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4년{AD334}갑오

 

추8월에 <모용황>이 이복형인 <한>의 처를 빼앗자,

<한>은 <段>씨에게로 도망하였고,

<모용인慕容仁>은 <황>의 죄를 들먹이며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은 대노하여

11월에 자신이 나서서 양평(襄平)을 쳐서 차지하였고,

요동의 큰 성씨 집안들을 극성으로 옮겼으며,

<두군杜羣>을 요동상(遼東相)으로 삼았다.

 

이에 <인>은 신창(新昌)을 습격하여 <왕우王寓>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국원제 6년{AD336}병신,

 

춘정월, <모용황>이 려(黎)에서 동쪽으로 얼음이 언 물을 건너서

행군하여 동생인 <인>을 습격하여 평곽(平郭)에서 잡아 죽였더니,

<동수佟壽>·<곽충郭充> 등이 뉴벽(紐碧)로 도망하여 왔다.

 

기묘년(319년)의 <최비崔毖>의 일이 있은 후 <외>는 <인>을 요(遼)의 땅에 두어

득책으로 삼았었으나, 필경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망하였으니,

이를 두고 「날래고 사나운 고양이가 밤눈 어두웠던 격」이라 함이다.

 

2월, 큰 별이 서북으로 흘렀다.

 

왕은 <황>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상도尙道>를 동진(東晉)에 보냈다.

 

<황>이 동생을 형수와 놀아난 죄를 물어 죽이니,

진(晋)사람은 <황>을 두려워하여 감히 죄를 논하지 않았다.

 

하5월, 종실의 여인들에게 환도(丸都)의 신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미추왕 12년(AD.336) 화원(火猿=丙申)

 

3월 구려(句麗)가 신하 <우신于莘>을 진(晉)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연(燕)을 치기를 청하였다.

 

당시 큰 별이 그 서북쪽으로 흘러 연의 침입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표석이 없는 커다란 묘가 있다.

 

안악3호분이라 불리는 이 묘의 내부에는 묘의 주인을 추측할만한 벽화와 글들이 있다.

 

앞방 서벽 왼쪽 벽면 인물화 위에 쓰인 7행 68자의 묵서명에 따라

<동수冬壽>가 무덤의 주인공이라 한다.

 

그러나 주인공을 묘사한 인물도의 좌우에 주인공을 호위하는 인물도가 각각 있고

문제의 묵서명은 좌측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인물 위에 쓰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지워졌지만 우측의 인물도 위에도 묵서명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수冬壽>에 대한 묵서명은 좌측 장하독(帳下督)을 설명하는 것이지

가운데 그려져 있는 무덤 주인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수冬壽>가 무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벽화에 따르면 <동수冬壽>는 두 명의 장하독(帳下督) 중 하나이다.

 

장하독(帳下督)이란 바로 무덤의 주인에 속해있는 무장을 말한다.

 

고구려에는 없는 무장이지만 중원의 사서에는 장하병(帳下兵), 장하장(帳下將),

장하독(帳下督), 장하도독(帳下都督), 장하도위(帳下都尉)등으로 표현되는 무장이다.

 

전연(前燕)에서도 역시 이 장하독(帳下督)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무덤의 주인은 두 명의 장하독(帳下督)이 모시고 있는 왕 혹은 왕에 준하는 인물이다.

 

그 무덤의 주인은 바로 장하독(帳下督) <동수冬壽>가 모시고 있었던 인물이다.

 

원래 <동수冬壽>는 모용황의 사마(司馬)였다.

 

<모용황>의 모제였던 <모용인>은 <모용황>과 다투었는데

문성(汶城)전투에서 <동수>는 <모용인>에게 투항하여

<모용인>의 사마(司馬)가 된다.

 

이때가 서기333년 <모용외>가 죽은 해이다.

 

그리고 다시 <모용인>이 <모용황>에게 패하자 고구려로 도망 온 것이다.

 

<동수>가 모신 주인은 <모용인慕容仁>이다.

 

서기336년, <모용황>과 <모용인>의 전투에서 <모용인>이 패했을 때

<모용황>은 배반한 장하(帳下)들과 <모용인>을 죽인다.

 

이때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등이 동으로 달아났으나 <모용유>는 도중에 돌아갔고,

<적해>, <방감>등은 추격해온 <모용황>의 군사들에 의해 죽고,

<동수>와 <곽충>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무덤에 존재하는 장하독(帳下督) 은 2명이다.

 

이 2명의 장하독(帳下督)이 <동수>와 <곽충>인 것이다.

 

당시 고구려로 도망 온 <모용인> 일파는 고구려마저 <모용황>에게 굴복하자

멀리 고구려 동쪽 변방의 험지로 이동하여 만주나 한반도 중, 북부에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모용인>의 시신이나 유품을 그곳으로 모셔왔을 것이다.

 

고구려가 모용황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진(東晉)에게 접근했듯이

그들도 부활을 꿈꾸며 동진(東晉)에게 접근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전연(前燕)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동진(東晉)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동진(東晉)과 긴밀한 교류를 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어려웠다.

 

이는 이들이 영화(永和)13년이라 기록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永和)는 고구려의 연호가 아니다.

 

영화(永和)라는 연호는 12년인 서기356년까지 동진(東晉)에서 사용하였으며

이듬해인 357년에는 승평(昇平)이라는 연호를 썼다.

 

이는 이들의 교류가 자주 없었기에 연호가 바뀐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안학3호분 벽서>

 

영화13년(357년) 10월 무자삭 26일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 현도, 대방태수도[][]  유주 요동 평곽[]향경 상리 동수 자 []

안연 69 흉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