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신화로 기록된 야마토 타케루의 행적을 살펴보자.

 

야마토 타케루는 천황으로 기록되지 않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12대 景行천황 기사에 景行천황의 아들이라면서

야마토 타케루의 기록을 함께 취급하였는데

주로 야마토 타케루에게 많은 문량을 할애하고 있다.

 

야마토 타케루는 12대 景行천황의 아들로 천황의 명에 의하여

남구주(南九州)의 구마소(熊曾)와 이즈모(出雲)를 정벌하는 서정(西征)을 완수한 뒤,

동국(東國)의 하이(蝦夷)정복의 동정(東征)을 떠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고사기에서 왜건명(倭建命)

일본서기는 일본무존(日本武尊)이라는 서로 다른 한자를 쓰고 있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路>

 

한반도의 문명의 빛은 한반도에 가까운 구주(九州)와 출운(出雲)에 먼저 들어와

3세기경 현재의 근기(近畿)지방에 야마토(大和)라는 정권이 형성된다.

 

그러나 일본의 혼슈우(本州)는

지리적으로 문명의 소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가지고 있으니,

혼슈우의 한 가운데 동서를 가로 막고 있는 중부(中部)지방의 산악지대이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비탄(飛驒)산맥, 목증(木曾)산맥, 적산(赤石)산맥이

모두 이곳에 있다.

 

중국의 정사 구당서의 일본전에

 “일본의 북과 동의 끝에 大山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大山이란 일본의 알프스를 뜻하는 것이다.

 

일본의 알프스는 토오쿄오 지역과 오오사까 지역을 가로막는

니이카타 현, 나가노 현, 기후 현, 시즈오까 현 등을 포함하는 산악지대이다.

 

이 산악을 중심으로 하여 토오쿄오 지역을 관동(關東),

오오사까 지역을 관서(關西) 또는 근기(近畿) 지방이라 한다.

 

중부지방의 거대한 산악지대는 천연적인 장벽이 되어

근기(近畿)와 관동(關東)지방의 문명의 교류를 차단하여

일본의 동북부 지역은 역사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야마토 타케루의 동정(東征)이란 이 장벽을 넘어 관동(關東) 지방과,

보다 북부의 동북(東北) 지방에 문명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야마토 조정의 의지의 산물이다.

 

문명의 소통을 다른 말로 하면 야마토의 권위의 인정 아니면 정벌이 되는 것이다.

 

야머토 타케루는 동정(東征) 출발 전 이세의 대신궁을 참배하고

숙모 야마토히메(倭比賣)에게 인사를 드린다.

 

숙모는 떠나는 그에게 스사노오(須佐之男命)가 이즈모에서 처치한

팔기대사(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온 것을 아마테라스(天照大神)에게 헌상하였던

천총운(天叢雲)의 劍과 필요할 때 열어 보라면서 주머니를 한개 주었다.

 

미장(尾張)에 들러 호족의 딸 미야스(美夜受比賣, 宮簀媛)를 만나

동국(東國)을 평정한 뒤 혼인하자는 약속을 한다.

 

미야스의 오빠 타케이나다네(建稻種命)가 오와리의 수군을 이끌고

부장군(副將軍)으로 동국평정에 합류한다.

 

고사기에 미스키토모미미타케히코 (御鋤友耳建日子),

일본서기에 기비 타케히코(吉備武彦)로 나오는데

이 전쟁에서 귀로상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

 

나고야의 열전(熱田) 신궁에서 모시는 신 가운데 하나이다.

 

오와리의 훤진(萱津) 神社에 들른 뒤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가 합류하여 함께 상모(相模)국에 이른다.

 

야마토 타케루는 상모(相模)국의 국조(國造)로부터

 

“이 곳에는 커다란 못(沼)이 있는데 그 곳에 너무나 다루기 힘 든 자가 살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그 자를 보기 위하여 들판으로 나갔다.

 

기회를 보던 상모(相模)국의 국조(國造)가 들판에 불을 붙이니

삽시간에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화공(火攻)의 불길에 쌓인다.

 

속은 것을 안 야마토 타케루가 야마토히메(倭比賣)가 준 주머니를 열어보니

부싯돌이 들어 있었다.

 

천총운(天叢雲)의 보검으로 주위의 풀을 제거하고

접근해 오는 화염 쪽으로 맞불을 놓자

천우신조로 바람의 방향까지 우호적으로 바뀐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야마토 타케루는 배신자를 처단하고 불 속에 던져버린다.

 

현 시즈오까 현의 소진시(燒津市)는 여기서 연유하는 도시이다.

 

이 일이 있고부터 천총운(天叢雲) 검(劍)은 초치검(草薙劍)으로 불리게 된다.

 

풀을 벤 칼이라는 뜻이다.

 

이 보검은 현재 열전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상모(相模)에서 더욱 동진하여 주수해(走水海)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포하수도(浦賀水道)이다.

 

현 요꼬스카에서 바다를 건너 지바현의 방총반도(房總半島)로 갈 때

그 해협의 신이 노하여 큰 파도를 일으켜

배가 추풍낙엽처럼 딩굴며 나아 갈 수 없었다.

 

이때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가

 

“내가 제물이 되어 신의 노여움을 풀겠습니다.

황자(皇子)께서는 동정(東征)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천황에게 보고해야 되는 존귀하신 분입니다.

사네사시 상모(相模) 벌판의 불 속에서 나를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겠나이까 ”.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가 바다에 빠지자 해신의 노여움이 풀려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바다를 건너 상총(上總, 千葉縣)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7일 후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의 머리 빗이 해안에 흘러 왔으므로

빗을 수습하여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의 어릉(御陵)을 만들고 그 안에 매장했다.

 

야마토 타케루는 상총(上總)에서부터 오지(奧地)에 이르기까지

멋모르고 날뛰는 하이(蝦夷)들을 복종시키고,

이곳저곳의 거친 귀신들을 평정한 후 귀로에 오른다.

 

족병치(足柄峙)에 이르러 건반(乾飯)을 먹는 중

그 고개의 귀신이 하얀 사슴으로 변하여 공격해 왔다.

 

얼떨결에 먹고 있던 야선(野蒜)으로 후려쳐 사슴의 눈을 맞추어 사슴을 죽였다.

 

아마토 타케루는 이 고개에 올라 오토타치바나(弟橘比賣)를 목메어 부른다.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하고 세 번이나 절규하니

 

이를 따라 동국(東國)을 아즈마 쿠니(東國)라 하게 된 것이다.

 

이 “아즈마하야”라는 말은 한국어 “아줌마야”로 본다.

 

한국어 아줌마는 옛날 고귀한 신분의 여인네를 칭 하는 말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말을 와가쯔마 (吾妻,나의 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귀로에 갑비(甲斐), 신농장야(信濃長野), 미농대정(美濃大井),

부호(釜戶), 지전(池田)에서 오와리의 국경, 내진치(內津峙)에 왔다.

 

그곳에서 종자 구미팔복(久米八腹)이 급히 말을 달려 갑비(甲斐)에서의 전투이후

동해도(東海道)를 통과하고 있을 터인 타케이나타네(建稻種命)가

준하(駿河)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야마토 타케루의 손 위 처남인 동시에 동정(東征)의 부사령관이다.

 

야마토 타케루는

 

“우쯔쯔가나” “우쯔쯔가나” 하고 탄식하며

 

타케이나타네(建稻種命)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이곳에 우쯔쯔신사 (內內神社)가 세워지게 되었다.

 

내율치(內津峙) 고개는 아이치현 춘일정시(春日井市)와

기부현(岐阜縣) 다치견시(多治見市)를 잇는 표고 320m의 고개이다.

 

이 “우쯔쯔가나”라는 탄식의 언사는 한국어 “어찌할까나” 또는 “어이할까”가 아닐까.

 

족병치(足柄峙)는 준하국(駿河國)과 상모국(相模國) 국경이 되는 고개이며

정강(靜岡)현과 신나천(神奈川)현 아시가라市 사이에 있는 고개로 표고 759m이다.

 

이 고개를 넘어, 갑비(甲斐)로 가서 주절궁(酒折宮)에 머물 때

 

“신치(新治) 축파(筑波)를 지나 몇 밤이나 잤을까”

 

라고 감회를 노래하자,

 

야경(夜警)의 불을 지피던 노인이

 

“날짜를 겹쳐서 밤으로 아홉 밤, 낮으로 열흘”

 

하고 곧장 노래를 이었으므로 그 노인을 칭찬하고

동국(東國) 국조(國造)의 칭호를 내렸다.

 

이후로 갑비(甲斐)의 주절궁(酒折宮)은 연가(連歌)의 발상지로 불리게 된다.

 

그후 미장(尾張)에 도착한 야마토 타케루는 약속대로 미야스(美夜受媛)와 결혼한다.

 

그리고는 이세의 신검 초치검(草薙劍)을 미야스(美夜受媛)에거 맡긴 채

이취산(伊吹山)의 귀신을 맨 손으로 처치하겠다고 나선다.

 

이취산(伊吹山)은 표고 1,377m로 자하현(滋賀縣)과 기부현(岐阜縣)의 경계에 있는 산이며 옛부터 영봉(靈峰)으로 알려져 왔다.

 

맨 손으로 이취산(伊吹山)의 귀신과 대결하러 가는 야마토 타케루 앞에

하얀 멧돼지가 나타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귀신이 보낸 심부름꾼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였으나

실재 귀신 자신의 화신이었다.

 

귀신이 눈사태를 일으키며 공격하자

야마토 타케루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하산하나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독기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야마토 타케루는

옥창부(玉倉部)의 청수(淸水)를 마시고 몸을 추스렸다.

 

거기 청수(淸水)는 효과가 있어 고열이 내렸다고 전해 온다.

 

야마토 타케루가 상처를 치료했다 하여 거성청수(居醒淸水)로 불리며

성정(醒井)이란 지명이 여기서 생겼다 한다.

 

이취산(伊吹山) 전투 이후 피로에 지친 야마토 타케루는

기부현(岐阜縣) 양로정(養老町) 부근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다리는 부어 올라

 

“내 다리는 걸을 수도 없고 무언가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하여

 

후에 이곳을 당예야(當藝野)라 부르게 되었다.

 

영록산(鈴鹿山)을 바라보며 현재의 삼중현(三重縣) 사일시시(四日市市)에서

영록시(鈴鹿市)에 들어 온 야마토 타케루는

너무 피로하여 지팡이에 의지하고 고개에 올랐다하여

이 고개를 장충판(杖衝坂)이라 부르며 구(舊) 동해도(東海道)에 이 이름이 남아있다.

 

야마토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나 체력이 바닥나

 

“내 다리가 세 겹으로 굽은 듯 너무 힘들어” 라고 말 했다하여

 

이곳을 미에(三重)라 부르는 것이다.

 

야마토 타케루의 종언의 땅이 되는 노보노(能褒野, 能煩野)에 이르러

마지막 감회를 읊으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소식이 궁에 전해지자 妃와 皇子들이 도착하여 노보노에 릉(陵)을 만들었다.

 

조문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탄식하는데

능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야마토를 향해 날아갔다.

 

고사기에 의하면 야마토 타케루는 죽기 전 야마토를 그리워하며

야마토는 아름다운 땅, 청산으로 푸른 담장을 두른 아름다운 야마토여! 라고

사국가(思國歌)를 불렀다하며 이 노래는 태평양 전쟁 중

동 아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한다.

 

야마토 타케루의 능이라 주장하는 고분은

백조총(白鳥塚) (鈴鹿市 加佐登), 무비총(武備塚) (鈴鹿市 長澤),

쌍아총(雙兒塚) (鈴鹿市 長澤), 왕총(王塚) (鈴鹿市 國府),

정자총(丁字塚) (龜山市 田村町) 등 여럿이다.

 

메이지(明治) 12년 내무성은 구산시(龜山市)의 노보노(能褒野)신사 서쪽에 있는

정자총(丁字塚)이라 불리는 전방후원분을 야마토 타케루의 능으로 지정했다.

 

미에현(三重縣) 구산시(龜山市)에 있는 노보노(能褒野) 어묘(御墓)는

전장 90m, 후원부의 직경 54m, 높이 9m로 三重 北部 最大의 前方後圓墳이다.

 

소보노(能褒野)神社는 야마토 타케루와 오토타치바나(弟橘媛)를 제사 드린다.

 

소보노(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금탄원(琴彈原)으로 이곳에 백조릉(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 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백조릉(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河內 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야마토 타케루(왜건명, 일본무존)는 경행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비류왕의 쌍둥이 아들 중 동생으로 태어나 

318년 백제왕자 契(300?~358){경행천황}를 따라 야마토의 숭신천황을 죽이고

야마토는 契에게 맡긴 후, 東征을 완성하고 333년 야마토를 떠나 백제로 귀국하여

346년 백제 근초고왕으로 즉위한다.

 

 

- 일본 열도는 도래인에 정복된 역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