선비는 더욱 강성해져 前燕이 되었고 서기 342년 고구려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346년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 왕 <현>을 포함 주민 5만 여구를 이주시켜,

부여의 존재가 중원에서 사라진다.

 

위의 대진국본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부분만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려> 또한 바다건너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이중의 기사로 읽는다.

 

부여를 탈출하려면 요동의 발해 만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야 된다.

 

백제해안을 전전하면서 남해안, 가라해의 가락국을 거친 뒤

다시 쯔시마, 잇키, 쯔쿠시에 상륙하게 된다.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하여 자주 상륙하게 되고

가는 곳마다 토착민과 갈등이 생긴다.

 

백제 정도의 큰 나라와는 전쟁양상의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지방에서는 부여 이주민의 규모가 오히려 토착세력을 능가하여

필요한 것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으리라.

 

이 대규모의 민족이동은 중간 기착지에 부여의 무덤이나 무기 등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선진의 농업과 공업 기술 등의 소프트웨어를 남기게 된다.

 

이들의 경유지 가운데 쯔시마는 매우 중요하다.

 

부여의 민족이동의 규모만으로 쯔시마는 쉽게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오랫만에 적의 위협이 없는 쯔시마에서 이들은 느긋하게 앞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미마나(任那)라는 단어가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国)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筑紫国)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사이다.

 

미마나의 나(那)는 라(羅)와 마찬가지로 벌판을 뜻하므로

미마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마이다.

 

미마를 “任”으로 표기하여 마마나(任那)가 되었으나

숭신왕의 일본식 시호는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로

미마를 “御間”로 표기하였다.

 

고사기는 미마키 이리히코 이니에 (御眞木入日子印惠)로 “御眞”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임나(任那)라는 단어가

열전 강수전에 딱 한번 임나가라(任那加良)라고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미마나(任那)는 219회나 나온다고

일본의 야지잇슌(矢治一俊)씨는 지적한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 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서기 401)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쯔시마가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의 3 개의 가라(加羅 = 韓)로

나뉘어 있었다는 말은 오직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만 나오는 기사이다.

 

한단고기의 위서논쟁이 뜨겁지만

이 부분의 기사는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나오지 않는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라는 지명은

지금 쯔시마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카미아가타 마찌 사고(上縣町 佐護), 토요타마 마찌 니이(豊玉町 仁位),

미쯔시마 마찌 케찌(美津島町 鷄知)가 그것이다.

 

우리는 위의 인위(仁位)가 숭신(崇神)천황의 시호,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의

이니에(五十瓊殖)와 대응함에 주목한다.

 

그러면 미마키는 임나(任那)와 이니에는 인위(仁位)에 대응하여

숭신천황의 시호는 임나(任那)와 인위(仁位)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숭신 65년 미마나국(任那國)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는 기사는 <의라>의 역사기록이다.

 

서기 298년경 부여왕 <의라依羅>는 인위가라를 근거로 쯔시마 전역을 장악하고

일본열도 공략에 들어간다.

 

쯔시마가 미마나(任那)로 불린 것은 이 때 부터이며

그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숭신 천황으로 기록된 것은 서기 300년경의 일이다.

 

 

 

 

오오사카(大阪)시 스미요시(住吉)구에 오오요사미(大依羅)신사가 있다.

 

주변에 있었던 고대의 인공(人工) 저수지 요사미노이케(依網池)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숭신 62년 12월 만든 것으로 나온다.

 

숭신천황 시절 식량증산을 위하여 부여의 선진기술로

일본열도 오오사카에 처음 만들어진 대규모의 인공저수지이다.

 

서기1704년 야마토강(大和川)의 유로(流路)를 바꾸면서

야마토강이 요사미노이케(依網池)를 관류하게 되었고 일부는 매립되어

현재 사카난(阪南)고등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의망지(依網池)는 의라지(依羅池)이며 망(網)과 라(羅)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일본어로 양쪽 다 요사미로 읽는다.

 

오오요사미(大依羅) 신사가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남아있다.

 

 

 

 

<의려>와 <의라> 부자(父子)는 부여를 탈출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의 장악에 성공하여 일본의 천황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황실의 만세일계의 논리는

이들을 신무(神武)이래의 황계속의 족보에 끼어 맞춘다.

 

<의라>는 9대 개화(開化)천황의 둘 째 아들로 족보가 만들어져

10대 숭신천황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열도에 뿌리가 없는 숭신천황{의라}은 백제계와 가야계의 호족들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가야의 아마테라스 오호미 카미 (天照大御神,비미호)와

백제의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 (大物主神 = 三輪山神)를 성대하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또 백제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호모노 누시의 황후였으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 (倭迹迹日百襲姫, 235–318)를 극진히 예우한다.

 

현 나라(奈良)현 사쿠라이(桜井)시 북부의 마키무쿠(纒向)에

그녀의 무덤이 남아 하시하카(箸墓)라 불린다.

 

그녀의 남편 코우안(孝安 = 大物主神 222-298)천황은

부여에서 온 의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은둔 중 298년에 눈을 감는다.

 

 

 

 

숭신천황을 비롯한 정복세력은 물론 백성들도 패망한 전 왕조의 황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쳤던 것 같다.

 

역사는 그녀와 관련하여 해괴한 신화를 기록하였다.

 

“하시하카(箸墓)는 낮이면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라고 하였다.

 

낮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진행하고,

밤이면 그녀를 기리는 민초들이 돌과 흙을 날라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사기는 숭신천황(260?-318)이 168세로 무인(戊寅)년 12월 죽었다고 기록했다.

 

무인(戊寅)년은 서기 318년이다.

 

<의라>가 열도를 장악한 뒤

열도에 먼저 와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백제왕실의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이 탈환작전에서 다음 세대의 리더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

야마토 타케루 즉 훗날의 백제 근초고왕(295–375)이다.

 

의라는 숭신(崇神, 260?-318) 천황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서기 318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열도의 주도권은 다시 백제로 넘어간다.

 

 

※ 참고 <모용외(慕容廆 269-333)>

 

- 야만의 성인(聖人) <토욕혼>과 문명의 영웅 <모용외>

 

<모용섭귀>의 동생 <모용내>가 형 <모용섭귀>를 죽이고 대인의 자리에 오르자

<모용외>는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만을 부지할 수 있었다.

 

<모용외>는 근 2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285년 17세의 나이로 본국으로 돌아와 대인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직 모용부 안에서 그의 입지는 지극히 위태로웠다.

 

나이가 연소하니 권위나 인망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내란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나 있었으니 마땅한 지지 기반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래도 국외에는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던 <장화>가 버티고 서 있다지만,

그 또한 중원의 문명을 아는 <모용외>를 그 나라 군주로 세워

손발로 부리려는 속셈이었지 순수하게 <모용외>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매사가 다 <모용외>에게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모용부는 신흥 유목 집단으로

아직 제대로 된 권력관계가 분화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막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군주의 권위를 침식할 만한 권신의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회적인 단순성은 구차스러운 중간 단계 없이

효과적으로 군주와 백성이 마주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 있는 각 부락의 유력자들은

앞서 <모용내>의 일로 <모용외>에게 약점이 잡혀 있었다.

 

따라서 <모용외>가 대인의 자리를 지키는 이상

눈 뜨고 허수아비로 전락할 위험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울러 <막호발> 이래 3대에 걸쳐 만들어진 모용부라는 집단의 외연과

그를 이끌어가는 대인이라는 자리의 존재도

여전히 확고하게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즉 누군가는 모용부라는 집단의 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막호발>의 직계 후손인

<모용외>와 그의 이복형 <토욕혼> 뿐이었다.

 

따라서 지금이 순간 <모용외>가 당면한 문제는 <토욕혼>의 처분이었다.

 

서자라고는 하지만 장남이고, 더욱이 막강한 독자 세력까지 거느린 <토욕혼>은

아직 어리고 기반도 없는 <모용외>가 가지지 못한 모든 여건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토욕혼>으로서는 아직 자리가 덜 잡힌 <모용외>를 밀어내고

그 권좌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고,

<모용외>의 입장에서도 <토욕혼>이라는 대체재가 있는 이상

자신의 기반을 오롯이 굳힐 수 없었다.

 

대인의 자리에 오른 <모용외>의 첫 행보가

<토욕혼>을 축출하는 일이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사태는 이미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모용외>가 거느린 부락의 말과 <토욕혼>이 거느린 부락의 말이

서로 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초원은 광대하고 부락의 동선은 정해져 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는 곧 <모용외>에게 선수를 빼앗긴 <토욕혼>이 자신의 부락을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다가와 무력시위를 벌이던 정황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렇다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을 이 순간에 <모용외>는 한 치의 위축된 모습도 없이

<토욕혼>에게 정면으로 담판을 신청했다.

 

"선친께서 두 사람을 나누어 세우심이 유별한데,

어찌하여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지금 말이 다투게 하십니까!"

 

<모용외>의 말은 비록 조악하지만 그 구성은 분명히 중원의 문장이었다.

 

상대방이 저지른 행동을 규탄하되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대신에 선친의 분건(分建)을 거론하며 먼저 명분을 세운다.

 

그 다음에 비로소 행위와 그로 인해 벌어질 결과가 나오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유적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국 물을 먹은 <모용외>의 수사법은

아직 유목민들에게 생소할 따름이었다.

 

"말은 가축에 지나지 않고, 싸우는 것은 그 본성[常性]이다.

어찌 사람에게 화를 내느냐!

우리 사이가 틀어지기 이리 쉬우니, 마땅히 너로부터 만리 밖으로 떨어져야 하겠구나."

 

급기야 <토욕혼>이 자신이 거느린 무리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버리자,

차마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모용외>는 문득 마음이 약해졌다.

 

<모용외>는 자신의 장사 <사나누풍>과 아버지 <모용섭귀>를 섬기던 원로들을 보내서

<토욕혼>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토욕혼> 역시 그 아우에 그 형이었다.

 

"선친께서 점을 쳐보신 말에,

마땅히 두 아들이 있어 지극히 창성하리니 후손이 왕이 되리라고 하였다.

 

나는 비천한 서자로서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그만큼 대단하지 못한데,

이제 말 때문에 헤어지게 됨은 분명 하늘의 계시이리니!

 

제군들이 시험 삼아 말을 몰아서 동쪽으로 가게 해 보라.

 

말이 만약 동쪽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마땅히 그리로 따라가겠다."

 

이에 <사나누풍>은 종자들을 보내어 <토욕혼>의 말을 몰아 동쪽으로 가게 했지만,

그렇게 수백 보를 가자 말들은 문득 슬피 울면서 서쪽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무려 십여 번이나 거듭되자,

결국 <사나누풍>은 <토욕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는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토욕혼>과 그가 이끄는 무리는

서쪽 멀리 내몽골 중부에 있는 음산산맥에 자리를 잡았고,

25년 뒤 영가의 난으로 중원에 난세가 도래하자

다시 남으로 내려와 티베트 고원의 동쪽 기슭에 터전을 마련했다.

 

이들은 유목민 고유의 습속을 보전하면서도

원주민인 강(羌), 저(氐) 집단을 다스리며 번성하다가

7세기 중반에 이르러 토번의 침공으로 멸망하기까지

장장 380년에 달하는 기간을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토욕혼> 집단과 분리됨으로써

우리가 아는 모용세가는 비로소 진정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과연 형제의 운명을 가른 것은 초원의 말들이었을까?

 

『진서』와 『위서』 등지에 실린 이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역사는 우연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토욕혼>은 중원의 엄정한 수사를 알지 못하고 개의치도 않는 진짜배기 야만인이지만,

적어도 문명인 못지않게 일이 돌아가는 대체를 꿰고 있었다.

 

군주가 나라 밖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것을 틈타

그 자리를 빼앗은 이가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실책을 저지른 자와 공적을 세운 자,

 

동조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가 한 자리에 뒤섞이면 상벌의 원칙이 무너지고,

상벌의 원칙이 무너지면 원한을 사게 되는데 어찌 장구할 수 있겠는가?

 

과연 3년이 채 못 되어 찬탈자는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고,

<토욕혼>은 기다리던 때를 맞았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이 도리어 자신의 발목을 잡아서

<토욕혼>은 그만 <모용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군주의 자리에 미련이 남은 <토욕혼>은 <모용외>를 대단치 않게 보고

그를 압박해 들어갔지만,

그동안 큰 세상을 보고 돌아온 <모용외>는 이미 상당한 그릇으로 자라나 있었다.

 

처음부터 상대조차 되지 않는 적수라면 몰라도

막상막하의 골육상쟁이라면 이긴들 무엇을 얻겠는가?

 

앞서의 찬탈자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여기서 이만 야심을 접고 돌아가야 했다.

 

<모용외>의 웅지를 간파한 <토욕혼>은

찬탈자도, 조력자도 아닌 이탈이라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신하로 숙이고 들어가기에는 자신의 무리가 지나치게 컸고,

이미 한 번 야심을 드러낸 이상 다시 용납되어도 그것이 장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줄 바에는 대범하게 주는 것이 낫다.

 

<토욕혼>은 기왕 떠나는 김에 권위를 필요로 하는 <모용외>에게

운명적 정당성을 더해주었다.

 

<모용외>는 이런 <토욕혼>을 차마 잊지 못하고 '아간(阿幹)의 노래'를 지어서

세밑마다 불렀다고 하는데, '아간'이란 선비어로 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토욕혼>은 모용부에서 이탈한 직후

자신의 무리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 형제가 향유하게 될 나라를 모두 갖추었다.

<외>는 증손과 현손까지 고작 백여 년에 미치겠지만,

나는 현손 이후로도 후손들이 창성하리라!"

 

<모용외>가 문명의 영웅이라면, <토욕혼>은 야만의 성인이다.

 

영웅은 강철과도 같은 의지로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지만,

성인은 그저 허허로이 목표를 찾는 화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전자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과녁을 맞추면 찬사를 쏟아내지만

일단 과녁을 맞춘 화살이 어떻게 더 날아갈 수 있겠는가?

 

오히려 더 오래,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은 과녁이 아닌 허공을 향한 화살이다.

 

과연 동생 <모용외>는 굵고 짧은 길을 골랐고, 형 <토욕혼>은 길고 가는 길을 떠났다.

 

 

※  모용외의 가계도

 

慕容莫護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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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容木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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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容涉歸 = 乙氏      - 慕容耐 - 慕容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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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  慕容廆(269~333) - 慕容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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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容翰-慕容皝(297-348) - 慕容仁 - 慕容昭 - 慕容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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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雋(319-360) - 慕容垂(326-396) - 慕容德(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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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暐(350-384)     慕容寶(355-398) - 慕容熙(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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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盛(373-401)

 

 

※  참고 <모용외 일대기>

 

269년     모용섭귀(慕容涉歸)와 乙씨 사이에서 태어남.

285년     비리를 공격하여 의려가 패하여 자살함.

             비리의 백성들은 옥저{양맥}로 피신함

             <의려>가 일본열도로 들어감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함

287년     <의라>가 비리를 재건함(고구려와 晉의 도움)

289년    도하(徒河) 청산으로 옮겨감

292년    봉상제 <치갈>이 서천대제 <약우>를 시해하고 안국군 <달가>가 죽음

293년    고구려의 환성(桓城)을 공격함(곡림대전)

294년    환성(桓城)에서 대극성으로 옮겨감

             <을불(278-331)>이 창포의 사랑을 얻어 최체를 차지함

297년     <의라>가 일본열도로 들어감

298년     <책계>가 대방에서 전사하고 <분서>가 즉위함

300년     <의려>가 일본열도의 숭신천왕으로 즉위함

             <을불>의 반정으로 <을불>이 즉위함

302년     우문의 <대소연>을 격파함

304년     <황창량>이 <분서>를 죽임

307년     선비대선우로 임명하나 받지 아니함

             요동의 백성이 <모용의>에게 귀부함

             미천대제 <을불>이 수,육군 30만 대군을 압록원에서 사열함

308년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하여 포로 300명을 사로잡음

310년     현도인 <삼성>이 남소에 투항하여옴

311년     미천대제 <을불>이 서안평을 빼앗고 남녀 2천명을 평양으로 데려옴

313년     <모용외>가 도하(徒河)에 낙랑군을 설치함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명함

             미천대제 <을불>이 낙랑을 정벌함

317년     창려,요동 2국공으로 임명하나 받지 아니함

             기주, 예주, 청주, 평주 유민을 기양군, 성주군, 영구군, 당국군으로 이주시킴

             모용황을 세자로 세움

318년     <의라>{숭신천왕}가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사망함

319년     <최비>가 우문부, 단부, 고구려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함

             <최비>가 고구려로 달아남

320년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함

             <모용외>가 평주자사가 됨

321년     요동군공이 됨

             <우문걸득귀>를 공격함

333년     <모용외>의 죽음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