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乙弗의 反正

고대사 2014. 9. 15. 11:41

 

 

봉상제9년{AD300}경신,

 

추8월,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이 궁을 짓는 부역에 끌려갔다가

먹을 것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았다.

 

<창조리>가 {이런 사정을} 간하였더니,

 

상이 말하길;

 

“경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다 이거요?”라 하였다.

 

<창조리>는 어쩔 수 없어 군신들과 더불어 <을불>을 맞아들여 제로 세우고,

상을 폐하여 가두었다.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았던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두 아들 또한 뒤따라 죽었다. 봉산원에 묻어주었다.

 

 

 

제의 초휘는 을불대왕이고, 서천제의 손자이며, 돌고대왕의 아들이다.

 

모친은 태공 <을보乙寶>의 딸인 <을>태후이다.

 

성품이 너그러워 아랫사람들에게 후하였고, 지략이 있었으며, 무리를 능히 이끌었다.

 

<봉상>이 <돌고>를 죽일 때, <을불>은 <상루尙婁>의 집에 있었다.

 

<상루>가 집안사람인 <재생>과 <담하>를 시켜 <을불>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후 수실촌에 사는 <음모>의 집으로 달아나 숨었다.

 

<음모>를 위해 일하며 겪은 고초가 심하였다.

 

개구리가 야밤까지 울지 못하도록 하라고 시켜놓고,

무엇인가 {돌멩이나 흙덩이를} 던지면 미행하여 못하게 하였고,

밤낮으로 땔나무를 해오라고 시키고는 잠시도 쉬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동촌 사람 <염모冉牟>와 도망하여 소금을 팔며

압록{今 난하}의 사수촌에 사는 사람의 집에 의탁하였다.

 

그 집의 노파가 소금을 좀 달라고 하기에 한 말 정도를 주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하여 들어주지 않자, 토라져 신발을 소금 속에 감추었다.

 

그것을 모른 채 {소금을 팔러나가려고} 상이 길을 나서자

노파가 쫓아와 뒤져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신발을 훔쳤다고 고변하였다.

 

압록의 우두머리가 소금으로 신발을 보상하게 하고는 볼기를 쳐서 풀어주었다.

 

이 시절, 얼굴 꼬락서니는 삐쩍 말랐고 의상은 남루하여,

사람들은 쳐다보면서도 그가 왕손인 줄 몰라보았다.

 

이때, <창조리>는 곧 임금을 폐하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려던 참이었다.

 

왕손이면서도 검약하고 인자하여 조상의 뒤를 잇게 하면 좋겠다고 여겨,

신하 등을 보내어 맞아들이라 하였더니,

 

<을불>은

 

"저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소우萧友> 등이 <선결仙潔>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오맥남烏陌南>의 집에서 맞아들였다.

 

9월, 후산의 북녘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창조리>가 무리들에게 말하길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들은 나를 따라 하시오."

 

라 하고는 부들{지황} 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가 부들 잎을 모자에 꽂았다.

 

이윽고 {<창조리>가} 말하길;

 

"지금의 주상은 무도합니다.

<을불>대왕께서 덕이 있으시어, 그분을 추대하고자 합니다."

라 말하니, 무리들이 크게 기뻐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하여 <을불>을 맞아들이고,

봉상제를 억압하지 않은 채로 행궁에 가두어 지켰다.

 

 

원년{AD300}경신,

 

추9월, <창조리倉助利>·<조불祖弗>·<소우萧友>·<오맥남烏陌南>·<자柘>·

<선방仙方>·<방부方夫>·<재생再生>·<담하談河>·<송거松巨>·<장막사長莫思>

·<휴도休都> 등 공신 12 사람에게 각자의 고향 땅을 봉하고

노비를 차등하여 하사하였으며, 부친인 <돌고>대왕을 평맥(平貊)大帝로 올리고,

모친 <을>후는 단림(檀林)태후로, 조모이신 <고>씨는 태황태후로,

<을>태후의 부친 <을보>는 국태공으로 올렸다.

 

동10월, 누런 안개가 네 변방을 닷새나 덮었었다.

 

태사인 <우선于先>에게 물으니

 

"조짐이 后와 妃에 있다."고 하였다.

 

<재생>이 봉상제를 겁주고 <연椽>후를 빼앗아 자기의 처로 만들었더니,

모든 사람들이 <재생>의 안개라고 여겼다.

 

<창조리>를 태보로, <우탁于卓>을 좌보로, <을로乙盧>를 우보로 삼았다.

 

<을로>는 <을>태후의 오빠이다.

 

11월, 서북풍이 크게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구르길 엿새나 계속되어,

상이 감식하고 지나쳤던 일이 있었는지를 물으니,

 

<창조리>가 아뢰길;

 

“우선하여 정후{황후}를 세우시고,

<재생>과 <담하>가 공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지요.”라 하였다.

 

이에, 상은 그리 하겠다고 하였다.

 

晋이 <양羊>씨를 후로 세웠다.

 

12월, 혜성이 동방에서 나타나니,

 

<우선>이

 

“군신상쟁의 조짐이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상보尙宝> 부자와 <부협芙莢> 형제를 풀어주었다.

 

<상보>는 <초草>씨의 부친이고, <부협>은 <부芙>씨의 오빠이다.

 

그믐날에 <상보>를 좌보로, <우탁>을 서부대사자로 삼았다.

 

상이 <초草>씨를 황후로 삼고 싶어 하자,

 

<창조리>가

 

“<초草>씨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절개를 버리고 폐제를 섬겼었습니다.

절개를 버린 사람을 후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고구려사초>

 

 

 

 

<을불>이 잠시 <고박아高朴兒>의 집에 피신해 있는 동안

봉상제(烽上帝)는 탈출한 <을불>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곳곳에서 <을불>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나

이들은 모두 <선방仙方>의 계획 하에 만들어진 가짜 <을불>이었다.

 

 

화가 난 <봉상>이 진짜든 가짜든 모두 목을 베라 일렀으나

목을 베어야할 관리마저 모두 <선방>의 무리들이었고

인형의 목을 베어다가 바치며 하는 말이 사람이 변하여 인형이 되었다고 아뢰었다.

 

평상시 같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말같지 않는 말들이 서슴없이 왕에게 보고되었다.

 

하지만 <봉상>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원망이 두려웠다.

 

 

사람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봉상>의 이름을 써놓고 팔을 자르고 머리를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고 궁궐에는 불을 질러 <봉상>이 혼비백산하여 피난을 가게 만들었다.

 

모두가 다 <선방>의 치밀한 계획 하에 꾸며진 일이었다.

 

하지만 <봉상>은 이 모든 혼란을 수습하기위해 <선방>에게

수도방위를 위한 군사적 실권을 부여하게 되고

<선방>은 그 힘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기반을 확고히 굳히게 된다.

 

 

이때 <을불>은 고구려 5부에 신하들을 보내 호응을 얻고자하였다.

 

북부의 <조불祖弗>, 동부의 <소우蕭友>, 남부의 <오맥남烏陌南>이

곧바로 반정의 무리에 합류하였으나

서부와 중부로부터는 소식이 없어 거사를 잠시 미룬다.

 

이는 <을불>이 과거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오맥남>은 <창조리>의 사위로 <창조리>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게 되고

<창조리> 역시 마음에 동요를 느끼게 된다.

 

갈등하던 <창조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언을 하는 자신을 오히려 나무라는

<봉상>과의 대화를 통해 <봉상>의 속내를 확인하고 반정의 결심을 굳히게 되는데

<을불대왕전>에 실린 그 대화의 내용이다.

 

 

無知之民徒譽乙弗而怨朕 人言卿與乙弗相通 而欲得民譽 今果然矣

助利曰 君不恤民非仁也 臣不諫君非忠也

臣旣承乏相國 不敢不言也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死於百姓乎 欲死於寡人乎 勿復言也

<을불대왕전>

                                                                                     

“무지한 백성들이 <을불>을 칭찬하고 짐을 원망하는구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은 <을불>과 상통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한다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러하구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질지 아니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재능이 없는데도 상국이 되었기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는가 아니면 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다시는 말하지 마시구려.”

 

 

고구려 역사상 다시없는 강직한 인물이었던 창조리의 마음을 돌리게 한 사건이었다.

 

백성을 위하지 않는 임금을 창조리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인 봉상 9년(서기300년) 9월,

 

봉상제는 사슴제(祭鹿)를 지내기 위해

후산(侯山)으로 황후를 비롯하여 신하들을 데리고 행차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 곳에는 <을불>의 군사들이

모두 정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갈댓잎을 관에 꽂은 <을불>의 무리들이 봉상을 잡아 꿇어앉혔고

봉상은 새보(璽寶)를 바치며 신하의 예를 갖추게 된다.

 

고구려의 황제가 바뀐 것이다.

 

<을불>은 대맥대왕(大貊大王),

즉 고구려의 황제가 되어 5부(部) 37국(國)을 다스리게 된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완벽하였던 정변이었다.

 

 

 

 

※ 참고  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1. 을불의 탄생 

 

 

약로대왕(藥盧大王, 서천대제 若友 240-292) 9년(278년) 춘정월.

 

왕은 모든 비빈(妃嬪)들과 단림지궁(檀林之宮)에서 야연을 베풀었는데

홀연 벽력소리가 나고 하늘로부터 화광이 내려와 작은 개 같은 것이

돌고(咄固 260-293)태자의 침전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왕은 크게 놀라 급히 침전으로 가서 안을 살폈는데 별다른 불빛은 없었고,

다만 돌고태자(咄固太子)와 다비(茶妃) 을씨(乙氏 261-318)가 교합을 하고

기식(氣息)이 엄엄하여 용보(龍步)가 지척에 이르도록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비(茶妃) 을씨(乙氏)는 주통태후(酒桶太后)의 서자인 을보(乙寶 231-301)의 딸이니

현상(賢相) 을파소(乙巴素 139-203)의 증손이다.

 

아름답고 지혜 영민(慧敏)하므로 왕이 그를 아끼어 후궁에 들이고

누차 총애를 받아 차비(次妃)의 지위에 올랐던 것인데,

언제부터 돌고(咄固)와 밀통했는지 알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을씨(乙氏)를 주살하려하자 태사(太史) <우선于先>이 상주하였다.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에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주살함이 가할 것 입니다.”

왕은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과연 열 달에 이르러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풍준(豊雋)하고 기걸(奇傑)찼으며

또 오색구름이 산실을 에워싸고 감돌았다.

 

왕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을씨(乙氏)를 <돌고咄固>의 처(妻)로 삼고

아기의 이름을 <을불乙弗>이라 지었다.

 

때는 황구(黃狗,무술 278년)의 10월(孟冬)이었다.

 

 

 

 

2. 을불이 태자가 되다 

 

 

왕은 <을불乙弗>을 아끼고 사랑해서

을씨(乙氏)에게 내리는 작록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을불乙弗>은 3살에 능히 길흉(吉凶)을 말할 수 있었다.

 

왕제(王弟) <달가達賈 (256-292)>가 숙신(肅愼)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왕에게 입사(入辭)했는데 왕은 <을불乙弗>을 무릎위에 안고 있다가 물었다

 

“이번 출행이 길(吉)하겠느냐?”

 

<을불乙弗>은 “길(吉)”이라 답했다.

 

과연 대승을 거두었다.

 

왕은 이에 첫 승을 올린 땅을 <을불乙弗>의 식읍(邑)으로 삼고

<돌고咄固>에게 명하여 그곳으로 나아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왕은 다시 을씨(乙氏)를 총애하여 딸 단씨(丹氏)를 낳았는데

<을불乙弗>이 단씨(丹氏)를 몹시도 아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왕은 <을불乙弗>을 놀려서 말하되

 

“단씨는 내 딸이고 너는 곧 내 손자이니 네가 그 아이를 누이로 할 수 없다.”

 

<을불乙弗>은 울면서

 

“나도 왕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하였다.

 

왕은 측은히 여겨서 그를 허락하고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그때의 궁중은 엄하지 않아서 후비(后妃)들이 행실이 없었다.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 242-306) 또한 소후(小后)로써

<치갈>태자(雉葛太子 259-301)와 밀통하고 있었다.

 

<을불乙弗>이 이를 간하되

 

“할머니는 어찌하여 치갈(雉葛)과 함께 어울리십니까?”

하자 고씨는 말했다.

 

“<치갈雉葛>은 후일의 천자(天子)이다.

어찌 교태를 부려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를 말하지 말라.”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 또한 태자이니 이는 훗날의 천자가 아닙니까?”

 

고씨는 크게 놀라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천위(天位)는 이미 정해졌다. 너는 망령된 말을 하지마라.”

 

<을불乙弗>은 불복하며 스스로 나는 천자가 될 것이라고 자인하였다.

 

치갈(雉葛)은 다시 을씨(乙氏)와도 밀통하였다.

 

을씨가 울면서 말했다

 

“대왕이 이를 알면 반드시 나를 호음(好淫)한다 하여 주살할 것입니다.”

 

치갈(雉葛)이 말했다

 

“심야지사를 대왕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때 <을불乙弗>이 일어나 말했다.

 

“태형(太兄)은 이미 내 조모와 통하고 다시 내 어머니를 핍박했으니 죄가 큽니다.

내가 마땅히 이것을 부왕께 아뢸 것이오.”

 

<치갈雉葛>은 크게 놀라 차고 있던 옥도(玉刀)를 끌러주며 말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아뢴다면 네 어머니는 주살되고 나는 마땅히 태형을 받을 것이다.

그리 되느니만 못하거든 말을 말거라.”

 

을불(乙弗)은 어머니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이를 숨겼다.

 

뒤에 왕은 옥도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것은 곧 사군(嗣君)의 보물(嗣寶)인데 어찌하여 네가 이것을 차고있느냐?”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는 연(鳶)이 끈 떨어졌는데 그것을 이을 수 있어 차지한다면

천명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왕은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은밀히 을씨에게 이르되

 

“네 아들이 식우(食牛:호랑이 새끼)의 기상을 가지고 있으니

천명(天命)이 있는 게 아닌지 몰라 두렵구나.”

 

이에 <방회方回>와 <대발大發>을 좌우스승(左右師)으로 삼아

기사(騎射)와 병진(兵陣)의 학문을 가르쳤다.

 

9세에 능히 3대의 화살을 쏴서 명중시키니 왕은 그에게 상을 내렸다.

 

그 때에 왕제(王弟) <일우逸友>와 <색발索勃>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을불乙弗>이 왕에게 아뢰었다.

 

“두 숙부는 무(武)를 숭상해서 예양지학(禮讓之學)을 모른 까닭에

저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臣)은 좋은 스승에게 예양을 배우기를 청하옵니다.”

 

왕은 그를 옳게 여겨 <우선于先>에게 명하여 효경(孝經)으로 가르치게 했다.

 

<을불乙弗>이 마침내 왕에게 상주했다.

 

“신이 어리고 예(禮)를 몰라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고,

아버지를 형으로 삼았으니 지금에야 그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청컨대 신의 태자 작위를 삭제함으로써 명분을 바로 잡으소서.”

 

왕이 말했다.

 

“네 말이 비록 옳다마는 이미 봉한 작위를 어찌 빼앗을 수 있겠느냐?

남의 아들도 내 아들로 삼을 수 있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들이겠는가?

다만 네 아비는 돌고(咄固)이니 너는 그 아비를 따름에 네 소원대로 하라.”

 

이에 <을불乙弗>이 아버지를 섬김에 지성으로 효도하니

<돌고咄固> 또한 인효우애(仁孝友愛)하였다.

 

국인(國人)들이 이를 우러러

“현태자(賢太子)가 현태자(賢太子)를 낳았다.”라고 하였다.

 

 

 

3. 치갈과 달가의 반목

 

 

<치갈雉葛>은 성품이 교만방자(驕逸)한데다

호색(好色)하고 패덕한 소행(悖行)이 많아 국인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일찌기 왕에게 조용히 상주하되

 

“나라가 의지하는 바는 사군(嗣君)에 있습니다.

이제 <을불乙弗> 부자는 모두 어질고 현명하나 <치갈雉葛>은 불초하니

형왕(兄王)은 모름지기 이를 유념하소서.”하였다.

 

왕은 말했다.

 

“짐도 그것을 알지만 어찌 차마 장자를 폐하고 소자를 세우겠는가?

네가 그를 잘 가르칠지어다.”

 

이에 <치갈雉葛>을 불러 꿇어앉히고 경계하여 말했다.

 

“국인들이 너의 무도함을 근심한다.

안국군은 네가 아버지로 섬김에 나와 같이 할지니

대소사를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묻고 나서 행해야 가할 것이다.”

 

<치갈雉葛>은 내심 불평을 품었으나 애써 노력하여 그를 좇았다.

 

이로부터 안국군이 규제하고 간하는 것이 많았다.

(치갈가 달가는 3살 차이)

 

<치갈雉葛>은 이를 괴롭게 여겨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먼저 <달가達賈>를 죽이리라.”하였다.

 

<돌고咄固>가 그 말을 <달가達賈>에게 고하며 이르되

 

“숙부는 스스로 위태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달가達賈>는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어찌 스스로의 이해를 돌보겠는가?”

 

<돌고咄固>는 탄식하며 말했다

 

“군자의 말씀입니다!”

 

<치갈雉葛>의 어머니 우씨(于氏)는 아름답고 요염 간교(奸姣)하니

왕이 그를 가장 아껴서 정후(正后)로 삼고 그녀가 말하는 바는 모두 들어 주었다.

 

때문에 <치갈雉葛>의 불초함을 알면서도 그를 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씨(于氏) 또한 국인들이 <돌고咄固>를 많이 추앙함을 알고

<돌고咄固>가 후계(嗣)를 뺏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행실을 훼손코자 거짓으로 부스럼(瘡)이 있다 칭하고

<돌고咄固>를 불러 같은 수레에 타고 온탕(溫湯)으로 들어갔다.

 

은밀히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나의부스럼은 옥문(玉門)의 해심(荄心)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양경(陽莖)에다 이 유약(油藥)을 발라서 넣어라.”고 하였다.

 

<돌고咄固>가 이를 어렵게 여겨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성후(聖后)를 증(烝) 하오리까?”

 

우씨는 노하여 말했다.

 

“네가 을씨의 젊음은 사랑해서 통하고 나는 늙었음으로 해서 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가 나와 더불어 알몸으로 탕에 들어왔으니 비록 통정하지 않았다 해도

남이 어찌 알겠는가?

내 당장 네가 나를 핍박하여 간음했다고 성언하여 주살할 것이다.”

 

<돌고咄固>는 어찌할 수 없어 그를 증(烝)하였다.

 

이로부터 우씨는 누차 <돌고咄固>를 이끌어 은밀히 그에게 총애를 주고

<치갈雉葛>로 하여금 오게 해서 그것을 보게했다.

 

<치갈雉葛>이 이에 <돌고咄固>를 꾸짖어 말했다.

(돌고는 치갈의 1살 아래인 이복동생)

 

“국인들이 너를 현명하고 호색하지 않는다 하는데

현자(賢者) 역시 모후(母后)를 치붙는가?”

 

<돌고咄固>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못했다.

 

우씨는 또 <달가達賈>의 옹병(擁兵)을 두려워해서

늘 <달가達賈>에게 교태를 부려 말했다.

 

“부왕(夫王)의 천추 후에 아즈반(叔)은 마땅히 산상왕(山上王)이 될 것이니

첩은 마땅히 그를 따를 것입니다.”

 

<달가達賈>가 말했다.

 

“왕위를 이을 사군(嗣君)이 수후(嫂后)마마에게 있는데

이 무슨 어지러운 말씀입니까?”

 

우씨는 즐거워하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그를 참소하였다.

 

“<달가達賈>가 나를 유혹해 말하기를

‘형왕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고 나는 마땅히 산상왕이 되어

형수를 후(后)로 삼을 것이니 이제 먼저 통하여 결친(結親)함이 옳을 것이오’

하기에 내가 그 뺨을 때리고 피했습니다.”

 

왕은 우씨의 거짓말을 알고 웃으며

 

“네가 <달가達賈>의 처가 되고 싶다면 내 죽음을 기다릴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그에게 갈 수 있다.”

 

우씨는 울며 말하기를

 

“그대는 아우는 아끼면서 처는 아끼지 않으니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달가達賈>의 처가 되겠습니까?”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달가達賈>와 나는 한 몸이니 네가 끼어들 바가 아니다.”

 

우씨는 참소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왕은 <달가達賈>에게 말하였다.

 

“네 형수 우씨가 내게 너를 참소하니 이는 필시 네가 그 청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무릇 형제동처(兄弟同妻)는 고금에 있어온 것이니 하물며 한 어머니의 아우이겠는가?

사사로이 통정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이 가할 것이다.”

 

<달가達賈>가 대답하되

 

“남녀의 예(禮)가 무너집니다. 어찌 남을 책망 받도록 하는게 도(道)이겠습니까?”

 

왕은 그말에 탄복하여 말했다.

 

“어질도다! 나의 아우여. 내가 미칠 수 없구나!”

 

 

 

 

4. 달가의 처 음씨 

 

 

<달가達賈>의 처 음씨(陰氏)는 상국(相國) <음우陰友>의 딸이다.

 

신장이 7척이요 얼굴은 붉은 대추(重棗)와도 같았는데

능히 장창(長槍)을 쓸 수 있었다.

 

일찌기 <달가達賈>를 따라 출전(出戰)하여 적을 베고 공을 세워서

봉작(封爵)을 받고 장군(將軍)이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늘 베치마(布裙) 차림으로 노복 무리들과 더불어 밭에 종자를 심으며 집안에 말하기를

 

“농사란 천하의 근본이다. 비록 재상의 처(妻)라 해도 알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왕이 일찍이 미행(微幸)하여 그 장원에 이르렀는데

하늘에서는 바야흐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달가達賈>와 음씨는 진탕에 서서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로 종묘(種苗)를 하느라

분주하여 어가(駕)가 다다른 것도 알지 못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국왕의 제매(弟妹)가 어찌 수고가 이와 같은가?”

 

음씨가 말했다.

 

“천자도 친히 밭을 갈아(親藉) 백성에게 보이는데 하물며 제매(弟妹)이리까?”

 

왕은 음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궁중에 비록 미인이 많으나 너와 같은 자는 없다.

이 저녁에 한번 행(幸)할 수 있겠느냐?”

 

음씨가 말하되

 

“여자는 정절을 귀하게 여기니 비록 천자라 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형제의 처(妻)이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크게 부끄러워 말하되

 

“내가 특별히 농담한 것뿐이니 누이는 용서하라.”하였다.

 

음씨 가로되

 

“천자는 농담(戱言)이 없습니다.

 

만약 왕명을 좇는다면 부정(不貞)이고,

왕명을 좇지 않는다면 불충(不忠)이니 이것이 첩의 어려움입니다.

 

만약 행(幸)한다면 난륜(亂倫)이고,

행(幸)하지 않는다면 식언(食言)이니 이것이 왕의 어려움입니다.

 

어찌 말하기가 쉽겠습니까?”

 

<달가達賈>가 말했다.

 

“불충(不忠)이 부정(不貞)보다 크니 너는 마땅히 수행(幸)을 받으라.”

 

왕이 말했다

 

“내가 차라리 식언(食言)을 할지언정 어찌 난륜(亂倫)의 이름을 받겠는가?”

 

<달가達賈>가 말했다.

 

“왕(王)이라 함은 참말(信)인 것으로 식언(食言)은 중대합니다.”

 

끝내 음씨로 하여금 목욕하고 수행(受幸)토록 하였다.

 

왕이 탄식하여 가로되

 

“말 한마디의 어려움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누이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형제의 정은 사사로이 다를 바 없고, 누이는 난륜한 것이 없으니 나를 꾸짖으라.”

 

음씨가 말했다.

 

“한번 동침은 백년부부입니다.

 

지금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첩은 이로부터 부왕(夫王)을 섬길 것입니다.

 

폐하는 마땅히 미녀를 택하여 <달가達賈>의 처로 삼아야 옳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장녀 다씨(多氏)를 <달가達賈>의 처로 하였다.

 

다씨(多氏)는 <돌고咄固>의 포매(胞妹)였다.

 

어질고 아름다운 까닭에 <치갈雉葛>이 첩으로 삼고자하여

여러 차례 고씨에게 말을했었다.

 

이제 <달가達賈>의 처가 되기에 이르자 더욱 질투심을 갖고

불령지도(不逞之徒){불량배}와 더불어 은밀히 죽여 없앨 것을 모의했다.

 

급기야 왕이 병질로 눕게 되자 그 모의는 더욱 급박해졌다.

 

 

 

 

5. 서천대제 <약우>의 죽음 

 

 

<달가達賈>의 신하 <선옹仙翁>이 <달가達賈>를 설득해 말했다

(선옹은 주유의 손자 주선의 아들이다)

 

“지혜로운 자는 선제(先制)합니다.

 

지금 <치갈雉葛>이 무고히 우리 군(君)을 죽이려하고

대왕은 병질에 빠진지가 수삭(數朔)이니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습니다.

 

우리 군(君)은 이때로써 군사를 이끌고 입궁하여 군측(君側)의 간신을 제거하고

<돌고咄固>태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가히 국가로 하여금 근심을 없애고

군(君)이 안전할 수 없습니다.”

 

<달가達賈>는 말하되

 

“내가 천하에 중시되는 까닭은 장의충군(仗義忠君)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스스로 역모를 꾀한다면 위로는 형왕(兄王)의 병을 더하고

아래로는 국민(國民)의 의를 저버림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선옹>은 탄식하여 말하되

 

“다만 선(善)으로써 악(惡)을 도울 뿐이니 저는 떠납니다.”

 

하고는 마침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치갈雉葛>의 신하 <원항猿項>이 기뻐하며 말했다.

 

“안국군에게 <선옹>이 없으니 쉬워졌을 따름입니다.”

 

왕은 병이 매우 깊어지자 <달가達賈>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돌고咄固>태자가 입내(入內)하였으나 우씨가 그를 저지하였다.

 

거짓으로 조서(詔)를 칭탁하여 <달가達賈>의 병권을 남김없이

우씨의 형제 평자(枰刺)에게 옮기게 했다.

 

<달가達賈>의 신하 <이경以竟>이 <달가達賈>에게 간했다

 

“지금 왕의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데 홀연 병권을 외척에게 옮기니

필시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쥐고 있으면서 변황을 기다리소서.”

 

<달가達賈>가 말하되

 

“내가 병권 때문에 수후(嫂后)에게 밉보인 까닭이다.

만약 지금 주저하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노여움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

 

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서 넘겨주었다.

 

<이경以竟>은 통곡(哭)하며

 

“호랑이가 이와 발톱이 빠지면 사람들 모두가 잡아 묶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달가達賈>의 입내(入內)를 기다리며 여러 번 재촉을 했으나 오지 않자

마침내 “달가!” “달가!”하고 부르짖다가 붕하였다.

 

춘추 53세에 재위는 23년이었다.

 

 

 

 

6. 치갈의 즉위와 달가의 죽음 

 

 

우씨(于氏)는 이에 <치갈雉葛>을 세워 대맥대왕(大貊大王)으로 삼았다.

 

때는 수서(水鼠,임자 292년)의 중추(8월)였다.

 

임자 3월에 <문천門天>을 태보(太輔), <상루尙婁>를 우보(右輔),

<가방稼方>을 좌보(左補)로 삼았다.

 

<치갈雉葛>은 이에 우씨(于氏)를 태후(太后)로 삼고 연씨(緣氏)를 후(后)로 삼고,

5부(部) 37국(國)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3월에 <달가達賈>에게 죽음을 내리되

 

“안국군(安國君)은 오래도록 병권을 장악하면서 안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당을 결성해 나라를 위태롭게 한 까닭에 대의멸친(大義滅親)한다.”라고 하였다.

 

<이경以竟>은 <달가達賈>에게 출분(出奔)할 것을 권하였으나 <달가>는 말하되

 

“나는 형왕(兄王)을 따라 순사해 죽는 것이 진실로 소원이다.”

 

하고 곧 조용히 자진하니 사자(使者)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왕은 달가의 처 다씨(多氏)를 소후(小后)로 삼고

그 전처 음씨(陰氏)를 <원항猿項>의 처로 하였다.

 

음씨(陰氏)가 말했다.

 

“나는 선왕(先王)과 안국군(安國君)의 대은(大恩)을 받았다.

이제 두 지아비의 상(喪)을 입어 빈소를 지키는 몸이니 다시 결혼할 수는 없다.”

 

<원항>이 협박하여 말했다.

 

“네가 만약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안국군의 모든 자식들을 죽일 것이다.”

 

음씨(陰氏)의 아들 <숙菽>이 권하여 말했다.

 

“성인 또한 시변을 추찰한다 하니 무의(毋宜)하더라도 권도를 좇아 원수를 갚으소서.”

 

음씨(陰氏)가 이에 <원항猿項>에게 시집가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음씨(陰氏)의 탈절(脫節)을 애석히 여겼다.

 

 

 

 

7. 상루와 원항의 결탁

 

상국(相國) <상루尙婁>는 음씨(陰氏)의 오라비이다.

 

사람됨이 온근(溫謹)하고 규각(圭角)이 없었으며

사람을 잘 영접하여 그 뜻을 주재하니 우태후(于太后)와 왕(王)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음씨(陰氏)에게 힘써 권하며

 

“안국군(安國君)의 모든 자식들과 우리 집안의 안위가 너의 한 혼사에 달려있다.”

하니 음씨는 흐느껴 울면서 그를 따랐다.

 

<원항>은 크게 기뻐하여 <상루>에게 말했다.

 

“이로부터 형제가 되어서 천하를 함께합시다.”

 

<상루>가 말하기를

 

“우리 장군(將軍)은 좋은 아우이니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원항>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서 오로지 권도와 속임수(權詐)로 발신(拔身)한 자이니

<상루尙婁>와 더불어 결친(結親)을 하게 되자 비로소 그 마음이 흡족하였다.

 

안국군(安國君)의 옛 신하(舊臣)들과 <돌고>태자의 가인(家人)중에

많은 이들이 <원항>과 척을 지어 원수가 되니

<상루>는 그들을 어루만지며 다독거렸다.

 

 

 

 

8. <을불>과 <초랑>의 사랑

 

<상루尙婁>의 아들 <상보尙寶>에게 딸이 있어 이름을 <초랑草娘>이라 했는데

매우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였다.

 

<을불乙弗>이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냇가에서 만나보고는

기뻐하여 함께 <상루尙婁>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尙婁>의 처 현씨(玄氏)를 보고 처(妻)로 맞게 해줄 것을 청하자

현씨(玄氏)는 어리다하여 그를 사양했다.

(을불 15살, 초랑13살)

 

<을불乙弗>은 연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매일같이 와서 놀며

혹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가고, 혹은 밤이 깊어 이르기도 했다.

 

<초랑草娘> 역시 <을불乙弗>을 사랑하여 서로 끌어안고 떨어지길 싫어했다.

 

현씨(玄氏)는 이를 민망히 여겨

<초랑草娘>의 어머니 부씨(芙氏)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했다.

 

부씨(芙氏)는 부드럽고 어질어서 그들의 정분을 금할 수 없자

마침내 밀통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을불乙弗>은 <초랑草娘>과 공모하여 담장 밖에 사다리를 내리고

밤이면 와서 자곤했다.

 

부씨(芙氏)는 이를 알았으나 차마 금하지 못했다.

 

 

 

 

9. 곡림대전과 <돌고>의 죽음

 

이때에 <모용외慕容廆>는 왕(王)이 새로 서서 숙부 <달가達賈>를 죽여

국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왔다.

 

장군(將軍) <우평于枰>이 싸웠으나 패배하자 경도(京都)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왕은 신성(新城)의 군사가 정예하고 양곡이 풍족하므로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했다.

 

출행하여 곡림(鵠林)에 이르렀는데

모용외는 왕이 나온 것을 알고 경도를 핍박하지 않고

곧장 정기(精騎)를 이끌고 왕을 추격했다. 뒤쫓아 장차 미치게 되었다.

 

왕은 화가 임박하자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홀연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있어 왕을 마중하기위해

5백기를 영솔하고 나왔다가 적과 조우하자 일제히 그들을 분격(奮擊)하였다.

 

<모용외>는 대비가 있는 줄 알고 후퇴하였다.

 

<돌고>태자 또한 <우자于刺>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모용외>의 후미를 쳐서 대파(大破)하니 <모용외>는 마침내 퇴각하여 물러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고노자高奴子>의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하고

곡림(鵠林)을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군신(群臣)들이 <우평于枰>의 군사가 패한 죄(罪)를 묻고자하며,

또 <돌고>태자의 공(功)을 표창할 것을 청하자 왕이 말했다.

 

“승패는 일시의 운(運)이요,

충심(忠心)의 다과(多寡)에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복론하지 말 것이다.

 

또 <돌고咄固>는 내가 일찍이 그에게 준 바 없는 병력을 거느렸노라.

 

창황한 시기를 맞아 제군(諸軍)이 추대한 바 그리 되었다하나

나는 과연 그것이 충심(忠心)을 가지고 그런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돌고咄固>를 추대한 장수들은 모두 대사(臺司)에 내려 이를 심문하라.”

 

 

<돌고咄固>가 <방회方回>에게 물었다.

 

“형왕(兄王)이 병력을 거느린 일로 나를 의심하니 나는 어찌 처신해야 마땅하겠소?”

 

<방회方回>가 말했다.

 

“마땅히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들어앉아 삼가고 조심하십시오.”

 

그때에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와 처 을씨(乙氏), 누이 다씨(茶氏)는

모두 총애가 쇠하고 오직 우태후(于太后)가 낳은 <돌고>의 딸 탐씨(耽氏)만이

그를 구하고자 힘써 우태후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상국(相國) <상루尙婁> 또한 말했다.

 

“<돌고咄固>는 난국(難)에 임하여 위급(急)을 구하느라

미처 명을 받들지 못하고서 기병(起兵)한 것이니 사사로운 뜻은 없었습니다.

공은 크고 죄는 적으니 청컨대 우애지정(友愛之情)으로써 그를 관대히 용서하소서.”

 

왕은 노하여 말했다.

 

“앞서 <달가達賈>가 불궤(不軌)할 때 경(卿)은 주살해야 된다는 말 한마디 없다가

이제 <돌고咄固>를 위해 변호하니 경 역시 <달가>의 부류(流)가 아닌가?

 

<돌고>는 겉으로 꾸미고 안으로 음험하여

내 모후를 증(烝)해서 딸 탐씨(耽氏)를 낳았건만

국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어질다고 한다.

 

<달가>의 무리가 나를 폐하고 그를 세우려한지가 오래 되었도다.

 

지금 <달가>가 비록 주살되었다하나

그 무리들이 산재하여 언제 변을 일으킬지 몰라 짐은 마음이 불안하다.

 

화근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재앙을 멈춘단 말인가?”

 

<상루>는 황공하여 땀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두드려 사죄하였다.

 

<원항>이 말했다.

 

“상국의 충심은 신(臣)이 명백히 아는 바입니다.

폐하의 우애지도(友愛之道)를 위해서 특별히 <돌고咄固>를 구하고자 했을 따름이니,

만약 <달가達賈>와 같은 마음이라면 신의 처(妻)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왕은

 

“상국의 마음은 내가 태자 때부터 알고 있으나 오늘의 말은 뜻밖에 나온고로

특별히 그를 시험했을 따름이다.”

하며 술을 내리도록 명하고 그를 위로하고서 나갔다.

 

 

 

10. 을불의 도망

 

 

그 때에 <을불乙弗>은 집안의 화(禍)가 임박했음을 모르는 채

<초랑草娘>에 대한 애정에 빠져서 매일 밤으로 상국(相國)댁의 담장을 넘고,

부씨(芙氏)의 침방(寢房)에 들어가서 <초랑草娘>과 더불어

무산(巫山)의 운우를 희롱하고, 어수(魚水)의 동락을 탐닉하였다.

 

이날 밤에 성긴 비가 흩뿌리며 가을 바람소리가 정원 나무에 소란스러웠고,

이따금씩 뇌성(雷聲)소리가 은은히 원근에 울려 퍼졌다.

 

부씨(芙氏)는 당(堂)안에 비단 금침을 깔고서

<초랑草娘>의 머리를 빗기고 연지(臙脂)를 바르며 그를 기다렸다.

 

갑자기 <을불乙弗>이 언 손에 입김을 불며 들어서는데

얼굴에는 우울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초랑草娘>이 좇아나가 그를 안고 당(堂)안으로 맞아들이며 물었다.

 

“낭군은 무슨 일로 근심합니까.”

 

<을불>이 말했다.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여 나의 부군(父君)을 참소하니 화(禍)가 멀지않은 곳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즐길 날이 많지 않은듯하여 두렵구나.”

 

부씨(芙氏)가 잔에 술을 따라 내밀며 그를 위로하였다.

 

“태자는 근심하지 마시오. 우리 아버지 상국(相國)이 반드시 그를 구할 겁니다.”

 

<을불乙弗>은 적이 마음이 풀어져서 <초랑>을 안고 금침으로 들어갔다.

 

혹은 희롱하며 혹은 농탕하였다.

 

부씨(芙氏)는 등불을 돋우고 그 앞에서 <을불乙弗>의 옷을 마름질하며 말했다.

 

“이옷을 다 만들면 마땅히 좋은 사위, 좋은 딸과 더불어

수왕(樹王)께 빌러 갈 것이로다.”

 

<을불乙弗>이 물었다.

 

“무슨 일을 빌러갑니까?”

 

부씨(芙氏)가 말하길

 

“좋은 손주 낳기를 빌지요.”

 

<초랑>이 말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합니까?

시작해야 할 일이라면 나는 부군(父君)의 무사를 빌고 또 한 가지 일을 빌고 싶습니다.”

 

부씨가

 

“무엇이냐?”하고 묻자 <초랑>은 말하지 않았다.

 

<을불>이

 

“장모(妻母)는 곧 내 어머니인데 말하는데 무얼 꺼리는가?”하자

 

<초랑>이 이에 기원하여 말했다.

 

“우리 낭군 빨리 왕위(王位)에 올라서 이 몸을 후(后)로 봉하소서.”

 

<을불>이 이어서 말했다.

 

“장모(妻母)를 태후(太后)로 봉하소서.”

 

부씨(芙氏)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남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그때 갑자기 차마(車馬)의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시비가 들어와 상국(相國)이 돌아왔음을 고했다.

 

부씨는 당황하여 급히 나가서 현씨(玄氏)와 더불어

<상루尙婁>를 당(堂)으로 맞이해 들이며

조복관대(朝服冠帶)를 벗기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루>가 말했다.

 

“초아(草兒)는 어디에 있길래 나와서 할애비를 보지 않느냐?”

 

부씨가 말했다.

 

“갑자기 이처럼 추워져서 일찍 재운 까닭에 미처 데리고 나오질 못했습니다.”

 

<상루>가 말하기를

 

“늙어가며 유일한 낙이라고는 초아(草兒) 하나뿐인데

어째서 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재웠단 말이냐?

오늘 밤 늙은 애비는 마땅히 초아(草兒)와 함께 자야겠노라.”

 

현씨가 웃으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젖먹이가 아닌데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는 오직 <을불乙弗>태자일 따름이니

속히 혼사를 치르어 그 마음을 편케 해야 할 것이다.”

 

<상루>는 무연(憮然)히 말하였다.

 

“<을불>의 혼사는 깨졌으니 말하지 마라.

 

오늘 밤 황상(皇上)은 <돌고咄固>태자에게 죽음을 내리고,

<을불乙弗>은 삭탈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을불>의 어머니 을씨(乙氏)를 <우탁于卓>의 첩으로 삼고,

<돌고>의 어머니 고씨(高氏)를 내 첩으로 삼은 까닭에

내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서 <을불乙弗>의 목숨이 심히 위태롭거늘

어찌 한가하게 혼사를 말하겠는가?”

 

부씨(芙氏)는 이 말을 듣고서 실신(失神)하여 바닥에 엎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씨(玄氏)가 말하였다.

 

“그대는 상국(相國)이 되어서 어찌 죄 없는 태자를 죽게 했는가?”

 

<상루>는 말했다.

 

“내가 비록 힘써 구하고자 했으나 황상이 불허하니 어찌하랴.

 

내 <달가達賈>가 제거되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상국이 되고 싶은 뜻이 없었으나

한번 스쳐본 화(禍)의 불측(不測)함이 두려웠던 까닭에 사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오늘 밤에 이르러 이러한 대참사를 보게 되니

내 마음은 재가 되고 혼백은 죽노라.

 

내 어찌 녹을 탐하는 자이겠는가?

 

초아(草兒)를 생각하면 사랑스런 모습이라,

 

능히 순국(殉國)하여 아이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인 것이다.”

 

현씨(玄氏)는 다만 “네!” “네!”하면서 부씨(芙氏)를 부축해 일으키고 말했다.

 

“마땅히 이때는 밖으로 기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지니

너는 자중하고 네 아버지께 술을 내어가야 옳을 것이다.”

 

부씨는 눈물을 수습하며 술상을 차려 올렸다.

 

<상루>는 술에 취하자 부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만사는 재천이니 억지로는 할 수 없다.

<을불>의 일은 모름지기 네가 초아에게 좋게 말해서 끊도록 하라.”

 

부씨는 울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스스로 사사롭게 기혈(氣血)을 교합하여 농밀하게 되었으니

끊기가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상루>는 놀라서 말했다.

 

“네가 내 며느리가 되어서 어찌 아이를 이와 같이 가르쳤더냐?”

 

부씨가 말하길

 

“금지해도 듣지않으니 어찌합니까?

현사(玄事)가 어렵다는 것은 반드시 이를 말함입니다.”

 

<상루>가 말했다.

 

“주상이 이를 알면 우리 가족들은 안전치 못하니

마땅히 <을불>을 멀리 도피시켜 소재를 모르게 한 연후에야 안전하리라.”

 

 

이에 심복 종(奴) 두 사람을 불러 세우니

그 한사람은 북부(北部)에서 죽을죄를 지은 것을

<상루尙婁>가 숨겨줘 살아난 까닭에 이름을 <재생再生>이라 했고,

또 한사람은 그 어머니를 토호(土豪)에게 빼앗기고

그 아버지가 장차 살해당하려는 것을 <상루>가 구하여 살려준 자로서

이름을 <담하談河>라고 했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을불乙弗>을 유배 인으로 변장시키고

비류(沸流)로 달아나 <상루>의 먼 친족인 <음모陰牟>의 집에 이르자

거짓말로 <상루尙婁> 집안의 죄인이라 칭하고 그를 맡겼다.

 

때는 수우(水牛,계축 293년)의 9월 추(秋) 5일의 심야(深夜)였다.

(을불 16살)

 

하늘은 칠흑같이 어둡고 궂은비는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초아(草兒)는 <을불乙弗>을 안고서 호곡하다가 이별을 참지 못하고 난간에 쓰러지니

 

<을불>이 말했다.

 

“십년만 나를 기다리면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있으리라.”

 

초아가 말했다.

 

“비록 백년이라 해도 기다릴 것이니 심려 말고 가소서.”

 

이튿날 왕은 <을불>을 찾다가 행방이 묘연하자 그를 수색하고자 했다.

 

때에 <우탁于卓>은 을씨(乙氏)의 미색을 좋아하여

그녀를 찾아 첩으로 삼고 함께 동침하려 하였다.

 

을씨가 노하여 말했다.

 

“나는 종실(宗室)의 딸이다. 오직 두 왕과 태자에게만 소천(所薦)되었을 따름이다.

지금 비록 몰락했다고 하나 어찌 너에게 더럽힘을 당하겠느냐?

조속히 죽여야 가할 것이다.”

 

<우탁>은 그 굽힐 수 없음을 알고 후(后)의 예로써 배알하였다.

 

“신이 어찌 감히 강압하겠습니까?

 

다만 현사(玄事)에는 귀천이 없다하니

소후(小后)께서는 신의 연모지정을 가엾이 여기고 한 번의 동침을 허락해 주신다면

물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어찌 <을불>태자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헛되이 죽으려 하십니까?

 

신이 만약 그를 구하여 안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장성함을 기다렸다가 설욕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자복(雌伏) 회계(會稽)는 이를 비유해 이르는 말이니

소후(小后)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을씨(乙氏)가 말했다.

 

“네가 만약 그 아이를 구해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가히 더불어 동침하리라.”

 

<우탁于卓>은 이에 힘써 왕에게 간하였다.

 

“<을불乙弗> 꼬마가 비록 달아났다하나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하늘(天)은 진살(盡殺)함이 없고,

일(事)은 지나치게 궁지로 모는 것(太窘)을 꺼린다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이에 대연(大宴)을 설(設)하여 군신(群臣)들을 향응하고,

대신(大臣)과 내외친척들을 내정(內庭)에 불러들여 또한 가무(歌舞)를 설(設)하고

5일 동안 야연(夜宴)을 베풀었다.

 

 

 

 

11. <치갈>의 여인이 된 <초랑>

 

왕은 <상루> 집안의 <초랑草娘>이 있다함을 듣고

사람을 시켜 정연(庭宴)에 참석할 것을 재촉했다.

 

<초랑>이 병질로 사양하자 왕은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억지로 일으켜 연회에 나오도록 했다.

 

왕이 그 가희(歌姬)를 보내어 함께 반주하고 노래를 시키니

<초랑>이 억지로 추스리고 발성(發聲)을 하였다.

 

왕이 듣고서 아름답게 여기고는 가까이 오도록 하여 손을 잡고는

 

“상국에게 이처럼 고운 아이가 있으면서 어찌 일찍 궁중에 들이지 않았는가.”

하며 금과 비단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초랑>은 사은(謝恩)하고 귀가했으나 <을불>의 소식을 몰라 즐거운 기색이 없었다.

 

부씨(芙氏)가 위로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치게 상심할 것 없다.”

 

그 후 며칠 안 돼서 홀연 왕이 미행(微行)하여 <상루>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는 크게 놀라서 나와 맞으며 안팎으로 허둥거렸다.

 

왕이 말했다.

 

“짐이 <초랑>이 보고 싶어 왔으니 경은 이를 허물치 말라.”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천한 여식이 추한데다 창졸간에 예를 차릴 줄 몰라

성지(聖旨)를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왕은 웃으며 말했다.

 

“한번 본 이래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었다. 속히 보기를 청하노라.”

 

<상루>는 어쩔 수 없이 왕을 내당(內堂)으로 맞이하고

부씨(芙氏)로 하여금 <초랑草娘>을 단장시켜서 나와 절하게 하였다.

 

왕은 <초랑>을 이끌어 무릎 위에 안고서는 마치 옥(玉)과 같이 아꼈다.

 

<상루>는 부씨로 하여금 술을 내 오게하고 왕에게 말했다.

 

“천한 여식이 성은을 입음이 이와 같으니 신의 집안에 복(福)이옵니다.”

 

왕이 술잔을 잡으며 부씨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하자 부씨가 대답했다.

 

“첩은 상루(尙婁)의 아들 보(寶)의 처(妻)이니 곧 초랑의 어미입니다.”

 

왕은 또한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대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은 까닭에 이렇게 좋은 아이를 낳았구나!”

 

하고는 <상루>에게 물었다.

 

“상보(尙寶)는 어디에 있는가?”

 

<상루>가 대답했다.

 

“신의 아들은 서토(西土)로 출정하여 지금은 <우자于刺>의 군중(軍中)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경의 부자는 짐에게 큰 공이 있으니 덕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구려.

짐은 <초랑>을 후(后)로 삼아서 경의 외손을 빛나게 하고자 하니

경은 그 할아비(祖)가 되어서 나라를 지켜주시오.”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사은(謝恩)하고 부씨에게 명하여 이불을 깔게 하니

곧 <을불乙弗>과 더불어 운우를 즐기던 그 금침이었다.

 

<초랑>은 꿈속처럼 황홀하여 <상루>가 물러가고

부씨가 옆에 시측하여 하의를 벗기는 것도 몰랐다.

 

왕이 손으로 <초랑>의 치마와 띠(裙帶)를 풀고 금침 속으로 안아 들이니

마치 미친 나비가 화심(花心)을 탐하는 듯 백가지 애정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초랑草娘>은 다만 푸주에 들어온 소처럼 희노(喜怒)의 감정을 끊었다.

 

삼십대왕(三十大王)의 장양지경(壯陽之莖)이

이칠(二七)의 소문지애(小門之艾)를 상봉하니

구름은 짙고 비는 진했으며 파도는 높고 소리는 세찼다.

 

왕은 보고 또 얼우고, 얼우고 또 보거늘 <초랑>은 다만 기식이 엄엄해 할 따름이었다.

 

왕은 행(幸)을 마치자 부씨(芙氏)에게 향탕(香湯)을 내오도록 하여

옥체(玉體)를 닦으며 부씨를 끌어안고 희롱하였다.

 

“경은 나이가 몇인가?”

 

부씨가

 

“첩은 이제 설흔 한 살입니다.”하자

 

왕은

 

“나보다 네 살이 적다, 만남이 뒤늦은 게 한스럽구나!”하고는

 

그대로 부씨의 붉은 치마를 헤치고 옥문을 만지려하였다.

 

부씨가 이를 거부하며

 

“첩은 마침 더러운 것이 있어 성수(聖手)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하자

 

왕은 강제로 그것을 취하여 어루만지며

 

“꿩(치갈)을 생각하여 알을 얻는 정인(情因)이 그러하다”

 

하고는 입을 맞추며 색정을 도발하였다.

 

부씨는 얼굴이 불같이 달아올라 크게 콧숨을 토해내며

 

“바라건대 폐하는 첩을 용서하소서.”하였으나

 

왕은 강제로 부씨의 옷을 벗겨 알몸을 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또한 통하였다.

 

<초랑>은 망연자실하여 묵묵히 그것을 바라 볼 따름이었다.

 

왕은 연달아 모녀를 행하고는 피로하여 쓰러졌다.

 

부씨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비녀에게 명해서

치란탕(雉卵湯)을 짓게하여 이를 진공하니

왕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부씨에게 입 맞추며

 

“경은 진정 사랑스럽소!” 하였다.

 

부씨는 입으로 불어 받들어 올리며

 

“모녀의 동방성은(同房聖恩)이 하늘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했다.

 

“초처(草妻)는 오히려 어리니 경이 먼저 내 알(子)을 낳으시오.”

 

부씨는 웃는 눈으로 끄덕거렸다.

 

왕은 꿩(雉)을 씹어 <초랑>에게 먹이고, 알(卵)을 씹어 부씨에게 먹이며

 

“알처(卵妻)는 꿩(雉)을 먹고, 꿩처(雉妻)는 알(卵)을 먹으니 가히 정이 균등하다.”

라고 했다.

 

왕은 다시 <초랑>을 안고 운우를 행하였다.

 

새벽이 되자 닭은 ‘꼬꼬댁. 꼬꼬댁(喔)’ 울어대고 비온 땅은 미끌미끌하였다.

 

왕은 부씨에게 말했다.

 

“국인이 이를 알까 두렵다. 내일 밤 다시 오겠노라.”

 

부씨는 시비에게 명하여 탈것(駕)을 내오게 하고 이마를 조아려 사은(謝恩)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아 일으키고 서로가 옷을 입혀주었다.

 

밖으로부터 <상루>가 들어와 사은숙배하니 현씨(玄氏) 또한 절하고 옆에 시측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고 문을 나서다가 현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좋은 할머니(好祖母)이니 가히 좋은 할아비(好祖父)를 붙들 수 있겠소.”

 

현씨는 이에 <상루>를 붙들고 웃으며 말했다.

 

“첩의 남편은 늙고 박정하여 폐하가 천녀를 아끼심만 못합니다.”

 

왕이 <초랑>을 남겨두고 수레로 들어가자 <상루>가 그 옆에 참승하였다.

 

수레가 출발하려하자 부씨는 <초랑>과 더불어 차전(車前)에 부복하여

 

“성은이 하늘과 같사옵니다”라고 제창하였다.

 

왕은 차마 곧장 출발하지 못하고 다시 <초랑>을 끌어당겨 안고 입 맞추며

 

“나의 처(吾妻)! 나의처(吾妻)!”라고 불렀다.

 

<상루>가 말했다.

 

“하늘이 밝아오니 출발해야 합니다.”

 

왕의 어자(御者)가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궁(宮)으로 돌아갔다.

 

부씨(芙氏)는 초랑을 안고서 입 맞추며 말했다.

 

“우리 딸이 복이 많아 성천자가 강림하셨도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구왕(仇王)이 나를 적셔놔서 걷자니 양다리가 축축한데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기쁩니까?”

 

부씨가 말했다.

 

“주상의 나이 한창이고 양기 위강하여 한번 동침하니 혼이 흩어지고 은공이 깊거늘

너는 어찌 구왕(仇王)이라 하느냐?”

 

<초랑>이 말했다.

 

“나의 남편은 <을불>태자입니다.

구왕(仇王)이 비록 장양(壯陽)해도 내가 어찌 동(動)하겠습니까?”

 

부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왕의 처가 되게 해 달라고 빌은 까닭에

신(神)이 왕경(王莖)으로써 너에게 주었거늘

너는 어찌 감사하지 않고 곡정(曲情)하느냐?

 

구사지중(九死之中)의 을불태자를 구하는 것은

오직 왕에게 어떻게 교태를 부리느냐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초랑>은 이내 크게 깨닫고 말했다.

 

“과연 어머니 말과 같습니다.

내 마땅히 왕에게 교태를 부려 나의 남편을 구할 것이로다.”

 

부씨는 웃으면서 <초랑>을 끌어당겨 그 옥문을 만지며 말했다.

 

“이 문이 왕경(王莖)을 머금고 천음(濺淫)할 시에 또한 미상불 환희하였으렸다!”

 

<초랑>이 웃으며 어머니를 때렸다.

 

“무슨 음담을 그리 심하게 합니까?”

 

부씨 말하기를

 

“내가 네 덕택에 성양(聖陽)을 모셔서 쾌미(快味)를 맛볼 수 있었으니 잊을 수가 없다.”

 

<초랑>은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고백하였다.

 

“왕의 양미(陽味)인즉 맛있었습니다.”

 

부씨는 웃으며 <초랑>에게 입 맞추고 말했다.

 

“대웅(大雄) 복자(伏雌)를 즐거워하지 않을 여자는 없다.

너 또한 여자이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은공을 생각하고 성왕(聖王)을 구왕(仇王)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초랑>은 혼란하여 떠듬떠듬 말했다.

 

“성왕(聖王).! 성왕(聖王).! 그렇다면 을불(乙弗)은 버려야하는가?

성왕(聖王)을 사모해야 하는가?”

 

부씨는 이에 <초랑>을 안고 탕에 들어가 몸을 씻고 나서

현씨(玄氏)와 <상루尙婁>를 배견하고 사은하였다.

 

“부모님의 은혜가 무거워 이러한 영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상루>는 왕을 전송하고 돌아와서 아직 조복을 벗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부씨와 <초랑>을 좌우로 끌어당겨 어루만지고 입 맞추며 말했다.

 

“우리 선군(先君)께서 다년 간 적덕(積德)하시며 늘 우리 형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이 三世에 상(相)이 일어나고 반드시 후비(后妃)를 낳으리라’ 했는데

과연 너희들이 그러하다.

이로부터 입궁하면 우리 부부를 효(孝)로써 대함이 불가하니,

집에 있을 때 진열(盡悅) 진효(盡孝)함으로써 늙은 애비를 위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초랑>을 안고 그 아버지 <음우陰友>의 묘(廟)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손녀 <초랑草娘>이 이제 주상의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곧 우리 아버지의 덕(德)입니다.”

 

하고는 묘실 안에서 춤을 추고 또 현씨와 부씨에게도 명하여 춤을 추게했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상을 안고 누우면서 그 양물을 보니 지푸라기 같았는데

할아버지는 어찌 기뻐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까?”

 

<상루>는 자세를 바꿔 앉아 부복하며

 

“우리 딸은 다른 날의 후(后)인고로 교오(驕傲)함이 이와 같으니,

노신(老臣)은 비록 할아비(祖)이로되, 또한 신하(臣)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초랑>이 <상루>를 안아 일으키며

 

“그대는 미쳤음인가? 어찌 이런 꼴을 하오?”하자

 

<상루>는 크게 기뻐하며 다시 <초랑>을 안고 춤을 추다가 묘(廟)에서 나왔다.

 

종(奴)에게 명하여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집안(宅中)의 신(臣) 노(奴) 처(妻) 녀(女)에게 하사하고 다함께 경축했다.

 

왕이 궁중으로부터 비단(帛緞) 50필, 포단(布緞) 3백필과,

<초랑草娘>과 부씨(芙氏)의 차마(車馬)와 자의(紫衣), 금관(金冠)을 내려 보냈다.

 

<상루>는 가인(家人)들을 모아 공수(共壽)하고

그 포(布)를 친척과 오랜 친구(故舊)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이 이로부터 혹은 매일 밤으로 혹은 사 오일 밤 간격으로 와서 행(幸)하니

<초랑>의 총애가 높아지고 은사가 깊어졌다.

 

<초랑> 역시 운명의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곱디곱게 진정을 다했다.

 

 

 

12. <상루>의 <창조리> 천거

 

 

이때에 왕후(王后) <연안椽眼>은 부마 <연나(那>의 딸이었다.

 

나이 30으로 <연椽>과 <안顔>태자를 낳았고,

또 왕녀 2인을 낳았는데 성품이 유순하고 투기하지 않았다.

 

<우탁>의 딸 산씨(山氏)와 왕매(王妹) 다씨(多氏)는

모두 나이 이십 육,칠세로 총애가 처음과 같지 않았다.

 

왕모 <우于>태후는 나이 51세로 색(色)이 한창 왕성한지라

왕이 매일 밤으로 증(烝)하며 총애가 가장 많았다.

 

서모 해포씨(解蒲氏)는 나이 29세로 왕이 태자 때부터 통정하여

총애가 쇠하지 않고 이에 이르렀으나

<초랑>이 새로 총애를 받자 모든 방이 다 공허해졌다.

 

우태후는 왕에게 아부하려는 뜻에서 속히 궁중으로 맞아들일 것을 권하였다.

 

왕은 거처할만한 궁이 없으므로 장작령(匠作令)에게 명하여

신궁(新宮)을 크게 일으켰는데 사치가 극심하였다.

 

<초랑>을 맞아들여 택일하고 책립하여 차비(次妃)로 삼으니

지위가 연씨(緣氏)의 다음이요, 제후(諸后)의 위(上)였다.

 

우태후(于太后)는 “초후(草后)는 내 딸이다.”하며

매번 초후(草后)와 함께 같은 이불에서 왕의 총행을 받았다.

 

이에 초후(草后)의 총권(總權)이 내외(內外)를 기울어지게 했다.

 

왕은 다시 <상루>의 정원에 부씨궁(芙氏宮)을 짓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하사했다.

 

부씨(芙氏)와 음씨(陰氏)의 자제들을 발탁해서 모두 추요(樞要)에 늘여 세우고

부씨의 아비 <포布>를 남부패자(南部沛者)로 삼았다.

 

<상루尙婁>는 상주하여 말했다.

 

“노신의 영예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원컨대 치사(致仕)하고 병을 요양코자 합니다.”

 

왕이 말했다.

 

“경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祖)요. 스스로 태공(太公)이 되어도 가할 것이나

상국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오?”

 

<상루>가 말했다.

 

“신(臣)의 처 현씨(玄氏)는 두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창협倉夾>의 집으로 개가(改嫁)하여 자랐습니다.

 

<창협>의 아들 <조리助利>는 곧 신의 처(妻)의 포제(胞弟)입니다.

 

충직하고 재주가 있어 신이 일찍이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로 삼았는데

훌륭한 치적이 많습니다.

 

국상(國相)을 맡음에는 이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왕이 말했다

 

“내 할머니(祖母)의 포제(胞弟)요.

먼저 대주부(大主簿)로 진작(進爵)시켜 입조(入朝)케 함이 가할 것이오.”

 

<창조리倉助利>가 명을 받들고 나아와 알현하자

왕은 <상루>의 장원 옆에 새 집(新宅)을 하사하고 그를 권려하였다.

 

“이른 새벽 마땅히 상(相)이 됨으로써 짐의 몸을 보필할 것이다.”

 

 

이때에 부씨(芙氏)가 왕의 아이를 배었다.

 

왕은 그녀를 심히 아껴서 <상보尙寶>로 하여금

따로 왕의 누이(姉) 불씨(弗氏)를 아내로 맞게하고,

부씨(芙氏)를 소후(小后)로 세워

그 지위를 초후(草后)의 아래에 두고자 하니 (모두가) 난감해 하였다.

 

<창조리倉助利>가 간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그 딸을 납(納)하시고 다시 그 어미까지 납(納)하여

국인들이 음란을 즐긴다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어미를 아래에 두고 딸을 위에 두십니까?”

 

왕이 말했다.

 

“이미 내가 그르쳤다. 짐의 과오로다.”

 

<창조리>가 말했다.

 

“현사(玄事)의 어려움은 반드시 귀천(貴賤)이 동일합니다.

 

폐하께서 부씨를 행(幸)함은 일시의 취흥에 불과한데 하필 구구하게 후(后)로 세워서

만민(萬民)으로 하여금 똑같은 잘못을 바라보게 하십니까?

 

은밀한 색공(色供)으로 삼음이 가할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중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씨(芙氏)가 왕자 <진津>을 낳았다.

 

<상루>가 말하기를

 

“왕자의 어머니가 신하의 집에 거(居)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입궁해야 마땅한 일이나

봉작(封爵)이 없으니 어찌할꼬!”

 

<창조리>가 말했다.

 

“천첩(賤妾)의 자식이 어찌 빠짐없이 왕통(王統)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상국께서 음사(淫事)로써 왕을 돕는 것은 불가합니다.”

 

<상루>는 사과했다.

 

“내가 실수했노라.”

 

왕이 <상루>에게 말했다.

 

“<창조리>는 원리원칙(正則)대로 똑바르니 거의 인정(人情)이 아니오.”

 

<상루>가 말했다.

 

“천하에 왕 노릇하는 자는 부인의 정(情)으로써 정(情)을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정(情)에 이끌리면 법이 해이해지고 백성이 문란해져 구제할 수 없습니다.”

 

왕이 이에 왕자 <진津>을 초후(草后)의 아들로 삼고

부씨(芙氏)를 유모로 삼아서 입궁시키니

군신(群臣)들 모두가 <창조리倉助利>를 두려워하여 감히 간사한 수작을 않게 되고

마침내 조정이 숙연해졌다.

 

왕은 <창조리>가 큰 그릇임을 알고 그를 더욱 무겁게 여겼다.

 

청호(靑虎,갑인 AD294년) 9월, <상루尙婁>가 자택에서 졸(卒)하였다.

 

왕은 애도하며 그를 태공(太公)의 예(禮)로 장사하였다.

 

갑인 9월, <연방椽方>을 좌보(左輔)로 삼고, <우평于枰>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창조리倉助利>를 맞아 상국(相國)으로 삼고 노비(奴婢)를 더하였다.

 

<창조리>가 말했다.

 

“상국(上國)이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입니다.

 

위엄이 없으면 서지 못하니

원컨대 폐하의 보검을 얻어 명령을 듣지 않는 자를 참하고자 합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곧 죽려검(竹呂之劒)을 하사했다.

 

<창조리>는 이에 검을 들어 군신(君臣)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경계하고 분발하라!”

 

 

 

 

13. <원항>의 죽음

 

때에 알자(謁者) <원항猿項>은 왕의 총애를 믿고 대신들을 능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안국군 <달가達賈>의 처 음씨(陰氏)는 달가의 자녀들을 이끌고

<원항>에게 재가함으로써 <달가>의 집안을 보전했는데,

겉으로는 교태롭게 굴었으나 기실 속으로는 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왕은 <돌고>태자의 어머니 고씨(高氏)를 <상루尙婁>에게 내렸는데

<상루>가 받지 않자 <원항>이 스스로 이를 취하였다.

 

고씨(高氏)가 말했다.

 

“너는 궁노(宮奴)의 자식으로써 어찌 감히 선왕(先王)의 후(后)에게 행음(淫)하느냐?”

 

<원항>이 말하길

 

”솥 안의 고기가 감히 후(后)를 말하는가?“ 하며

 

강제로 증(烝)하고는 고역(苦役)에 내몰아 일을 시켰다.

 

음씨(陰氏)가 애처럽게 여기고 그를 두터이 대우하며 말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용(龍)입니다. 어찌 스스로를 괴롭히며 적에게 항거하십니까?”

 

고씨가 말했다.

 

“나는 이미 늙어서 다만 이 문을 더럽힐 따름이지만

그대는 아직도 젊으니 도적의 자식을 낳게 된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음씨가 말했다.

 

“과연 나는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마땅히 압살(壓殺)할 것입니다.”

 

계집종이 이 말을 엿듣고 <원항>에게 일러 바쳤다.

 

<원항>이 장차 고씨(高氏)를 포박해서 형(刑)을 가하려 하자

음씨(陰氏)가 노하여 말했다.

 

“내가 분을 참고 너를 따른 것은 집안을 보전코자 함이었다.

 

네가 지금 선왕의 여후(女后)를 능욕하고 <달가>의 몽녀(冡女)를 간음하니

네 음욕이 장차 무슨 수로 틀어 막히겠느냐?”

 

이에 장창(長槍)을 휘두르며 나아가니 <원항>이 수하(奴)로 하여금 대적토록 했으나

모두 피살당하고 격살되었다.

 

<원항>이 놀라서 우림위(羽林衛)로 달아나 왕명을 빙자해 말했다.

 

“<달가達賈>의 족당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병력을 발하여 그를 잡아야 할 것이다.”

 

<창조리>의 아들 <멱覓>이 당시 위두(衛頭)가 되어서 말했다.

 

“상국(相國)의 명(命)이 오지 않았으니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원항>이 말하길

 

“상국이 왕과 더불어 숙귀(熟貴)하다하나 왕명을 듣지 않는 자는 참해도 가할 것이다.”

 

<멱覓>이 말했다.

 

“그대는 왕명이라 말하나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무슨 수로 왕명임을 알겠습니까?”

 

<원항>이 말했다.

 

“내말이 곧 왕명이다.”

 

<멱覓>이 노하여 말하길

 

“신하로써 왕을 칭하는 자는 역적(賊)이다.”

 

하고는 그를 포박해서 상부(相府)로 보냈다.

 

<창조리>는 이내 그 왕명을 빙자한 진상을 알고 대사(臺司)에 물었다.

 

“왕명을 빙자하여 병력을 동원한 죄는 무엇이냐?”

 

“법은 마땅히 참형입니다.”

 

<창조리>가 이에 참수할 것을 명하자 서리(吏)가 말했다.

 

“일찍이 주상이 조서(詔)를 내리되

‘<원항>은 비록 죽을죄가 있어도 마땅히 품신하고 다스리라’ 했습니다.

지금 급거히 죽임은 불가합니다.”

 

<원항>이 웃으며 말했다.

 

“상국은 생사지추(生殺之椎)를 오로지 하고 싶겠지만 그게 되겠는가?

내 마땅히 이 한을 갚아 주겠노라.”

 

<창조리>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려(竹呂)를 받을 시에 <원항>을 제외하라는 명은 없었으니

가히 이로써 벨 수 있느니라.”

 

<원항>은 안색이 변했고 그의 무리는 궁으로 달려 들어가 왕에게 고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창조리>는 그 사자를 문밖에 세운 채 <원항>의 목을 내걸은 다음 들여보냈다.

 

사자가

 

“<원항>을 구하러 왔는데 지금 이미 효수됐으니 어찌하랴?”하니

 

<창조리>가 말했다.

 

“그대가 오는 것이 더디었네.”

 

왕은 <원항>이 이미 참수된 것을 알고 노하여 말했다.

 

“상국이 나의 심복을 베다니 반(反)하고자 함인가?”

 

초후(草后)가 곁에 있다가 제지하며 말했다.

 

“내가 입궁하기 전부터 이미 <원항>의 흉간(凶干)을 들어왔다.

 

상국은 내 할아버지의 아우인데 어찌 우리 부처(夫妻)를 배반할 리 있으랴.

 

그대(汝)는 <원항>에게 기만된 까닭에 국인들이 그것을 의혹하였노라.

 

상국이 그대(汝)를 위해 적(賊)을 참했으니 또한 경사가 아닌가?”

 

왕은 초후(草后)를 아끼어 “예(唯), 예(唯),”하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즐겁지 않았다.

 

<창조리倉助利>가 이에 <원항>의 무리 52인을 체포해서,

남의 부녀자(婦女)를 강탈하고, 전택(田宅)과 우양(牛羊)을 노략질하고,

조서를 사칭해 칭왕(稱王)하고,

비밀리에 반역을 모의한 정상 12가지를 들어 참수할 죄상으로써 이를 상주하였다.

 

왕은 이에 경악하고

 

“짐은 <원항>이 이와 같이 극악 간흉한 줄 몰랐노라.

우리 처(妻)는 거의 조금도 상국을 의심하지 않았도다.”

 

하며 마침내 <원항>의 처 음씨(陰氏)와 고씨(高氏)를 <창조리>의 처(妻)로 삼고,

그 재산을 남김없이 <창조리>에게 하사하였다.

 

<창조리>가 말했다.

 

“고씨(高氏)는 선왕(先王)의 후(后)이고, 음씨(陰氏)는 나의 형매(兄妹)이니

내가 어찌 강요하겠는가?

 

<달가達賈>는 비록 주살되었으나 죄가 없으니

그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는 그 자녀에게 돌려줘야 가할 것이고,

고씨의 재산 또한 스스로 지니고 생활을 경영함이 가할 것이다.

 

다만 <원항>의 불인(不仁)한 재산은 그 자녀에게 줄 수 없으니

원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돌려주고,

돌려줄 수 없는 것은 공금에 소속(屬公)시켜

애민선정(愛民善政)한 관리(吏)와 충용선전(忠勇善戰)한 무사(士)를 장려할 것이다.”

 

이에 상하가 모두 상국(上國)의 득인(得人)을 칭송하였다.

 

 

 

14. <창조리>의 여인이 된 음씨

 

 

음씨(陰氏)가 <창조리倉助利>에게 말했다.

 

“왕이 첩을 그대의 처(妻)로 명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취(娶)하지 않습니까?

 

<원항>같은 비천한 남편도 나는 왕명을 받들어 취했거늘

하물며 우리 상국(相國)이겠습니까?”

 

<창조리>가 말했다.

 

“나의 처가 비록 병약하나 또한 조강지처입니다.

어찌 버리고 그대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로써 내 처의 비(婢)를 삼는다면 그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바 입니다.”

 

음씨가 말했다.

 

“군자는 명분(名分)이 아니라 도의(道義)로써 교제함이니,

도(道)가 진실로 나에게 있는데 비(婢)라 한들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창조리>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실상은 서로 사모하는 정(情)이 있었다.

 

<창조리>의 처가 그 아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와병한지 여러 해이나 네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음씨는 옛 상국의 딸이고 재색을 아름답게 갖추어 가히 취해야 할 것이나

취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죽어서 네 아버지의 은혜를 갚으리라.”

 

말을 마치고서 곧 숨을 거두었다.

 

<창조리倉助利>가 이에 음씨(陰氏)를 취하여 처(妻)로 삼으니

왕이 주악(樂)과 향연(宴享)을 그 집에 내리고

백관들로 하여금 가서 축하하고 즐기게 했다.

 

음씨가 <창조리>에게 말했다.

 

“내 뱃속에 더러운 물건이 있으니 낳아서 죽여야만

바야흐로 그대와 더불어 동침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리>가 말하길

 

“<원항>이 비록 죄가 있다하나 그 자식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하고 마침내 더불어 동침하였다.

 

음씨는 이에 약을 먹고서 그 태(胎)를 쏟아 버리며

 

“나는 태아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새 남편의 자식을 낳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15. <을보>의 여인이 된 고씨

 

 

이때에 을씨(乙氏)의 아버지 <을보乙寶>는 <돌고咄固>의 장인으로서

오래도록 폄척되어 등용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조리>가 극력 천거하며

그 재주가 좌보(左補)를 맡을 수 있다하자 왕이 그를 허락하였다.

 

음씨는 <을보乙寶>가 상처(喪妻)하고 짝이 없으므로 고씨(高氏)를 권하여

그에게 시집가도록 하였다.

 

고씨(高氏)가 <을보乙寶>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부부(夫妻)가 되어도 <을불乙弗>의 생사를 모르니

살아도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을보>가 말했다.

 

“<을불>은 용의 턱에 호랑이의 두상이니 다른 날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16. <을불>이 <음모>의 집을 나오다

 

그때에 <을불乙弗>은 수실촌주(水室村主) <음모陰牟>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었다.

 

혹은 나무하고, 혹은 밭 갈고, 혹은 짐을 지고, 방아 찧고. 물 길으며

낮으로써 밤이 되도록 계속하였다.

 

여름날에 초택(草澤)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는데 <음모陰牟>의 소처(小妻)가

그 소리를 미워하여 <을불>로 하여금 자지 않고 못 가에 서서 돌을 던져 금하게 했다.

 

<을불>은 피로해서 잠이 드는 바람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알지 못했다.

 

<음모>가 노하여 그를 매질하니 형용은 야위고 수척했으며 의복은 남루하여

다시는 왕자 때의 용모가 없었다.

 

<을불>이 나무에 기대어 탄식을 발하며 말하였다.

 

“내가 왕자의 존귀함으로 토호(土豪)의 손에 욕을 당해 곤액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

 

이에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재생再生>이 그를 구해서 끌어내며 말했다.

 

“일시의 고통을 못 이겨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마소서.”

 

하루는 밭 사이에서 수확을 하는데 멀리 변경을 바라보니

기러기의 슬픈 울음소리에 추성(秋聲)이 바야흐로 완연하였다.

 

이에 <을불>은 짚더미 위에 쓰러져서 누운 채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였다.

 

“서울(京)을 떠나고부터 이미 한 돌(一周)이 지났구나!

언제 다시 <초랑>과 상견하고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될런지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새 사자(新使者)의 일행이 나타났는데

위세가 당당하게 남쪽을 향해 지나갔다.

 

<을불>과 같은 밭에 있던 자들이 모두 그것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어떤 복력(福力)이면 저런 사자(使者)가 될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능히 나를 잘 섬기는 자는 사자(使者)가 될 수 있다.”

 

무리들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죄를 진 고용살이(罪傭)로 자생(自生) 할 수도 없는 주제에

어찌 감히 큰 소리를 치느냐?”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 집의 죄인인가?

상모가 비상하여 귀인(貴人)이 될 지도 모르니 두렵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는 바로 <상루尙婁> 상국의 죄인이니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말했다.

 

“내 숙부가 엊그제 서울(京)로부터 왔는데,

<상루>는 이미 죽고 창공(倉公)이 상국이 되었다고 한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 대단히 엄하여 비록 왕의 총신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까닭에

<원항猿項>이 주살당해 죽었는데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비록 <상루>에게 사사로운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새 상국은 법이 명백하니 어찌 송사해서 면죄하지 않는가?”

 

<을불>은 <원항>이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다가,

<상루>가 이미 죽고 집법(執法)이 심히 엄하다는 말을 듣자 두려워했다.

 

<을불>이 문득 물었다.

 

“너는 초랑주(草娘主)의 안부를 아는가?

 

그가 말했다.

 

“<초랑>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서 후(后)가 되고

왕자 <진津>을 낳아서 총애가 바야흐로 융성하다고 한다. 네가 어째서 그것을 묻는가?

 

혹 네가 그 방(房)을 범한 것이냐? 그렇다면 죽음을 면하진 못하리라.”

 

<을불>은 비분(悲憤)함을 이길 수 없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아니다. 나는 상국의 애마(愛馬)를 잘못 죽였기 때문에

상국이 노하여 나를 죽이려 했는데

초랑주(草娘主)가 구해준 까닭에 죽지 않고 여기로 유배되어 온 것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말을 죽인 죄는 한 때의 잘못에 불과하다.

지금 이미 상국은 죽었으니 송사하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을불>이 말했다.

 

“재산이 없는데 어찌 소송을 하겠는가?”

 

그가 말했다.

 

“내 숙부는 의(義)를 좋아해서 결교(結交)하는데, 내가 너의 억울함을 말해줄 수 있다.

오늘밤 우리 집으로 와서 숙부를 만나보면 일이 잘 될 것이다.”

 

<을불>이 물었다.

 

“너의 숙부는 서울(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내 숙부는 곧 을보(乙寶) 상공 댁의 노(奴)이다.

 

<돌고>태자가 무죄하게 해를 입은 후로부터

<을보> 상공은 어문(圄門)을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의 상국 창공(倉公)께서 천거하여 좌보(左補)의 책임을 맡기고,

또 고소후(高小后)를 아내로 맞이해 택주(宅主)를 삼게 되자

비로소 화기가 생겨났는데 다만 <을불>태자의 생사를 모르는 것이 한(恨)이 되어

우리 숙부로 하여금 주류천하(周流天下)하면서 그를 찾게하고 있다.”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서울로부터 올 때 들으니 <을불>은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너의 숙부는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설혹 달아난 것을 알았다 해도 상공의 재산을 써가면서

사방을 유람하고자 하려는 게 아닌가?”

 

그가 노하여 말했다.

 

“내 숙부는 의롭고 충직하다. 어찌 주군(主君)의 재산을 훔치는 자이랴!

너 같은 자는 내 숙부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을불>이 말했다.

 

“<을불>이란 자는 금상(今上)의 죄인이니 그를 찾으면 반드시 주살될 터인데

<을보> 상공이 과연 금상의 사허(赦許)를 얻어서 그를 찾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너의 숙부 역시 죄를 못 면할 것이니

내가 어찌 너의 숙부에게 의지해서 송사를 하겠는가?”

 

그가 노하여 말했다.

 

“금상이 무도하게 안국군과 <돌고>태자를 죽여서 국인들이 그를 원망하고 있다.

 

우리는 <을불>태자를 세움으로써 두 군(君)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데

네가 어째서 <을불>태자를 죄인으로 삼는 것이냐?”

 

무리들이 모두 말했다.

 

“만약 우리들 모두가 <을불>태자를 받들고자 한다면 너는 혼자 죄인이 됨으로써

인간의 류(人類)가 아닐 것이니 죽여서 분을 풀어도 가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을불>을 때리려고 하자 <재생再生>이 급히 말리면서 말했다.

 

“이는 곧 미친 사람입니다.

 

말을 잘못 죽이고 멀리 옮겨왔는데 나는 이 사람의 숙부로써

또한 연좌되어 온 것입니다.

 

광병(狂病)이 오히려 증상이 없다가도 때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니

죄라면 죽여도 가할 것이지만 어찌 정상인들이 그걸 따지겠습니까?

 

공들은 진실로 천하에 의기(義氣)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그를 하늘처럼 우러르나 이 한 미친 사람이야

어찌 일찍이 의기(義氣)를 알아서 말하겠습니까?

 

의(義)로써 타이를 수는 있어도 다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그러려니 여겼다.

 

이에 제각기 팔을 품고 <돌고>태자의 현(賢)과 <을불>태자의 인(仁)을 말하였다.

 

<을불>은 스스로 생각하되 내 몸엔 인(仁)이라 칭할만한 것이 없는데

전간(田間)의 우민들조차 모두 그를 생각함이 이와 같다 여겨지니

불각 중에 감동하여 눈물이 흘러 내렸다.

 

모두들 말하기를

 

“광인 또한 눈물을 흘리니 가히 양심이 있음을 알겠구나.”

하고는 마침내 흩어졌다.

 

<을불>이 이에 <재생>에게 일러 말하였다.

 

“오늘일은 반드시 수선스럽게 전해질 것인 즉 혹여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니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이제 <상루>는 이미 졸하고 <초랑>은 후(后)가 됐으니 형세가 일변했다.

 

<담하談河>는 입경(入京)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다른 곳으로 달아나

화(禍)를 피할 것이니 너는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아니면 따라오지 마라.”

 

<재생再生>이 말했다.

 

“신은 은주(恩主)의 명을 받아 태자의 신하가 됐습니다.

 

비록 물불 속이라 해도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함께 도피하여 간고(艱苦)함이 이와 같은데 왜 도망쳐서 살지 않겠습니까? ”

 

 

 

 

17. 삼도(三徒)

 

 

마침내 밭을 버려두고 달아나서 촌락을 전전하며 낙랑(樂浪)의 경계로 피해 들어갔다.

 

남의 집 홍시(紅柿)를 훔쳐 먹으면서 말했다.

 

“무릇 사람의 도둑이 됨은 다 우리네와 같은 것이니 어찌 죄라 할 수 있겠는가?”

 

<재생>이 말했다.

 

“막비왕토(莫非王土)라 했으니 이 또한 태자의 물건입니다.

비록 주인에게 고하지 않고서 먹으나 어찌 상습도적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왕토(王土)라 하나 나는 지금 왕이 아니니 어떻게 창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왕이란 백성이 가진 것을 도적질 할 수 없다.

 

훗날 내가 귀하게 되면 마땅히 너를 여기에 봉해 줄 것이니

너는 곱절의 값으로 돌려줘야 할 것이다.”

 

<재생>이 노하여 말했다.

 

“분골하며 태자를 따르는 것은 다만 의기(義氣)일 따름이지

어찌 봉토를 바라겠습니까?”

 

<을불>은 이내 실언을 사과하고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지쳐 더 이상한 발짝도 뗄 수 없게 되자 개울 옆에서 쉬는데

한 아낙(婦)이 물을 긷다가 그를 보고는 딱하게 여겨 말했다.

 

“우리 집에 빈방이 있으니 두 낭군(郎君)이 머물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에 그녀를 따라갔다.

 

아낙(婦)은 시골의 향미(鄕味)를 다해 그들을 넉넉히 대접하였다.

 

<재생>이 물었다.

 

“부인(婦)은 어찌 홀로 사십니까?”

 

여자가 말했다.

 

“나는 두 남편이 있는데 모두 사냥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호인(好人)들이니 걱정 말고 있어도 됩니다.”

 

<재생>이 말했다.

 

“우리는 집을 나온 지 이미 오래돼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쁜 아즈미(嫂)를 보고 이미 진미로 배가 부르고나니 또 음심이 생깁니다.

 

아즈미(嫂)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한 번의 동침을 허락해 주렵니까?”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귀해지면 첩 생각이난다고,

또한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어서 끌리는 이치는 면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마침내 판옥(板屋)안에 호피(虎皮)를 깔고 누웠다.

 

두 사람이 연달아 몇 차례를 행하고 나자 여인은 은근해졌다.

 

<을불>이 말했다.

 

“만약 그대 남편이오면 서로 용납하기가 즐겁지 않으리다.”

 

여자가 말했다.

 

“이곳 풍속은 순박해서 서로 처를 양보한다오.

두 남편이 알아도 질투하지 않으리니 안심하고 마음껏 즐겨도 됩니다.”

 

밤이 깊어서 두 장부가 호랑이를 묶어 돌아왔는데

모두 골격이 준수하고 수염이 덥수룩하였다.

 

<을불>을 보자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사냥을 나가서 미처 존가(尊駕)를 받들어 모실 수 없었으니

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공의 상모를 보니 시골사람(鄕人)이 아닌데 어찌 원로에 고생을 하십니까?”

 

<재생>이 말했다.

 

“우리 군(君)은 서울(京中)사는 상공(上公)의 아들인데

재난(禍)으로 인해 밖을 떠돌다가 여기에 다다른 것이오.”

 

그중에 수염이 짧은 자가 말했다.

 

“나는 <장막사長莫思>라 합니다.

 

일찌기 안국군(安國君)을 따라 숙신(肅愼)을 정벌했을 때

<돌고>태자 또한 종군하여 연전연승했는데 공(公)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때의 태자가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재생>이 말했다.

 

“안국군과 <돌고>태자는 모두 간신의 참소로 해를 당하셨소!”

 

<장막사長莫思>는 놀라서 말했다.

 

“나는 산골로 돌아와서 서울일(京事)이나 세간사를 못 들었는데

어찌 그와 같이 원통한 일이 있습니까?“

 

이에 여인에게 명하여 소장한 보도(寶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는 <돌고>태자께서 호가(扈駕)의 공(功)이 가상하다며

내게 손수 내려주신 패도(佩刀)인 것입니다.

이제 공(公)을 보니 옛 감회를 이길 수가 없구려.”

 

수염이 긴 자가말했다.

 

“나는 <막사莫思>의 종제 <휴도休都>라 합니다.

 

늘 <돌고>태자의 어지심(賢)을 듣고 매번 서울(京)로 나가 섬기고자 했는데

어찌 뜻을 접고 원통한 해를 입었단 말이오?

 

우리는 무예를 연마하는 자라 국가에 몸 바치고자 하는데

<돌고>태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쓰인단 말이오”

 

마침내 <장막사>와 더불어 강개한 탄식을 발하니

분기가 충천하여 안광이 형형히 빛나고 머리카락이 스스로 울었다.

 

<을불>은 가히 쓸만함을 알고 두 사람을 위로했다.

 

“진실로 의기지사(義氣之士)이고, 천생 호걸(豪傑)들이오.

 

스스로 용처(用處)를 갖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낙망(落望)해선 안 되오.

 

<돌고>태자가 비록 붕(崩)했으나 <을불>태자는 오히려 상존하니

우리가 그를 왕으로 받든다면 다른 날에 부귀(富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에 네 사람은 화로를 둘러싸고 고기를 굽고 술을 권하며

세상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막사莫思>가 말했다.

 

“뜻하지 않게 오늘 이런 큰 손님을 맞아 예(禮)를 차릴 것이 없으니 어쩌랴?”

 

<휴도>가 말했다.

 

“<태평太平>의 두 딸이 예쁘니 뺏어서 데려옴이 어떤가?”

 

<을불>이 말했다.

 

“우리는 호색지도(好色之徒)가 아니니 아즈미(嫂)만 있으면 족하다.

어찌 하필 남의 딸을 빼앗겠는가?”

 

<휴도>가 말했다.

 

“이 여자는 우리가 더럽힌 바이니 귀인(貴人)에게 받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두 공(公)은 이미 나와 교합하였다. 네가 어찌 스스로를 깍아 내리는가?”

 

<막사>가 말했다.

 

“목마르면 쉽게 마시는 법이다. <태평太平>의 딸이 오면 어찌 너를 다시 돌아보랴!

 

<태평> 또한 의기(意氣)의 사람이니 만약 <돌고>태자의 일을 말하면

반드시 딸을 보내 주리라. 아우는 갔다 오게.”

 

<휴도>는 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서둘러 돌아왔다.

 

“급하다. 급하다.

토갈(鞨) 추장이 칠,팔명을 이끌고 <태평>부부와 딸을 잡아가고 있다.”

 

<막사>는 그 말을 듣자 창을 잡고 뛰쳐나갔다.

 

<을불>이 <재생>에게 말했다.

 

“주인에게 어려움이 있는데 객(客)이 좌시할 수는 없다.”

 

“그를 도와야겠습니다.”

 

이에 감춰두었던 활을 풀고 문을 나서니 백설이 분분히 휘날리는데

개 짖는 소리가 골짜기에 어지러웠다.

 

<막사>와 <휴도>는 소리를 헤아려서 전진해 나아가 외쳤다.

 

“토갈(土鞨)이 엽호(獵戶)를 묶어 감은 심히 무례하다.

풀어주지 않겠다면 일전(一戰)을 겨루자.”

 

추장이 대답했다.

 

“나는 <태평>의 딸을 맞이해서 처로 삼고자 함이니 서로 해치는 일은 없다.”

 

<태평>이 소리쳤다.

 

“두 딸이 따르기를 원치 않는데 강제로 덮쳐서 잡아가는 것이다.

바라건대 장공(長公)은 나를 구하라.”

 

이에 서로 간에 박전(搏戰)이 벌어졌는데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으므로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을불>이 곧 화살 한대를 발사하여 추장을 거꾸러뜨리자

토갈의 무리가 놀라서 어지러워졌다.

 

<재생> 역시 활을 쏘아 토갈 한명을 거꾸러뜨렸다.

 

승세를 얻은 <막사>와 <휴도>가 토갈을 도륙했다.

 

나머지 토갈(鞨)들은 달아나고자 했으나 <을불>이 활을 쏴서 모두 쓰러뜨리니

토갈의 개(犬)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이에 <태평太平>및 그 처와 딸을 풀어주고 돌아왔다.

 

<태평>이 말했다.

 

“적이 반드시 무리를 모아 다시 올 것이니

우리 역시 모든 엽호(獵戶)들을 불러 모아 그를 대비해야 할 것이오.”

 

“적이 몇 명이나 되는가?”

 

<을불>이 묻자 <휴도>가 대답했다.

 

“한 굴(一穴)에 삼,사십명 정도인데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어서

노약자와 강한 자가 반반입니다.

 

지금 살상된 자들은 모두 그 강장(强壯)한 자들입니다.

 

비록 약간의 남은 무리가 있다 해도 어찌 감히 오겠습니까?”

 

<막사>가 말했다.

 

“토갈(鞨)의 풍속은 추장이 죽어서 대신할 수 없으면 다른 굴에서 추장을 맞이한다.

 

만약 다른 굴과 상통하게 되면 그 세력이 더욱 창궐할 테니

이 밤으로 남은 여당을 소탕하고 그 여추장을 사로잡으면

가히 해묵은 원수도 갚고 후환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이 말했다.

 

“지금 토갈의 개(犬)가 이미 돌아갔고 한명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여추장은 반드시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찾으리라.

 

우리들은 백피(白皮) 백모(白毛)를 뒤집어쓰고 눈 속에 숨어 있다가 요격해서

먼저 그 개(犬)를 쏘고 또 그 장사를 쏘면 여추장도 생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장비를 차리고나가 길목에서 기다리니

과연 여추장이 십 여명의 토갈 무리와 개를 따르게 하고 왔다.

 

무리가 모두 일제히 활을 쏘아 그 개와 따르는 자들을 사살하니

여추장이 비명을 지르며 부르짖었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남편 추장의 목을 끊어 가고자하는 것뿐이다.”

 

<막사>가 말했다.

 

“네 남편이 감히 우리 엽호의 딸을 간음하려했기 때문에 베어 죽였다.

 

너는 그 머리를 취해서 제사지내고 다른 굴에서 남편을 맞으려함이 아니냐?”

 

여추장이 말했다.

 

“나 역시 내 남편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그를 만류했노라.

내 말을 듣지 않고서 죽었으니 내가 어찌 그를 애석해 하리오.”

 

<막사>가 말했다.

 

“네가 만약 내게 투항해서 내 처가 된다면 용서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네 일족(族)을 진멸하리라.”

 

여추장이 말했다.

 

“엽호(獵)와 토갈(鞨)의 상쟁이 오래 되었노라.

 

허나 오늘의 패배와 같은 일은 아직 없었으니

이는 거의 하늘이 우리 일족을 미워함이다.

 

너의 소위에 맡기겠다.”

 

<막사>는 이에 <휴도>와 함께 나아가 여추장 이하 생구(生口) 8인을 사로잡았다.

 

여추장이 말했다.

 

“네가 우리를 살려주면 마땅히 노복이 되어서 보은하리라.”

 

<막사>가 말했다.

 

“너희들은 반복(反覆)이 무상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여추장이 말했다.

 

“네가 만약 내 남편이 되어서 내 굴(穴)을 지킨다면 누가 감히 반복(反覆)하겠는가?”

 

<을불>이 이에 <막사>를 권하여 토갈의 추장이 되게 하고

그 여중(餘衆)을 통솔하여 수피(獸皮)작업을 감독하게 하였다.

 

<을불>은 <태평>의 두 딸을 취하고 엽호의 우두머리(長)로 추대되어

날마다 호랑이 때리는 것을 일로 삼으며, 낙랑(樂浪)과 교통하여 무역하고,

호걸들과 교제를 맺으며 은밀히 중흥(中興)을 도모하였다.

 

이에 사방의 뜻을 가진 지사(志士)들이 그 땅으로 모여들었다.

 

때에 <담하談河>는 서울(京)로 들어가서 을씨(乙氏) 고씨(高氏)를 뵙고서

<을불>이 <음모陰牟>의 집에 있음을 보고하였다.

 

을씨와 고씨는 이에 백금을 그에게 줌으로써 은밀한 모의의 자금으로 삼게 하였다.

 

<담하>가 <음모>의 집에 오니

<을불>은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나 소재를 알수 없었다.

 

<을보乙寶>의 신하 <송거松巨> 역시 그 조카의 말을 듣고서

<을불>로 의심하여 <음모>의 집을 수탐하다가

마침내 <담하>와 만나게 되자 교우를 맺었다.

 

장사(壯士) 칠,팔인을 태을도(太乙徒)라 이름하여 각지를 분산 방문케 하며

“을불이 마땅한 왕이니 치갈은 무도하다”라고 희언(戱言)하게 했다.

 

순월(旬月)사이에 천 여 곳을 몇 차례 돌았다.

 

이 땅은 본래 안국군 달가의 구령(舊領)이었으니

촌주(村主)들이 오히려 옛 은정(舊恩)을 품고

태을도(太乙徒)와 더불어 잠통(潛通)하는 자가 많았으며

사자(使者)와는 통하지 않았다.

 

하루는 <송거松巨>가 수십명의 무리를 이끌고 남행하여 두우곡(斗牛谷)에 이르렀다가 토갈(鞨)의 무리와 사슴(鹿) 한 마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송거>가 이를 말리며 말했다.

 

“사슴 한 마리가 무엇이 대단해서 다툰단 말인가? 주어도 될 것이다.”

 

그의 무리가 말했다.

 

“사슴(鹿)이란 신물(神物)인데 어찌 줄 수가 있습니까?”

 

<송거>가 말했다.

 

“우리는 태자를 찾는 자들인데 태자를 못 찾으니

비록 신물(神物)이 있다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마침내 내어주니 토갈(鞨)의 무리가 크게 기뻐하며 사례하여 말했다.

 

“우리 거처로 갈 수 있다면 이를 나눠서 먹읍시다.”

 

<송거>가 허락하고 마침내 그 굴에 이르니 추장은 곧 <장막사長莫思>였다.

 

사슴을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곧 신물(神物)이다. 우리 군(君)께 바쳐야 할 것이니

너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을 수 없다.”

 

<송거>의 무리가 모두 대노하여 싸우려하자 <송거>가 만류하며 말했다.

 

“군주(君)가 있어서 이와같이 함이니 질서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 군주의 사람됨을 보아서 움직여도 늦지 않다.”

 

이에 <막사>에게 이르되

 

“우리 또한 너희군(君)을 배견코자하니 어떠한가?”

 

“좋다.”

 

<막사>가 대답하고 <을불>에게 이끌고 가니

<을불>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그들을 보았다.

 

<송거>는 눈여겨 바라보면서 나아가 절하였다.

 

“신은 바로 <을보乙寶> 상공댁의 노(奴) <송거松巨>입니다.

 

오래도록 태자를 찾다가 이제야 비로소 만나 뵐 수 있게 되었으니

거의 하늘의 도우심입니다.”

 

<을불>이 말했다.

 

“나는 태자가 아닌데 형(兄)은 어찌 잘못보시오?”

 

<송거>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비록 눈이 어둡다하나 어찌 자기 집(自家)의 태자를 모르겠습니까?

 

태자께서는 반드시 신(臣)이 반(反)하는 게 아닐까하여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마땅히 마음을 밝혀서 죽으리니 신이 죽은 후에는

이 무리들을 써서 중흥(中興)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검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려하자 <재생>이 붙잡으며 말했다.

 

“그대는 대사를 맡고서 어찌 성급히 자신을 그르치려 합니까?

 

천하에는 같은 모습의 사람이 있으니 우리 군(君)의 진짜(眞) 가짜(假)는

군(君) 스스로도 믿지 않는 즉

그대의 반(反) 불반(不反) 또한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비록 반(反)했다 해도 천하에 어찌 반(反)하지 않는 자가 없음을 알겠습니까?

 

우리 군(君)이 만약 태자와 같은 모습이라면 그대는 잠시 그를 받들어 군(君)으로 삼고

진태자(眞太子)가 나오기를 기다림이 어떠합니까?”

 

<송거>가 크게 깨닫고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도다.”

 

마침내 함께 사슴(鹿)을 잡아 제천(祭天)함으로써 마음을 맹서하였다.

 

이에 태을(太乙)과 엽호(獵戶) 토갈(土鞨)이 합쳐지니

삼도(三徒)가 한 마음이 되어 <을불>을 받들었다.

 

<담하談河>가 뒤따라 이르러 을씨(乙氏)가 손수 쓴 서찰을 받들어 올렸는데

<우탁于卓> 초후(草后)가 모두 내응(內應)하여 일을 성취하고자한다 하였다.

 

<을불>이 탄식하며 말했다.

 

“초처(草妻) 또한 간사한 숙부(奸叔)의 처이니 내가 어찌 심복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담하>가 말했다.

 

“성인(聖人)은 여색으로써 마음에 두지 않는다하니

비록 초후(草后)가 아니라도 어찌 거룩한 짝(聖配)이 없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낙랑(樂浪) 제군(諸郡)들이 모두 서로 사사로이 군주(君)를 세우는데

지금 최체(最彘)의 새 영주(領主)가 딸이 있어 매우 아름다우므로

좋은 사위를 맞아 나라를 전하고자한다 합니다.

 

태자께서 만약 결친(結親)하셔서 외원(外援)을 얻는다면 대사를 이루기에 족합니다.”

 

 

 

18. <을불>과 최체녀 <창포>의 사랑

 

 

<을불>이 이에 <담하>로 하여금 표범가죽과 큰 거울(大鏡)을

최체(最彘)의 영주 <선길善吉>에게 진헌케 하고 전하여 말하였다.

 

“과인은 대맥(大貊)의 왕손이오. 이제 장차 양국지간에 건국(建國)하려하니

바라건대 왕녀를 얻어 후(后)로 삼고자 하오.”

 

<선길>이 말했다.

 

“대맥(大貊)의 왕손이 어찌 그 나라를 배반(反)하고 스스로 서는가?”

 

<담하>가 <치갈雉葛>의 무도한 정상을 갖추어 진언하자 <선길>이 말했다.

 

“너희 왕이 비록 무도하다 하나 <창조리>를 상국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패망하지 않으리라.

 

다만 나는 아들이 없고 딸이 있는데 딸이 아름다운 사위(佳壻)를 바라니

네 주인이 만약 아름답다면 마땅히 사위로 맞으리라.

 

사냥으로 회합(會獵)하여 상견함이 가할 것이다.”

 

<을불>은 기약한 날짜가 되자 <재생>, <담하>의 무리와 함께

사냥할 지역에서 회동하였다.

 

<선길>은 그 딸 <창포菖蒲>와 더불어 말을 타고 왔는데

그 사냥한 것이 노루(獐)다섯 마리였다.

 

<을불>이 <창포菖蒲>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아름다움을 아끼니 너는 내 처가 되어 주려는가?”

 

<창포>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 또한 낭군을 아끼나 다만 우리 지방은 편벽되고 협소하니

낭군은 반드시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

 

<을불>이 말했다.

 

“용은 풍운을 얻으면 날아오른다.

 

네가 만약 나를 아낀다면 가히 함께 왕천하(王天下)할 것이니

어찌 한 지방 뿐이겠는가?”

 

<창포>는 “네.”하고 대답했다.

 

이에 말을 나란히 하여 서로 고삐를 끌며 가는데

홀연 누런 고니(黃鵠)가 공중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을불>이 우러러 활을 쏘며 말했다.

 

“저것으로 너를 맞이하는 페백(幣)을 삼겠다.”

 

그 고니(鵠)가 과연 마상(馬上)으로 떨어진 까닭에 그 땅을 곡락령(鵠落嶺)이라 했다.

 

 

<창포>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낭군은 진정 기재(奇才)입니다.

오늘밤 나의 거처로 와서 연회를 즐겨야 할 것입니다.”

 

<을불>이 그를 허락하고 무리를 이끌고 객사(館)에 들었다.

 

<선길善吉>은 노루를 요리하고 술상을 차리게 해서는 춤을 추며 마셨다.

 

<창포>가 <을불>에게 춤을 청하자 <을불>이 말했다.

 

“나는 독무(獨舞)는 못하니 그대와 더불어 서로 붙잡고 출까?”

 

<창포>가 말했다.

 

“차례대로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을불이 이에 <창포>를 안고 온갖 방법으로 희롱을 하니 <선길>이 노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혼인도 안했으면서 어찌 이와 같이 하느냐?”

 

<창포>가 말했다.

 

“비록 동침은 안했어도 폐물은 이미 받았으니 어찌 혼인이 아닙니까?

행여나 질투는 마세요.”

 

<선길>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창포>의 어미가 그를 이끌어 달랬으나 어찌 할 수 없자 <창포>에게 말했다.

 

“네가 조금 젖(乳)하고 와야겠다.”

 

<창포>가 이에 <을불>에게 말했다.

 

“노왕(老王)을 젖(乳)해 주고 곧 돌아오리라.”

 

<을불>은 젖(乳)의 뜻을 몰라 <창포>의 어미에게 물으니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창포>는 곧 손바닥으로 <선길>의 뺨을 치며 그를 꾸짖었다.

 

마침내는 <선길>을 안고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운반하는 듯 했다.

 

이어서 서로 치고 받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매질 당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윽고 얼마 후에 환희에 찬 부르짖음이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음(淫)했다.”라고 했다.

 

그 풍속은 남녀의 구별이 없어 나이가 들어 장성하면

부녀와 모자 역시 상음(相淫)하는데

남자는 반드시 먼저 욕심을 품은 여자에게 수태(受笞)한 후에야

바야흐로 통하는 까닭에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을불>은 이를 듣고 즐겁지 않아 말했다.

 

“노왕이 만약 그 딸을 스스로 징(澄)할 것 같으면

그 딸이 내 처가 되는 것을 어찌 즐겨 하겠는가?”

 

<창포>의 어미가 말했다.

 

“저것은 특별히 한 때의 젖(乳)하는 것일 따름이고 오래갈 것이 아니니

노여워 말고 기다리십시오.”

 

인하여 술을 권하니 <을불>이 크게 취하여

여러 추장의 처(酋妻)들과 서로 끌어안고 희학질을 하였다.

 

그 풍속이 손님(客人)과 더불어 상통(相通)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모두들 즐거워하며 그에 응할 따름이었다.

 

<창포>의 어머니가 다시 들어간 지 한참이 되어서야

<창포>가 얼굴에 참괴(慙)한 빛을 띠고 나와서

<을불>을 잡아끌며 그 침실로 들어가길 청하였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노왕과 더불어 행음(淫)하고서 어찌 나를 보러 왔는가?”

 

<창포>가 말했다.

 

“일시(姑)나마 아직 혼신(婚神)에게 맹서(盟)를 안한 까닭에

내가 노왕의 잉첩(媵妾)이 됐을 따름입니다.”

 

“언제 맹서를 하는가?”

 

“내일 마땅히 맹서를 하리니 노여워 마시고 나를 따라오세요.”

 

<을불>이 마침내 <창포>를 따라서 들어가니

뭇 추장의 딸(酋女)들이 좌우에 벌려 앉아서 서로 손뼉 장단을 침으로써 전송하였다.

 

표범가죽이 늘어서고 침대머리에는 큰 거울(大鏡)과 누런 고니(黃鵠)가 있고

12 대촉(大燭)이 양두(羊頭)에 꽂혀 있었다.

 

옷을 벗으니 흘레붙는 두 마리 흰 개가 되어 장난치고,

달려가 뛰어오르는 한 쌍의 사슴처럼 음(淫)하였다.

 

행음(淫)을 마치면 다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기를 무릇 7일이었으나 끝나지 않았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나를 속여서 머무르게 하려는 것인가?”

 

<창포>가 말했다.

 

“노왕(老王)에게 아우가 한사람 있는데 나를 취(娶)하고 싶어서

그대를 죽여 그대의 왕에게 바치자고 왕께 권하고 있습니다.

 

내가 방해해서 힘껏 저지는 했으나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그대는 도망치세요.”

 

<을불>이 놀라서 말했다.

 

“나는 너를 아껴서 왔거늘 마땅히 이 위급한 때에 네가 만약 나를 아낀다면

어찌 함께 달아나지 않는가?”

 

<창포>가 말했다.

 

“내가 만약 함께 달아난다면 노왕은 노해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이니

어찌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그대의 무리들을 힘써 보호하지 않으리오.”

 

그리하여 준마 5마리를 훔쳐서 내주니 <을불>이 <재생再生>등과 더불어

밤에 그 막사(幕)를 빠져나와서 달아났다.

 

<선길>이 이를 알고 추격하려 하자 <창포>가 말했다.

 

“이미 사위로 삼지도 않았으면서 또 무엇 때문에 쫓습니까?”

 

<선길>이 말했다.

 

“가히 연(燕:모용외)에 바쳐서 무거운 상(重賞)을 받을 수 있으리라.”

 

<창포>가 말했다.

 

“을불은 천인(天人)이니 그대가 잡을 바 아닙니다.”

 

선길이 노하여 그 신하 <칩여蟄蜍>로 하여금 추격하게 했다.

 

<을불>이 그를 쏴 죽이고 달아났다.

 

 

 

 

19. <을불> 최체를 점령하여 창포왕이 되다

 

 

돌아와서는 삼도(三徒)를 발(發)하여 최체(最彘)를 치려하자 <송거>가 간하였다.

 

“본래 결친(結親)하려했다가 도리어 원수를 맺음은 중흥(中興)의 계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한 보답으로 베푸니 만 못합니다.”

 

<을불>이 이에 물범가죽(水虎皮)과 자달피(紫獺皮)로

<선길>에게 예를 차려서 말을 전했다.

 

“칠일생관(甥館:사위로 머문)의 은혜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소인의 참소로 용납되지 않고 되돌아 옴에 이르르니

<창포>의 용음(容音)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선길은 쇠로하고 색을 탐하여 병으로 일어날 수 없었으니

<창포>가 일을 전결하고 있었다.

 

곧 백마(白馬)와 보옥(寶玉)으로써 답하여 가로되

 

“명랑했던 날의 일은 마치 해가 구름에 가린 것만 같습니다.

 

첩은 마땅히 노왕의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거니와

낭군과 더불어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 악한 숙부도 이미 죽고 노왕 또한 전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으니

낭군은 전일을 한(恨)하지 마시고 바라건대 초심(初心)을 이루소서.”

 

<을불>이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자 <재생>이 말했다.

 

“<선길>이 늙고 혼미(老昏)하여 그 아우에게 잘못된 바이나 지금 그 아우가 죽었으니

반드시 대신할 자가 있어 역시 <창포>를 취하고자 할 것인즉 그를 저지해야합니다.

 

거짓으로 출렵(出獵)을 핑계대고서 그 지경에 돌입하여 추장을 베고

그 무리를 진압함이 어떻겠습니까?”

 

“옳다!”

 

<을불>이 대답하고 이에 삼도(三徒)를 발하여 출렵(出獵)을 가탁(假託)하고

짐승을 쫓다가 그 지경으로 오입(誤入)해서는 그대로 돌진하였다.

 

그 때에 <선길>은 색(色)에 침닉되어 일어나지 못하므로

부족의 추장(部酋)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이

음(陰)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선길善吉>을 포위해서 그를 살해하고 강제로 <창포菖蒲>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모든 추장들이 불평을 품고 서로 치고자 관망하다가

삼도(三徒)가 돌입해오자 모두들 <창포>가 부른 것이라 여기고

힘을 합해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을 쳐서 주살하고

<을불>과 <창포>를 받들어 군주(君)로 삼았다.

 

<을불乙弗>이 이에 창포왕(菖蒲王)이라 칭하고

최체(最彘)의 6촌(村) 2성(城)과, 양화(陽化)의 2촌(村),

갈부(鞨部) 1촌(村)을 통일하고, 무리(衆) 5천 6백을 갖게 되었다.

 

때는 청토(靑兎, 을묘 AD295년) 10월이었다.

 

 

 

 

20, <창조리>의 변심

 

<담하談河>를 보내서 경도(京)로 들어가

은밀히 을씨(乙氏)와 초후(草后)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때에 초후는 왕의 총애를 오로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사치해서 도성 밖의 여러 산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대신원(大神院) 능원(菱院) 단왕궁(丹王宮)을 짓고 중수하며 왕과 더불어 왕래하였다.

 

정사는 모두 <우평于枰)과 <상보尙寶>와 <창조리倉助利>에게 위임하고서

그 다스림을 묻지 않았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했다.

 

“망국(亡國)의 길(道)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환락을 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음이 하나이고,

사람을 정으로 쓰고 재능으로 쓰지 않음이 하나이며,

현자를 받들어 그 말을 쓰지 않음이 하나입니다.

 

지금 세 가지를 다 갖추었으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우평>은 뇌물의 다소(多少)로써 사람을 쓰고

변장(邊將)들은 다만 배를 불리는 것을 일로 삼으니 언제 변이 생길지 모르는데

폐하는 근심함이 없이 호색(好色) 탐황(貪荒)하며 잡역(雜役)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신이 일찍이 <주의朱義>를 천거하여 납언(納言)으로 삼았으나

폐하께서는 그 직간을 괴롭게 여겨 양존(陽尊)으로 그 관(官)을 삼고는

그 말을 듣지 않다가 내치시니 <주의朱義>는 병을 칭탁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살피십시오,“

 

왕이 말했다.

 

“왕이란 다만 현자에게 맡길 따름이다.

 

경과 두 장인(二舅)이 나라를 위한 어진 재상(爲國賢相)이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인생(人生)은 행락(行樂)이로다.

 

경은 나를 잡다한 정무에 근심하다가 초췌해져서 죽게 하고자 함인가?

 

금을 캐서 가짐에 위험을 돌보지 않는 자는

바위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가 압사(壓死)하고 뒤에 오는 자가 남김없이 그것을 거둔다.

 

짐은 금을 잡다 죽는 것이 즐기다 망국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지 알지 못하겠노라.”

 

<창조리>는 그 간(諫)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오면서 탄식하였다.

 

“내가 물러나야함이로다.”

 

그 처 음씨(陰氏)가 말했다.

 

“내 형이 그대를 상(相)으로 천거한 것은

나라(國)를 위함이지 임금(君)을 위함이 아닙니다.

주상이 유도(有道)하면 섬기고, 무도(無道)하면 폐할 것이니

이가 곧 상국(相國)입니다.

그대는 내 남편이 되어서 어찌 졸부(拙夫)의 말을 합니까?”

 

<창조리>가 물었다.

 

“그를 폐하고 장차 누구를 세우는가?”

 

음씨가 말했다.

 

“을불태자는 약로대왕(藥盧大王)의 소탁(所託)이니 그를 찾아 세움이 가할 것입니다.”

 

<창조리>가 말했다.

 

“지금은 또한 이르도다. 내 관망하면서 서서히 도모하리라.”

 

음씨는 크게 기뻐하며 을씨(乙氏)와 내통하였다.

때에 을씨는 초후(草后)로 인해 다시 왕에게 총애를 얻었다.

 

왕이 말했다.

 

“내가 네 남편을 죽이고 네 아들을 내쫓았는데 너는 원망하지 않는가?”

 

을씨가 말했다.

 

“왕을 남편으로 삼았는데 어찌 용열한 남편을 생각하며,

그대의 어린 아들을 낳았는데 어찌 다 큰 아들 생각을 하겠습니까?”

 

왕은 그러려니 여기고 말하는 바를 많이 들어 주었다.

 

 

 

21. <선방>과 을씨의 만남

 

 

을씨는 이에 <우탁于卓>과 더불어 장사(將士)들과 교유하며 결탁하였다.

 

때에 안국군 <달가達賈>의 옛 신하 <선옹仙翁>은

마산(馬山)에 퇴거하여 재산을 쌓음이 누만(累萬)이었다.

 

아들 <선방仙方>으로 하여금 입경(入京)시켜 을씨를 알현하고

<을불>태자를 받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을씨는 크게 기뻐하며 침실로 이끌고 들어가

술을 따라 권하고 고기를 잘라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위국지낭(爲國智囊)이란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지금 너를 보내 내 모주(謀主)로 삼으니 거의 하늘의 도우심이다.”

 

을씨는 <선방>이 취하는 것을 보고 귀에 입을 붙여 말하였다.

 

“지금 이후로부터 너는 나의 심복(心腹)이 되고 나는 너의 두목(頭目)이 되어

한 몸(一身)이고 한 마음(同心)이 될지니 맹서가 없을 수 없다.

 

삽혈(歃血)의 맹서는 뜻이 교혈(交血)에 있음인데

너는 남자이고 나는 여자이니 혈기(血氣)를 직통(直通)하느니만 못하다.”

 

마침내 옷을 벗고 <선방>을 안으니 <선방>이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성모(聖母)를 증(烝)하오리까?”

 

을씨가 말했다.

 

“대사를 이루면 네 자손으로 하여금 후족(后族)을 삼고 내 자손은 왕족(王族)이 되어

천하를 함께 할 텐데 구구하게 한 배꼽 아래를 어찌 사양하는가?”

 

이때에 <선방>은 나이 39살이고 을씨는 35살 이었으니

장양(壯陽) 장음(壯陰)이 맞닿자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선방>이 마침내 을씨의 배위에 올라 서로 합하고서 맹서하여 말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은 우리 자웅(雌雄)을 비추 사 약속컨대

<을불>태자를 받들어 왕을 삼고 공(功)을 이루면 세세토록 이와 같이

서로 자웅(雌雄)을 지을 것을 맹서합니다.”

 

맹서를 마치고 행음(行淫)하니 을씨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내 마땅히 네 아들을 낳아서 가르쳐 장래(來) 나를 위안케 할 것이다.”

 

<선방>이 말했다.

 

“우상공(于相公)이 이를 알면 모의에 해로울까 두려우니 안 됩니다.”

하고 다시 범(犯)하자 을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 꾀(謀)가 심히 치밀하니 내가 안심이로다.

내가 너와 더불어 상친(相親)함이 이와 같으니 너의 몸은 곧 내 몸이다.

감히 사사로이 훼손함으로써 내 걱정을 더하지 말 것이니라.”

 

<선방>이 말했다.

 

“신(臣)은 은혜를 받음이 이에 이르러 만 번 죽어도 달콤할 뿐이니

후(后)께서는 살리고 죽이소서.”

 

을씨가 이에 속곳 내의(衣)를 그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너의 몸 안에 입어서 조석으로 잊지 말거라.”

 

<선방>은 배사(拜謝)하고 물러 나와서 술집(酒肆)을 잠행하며

무뢰배들과 교제하여 결탁하고

다시 안국군 <달가>의 옛 신하로서 전간(田間)에 흩어져있는 자들과 결속하여

서로 간에 안팎(表裏)이 되었다.

 

 

 

22. <해문>과 <우평>의 만남

 

 

<달가達賈>의 큰 아들 <자柘>의 어머니 <해문解門>은

평산(平山) 부호(富戶) <해숙解熟>의 딸이다.

 

소시 적에 미모로 뽑혀 중천왕(中川王)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달가>와 상통(相通)하여 <자柘>를 낳은 까닭에

스스로는 <달가>의 아들임을 알았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중천왕의 아들이 되었다.

 

중천왕이 붕하고 계속하여 약로대왕(藥盧大王){서천왕}의 총애를 받아서

약로의 아들 <저楮>와 딸 표씨(標氏)를 낳았다.

 

왕(치갈)은 태자시절에 또한 <해문解門>및 표씨(標氏)와 통한 까닭에

<해문>을 후대하여 상(賞)을 내림이 매우 무거우니 집안이 매우 부유했으나

<달가>가 죄 없이 피살된 것을 한(恨)하여 항상 은밀히 <자柘>에게 말했다.

 

“너는 <달가>의 아들이니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것이다.”

 

<자柘>는 이를 승낙하고 마침내 미친 척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또한 무뢰배에 투신하여 음무(淫巫)들을 많이 기르며,

민재(民財)를 끌어 모아 수십 개의 창고(倉)을 일으켰다.

 

<우평于枰>은 재물을 탐하고 호색(好色)하였다.

 

<해문解門>을 보니 나이는 비록 50이었으나 오히려 아름다움은 소녀(少女) 같았으며

궁중을 출입하며 왕의 총애를 얻고 그 집안은 재산이 많았다.

 

이에 따라가 유혹하며 말했다.

 

“나는 처(妻)가 세 사람 있으나 그대의 아름다움 같은 이는 아직 없소.

그대를 제 4처로 삼고 싶은데 되겠소?”

 

<해문>이 대답했다.

 

“장군(將軍)은 초방(椒房)의 존친(尊親)이요, 첩은 선왕(先王)의 퇴물(退物)입니다.

만약 처(妻)가 될 수 있다면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장군은 인색해서 재물을 쓰지 않는데 반해 나는 사치를 좋아해서 낭비하니

서로 용납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평>이 말했다.

 

“내 성격이 비록 인색하나 어찌 애처(愛妻)를 위해 재물을 아까와 하겠소?”

 

<해문>이 이에 <우평>을 이끌어서 목욕(浴)하며 또한 도발하다가

또한 게으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 아버지 <해숙解熟>은 우리들의 입궁으로 인해

전곡(錢穀)을 많이 허비하고 죽어서 장원(庄園)은 많이 황폐하고

하나 있는 아들 <현玄>은 오히려 어리므로

내가 아버지를 위해 원(院)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장군은 황금 백량(百兩)과 양 천 마리(羊千頭),

오곡(五穀) 2백석(石)으로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우평>은 침음(沈吟)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공경(公卿)의 신하도 아닌데 어찌 큰 원(巨院)을 짓소?”

 

<해문>이 노하여 말했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이나 세 왕을 차례로 섬겨서 지위(位)가 일품(一品)에 이르렀고,

내 아버지는 비록 공경(公卿)은 아니나 왕자의 할아비입니다.

작은 원(小院)이 가하겠습니까?

그대는 나를 처로 삼고 싶어 하면서 내 아버지를 박대하니

그대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손을 뿌리치고 나가니 <우평>은 크게 놀라서 쫓아가 안으며 말했다.

 

“내가 돕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 다만 원(院)이 크면 인부가 많고,

인부가 많으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까닭이오.”

 

<해문>이 말했다.

 

“그대는 초친(椒親)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한 처(妻)를 위해 그 아버지의 원(院)을 조영할 수 없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평>이 말했다.

 

“내 마땅히 힘쓰겠소.”

 

<해문>이 이에 기뻐하며 욕중(浴中)에서 상통(相通)하여

그 음기(淫技)를 남김없이 발휘하니

<우평>이 크게 미혹(大惑)되어 감히 그 청구(請求)를 거절하지 못 했다.

 

<해문>이 이에 <자柘>에게 일러 말했다.

 

“<우평>은 곧 네 아버지의 원수이니 내가 그에게 아양을 떤 것은

그 쌓은 재산을 빼앗으므로써 너를 돕고자하는 까닭이다.”

 

<자柘>가 말했다.

 

“다만 재산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 도당(徒黨)들로 하여금

서로 시기해서 해치도록 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마땅히 중간에서 이간을 붙이십시오.”

 

<해문>은 이를 허락했다.

 

<선방仙方>은 <자柘>가 큰 뜻을 가졌음을 알고 마침내 서로 친교를 맺고

무뢰배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도적질을 하게했다.

 

<우평>은 수하들을 독려하여 도둑들을 잡게 했다.

 

<해문>이 그 수하들을 반간(反間)하여 말했다.

 

“양민들을 잡는 것을 사사로이 혐오하는 까닭으로

풀어준 그 도둑으로 하여금 잡는 자를 두드려 패는 것이다.”

 

때문에 도둑들이 서울 안(京中)에서 횡행함이 많았으나 붙잡지 않았다.

 

왕은 노하였다.

 

<우평>이 도둑 잘 잡는 자를 얻고자 하니 <해문>이 <선방>을 천거했다.

 

<선방>은 이에 <우평>의 충노(忠奴)들을 잡아들이고

모두 사납게 매질(猛杖)해서 꾸며낸 자백을 토설케했다.

 

이에 <우평>의 무리들이 많이 <우평>을 원망하고 도리어 <선방>에게 붙었다.

 

<선방>은 그들 모두를 어루만져 자신을 위해 이용했다.

 

<해문>의 막내 여동생 포씨(蒲氏) 역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후궁으로써

왕이 태자 때부터 잠통(潛通)하다가 이에 이르러서

제 3후(三后)가 되어 서궁(西宮)에 거처하고 있었다.

 

<해문>은 다시 <선방>을 천거하여 서궁(西宮)의 알자(謁者)로 삼았다.

 

포씨는 왕의 총애가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해문>이 포씨를 권하여 <선방>과 더불어 밀통해서 임신을 하였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어떻게 임신하였느냐?”

 

포씨가 말했다.

 

“선방이 가진 영약(靈藥)을 얻어 먹고서 잉태했습니다.”

 

왕이 이에 <선방>에게 황금 백량을 내리면서 그 약에 대해 물었다.

 

선방이 대답했다.

 

“신이 소시 적에 산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찾았었는데

한 백두옹(白頭翁)이 있어 바위 위의 오디열매(椹實)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것을 먹으면 남자는 가히 선도(仙道)를 얻을 수 있고,

여자는 가히 산도(産道)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신이 그것을 따먹고 그 나머지를 따가지고 돌아왔으나

모두 잃어버리고 오직 한개 얻은 것이 오히려 남았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왕이 이에 그 아들을 <심椹>이라 이름하였는데 후에 <선방>의 아들이 되었다.

 

<방회方回>, <대발大發>, <우선于先>, <우풍于豊>은

모두 <을불>의 옛 스승으로써 을씨와 통모(通謀)하며 원조하였다.

 

 

 

23. <을불>의 정변 실패

 

 

<담하>가 돌아와서 형세가 점차 유리해짐을 보고하자 <송거>가 말했다.

 

“우리들은 밖에 있어 간고(艱苦)하고 저들은 도성에 있어 안락하니

모사(謀事)는 스스로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나

만약 저들과 같이 왕이 크게 민망(民望)을 잃기만을 기다리면서

느릿느릿 도모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금을 가지고 소의 뒤를 따라가면서

”불알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먹으리라.“ 하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모용씨(慕容氏)를 설득해 우리 서변(西邊)을 침범케 하고

<우평于枰>등이 출동해서 그를 막으면 <선방仙方>등이 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우리들은 구원하러간다 칭하고서 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왕을 죽이고

우리 군(君)을 세워서 모용씨와 더불어 화친하고

남으로 낙랑(樂浪) 백제(百濟)로 내려가면 조업(祖業)이 가히 창성할 수 있다.”

 

<을불>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고 <담하>에게 명하여 샛길로 하여 바다로 나가서

뱃길을 따라서 극성(棘城)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를 설득케 했다.

 

“대국(大國)이 만약 신(臣) 을불(乙弗)을 위해서 병력을 빌려주어 공을 세운다면

마땅히 세세토록 번방(藩)이 되어 조공할 것입니다.”

 

<모용외>가 이를 허락하고 병력을 이끌고 서침(西侵)하였는데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능(陵)을 보고는

사졸들로 하여금 파내게 했다.

 

<담하>가 말했다.

 

“대왕은 의(義)로써 병력을 빌려주고서

어찌 우리 선왕(先王)의 능(陵)을 파내어 원수를 지십니까?”

 

<모용외>가 말했다.

 

“네 나라가 반복(反覆)하는 까닭에 볼모(質)를 잡고자하는 것이다.”

 

능(陵)을 파내는 날,

 

천기가 음산하더니 갑작스레 추워짐이 마치 엄동(嚴冬)과도 같았다.

 

때는 대룡(大龍,병진296년) 8월이었다.

 

병력을 출발할 때만해도 오히려 늦더위가 남아있었던 까닭에

사졸(士卒)들은 두꺼운 옷이 없었다.

 

하루 밤 사이에 얼어 죽은 자가 줄을 잇고

또한 광내(壙內)에서 풍악소리가 나니 사졸들은 두려워서 감히 능을 파헤치지 못했다.

 

<모용외>는 뒤(後)에 신(神)이 있다는 이유로 해서 중지시키고

또 갑작스런 추위에 옷이 없는 까닭으로 하여 퇴각해서 물러갔다.

 

 

<선방仙方>등도 또한 외적(外敵)과는 더불어 통모(通謀)할 수 없다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모용외>는 우리가 내응(內應)하지 않은데다

헛되이 사졸(士卒)을 상한 까닭에 그를 꾸짖고

최체부(最彘部) 역시 점제(秥蟬)와 더불어

교위(校尉)에 소속(幷屬)될 것을 명령하였다.

 

<창포菖蒲>의 어머니는 본래 점제(秥蟬)로부터 왔는데

점제(秥蟬)는 그 아들로써 창포를 아내로 맞게 하고자하여

교위(校尉)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을불乙弗>을 내쫓으려 했다.

 

교위가 이로 인해 이유 없이 질책하며 혹은 부당한 공납(貢)을 요구하니

<을불>은 실화(失和)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정성을 다했다.

 

 

 

24. <을불>의 체포와 반옥령 탈출

 

 

때에 조정(朝廷)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新城) 태수로 삼아

서북(西北)을 대비하였는데

<모용외>는 그 위엄과 명성(威聲)을 듣고는 다시는 재침(再侵)할 뜻이 없었다.

 

오로지 낙랑(樂浪)에만 마음을 두고 5부(五部)를 통합코자 하여

모든 신영주(新領主)들을 점제(秥蟬)로 모이게 하여

맹약(盟約)을 다시 정(定)하도록 했다.

 

<을불>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교위(校尉)가 사람을 시켜 재삼 독촉을 하므로

부득이 <창포菖蒲>와 더불어 <재생再生>등을 이끌고서 회맹에 갔다.

 

서부사자(西部使者) 역시 국경을 정하고자하여 이르렀는데

교위는 사자(使者)와 서로 통하고 <을불>을 포박해서 조정에 송치(送致)하였다.

 

이에 사자(使者)가 호송하여 가니 곧 황마(黃馬,무오 298년)의 초겨울이었다.

 

이해 9월에 서리(霜)와 우박(雹)이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들은 굶주려서 서로 도둑질을 하였다.

 

왕은 궁실을 더욱 증영(增營)하느라 천하(天下)에 재목을 구하고 돌을 채취토록 하니

운반하는 노역자들은 도로에서 추위와 허기에 지쳐

서로를 바라보고 백성들은 원성이 높았다.

 

<을불>이 탄식하여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는데

영웅은 소인배 오랑캐에게 잡힌 바 되니 이 무슨 마(魔)인가?”

 

함리(檻吏)들이 그 말을 듣고 상의하기를

 

“우리가 <을불>태자의 뛰어남을 들어온 지 오래인데

지금 그 영특한 용모를 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죄인으로 대우할 수는 없다.”하고

 

그 칼(枷)과 형틀(械)을 늦춰주고는 그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며칠이 지나 반옥령(班玉岑)에 이르렀다.

 

그 땅은 청옥(靑玉)이 많이 산출되는데 캐어서 궁실의 장식(粧飾)을 삼으므로

노역자(役者)가 수천 명이고 공사를 감독하는 자 또한 수백 명이며

운반하는 자들이 서울(京)에까지 잇달았다.

 

한 사람이 옥판(玉板) 두개를 지는데 흠집 없이 도착하면 상(賞)을 주었다.

 

운반을 호위하는 자들이 오고가며 그들을 감독하니

술(酒)과 국밥을 파는 자들이 길에 시가(街)를 이루었다.

 

이날 천기가 한랭하고 또한 눈이 내리므로 옥을 깨뜨리는 자들이 속출하여

도중(途中)에서 서로 목 놓아 울었다.

(아마도 깨뜨리면 본인이 배상해야 하는 듯)

 

때에 <선방仙方>의 무리(徒) 수십 인도 또한 운반을 호위하는 자들 중에 있어서

그 우는 자들을 보고는 도발하여 말했다.

 

“어째서 반(反)하지 않고 도둑이 되는가?”

 

이에 옥을 지는 자들이 난(亂)을 일으켜 그 사자(使者)를 죽이고,

<을불>이 장차 지나가리라는 말을 듣자 기다렸다가 습격하여

또한 호송사자(護送使者)를 죽이니 함리(檻吏)들은 모두 도둑들에게 붙어서

마침내 <을불>, <재생>, <송거>등을 풀어주어 도망치게 만들었다.

 

왕은 <우풍于豊>, <방부方夫>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진압케하고

<을불>을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때 <을불>은 오히려 대설(大雪)로 인해 멀리 도주할 수가 없어서

물레방아 집에 숨어서 장차 돼지를 불에 구워 먹으려 하고 있었다.

 

<방부方夫>가 군사를 이끌고 물레방아간 밖에 와서 멈추고는

연기가 나는 것을 보자 들어와서 <을불>을 보았다.

 

<방부>는 <을불>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기에 비록 변하기는 했어도

속으로는 그를 알고 <을불>에게 눈을 맞춘 채 말했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서 <을불>태자를 잡고자 여기에 이르렀는데

무죄한 사람들이 여기 있어서 군요(軍擾)를 입을까 두려우니

속히 멀리 가서 피하길 바라오.

여기서 동북쪽으로 이십리를 가면 당자촌(棠子村)에 <고박아高朴兒>라는

의기(義氣)로운 사람이 있으니 그리 가면 될것이오.”

 

<을불>이 그 구해주고자하는 뜻을 알고 사례하며 일어나자 <방부>가 말했다.

 

“날씨가 추운데 또한 허기져서 어찌 가겠소?

나에게 간직한 술과 찐 돼지고기가 있으니 마시고 가시오.”

 

<을불>은 받아서 그것을 먹고 당자촌(棠子村)을 찾아 나섰다.

 

<방부>는 군대를 주둔시킨 채 움직이지 않고 <을불>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수색을 시작했다.

 

함리(檻吏)들을 찾아내자 이야기를 짜서 말했다.

 

“<을불>은 진짜 <을불>이 아니고 곧 가짜 <을불>인데 난민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마침내 한 시체의 머리를 베어서 왕에게 바쳤다.

 

왕이 말했다.

 

“진짜 <을불>을 찾아야할 것이다.”

 

<우탁于卓>이 말했다.

 

“신이 진짜 <을불>을 아는데 이미 강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어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차례로 다시 그를 수색하라.”

 

이에 천하에 령(令)을 내려 <을불>을 찾는 자에게 천금(千金)의 상을 내린다하고

오부(五部)에 사자(使者)들을 파견(發)하니

<선방仙方>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뒤를 좇게했다.

 

 

 

 

25. <을불>과 <고박아>의 만남

 

 

그때에 <을불>은 눈(雪)을 무릅쓰고 당자촌에 들어가 <고박아高朴兒>를 물어 찾으니

작은 산등성이 아래 정원이 있는데 소나무 잣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산골짜기 물을 끌어들여 샘을 만들었으니 곧 은자(隱者)의 집이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동자가 나와서 우러러 보며 말했다.

 

“장골 대한(大漢) 서너 사람이 도적질을 하고자 오셨습니까?”

 

<을불>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고박아> 선생의 풍도를 듣고서 왔다.”

 

동자가 웃으며 말했다.

 

“<고박아>는 단지 한 돗자리 짜는 늙은이인데 무슨 선생의 풍도가 있습니까?

그대들은 좀도둑이 아니고 우러러 남의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이 아닙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동자의 말과 같다.”

 

동자는 처마 밑으로 맞아들이며 숯불갱에 이르러서 말했다.

 

“여기서 옷을 말릴 수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숯불은 불길이 치성한 것이 마치 오기를 기다려서 준비된 것만 같았다.

 

잠시 있자 <고박아高朴兒>가 포의야관(布衣野冠)에 작은 체구의 여윈 얼굴로 나와서

흔연히 맞아들이는데 마치 오랜 숙친(熟親)을 대하는 듯 했다.

 

당(堂)안으로 이끌어 차례로 예(禮)를 나누며 말했다.

 

“일전에 경도(京都)의 천한 사위 <방부方夫>로부터

이곳에 도착하는 귀인이 있게 될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집안에는 받들어 올릴만한 진미도 없고 또한 멀리 나가 밖에서 영접할 수도 없었으니

엎드려 비옵건대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을불>이 말했다.

 

“표류(漂流)하는 사람이 얻는 아름다움은 곧 후의(厚意)이니

살아서 이곳에 도착한 것만도 행운이오! 어찌 감히 분외(分外)의 것을 바라겠소?

이로부터 선생을 받들어 풍교(風敎)로써 모새(茅塞:미개한 지식)를 열고자하니

가련히 여기고 구원해 주면 다행이겠소.”

 

<고박아>가 말했다.

 

“산간의 비부(鄙夫)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로부터 겨울이 깊어져 들판에 눈이 쌓이면

길이 불통(不通)되어 멀리 갈 수 없으니

가히 천한 장원에 머물러 화로를 끌어안고 술을 데우며

새끼를 꼬고 돗자리를 짜는 것도 또한 일락(一樂)을 안에 갖고 있으니

더불어 동취(同趣)하며 소일(消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딸 고씨(高氏)를 불러 술을 내오게 하니 곧 <방부方夫>의 처(妻)였다.

 

아름답고 영이(穎異:총명과인)하며 사람을 접대함에 능숙하였다.

 

<을불>이 그 나이를 물으니 방년 19세로서 초후(草后)와 같은 나이였다.

 

<을블>은 초후(草后)를 추억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암연(黯然)히 침울해져 눈물을 흘렸다.

 

고씨가 말했다.

 

“내 남편은 어릴 적에 <을불>태자와 더불어 함께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습니다.

태자는 현명했으나 불행하게도 강에 투신하여 훙서(薨逝)했는데

세간에는 가짜 <을불>이 있어서 소란을 일으키니 주상이 근심하여

그 사람을 잡으라고 명했는데, 비록 그 사람을 잡는다 해도 진짜 <을불>이 아닌데

어찌 잡을 필요가 있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주상입니다.”

 

말을 마치자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리며 <을불>에게 술잔을 내미는데

두 눈에 정을 담아 보냈다.

 

<을불> 또한 웃으면서 말했다.

 

“주상인 즉 현명하고 <을불>은 어리석도다. 어찌 강에 투신함이 그리 빨랐는가!”

 

고씨가 다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밤에 천문을 관상(觀象)하며

‘왕성(王星)은 미미하고 태을(太乙)은 점차 밝아지니

혹 진짜 <을불乙弗>이 인간(人間)에 살아 있어 오래지 않아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했는데

천자가 될 자가 어찌 용이하게 사람에게 잡히는 바 되겠습니까?

천명(天命)을 모르고서 망령되게 스스로 성질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미친 주상(主上)입니다.”

 

일좌(一座)가 모두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제수(嫂)는 진실로 의사(義士)이다!  가히 우리네와 더불어 한 마음이로다.”

 

이에 서로 친숙하게 장난치다가 크게 취하여 책을 베고서 잠이 들었다.

 

고씨는 따로 <을불>을 이끌어서 안으로 들어와 특별히 비단 금침을 펼쳤다.

 

<을불>이 말했다.

 

“사람들 모두 취하여 밖에 누웠는데 어찌 나 혼자만 이와 같겠소?”

 

고씨가 웃으며 말했다.

 

“용굴(龍窟)은 뱀굴(蛇窟)과 더불어 같이하지 않습니다.”

 

<을불>이 물었다.

 

“용굴(龍窟)이 어디에 있소?”

 

고씨는 웃으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을불>이 이에 고씨를 안고 잠자리로 들어가 서로 통하였다.

 

 

 

 

26. 재앙

 

 

이날 밤에 큰 눈이 한길(丈)남짓이나 내려 원근(遠近)이 모두 길이 막히니

수포사자(搜捕使者) 역시 도중(途中)에서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왕은 속히 잡아오지 않는다고 그 사자(使者)에게 태형(笞)을 가하니

사자들이 모두 원망하여 말했다.

 

“강에 빠져 죽은 자를 장차 수부(水府)에서 잡아오란 말인가?”

 

혹은 <을불乙弗>을 자칭하며 죽기를 원하는 자가 서울 안에 또한 오,륙명이 있었다.

 

왕은 그들 모두를 친히 국문하고 거짓임을 알자 그 모두를 참하라고 명령했다.

 

<창조리>가 간하였다.

 

“인명(人命)은 지중(至重)합니다.

하민(下民)들이 왕법을 모르고 망령되이 <을불乙弗>을 칭하는 것은

<을불>의 뛰어남을 듣고서 허명(虛名)을 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인다면 그 이름(名)을 이루어주고 크게 인화(人和)를 잃게 되니

태형(笞)을 가하여 경계시키느니만 못합니다.”

 

왕은 듣지 않고 속히 그들을 참하라고 명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바로 <선방仙方>의 무리(徒)였으니

그 참(斬)하는 자들 역시 같은 무리였던 까닭에

몰래 놓아주고서 허수아비의 목을 끊어 바치며 말했다.

 

“형을 집행할 때는 모두 산 사람들이었는데 목을 끊은즉

모두 이런 허수아비였습니다.”

 

왕은 크게 의혹(大疑)하였다.

 

그때에 경도(京都)에도 큰 눈(大雪)이 내렸는데 도성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들어

“을불태자”라 하며 혹은 수레에 실어 시가를 지나가니

사람들이 다투어 절을 하면서 “우리 천자(天子)”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잡고자 한즉 뿔뿔이 흩어져 간곳을 모르고

다만 수백 개의 큰 눈사람을 궁안에 잡아다 놓았다.

 

왕은 노하여 그것을 불사르도록 명했다.

 

역부(役夫) 수백 명으로 하여금 각기 큰 횃불을 들게 하고

 

“을불은 마땅히 이 눈이 녹듯 꺼져라.”하고 빌게 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크게 외쳤다.

 

“을불이 마땅한가?  을불은 마땅히 왕이다.

연태자(椽太子)가 마땅히 이 눈처럼 사라져라.”

 

그러자 사람들 모두가 따라서 함께 제창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 선창(先呼)한 자를 잡도록 명하자

사람들이 모두 횃불을 든 채 뿔뿔이 달아나므로

화연(火烟)이 궁 안에 가득 차서 궁인들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갑자스런 와중에 잘못하여 궁중에 실화(失火)하니

불길의 기세가 매우 급하였으나 불을 끄는 자가 없었다.

 

왕은 크게 두려워 하여그 잡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 눈사람들을 보니 혹은 “椽太子(연태자)” “顔太子(안태자)”라 적혀있고,

혹은 “揷矢婁(삽시루)”라 써 놓았는데 팔을 자르거나 눈을 뚫고,

혹은 머리를 끊고 가슴을 파고 코를 깎거나 입을 지졌으며

또한 “주상을 죽일 것이다”라고도 써놓았다.

 

왕은 분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장군 <우평于枰>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고 바람이 갑작스레 휘몰아쳤다.

 

왕은 연후(緣后), 초후(草后), 우태후(于太后) 및 두 태자와 함께

겨우 신림(神林)의 원(院)으로 화(禍)를 피하고 궁중의 모든 비빈들과

왕자녀(王子女)의 생사는 아득히 알지 못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죄로 이런 재앙을 받는가?”

 

홀연 신림(神林)의 숲이 어지럽게 우는 가운데

한 장군(將軍)이 검을 휘두르며 호령하고 나오는 것이 보이는데

어김없이 바로 안국군 <달가達賈>였다.

 

왕은 크게 놀라 땅에 자빠지며 말했다.

 

“나 죽는다!  나 죽는다!”

 

우태후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무슨 경겁(驚怯)을 이리 심하게 하는가?”

 

그때 서궁(西宮)의 알자(謁者)가 포후(蒲后)와 왕자 <심椹> 및

<홍紅>, <람藍> 두 공주를 데리고 와서 아뢰었다.

 

“신이 병권(兵權)이 없는 까닭에 진화(鎭火)를 지휘하지 못하고

다만 거느린 궁노(宮奴)들과 더불어

겨우 서궁과 정궁(正宮)의 보화를 보전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때야 바야흐로 너의 충성을 알겠다!”

 

포후(蒲后)가 말했다.

 

“위두(衛頭)의 패거리들이 모두 난군(亂軍)과 더불어 도둑질을 하자

<선방仙方>이 그를 꾸짖었으나 금할 수가 없었으니 저들은 모두 위두이고

<선방>은 다만 일개 알자(謁者)일 따름이니 어찌 보국(保國)을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위두는 모두 우于 장인(丈人)의 소임이다. 혹여 뇌물을 받고 도적들을 쓴 것인가?”

 

우태후가 말했다.

 

“어찌 도적을 쓸 장인(丈人)이겠는가?

마땅히 이 급한 때에는 미천함으로써 사람을 저버릴 수 없으니

의당 <선방>을 위두로 삼아 이를 진압해야 할 것이다.”

 

왕은 그러히 여기고 즉시 <선방>을 배(拜)하여 위두(衛頭)로 삼았다.

 

<선방>이 말했다.

 

“신에게 위두는 과분하나 이 대란(大亂)에 일개 신위두(新衛頭)가 무슨 가치가 있어

능히 제군(諸軍)을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도두낭장(都頭郎將)을 얻어 12 위두(十二衛頭)와

궁외위장(宮外衛將)들을 감독하고자 합니다.”

 

왕이 그를 허락하고 용검(龍劍)을 내렸다.

 

<선방>이 그 궁노(宮奴)를 불러 영(令)을 전하고

융복(戎服)차림으로 말에 올라 출발하니 위의(威儀)가 새로웠다.

 

우태후가 감탄하여 말했다.

 

“장재(將材),유재(有才)라 하더니 저게 그 사람이다!”

 

잠시 후 <선방>은 한 위두(衛頭)의 목을 베어서 바치며 상주했다.

 

“이 사람은 방화와 도둑질을 했습니다.

태보(太輔) <우평于枰> 또한 난군(亂軍)에 피살된 바이니

옛 위두(舊衛頭)로는 일을 정리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든 위두를 파직하고 신(臣)의 사람으로 씀이 어떠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그대가 상주한 바 대로하라.”

 

<선방>이 이에 그 무리 열두 명에게 위두(衛頭)를 제수하고

요새(要塞)를 나누어 지키며 방화를 금지시키고,

<창조리>와 <상보>를 불러 입궁시키며,

정궁(正宮)과 서궁(西宮)을 소제하여 왕을 받들어 모시고 위로하였다.

 

불은 오히려 아직도 꺼지지 않았건만

왕은 놀라 쓰러진데다 상한(傷寒)으로 정사를 볼 수 없었다.

 

우태후가 <상보>와 더불어 공의(共議)하여 정사를 행하며

<창조리>에게 명하여 군민(軍民)을 진무(鎭撫)하도록 하였다.

 

소실된 궁전이 32좌(坐)요, 보물(寶物)과 인축(人畜)의 손실 또한 허다하였다.

 

왕은 그 불타고 남은 잔해를 보자 더 이상 궁(宮)에 뜻이 없어 모두 다 쓸어버리라 하며

 

“나가서 <상보>의 집에 거하리라.”라 하고

 

“내 처의 집이 심히 아늑하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초후(草后)는 임신한지 이미 두 달째였다.

 

왕이 그녀와 더불어 온탕(溫湯)에 가서 출산하고자하니 부씨(芙氏)가 간했다.

 

“인심이 흉흉하여 산장(山莊)에 나가 계실 수 없습니다.”

 

마침내 <상보>의 집에서 군신(群臣)의 조례를 받으니 군신들이 모두 진창에 섰다.

 

<상보>의 노(奴)가 군신들에게서 마두전(馬頭錢)을 거둬들여

재화를 챙기는 것이 심히 많았다.

 

<창조리>가 <상보>에게 말했다.

 

“공은 후(后)의 아버지로써

노(奴)가 조신(朝臣)들에게 재물을 거두는 것을 치죄(討)하였소?”

 

<상보>가 말했다.

 

“내가 치죄할 바가 아닙니다. 왕이 하사한 노(奴)이니 내가 어찌 그를 금하겠습니까?”

 

<창조리>가 탄식하여 말했다.

 

“큰 기강(大綱)이 무너지니 나라를 보전할 수 없도다.”

 

이 해 봄에 왕은 초후(草后), 부씨(芙氏)와 더불어 봉산행궁(烽山行宮)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왕의 태궁(胎宮)이었다.

 

 

 

 

27. 소금장사 <을불>

 

 

<을불乙弗>은 모든 신하들을 5부(五部)에 분산 파견하여

동지(同志)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조불祖弗>, 동부의 <소우蕭友>, 남부의 <오맥남烏陌南>이

가장 먼저 모의를 통하였다.

 

<오맥남烏陌南>이란 자는 <창조리>의 사위로서 공신 <오이烏伊>의 후손이었다.

 

<맥남>은 음씨와 더불어 <창조리>에게 왕을 폐하여

<두로杜魯>의 고사(古事)를 행할 것을 권하였다.

 

<창조리>가 자못 마음이 움직여 은밀히 <조불祖弗>과 <소우蕭友>에게 물으니

모두 찬성하였다.

 

오히려 서부(西部)와 중부(中部)에서 응하는 자가 없어서 그를 기다렸다.

 

<을불>은 동촌(東村)사람 <재모再牟>와 더불어 소금장사를 하며 은밀히 다녔는데

압록(鴨綠)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동(江東)의 사수촌(思收村)에 닿아 인가에 묵었다.

 

그 집의 노파가 소금을 청구하므로 한 말(斗)남짓을 주었다.

 

노파가 적다고하며 꾸짖고 욕하자 <을불>이 말했다.

 

“말 소금이 적다면 섬 소금 역시 응당 적을 것이니

무슨 수로 네 욕심을 틀어 막겠는가?”

 

노파가 노하여 앙심을 품고 몰래 신을 소금 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이 알지 못하고 소금을 지고 길을 나섰는데 노파가 쫓아와서 신을 찾아내며

그를 무고하여 재(宰)에 고소하였다.

 

재(宰)는 신발이 소금 속에 있었으므로 노파에게 판결을 주고

<을불>에게는 태형을 가하여 내쫓았다.

 

이에 걸식을 하며 돌아가니 형용은 말라죽은 고목같고

옷은 남루하여 사람들이 그 왕손(王孫)이 됨을 알지 못했다.

 

 

 

 

28. <을불>과 <면대>의 만남

 

<방부方夫>는 <을불>을 받들고자하여 입경했다가 당자촌(棠子村)에 이르렀는데

<재모再牟>와 더불어 소금장사가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재모>가 말했다.

 

“압록재(宰)에게 죄수로 갇힌바 되어 서로 헤어졌습니다.”

 

<방부>가 압록의 재소(宰所)에 이르러 그를 찾았으나 볼 수 없었고

강가에서 수색하다가 마침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끌어안고 울고 나자 <을불>이 기뻐하며 말했다.

 

“염노(鹽奴)의 옷차림이 오히려 복이 되었으니 일시의 고초야 족히 말할게 무엇인가?”

 

마침내 더불어서 마산(馬山)을 거쳐 지나가니 바야흐로 단오(端午)를 맞이하여

모든 촌락의 장춘녀(長春女)들이 시냇가에서 유희하는데 꿀물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을불>이 목이 말라 마시기를 청했다.

 

모든 여자들이 <을불>의 새까만 얼굴과 염노 차림에

키가 커서 비쩍 마른 몰골을 보고는 꾸짖어 말했다.

 

“대가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염노(鹽奴)가 마실 것을 구하느냐?”

 

그 때에 <선방仙方>의 처 <면대免大> 역시 그 중에 있었는데

뭇 여자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목마르면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찌 귀천을 논하는가?”

 

이에 큰 바가지로 퍼서 주니 <면대>의 두 딸 또한 앵두(櫻桃)를 그에게 주었다.

 

<을불>이 감사를 표하며 그를 시험코자하여 말했다.

 

“우리는 멀리서부터 와서 목이 마르고 굶주렸소,

소소한 앵두로는 배창자를 채우기에 부족하니 바라건대 밥을 얻어 먹읍시다.”

 

뭇 여자들이 <면대>를 말리며

 

“대노(待奴) 후노(厚奴)가 대개 꺼리는 게 없으니 일찍 쫓아버림만 못합니다.”

 

하고 몽둥이로 내쫓으려했다. <난대>가 말했다.

 

“그 안색을 보니 진정 굶주린 사람이다.”

 

이에 밥을 짓고 어육(魚肉)을 갖추어 차려주었다.

 

<을불>이 <방부>와 더불어 배부르게 먹고 나서 사례하여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보답할 것이 없으나 다른 날에 귀하게 되면 마땅히 갚으리다.”

 

사람들이 모두 웃으며 말했다.

 

“염노(鹽奴)가 귀하니 누군들 귀하지 않을꼬?”

 

<면대>의 어린 딸은 나이가 거지 9살이었으나 재색(才色)을 이미 갖추었다.

 

홀로 말하기를

 

“이 아즈반(叔) 또한 <을파소乙巴素>처럼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상국(相國)이 되면 마땅히 그대를 취하여 처(妻)로 삼으리라.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노하여 말했다.

 

“노(奴)가 감이 은혜를 저버리고 욕(辱)을 하느냐?”

 

<면대>가 말했다.

 

“사람은 제각기 스스로 믿는 것을 가져서 말함이니 어찌 욕(辱)이 되겠는가?”

 

그리고 <을불>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딸아이 <거지居知>는 오히려 어리니 마땅히 상(相)이 되기를 기다려서 받드리다.”

 

<을불>이 이에 사례하고 떠났다.

 

<면대>는 암중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을불>태자이다.’ 하고 돌아가 <선옹仙翁>에게 고하였다.

 

애초에 <선옹>의 아버지 <주선周仙>은 <주공근周公瑾>{주유}의 서손(庶孫)으로서

나이 18세에 (오의 사신) 호위(胡衛)를 따라 이르렀는데

용모가 절미(絶美)한 까닭에 (말썽이 생겨) 행로(行路)가 경색 차단되고

급기야 복주되어 유형(誅流)을 받기에 이르렀다.

 

때에 집법령(執法令) <주통朱通>은 그 미모를 아끼어 집에 은닉하고

용양신(龍陽臣)으로 삼았는데

<주통>의 처 우씨(于氏)가 몰래 <주선周仙>과 상통(相通)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선옹仙翁>이었다.

 

명민(明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고금(古今)에 박식하였다.

 

<주통>의 모든 아들들이 다 귀하게 되었으나

<선옹>은 홀로 오(吳)나라 사람의 출생이라 하여 기용되지 않았다.

 

안국군 <달가>가 그 재주를 알고 불러서 기실(記室)을 삼고

그 계책을 써서 양맥(梁貊)과 숙신(肅愼)을 평정하였는데

돌아와서는 경하(京下)에 학원을 여니 가르침을 받은 자제(子弟)들이 수천 명이었다.

 

늘 <달가>를 권하여 먼저 기선을 잡아 간흉을 제압할 것을 권하였으나

<달가>는 의(義)를 중시하여 차마 그 말을 쓰지 못했다.

 

<선옹>이 이에 퇴거하여 마산(馬山)에 숨어 지내며

해마다 소(牛)와 양(羊) 수천마리를 쳐서 번식시키며

하천에서 금(金)을 캐어내니 재화를 모은 것이 수만(數萬)이었다.

 

스스로 우태후(于太后)의 옛 신하의 얼축(糵畜)이 됨으로써

태수(太守)와 매우 깊이 결탁하였다.

 

태수는 그가 비상한 위인임을 알고 그 부락(部落)을 다스리도록 명하여

공적을 크게 드러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았다.

 

<선옹>은 <을불>을 받들고자하여 재산을 흩어 선비들을 결집(結士)하고

아들 <선방仙方>을 입경(入京)시켜 일을 주관케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을불>이 촌락을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뒤를 쫓아서 해령(蟹岺)에 미치자

<을불>은 <방부>와 더불어 나무아래에 불을 피우고 노숙(露宿)하고 있었다.

 

<선옹>이 나아가 배알하며 함께 그 장원을 돌아갈 것을 청하자 <을불>이 말했다.

 

“나는 곧 미친 사람일 따름이오.”

 

<선옹>이 말했다.

 

“세상이 모두 눈(目)이 없으나

신은 홀로 눈동자(瞳)가 있으니 왕손은 의심하지 마소서.

신은 바로 안국군의 신하 <선옹>입니다.

태자를 받들어 옛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을불>은 곧 그가 <선방仙方>의 아버지임을 알고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변복(變服)하여 목양자(牧羊子:목동)가 되고 <방부>를 서부(西部)로 보내어

여러 대인(大人)들에게 유세(遊說)하도록 하였다.

 

 

 

 

29. <창조리>의 간언

 

 

때에 초후(草后)는 왕녀(王女)를 낳고 장차 귀경(歸京)하려 했는데

왕은 궁실이 아직 중수되지 않은 까닭으로

나라 안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 해는 흉년이라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다시 부역에 시달리자

백성들이 많이 집을 버리고 떠돌아 다니니 세상이 흉흉(洶洶)하였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했다.

 

“천재(天災)가 닥쳐와 한 해 농사가 흉작을 이루매

여민(黎民)들이 의지할 바를 잃고

건장한 자는 사방을 떠돌며 노약자는 물 구덩과 산골짝을 전전하니

이는 진실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가다듬어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않고 기갈에 지친 사람들을

토목의 노역에 내몰아 괴롭히니 백성의 부모 된 뜻과는 심히 어그러집니다.

 

하물며 또한 모용씨가 강경하여 우리의 피폐를 틈타 침공하려하고 있으니

그 사직(社稷)을 어쩌려고 하십니까?”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君)이란 백성의 우러러 바라봄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도 위엄을 보일 수 없는 까닭에

하늘이 불을 내려 옛 궁실의 피폐함을 허물고 면목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경은 국상(國相)으로서 마땅히 불일의 공(不日之功)을 독려해야 하거늘

오히려 불평하는 무리와 함께 짐의 몸을 비방하려 하는가?

 

무지한 백성들 무리가 을불을 칭찬하고 짐을 원망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은 을불과 서로 상통(相通)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얻고자 한다는데 지금 과연 그러하도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질지 아니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재능이 없는데도 상국이 되었기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죽고자 하는가? 과인을 범하고자 하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창조리>는 왕이 고칠 뜻이 없음을 알고 또한 해가 머지않아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맥남烏陌南>, <조불祖弗>, <소우蕭友>등과 더불어

은밀히 <을불乙弗>을 영립(迎立)할 모의를 세웠다.

 

때에 <우탁于卓>, <을보乙寶>, <자柘>, <선방仙方>등은 암암리에 서로 결탁하고

서로 간에 <을불>의 소재를 감추어서

만일의 변고에 처하여 그 공(功)의 으뜸이 되고자했다.

 

<창조리> 또한 암암리에 그 무리를 발하여 물색하며 찾아다녔다.

 

 

 

 

 

30. <을불>의 婢녀 희롱

 

그때 <을불>은 <선옹仙翁>의 집에 있었는데

<선옹>은 또한 그 아들 <선방>에게도 감추고 말하지 않았으며

집안 사람들 역시 그가 왕손(王孫)임을 몰랐다.

 

유독 <선방>의 처 <면대免大>만이 알고 있어서 그를 대우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때에 <을불>의 나이 이미 22세로 신장이 8척이고

용의 수염에 호랑이의 눈동자요, 원숭이의 팔에 외뿔소의 어깨였으니

삼가 근심하는 초췌한 모습은 마른 학을 닮았고,

얼굴을 펴고 웃으면 봄바람이 호탕하였다.

 

모든 비녀(婢)들이 그와 친하고 싶어서 그에게 장난을 치니

뭇 노(奴)들이 그를 질투하여 말했다.

 

“용렬한 장한(長漢)이 비녀(婢)를 훔치는 데는 능하구나!”

 

<면대(免大)>가 그들을 꾸짖어 말했다.

 

“저 공(公)은 <옹翁>의 외족(外族)이다. 너희들이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니다.”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외족노(外族奴)가 비녀(婢)를 희롱할 수 있는데

타족노(他族奴)는 희롱할 수 없겠는가?”

 

이에 품고 희롱하던 비녀(婢)를 그 노(奴)에게 밀어주었다.

 

노(奴)가 그녀를 안고 희롱하려하자 비녀(婢)가 뿌리치고 가면서 말했다.

 

“나는 외족노(外族奴)는 좋아해도 이런 미친노(此狂奴)는 싫다.”

 

그 노(奴)가 <을불>에게 말했다.

 

“네가 키가 크고 자지(莖)가 큰 까닭에 비녀(婢)들이 그것을 좋아하니

마땅히 네 자지(莖)를 뽑아서 갚아 주리라.”

 

<면대>가 그를 꾸짖어 말했다.

 

“네가 어찌 감히 장자(長者)에게 욕하느냐, 명하여 곤장을 칠 것이다.”

 

<을불>이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한 마디 실수를 족히 책망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마땅히 삼가 할 것입니다,”

 

마침내 비녀(婢)들을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니

비녀(婢)들이 모두 그 노(奴)를 원망했다.

 

<면대免大>가 <을불>을 보니 비녀들을 멀리하고 무료하고 조용히 지내므로

그 앞에 나아가 옷의 터진 곳을 꿰매주며 교태를 부려 말했다.

 

“두 딸은 모두 어려서 잠자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첩이 듣건대 영웅은 호색하지만 감히 비녀(婢)를 받들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훗날의 누(累)가 될까 두려운 것이외다.”

 

<을불>이 웃으며 <면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속말에 ‘딸을 기다려서 어미가 행한다’하니

어미가 만약 나를 가엾게 여긴다면

어찌 은밀하게 한 번의 잠자리를 베풀지 않습니까?”

 

<면대>가 웃음을 머금으며 은근함을 보이자 <을불>이 마침내 안고 희롱하다가

산정(山亭)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그녀와 통하였다.

 

이로부터 날이 없이 서로 통정하는데 그 집이 산을 의지하여 세워졌으므로

정자(亭)는 그 꼭대기에 있어서 멀리서도 바라다 보였다.

 

노(奴)중에 그것을 본 자가 있어서 질투하던 노(奴)로 하여금

<선옹仙翁>에게 고하게 했다.

 

<선옹>은 꾸짖으며 그를 물러가게 했다.

 

노(奴)가 일곱 번을 고하였으나 일곱 번 꾸지람을 당하였다.

 

노(奴)가 노하여 말했다.

 

“우리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주인은 외숙(外叔)을 위해 거짓을 취하고

오히려 우리를 욕하니 가히 이때로써 주인을 멸하고 재산을 나눠야 할 것이다.“

 

비녀(婢)가 그 밀모(密謀)를 엿듣고서 <선옹>에게 고하였다.

 

<선옹>은 이에 비녀(婢)로 하여금 술을 보내서 그들을 위로하고 말을 전하게 했다.

 

“내일 마땅히 외족노(外族奴)를 죽일 것이다.

너희들 세 사람은 정원(園)안에 구덩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니 은밀히 하라.”

 

세 사람이 크게 기뻐하고 은밀히 밤을 새워 구덩이를 파고는 지쳤는데

그 나오고자 할 때를 기다렸다가 돌을 굴려 메워버렸다.

 

곧 모든 노(奴)를 경계시켜 말했다.

 

“집안에 수신(樹神)이 있어서 너희들의 정사(正邪)를 아니 모반하는 자는 죽인다.”

 

이에 모든 노(奴)들이 전율하며 감히 난(亂)을 일으키지 못했다.

 

 

 

 

31. 객성이 달을 범하다

 

 

이해 9월, 왕은 초후(草后)와 더불어 봉산행궁(烽山行宮)에 있었는데

매일 밤 산 위에서 귀신의 곡(哭)하는 소리가 있어

왕은 모골이 송연하여 그를 두려워했다.

 

이미 행궁을 버리고 환도(還都)해서는 공사를 매우 급하게 독촉하므로

장병(將士)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태사(太史) <연봉椽逢>이 상주하여 말했다.

 

“근자에 객성(客星)이 달(月)을 범하니 필시 외적이 있어서

후비(后妃)와 내통하고 반역을 꾀하는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내 처(妻)의 누가 외적과 더불어 상통하는 것을 응하겠는가?”

 

초후가 말했다.

 

“<연봉>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자 하여 지어낸 것입니다.

이는 무근지설(無根之說)이니 가히 황지(荒地)로 유배시켜야 할 것이오.”

 

왕이 이에 초후의 오라버니 <상도尙道>를 태사(太史)로 삼고

<연봉椽逢>을 해빈(海濱)으로 귀양 보냈다.

 

때에 서부사자(西部使者) <우린于璘>은 <방부方夫>의 모반을 상주하고자

장차 입경(入京)하는데 도중에 <연봉>과 만나게 되었다.

 

<우린>과 <연봉>은 본래 돈독한 사이였다.

 

<연봉>이 말했다.

 

“주상이 충신을 많이 의심하여 소원한 꼴을 당하니 화(禍)가 장차 멀지 않았소.

나아가 충성하여 주살을 당하는 것 보다 관망하면서 변고에 응하는 것이 낫소.”

 

<우린于璘>은 그말을 그럴듯이 여기고

마침내 돌이켜서 <방부>와 결탁하고 혼인을 약속하였다.

 

12월에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므로 우태후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네가 허물없는 사람을 죽이고 백성을 부역시키니

두렵건대 혹 하늘이 노하신 것인가?”

 

왕이 노하여 말했다.

 

“너 또한 <조리助利>의 패거리와 통모(通謀)했는가?”

 

태후가 이에 <상도尙道>에게 물었다.

 

“태사는 어떻소?”

 

<상도>가 말했다.

 

“하늘의 방뢰(放雷)는 사람의 방귀와 같으며

땅의 진복(震腹)은 사람의 설사(泄瀉)와 같습니다.

방귀와 설사는 모두 그때의 따듯함(暖)과 추움(冷),

막힘(滯)과 트임(通)으로 인한 것이며

정해진 때가 없는 것이니 족히 두려워할게 아닙니다.”

 

왕은 이에 기꺼워 하며 말했다.

 

“진정 좋은 태사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크게 지진이 일어나는데

때에 왕은 <상보尙寶>의 집에 있었으니 그 집의 정당(正堂)이 무너져 내렸다.

 

왕은 비로소 송연한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태사의 말이 두렵건대 혹 틀린 것인가?”

 

<상도>가 말했다.

 

“신의 집이 협소하고 오래되어 많이 썩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조례를 받는 것이 옳지 않은 까닭에

또한 아버지와 의논하여 개축하고자 했으나

왕궁이 아직 보수되지 않은 까닭으로 공사를 겹칠 수 없어 기다렸습니다.

지금 그 썩은 나무가 부러졌으되 인축(人畜)의 상함이 없었으니

거의 하늘이 조속히 수리하고자 함인 듯 합니다.”

 

왕은 그런가 여기고 역졸(役卒)을 나누도록 명하여 <상보>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다.

 

금신(金神)의 원춘(元春)에 왕은 <우탁于卓>의 집으로 어소를 옮기고 조회를 받으니

곧 돌고궁(咄固宮)이었다.

 

<을불>이 도피했을 때부터 수왕(樹王)이 말라죽고 꽃이 피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서 다시 소생하자 옛 노(舊奴)의 무리들이 암암리에 기뻐하며

“을불당왕(乙弗當王)”이라함으로써 그를 축도하였다.

 

을씨(乙氏)는 왕이 들을까 두려워서 그를 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때에 왕의 포매(胞妹) 탐씨(耽氏)는 이미 장성하여 아름다웠다.

 

왕이 그를 행(幸)하여 총애가 바야흐로 융성하였으니

탐씨(耽氏)는 곧 <돌고咄固>의 딸이었다.

 

힘써 그 아버지가 무죄하게 간신의 참소를 입은 것을 말하니

 

왕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원항>이 나를 그르쳤다. 내가 어찌 진실로 네 아버지를 미워했겠느냐.”

 

마침내 명을 내려돌고의 작위를 복원하고 그 묘(墓)에 제사를 지냈다.

 

을씨가 이에 사은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첩의 옛 남편을 가엾게 여겨주신 까닭에

고목이 다시 살아나서 옛 노(舊奴)들이 그를 받들고 있습니다.

신의 아들 <을불>은 이미 강 속에서 죽었으니

황송하오나 초혼하여 그를 위로하겠습니다.”

 

우태후 또한 말했다.

 

“골육을 이간한 것은 간신의 성토였다.

<을불>이 비록 살았어도 사면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이미 죽은 자임이겠는가?”

 

왕은 마침내 명을 내려 그 혼을 불러 위로하도록 하였다.

 

을씨가 이에 <선방仙方>, <자柘>등과 더불어 포대(布袋)를 만들어 곡식을 넣고

빈민들에게 분배하여 “을불곡(乙弗穀)” 이라한 것이 수만 포였으니

경외(京外)의 인민들이 모여든 자가 십만으로 셈할 수 있었다.

 

왕은 변(變)이 있을까 의심하여 중지하도록 명령했으나

인민들은 해산하여 떠나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포곡(布穀)이 나온 곳을 추궁하고 <자柘>등을 정원에서 국문코자 하니

땅이 홀연 다시 크게 요동치고 왕은 능히 앉아있을 수 없어

전(殿)을 내려와 수왕(樹王)에게 달려가서 의지했다.

 

<자柘>와 모두가 왕을 부축하며 무죄(無罪)함을 호소하고

초후와 탐씨가 모두 출령(出令)이 불일(不一)한 까닭에

이러한 지진이 있다고 말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모두를 사면하자 지진이 그쳤다.

 

이로부터 남이 <을불>의 모반이라 말하는 것이 있으면

왕은 모두 믿지 않고 옥에 가둘 것을 명했으므로

왕의 근신들 또한 <을불>이 조만간 들어와 왕이 될것임을 알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32. 반정

 

 

2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들어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도로는 끊어져 막히고 떠도는 말들이 사방에서 나왔다.

 

 

<을불>이 고열(苦熱)이 있어 <선방仙方>의 두 딸과 더불어

시내에 나가 목욕하였는데 이를 태수에게 고한 사람이 있었다.

 

태수가 장차 <을불>을 잡으려고 오자

<을불>은 <선방>의 두 딸을 데리고 냇가의 갈대숲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날은 저물고 뱃속은 비었는데 모기와 등에가 교대로 덤벼들었다.

 

<선옹>이 횃불을 들고서 그를 찾아내자

곧장 <을불>과 <면대免大> 및 그 두 딸을 산의 오두막집으로 옮기고

<선옹> 스스로 창검을 잡고서 지키는 자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서 마침내 와전된 것임을 알자 그만두었다.

 

그때에 <재생再生>과 <장막사長莫思>등은

남부사자(南部使者) <오맥남烏陌南>과 더불어

정병 3천을 이끌고 궁역(宮役)을 감리(監理)한다는 말로 칭탁하고

날짜를 정해서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고자 했다.

 

<조불祖弗> <소우蕭友>등은 먼저 맞이하여 자신의 공(功)으로 삼고자하여

사잇길로 잠행하며 비류하(沸流河)의 강가에 이르렀다.

 

그들이 배를 타려하는데 그때 <을불>은 장차 당자촌(棠子村)에 가고자하여

노정과 소식을 탐문하며 배 위에 서있었다.

 

<소우蕭友>가 보고서 의심하며 말했다.

 

“저 사람의 형모가 비록 초췌하나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고

풍채가 <돌고>태자와 흡사하니 필시 <을불>태자이다.”

 

이에 좇아가서 절하며 말했다.

 

“신등은 국왕이 무도한 까닭에 음(陰)으로 폐립을 모의한 바,

왕손은 조행검약(操行儉約)하며 인자애인(仁慈愛人)하므로

가히 조업(祖業)을 이을 수 있는 까닭에 맞으러 왔습니다.”

 

<을불>이 굳이 감추며 부정하자

<소우>등은 마침내 그를 이끌고 <선옹>의 장원에 이르러서 탐문했다.

 

<선옹>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는 우리집의 노(奴)입니다. 공들이 모두 잘못 안 것입니다.”

 

<소우蕭友>등이 의심쩍어하며 결정을 못 내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부方夫>와 <선방仙方> 또한 말을 몰아 당도하니

마침내 일의 고비가 장차 박두했음을 알게 되었다.

 

<선옹>은 <면대>에게 명하여 <을불>을 목욕시키고 어의(御衣)를 받들어 올렸다.

 

<을불>이 마침내 태자의 복장을 차려입고

<소우蕭友>, <조불祖弗>등의 배알(拜謁)을 받고

군신(君臣)의 예를 행한 후 자리에 앉아 밤을 새워 잔치를 하고 새벽에 파하였다.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출발할 수가 없자 <선옹>이 말했다.

 

“인사(人事)는 순천(順天)이니 가히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명을내려

<방부方夫>는 당자촌(棠子村)의 장정(壯丁) 30인을 발하고.

<선방仙方>은 마산촌(馬山村)의 장정 30인을 발하여

초후(草后)에게 양(羊)을 진상한다고 탁언(託言)하며 출행하니

바로 8월 보름에 맞아 떨어졌다.

 

하얀 달이 마치 낯과 같이 비추니 낮에는 쉬고 밤에는 행군해서 경도에 입성하여

<오맥남烏陌南>의 집에 묵었다.

 

<오맥남>의 처는 <창조리>의 딸이었다.

 

<조불祖弗>이 <맥남>을 권하여 말했다.

 

“<선방>은 이미 그 처로 신왕(新王)을 모시게 했으니

그대도 의당 스스로 도모하십시오.”

 

<맥남>이 이에 그 처 창씨(倉氏)로 하여금 <을불>의 잠자리로 들어가게 했다.

 

<을불>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자 마침내 창씨를 품고

칠일(七日) 칠야(七夜) 연이어 행(幸)하였다.

 

누운 채로 나오지 않고 오직 소식만을 기다리니

얼굴은 흙빛이 되고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몰랐다.

 

창씨가 말했다.

 

“들은즉 그대는 밖에 있으면서 근신(近臣)의 처와 많이 통했다고 하는데

일조에 왕이 되면 모두 가히 입궁시키겠지만

첩은 비록 오늘 총애를 받아도 다른 날에 버려질지 어찌 알겠습니까?”

 

<을불>이 그를 위로하여 말했다.

 

“네 아버지 창공(倉公)이 나를 받드는데 어찌 너를 등지겠는가.

마땅히 너를 후(后)로 삼아서 네 아들을 세우리로다.”

 

창씨가 그 말을 <창조리>에게 고하자 <창조리>는 웃으며 말했다,

 

“신왕(新王)의 나에 대한 아부가 심하도다!

너는 그 총애를 믿어서 뜻을 잃는 일은 말아야 할 것이니 도리어 화(禍)의 근본이다.”

 

창씨가 이에 삼가 신절(臣節)을 지키면서 감히 친근하게 장난치지 않음이 여전하므로

<을불>은 그 예절이 있음을 알고 또한 빈객처럼 대하였다.

 

 

9월, 왕이 장차 후산(侯山)의 북쪽(陰)에서 사슴(鹿)을 제사하고자하니

구공(舅公) <상보尙寶>와 장군 <우자于刺>, 상국 <창조리倉助利>가 따랐다.

 

왕이 연후(椽后), 초후(草后), 탐씨(耽氏), 을씨(乙氏)와 더불어

우태후(于太后)를 받들고 어가를 출발하여 후산행궁에 이르렀다.

 

<조불祖弗>, <소우蕭友>등은 <자柘>, <을보乙寶>, <창멱倉覓>, <우풍于豊>등과 함께

병력을 출동하여 서울(京)안팎을 진압하고,

<선방仙方>은 군사로써 행궁을 정숙히 하고,

<오맥남烏陌南>), <재생再生>, <장막사長莫思>, <방부方夫>등은

그 사사로운 기병들을 거느리고 사냥터에 산재하며 상황에 응변(應變)토록 하였다.

 

<을불>이 마침내 <휴도休都>, <송거松巨>등과 함께 미복차림으로

계곡을 따라서 후산(侯山)의 북쪽으로 나왔다.

 

갈대 잎을 따서 관(冠)에 꽂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신호를 삼아야 할 것이오.”

 

<창조리>가 이에 갈대 잎을 관(冠)에 꽂으며 말했다.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자는 나를 따라서 갈대 잎을 관에 꽂아라.”

 

<오맥남> 등이 일시에 그것을 꽂고는 <을불>을 받들어 말위에 태우고

백신의(白神衣)와 자주왕관(紫朱王冠)을 더하니

무리들이 모두 환호하며 만세(萬歲)를 외쳤다.

 

왕이 행궁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물었다.

 

“상국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선방>이 대답했다.

 

“우리가 현주(賢主)를 맞아 세우고 무도함을 폐하는 것입니다.”

 

곧 검을 휘두르며 군사를 호령하니 왕은 도망갈 바를 모르고

초후(草后)의 곁에서 머리만 내민 채 말했다.

 

“네 아버지와 네 아저씨가 차마 날 폐하려고 하는가?”

 

초후가 <선방>을 꾸짖으며 말했다.

 

“네 어찌 감히 배은하고 반역하느냐?”

 

<선방>이 말했다.

 

“신은 반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을불>태자를 받들고 후(后)를 받들고자 하옵니다.”

 

초후(草后)는 곡(哭)을 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구왕(仇王)의 딸을 낳았다.

<을불>이 비록 온대도 어찌 상면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왕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왕은 두 태자와 우태후, 연후와 더불어 달아났다.

 

군신(群臣)들이 <을불>을 들어 올린 채 행궁으로 들어와서

왕 및 두 태자를 당(堂)에서 끌어내려 꿇어앉게 했다.

 

<을불>이 말했다.

 

“전왕(前王)이 무도하나 또한 나의 숙부이니 죽일 수 없다.

태후 및 여러 후(后)는 모두 여자이니 만약 그를 범(犯)한 자가 있어도

나의 신하가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왕은 이에 부복하여 사죄하고 <을불>에게 새보(璽寶)를 바치며 말했다.

 

“이로부터 마땅히 대왕의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군신(群臣)들이 모두 외쳤다.

 

“신왕만세(新王萬歲)”

 

<을불>은 마침내 새보(璽寶)를 받고 대맥대왕(大貊大王)이 됨으로써

5부(部) 37국(國)의 조하(朝賀)를 받게 되었다.

 

명을 내려 구왕(舊王)및 두 태자를 별실에 가두게 하자

두 태자는 놀라고 겁에 질려 스스로 자살하였다.

 

왕 또한 놀라고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는데

수졸(守卒)이 그를 잡아 말리고 엄하게 지켰다.

 

때에 우태후(于太后)는 왕 앞에 달려와서 엎드리며 말했다.

 

“원컨대 폐하는 우리 모자를 용서하소서.”

 

신왕은 그를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태후는 걱정하지 마시오.”

 

을씨(乙氏) 또한 신왕을 안고 울며

 

“오늘 서로 보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하고

 

다시 초후(草后)를 이끌어 앞에 세우며 말했다.

 

“오늘의 일은 모두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니

너는 실절(失節)했다하여 그를 버리지 말고 처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왕이 이에 초후를 안고 교대로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군중(軍中)에서는 초후(草后)가 정사를 어지럽혔으니 죽여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선방>이 명을 내려 금지시켰다.

 

난군이 다시 <상보尙寶>와 <우자于刺>, <우덕于德>등을 묶어서 죽일 것을 청하자

 

신왕이 말했다.

 

“가히 뒤 차에 실어서 그를 의논할 것이다.”

 

마침내 군(軍)을 이끌고 입경(入京)하니

<을보乙寶>, <우탁于卓>, <자柘>등이 도상에 부복하여 맞이했다.

 

신왕은 모두에게 말을 하사하여 따르도록 명 하였다.

 

정궁(正宮)으로 들어가 거처하고 군신들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치갈왕(雉葛王) 9년 금신(金神)의 9월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백성들 중에 20세 이하의 부역하는 남녀 및 형제(兄弟) 부자(父子)가 되는 자들은

3분의 2를 놓아주고 그 장정 중에 궁실보수를 자원하는 자 천명을 택하여

궁실을 짓도록 했다.

 

백성들이 대부분 돌아가지 않고 머무르며 말했다.

 

“내 임금(吾君)을 위해 집을 짓겠다.”

 

신왕(新王)은 명을 내려그 모두를 후하게 대접하고 수고를 위로하였다.

 

<상도尙道>의 처 이씨(梨氏)를 <선방>의 아들 <선곽仙槨>의 처로 삼았다.

 

원년(300년) 9월,

 

대왕은 공신(功臣) <창조리>, <조불>, <소우>, <오맥남>, <자>, <선방>, <방부>,

<재생>, <담하>, <송거>, <장막사>, <휴도>등의 12인을 그 고향(鄕)에 봉(封)하고

노비(奴婢)를 하사함에 차등을 두었다.

 

<돌고咄固>를 존효(尊孝)하여 태왕(太王)을 삼고

어머니(母) 고씨(高氏)와 을씨(乙氏)를 태후(太后)로 삼고,

을씨의 사부(私夫) <우탁于卓>을 태공(太公)으로 삼고,

아버지(父) <을보乙寶>를 노태공(老太公)으로 삼았다.

 

초후(草后)를 정후(正后)로 삼고,

누이(妹) 단씨(丹氏)와 탐씨(耽氏)를 부후(副后)로 삼았다.

 

태평(太平)의 딸 평씨(平氏)와 휴도의 처 녹씨(鹿氏), 방부의 처 고씨(高氏),

선방의 처 <면대免大>, <오맥남>의 처 창씨(倉氏)에게

모두 부인(夫人)의 작위를 내리고 노비(奴婢)를 하사함에 차등을 두었다.

 

전왕의 후(后) 연안씨(緣眼氏)를 <재생>의 처로 삼고,

해포씨(解蒲氏)를 <선방>의 처로 삼고, 다씨(多氏)를 <담하>의 처로 삼았다.

 

<재생再生>과 <담하談河>를 좌우주부(左右主簿)로

삼아 정사(政事)를 결정하도록 하고,

<휴도休都>와 <방부方夫>를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아

군사(軍事)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창조리>는 왕의 뜻을 몰라 병을 칭탁하고 사퇴하며 말했다.

 

“신이 무재(無才)함으로써 선왕을 섬김에 불충하였고,

국정을 어지럽힌 까닭에 새 조정(新朝)에 서기가 부족하오니

원컨대 해골을 얻어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선방>이 은밀히 상주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새로 서서 중흥의 대공을 생각지 않으시고

밖에서 따라다닌 작은 공을 중용한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질 않습니다.”

 

대왕이 이에 <창조리>의 집을 방문하고 <조리>를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숙부(叔父)가 나를 버리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겠습니까?”

 

<창조리>가 말했다.

 

“신은 이미 늙었으니 청컨대 삼보(三輔)를 세워 함께 일하고자 합니다.”

 

왕이 이에 <창조리>를 태보(太輔)로 삼고,

<우탁>을 좌보(左輔)로 삼고, <을로乙盧>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왕자 <자柘>를 대주부(大主簿)로 삼고,

<선방>과 <오맥남>을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삼고,

<조불>과 <소우>를 전후위장군(前後衛將軍)으로 삼고,

<휴도>, <방부>, <송거>를 마장군(馬將軍)으로 삼았다.

 

<장막사>를 남부우대(南部于臺)로 삼고, <우린于璘>을 서부우대(西部于臺)로 삼고,

<우풍于豊>을 중부우대(中部于臺)로 삼았다.

 

이에 모든 무리의 정세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대왕은 초후와 더불어 <상보>의 집에 행차하여

현씨(玄氏)와 부씨(芙氏)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현씨가 말했다.

 

“첩은 나이가 이미 늙었는데 <상보>가 공신에게 득죄하니 의지할 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왕은 그를 용서하소서.”

 

대왕은 말했다.

 

“상보는 내 후(后)의 아버지입니다. 조만간 상(相)으로 삼을 것이나

지금은 잠시 중의를 좇아서 죄안(罪案)에 올린 것입니다.

조모(祖母)는 걱정하지 마시오.”

 

현씨가 이에 사은하고 물러갔다.

 

부씨(芙氏) 또한 초후를 안고 울며 말했다.

 

“우리가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여 왕을 축원한 것은 함께 귀해지고자 함이었습니다.

어찌 오늘날 남편이 하옥되고

형제가 모두 밖으로 유배당하고자하는 뜻이었겠습니까?”

 

대왕이 말했다.

 

“ <부협芙莢>과 <부린芙獜>의 죄는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나

장모를 위하여 사면하리다. 심려 말고 눈물을 거두시오.”

 

부씨가 말했다.

 

“형제가 만약 살아난다면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로부터 날씨가 추워지니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옵니다.

또 <재생>과 <담하>는 모두 우리 집의 가노(家奴)였는데

이제 주부(主簿)의 직책에 있어 우리 남편의 죄를 논하니

어찌 배은망덕이 아니겠습니까?”

 

대왕이 말했다.

 

“<재생>이 밖으로는 공론을 좇고 있으나 안으로는 기실 그를 보호하고 있으니

장모는 의심하지 마시오.”

 

이날 밤에 대왕은 부씨와 더불어 상통하였는데 혹은 이르기를

대왕이 태자시절에 이미 먼저 상통했으며 이에 이르러 다시 통한 것이라고도 한다.

 

부씨는 유미(柔美)하고 교태롭게 아부를 잘 하므로

<치갈雉葛>의 시절에도 총애가 쇠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대왕의 총첩이 되니 내정(內政)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이 많았다.

 

10월,

 

<선옹仙翁>과 <고박아高朴兒>, <태평太平>을 <우탁>의 집에서 잔치하여 대접하고

<선옹<을 마산공(馬山公)으로 삼고, <고박아>를 당산공(棠山公)으로 삼고,

<태평>을 양화공(陽花公)으로 삼았다.

 

누런 안개(黃霧)가 닷새동안 사방을 가득 메웠다.

 

대왕이 태사 <우선于先>에게 물었다.

 

“짐의 잘못이련가?”

 

<우선>이 말했다.

 

“안개의 기운(霧氣)은 아래로부터 위로 오르니 조짐이 후(后)를 범(犯)함에 있습니다.

두렵건대 군신(群臣)들이 초후(草后)를 전왕의 요물(妖物)이라 함으로써

폐하고자 함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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