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책계왕이 고구려의 혼란을 틈 타 대방군을 공격하였다가

한(漢)과 맥(貊)의 복병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삼국사기>와 남당유고의 <고구려사초> 에도 기록되어있다.

 

(責稽)十三年 戊午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而薨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 13년 무오(서기 298년)

 

9월, 한인과 맥인이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막으러 나갔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責稽>攻<帶方><漢貊>五部, 遇伏兵而死. 子<汾西>立. 聰慧英{挺}云.

<고구려사초>

 

<책계>가 대방(帶方) 한맥(漢貊) 다섯 부락을 공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죽었다.

 

아들 <분서>가 섰는데, 총명하고 슬기롭고 특출하게 빼어났다고 한다.

  

 

두 기록의 차이는

<백제본기>는 한과 맥이 침입하니 책계가 막으러 나갔다고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에서는 대방한맥5부(帶方漢貊五部)라고 기록되어있고

백제왕 <책계>가 먼저 이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방이라는 지역은 한족(漢族)과 맥족이 더불어 살고 있었던 지역이며

이 시기는 晉 惠帝 때이므로 여기에서 기록한 漢貊은 漢人과 貊人(고구려인)을 말하며

晉과 고구려의 두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책계왕이 <모용외>의 고구려 침공을 틈타 대방군의 맥인들을 몰아내고자

공격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거나

서부여에서 탈출한 <의라> 일파에게 살해된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대방은 책계왕이 대방을 구하려다 죽었고

그의 아들인 분서왕 역시 대방을 차지하였다가 황창(랑)에게 피살당하게 되었던

<건虔>이 다스리는 대방군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나라는 흉노의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다.

 

 

당시 서진(晉)은 외척과 왕족들의 내분으로 곳곳에서 전쟁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 혼란을 이용해 저족과 흉노족이 대거 봉기하여 세력을 형성했고,

이 때부터 이른바 외방 오족인 5호의 16국 시대가 시작된다.

   

유연의 터전은 대륙백제가 형성된 산동 지역에서 멀지 않은 평양(산서성 임분)이었다.

 

이들은 304년에 평양을 도읍으로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이미 이 때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낙랑 지역은 유연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연>이 세력을 확대하던 시점에 백제 또한 세력 확대를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이 몰락상을 보이며 내분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백제가 대륙 땅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흉노나 저족 등의 외족들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는 상황이라면,

산동에 자리 잡고 있던 안정된 국가인 백제가 영토를 확충하려 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책계왕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이 직접 대륙에 머물렀다.

 

흉노족이 맥 사람들과 함께 쳐들어온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 땅이었고,

책계왕이 그들을 막다가 죽었다는 것은 그가 직접 대륙에 나가 싸웠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한과 맥족이 어느 성을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구체적인 격전지를 기록했을 것이고,

또 그들이 쳐들어온 곳이 백제의 도성인 한성이라면

그 점을 기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삼국사기』는 책계왕이 어디서 싸우다가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는『삼국사기』편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록한 사료,

즉 중국 대륙에서 책계왕이 죽었다는 내용을 담은 사료를 보고 납득할 수가 없어

그냥 죽은 내용만 기록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책계왕 즉위년 기사는 다른 왕들의 즉위년 기사에 비해 비교적 상세한 편인데,

재위 2년부터 죽기 전까지의 기록은 전무하다.

 

게다가 책계왕의 죽음도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삼국사기』편자들이 본 책계왕 관련 사료들이

모두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고의로 빼버린 결과가 아닐까?

 

『삼국사기』편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책계왕이 대륙에서 죽은 일과 재위 기간 대부분을 대륙에서 보낸 일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편찬 과정에서 고의로 그런 내용들을 모두 빼버린 것은 아닐까?

   

중국 측 사료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기사가 숱하게 보이는데,

그 자료를 기반으로 만든『삼국사기』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기사가 거의 전무하다.

 

이는『삼국사기』편찬자들이 대륙백제의 기사를 고의적으로 빼버렸다는 뜻이다.

 

고려 인종 대 당시의 편찬자들은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광활한 땅을 가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한나라 군과 싸우다가 죽은 책계왕 관련 사료들도 그런 이유로 무시되었고, 그래서 책계왕에 대해선 즉위년과 사망한 해에 관한 기사만 다룬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책계왕을 죽일 때 한나라 군과 함께 몰려온 맥 사람들은 누구일까?

 

맥은 대개 예맥으로 불리었고,

흔히 중국 측에서 예맥이라고 하면 고구려인들을 일컬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한서』엔 원초 5년(118년)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침입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고,

건광 원년(121년) 가을에 궁(고구려 제6대 태조)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군을 포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들은 고구려와 예맥을 다른 세력으로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때 예맥은 고구려의 변방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속하지 않은 예맥 족을 일컫는 것인데,

한과 함께 책계왕을 공격한 맥 족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에 속하지 않았던 예맥 족은 어디에 살고 있던 세력일까?

 

아마도 이들은 낙랑 지역에 살고 있던 세력이었을 것이다.

 

「온조왕실록」에서 낙랑은 원래 서기전 123년에 예의 임금 남려가

약 이십만의 백성들을 이끌고 세운 예족 집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족과 맥족은 원래 다른 민족이었으나,

점차 예맥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책계왕 당시 백제를 침입한 맥은 예맥을 일컫는 것이니,

남려가 형성한 낙랑과 같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때 한나라 군과 함께 쳐들어온 맥인들은 곧 남려와 함께 낙랑을 형성한

이십만의 예족들의 후예라는 것이다.

   

책계왕을 이어 즉위한 분서왕이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고,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것도

책계왕을 공격한 맥이 낙랑 태수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다만 이 때 한 군과 함께 몰려온 맥인들은 낙랑 태수가 직접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

낙랑 지역에 살고 있던 예맥 출신의 백성들일 가능성이 높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