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娄奏曰 老臣之榮已極 願致仕而養病

王曰 卿是吾祖 自可爲太公 而無人可代相位何

尙娄曰 臣妻玄氏 二歲從母改嫁倉夾之家 而長焉

長生夾子助利乃臣妻之胞弟也

忠直有才 臣常舉爲南部大使者 多致善績 非斯人不可以任國相

王曰 吾祖母之胞弟也 可先進爵大主簿入朝

倉助利承命進謁 王賜新宅于尙娄庄側而勸之曰 早晩當以爲相可 輔朕躬

<을불대왕전>  

 

 

<상루尙娄>가 아뢰어 말하기를

 

“노신의 영화(榮華)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벼슬을 물러나 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옵나이다.”

 

왕이 말하기를

 

“경은 무릇 내 조부이시니 뜻대로 태공(太公)이 되어도 될 것이나

재상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오?”

 

<상루>가 말하기를

 

“신의 처 현씨(玄氏)는 두 살 때

<창협倉夾>의 집으로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가서 자랐습니다.

 

<창협>의 아들 <창조리倉助利>를 낳았으니 신의 처의 포제(胞弟)가 됩니다.

 

충직하고 재주가 있어 신이 일찍이 천거하여 남부대사자가 되었는데

빼어난 공적이 매우 많습니다.

 

국상을 맡기기에 이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내 할머니의 포제이구려. 먼저 작위를 올리고 대주부로 입조케 함이 옳을 것이오.”

 

 

<창조리>가 명을 받들고 나와 알현하자 왕은 상루장(尙娄庄) 옆에 새 집을 하사하고

 

그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조만간 당연히 국상이 될 것인즉 짐을 도와주시오.” 라고 하였다.

 

 

 

<창조리>는 고구려 역대 재상 중 가장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다.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가 고구려의 조정에 발을 딛게 된 것은 봉상 3년 서기 294년의 일이었다.

 

당시 좌보로 있던 상루(尙娄)는 늙고 병이 들어 물러나면서

남부대사자 창조리(倉助利)를 봉상제에게 천거한다.

 

<창조리>는 <상루>의 손아래 처남이었다.

 

대주부의 자리로 들어온 <창조리>는 3품의 지위에 불과했지만

맡은 일은 국상을 대리하였다.

 

황제는 그에게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처벌할 수 있는

죽려지인(竹呂之釼)을 내려준다.

 

실직적인 권력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돠고 <창조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원항>은 봉상제의 충복이자 <달가達賈> 일파를 제거하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항상 눈에 가시였던 안국군 <달가>를 제거하고 <달가>의 처 <陰씨>를 취하고

그도 모자라 <돌고>태자의 어머니 <高씨> 마저 취하고는

반항하는 <高씨>에게 허드렛일을 시킨다.

 

<高씨>는 하루아침에 황실의 여인에서 노비의 신세가 되었다.

  

<陰씨>와 <高씨>는 서로를 위로하다가 <高씨>가 <陰씨>에게 묻기를

자신은 늙었으니 상관없으나 젊은 <陰씨>가 만약 <원항>의 아이를 임신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陰씨>가 대답하기를 만약 <원항>의 아이를 낳게 된다면 죽여 버리겠노라고 말한다.

  

<원항>의 계집종 하나가 이 이야기를 엿듣고 <원항>에게 달려가 일러바친다.

 

늙고 고집 센 <高씨>를 싫어하던 <원항>은 그녀를 잡아다가 형(刑)을 가하려 한다.

  

이를 안 <陰씨>가 폭발하였다.

 

무예 집안인 그녀는 장창으로 덤벼드는 <원항>의 노비들을 다 죽여 버린다.

 

놀란 <원항>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 우림위(羽林衛)로 달아났다.

 

우림위에는 <창조리>의 아들 <창멱倉覔>이 위두(衛頭)로 있었다. 

 

<창멱>이 <원항>을 막아서자 당황한 <원항>이 <달가>의 족당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진압하기위해 군사를 동원하고자 한다고 왕명을 들먹이며 거짓말 한다.

 

<창멱>이 증거를 내놓으라고 다그치자 <원항>은 자기 말이 왕명이라 한다.

 

자기 말이 왕명이라 했으니 왕을 사칭한 것이다.

 

곧바로 묶어서 아버지가 있는 상부로 압송하였다.

  

전후사정을 알고있던 <창조리>가 삼보(태보, 좌보, 우보)들에게 물었다.

 

“허위로 교서를 지어 병사를 동원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참(斬)”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창조리>는 <원항>을 참하라고 명한다.

 

당황한 한 관리가 <원항>은 봉상제의 심복이자 공신이니 죽음의 죄를 지어도

임금에게 보고하기 전에는 함부로 하지 말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음을 말한다.

  

 

項笑曰 相國欲專生殺之權 其可得乎 吾當報此恨矣

助利徐曰 吾受竹呂之時 無猿項除外之命 可以此斬之

<을불대왕전>

  

<원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상국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기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지만

어찌 가능이나 한 일이겠는가?

 

내 마땅히 이 한을 갚아 드리리라.”

 

<창조리>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려(竹呂)를 받을 때 <원항>을 제외하라는 명은 없었으니 벨 수 있느니라.”

 

<창조리>가 <원항>을 참하려하자 <원항>의 부하가 위급한 상황을 봉상제에게 고하니

봉상제는 <원항>을 살려주라고 사자를 보낸다.

  

<창조리>는 봉상의 사자를 문밖에다 기다리게 한 후,

<원항>의 목을 매달아 죽인 뒤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사자에게 말했다.

 

“그대가 좀 늦었구려!

 

봉상 3년(AD294) 8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창조리>는 <원항>의 무리들이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봉상에게 보고한다. 

 

봉상은 <창조리>에게 <원항>의 처가된 <高씨>와 <陰씨> 및

<원항>의 재산을 <창조리>에게 하사한다.

 

하지만 <창조리>는 여색과 재물을 탐하는 이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받지 않고 <원항>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한다. 

 

<창조리>의 처가 병을 앓다 숨을 거두니

그제야 <창조리>는 <陰씨>를 처로 받아들인다.

 

<창조리>는 <을불>의 외조부 <을보乙宝>를 좌보(左輔)로 천거한다.

 

마침내 <을불>에게 한 가닥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봉상제는 이즈음 대신원(大神院), 능원(菱院), 단왕궁(丹王宮) 등을 수리하는 등

국력을 낭비하고 있었고, 한때는 <을불>의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자신의 후가 된

초후(草后)와 놀아나고 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주요정사는 모두 <우평于枰>, <상보尙寶>, <창조리倉助利> 등에게

맡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참다못한 <창조리>가 입을열었다.

 

 

亡國之道 有三

貪樂不願政 一也

用人以情不以才 一也

舉賢而不用其言 一也

今三者具 可不畏乎

<을불대왕전>

 

“망국의 길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놀기만 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음이 그 하나이고,

사람을 정으로 쓰고 재주로 쓰지 않음이 하나이며,

현명한 이를 뽑아 놓고그 말을 듣지 않음이 하나입니다.

 

지금 세 가지를 다 갖추어졌으니 두렵지 않습니까?” 

 

 

王曰 王者唯任賢而已卿與二舅 爲國賢相 朕何言乎 且人生行樂矣

卿欲以我勞於雜政憔悴而盡乎

有採金而不顧危者深入岩間 執金而壓死 後來盡授之

朕不知 執金而死猶勝於樂而亡國也 

 

왕이 말하기를

 

“왕이란 다만 현자에게 맡길 따름이다.

 

그리고 이미 나라를 위한 어진 재상으로 경과 두 장인이 있는데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인생이란 잘 놀고 즐겁게 지내야하는 것이라.

 

경은 내가 잡다한 정무에 애를 쓰다가 초췌해져서 죽으란 말인가?

 

금을 캐려고 위험을 돌보지 않는 자는 바위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가

금을 쥔 채로 압사하고 뒤에 오는 자가 금을 다 거두게 되는 것이다.

 

짐은 금을 잡고 죽는 것이 즐기다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창조리>는 더 이상 봉상제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와 그의 처 <陰씨>에게 조정에서 물러나야겠다고 한다.

 

<陰氏>는 <창조리>에게 그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라를 위함이지 임금을 위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봉상제를 대체할 인물로 <을불>태자를 언급한다.

 

고구려 15대 황제 미천대제 <을불>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