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趙燕戰爭

고대사 2014. 9. 25. 16:25

 

 

- 後趙의 <석호石虎>가 고구려에 원조를 청하다

 

고국원제8년{AD338}무술,

 

정월,<황>이 <석호石虎>와 함께 <단>씨를 쳤더니,

<단>씨는 <한>에게 <황>과 대적하게 하였다.

 

<한>은 자기의 군사를 이끌어 <황>에게 투항하고 죄를 청하였다.

 

이에 <황>은

 

“형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라 말하고는,

 

<한>의 계책을 써서 <단>씨를 깨고 <단>씨의 땅도 많이 빼앗았더니,

<석호石虎>가 대노하여 <황>과 맞붙어 싸웠다.

 

이에 낙랑(楽浪)의 현들 중에서 많은 현들이 돌아섰고,

태수인 <국팽鞠彭>은 달아나서 <극성棘城>으로 들어갔다.

 

<석호石虎>가 <조복曹伏>를 우리에게 보내와서 싸움을 도와달라고 청하기에,

군량이 다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였더니,

<조복曹伏>는 300척의 배를 동원하여

30만석의 군량을 <점제占蝉>로 날라 오고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왔다.

 

왕도 어쩔 수 없어 <뉴벽紐碧>과 <조문祖文>에게 3만병을 끌고

안평(安平)을 나가서 관망하고 움직이지는 말라고 하였다.

 

<호>가 진격하여 극성을 포위하고 공격함이 심히 급하여 지자,

<황>은 <한>의 처를 돌려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한>과 <여근輿根> 등이 열흘 여를 힘껏 싸우고,

현도(玄菟)태수 <유용劉佩>이 용감히 싸워서 趙군을 흩어지게 만드니,

<호>는 우리의 군대가 오지 않음을 알고는 물러났다.

 

이에 <황>의 아들 <각>이 추격하여 3만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한>과 <여근輿根> 등은 군대를 나누어서

반란하였던 성들을 복구하고 땅을 넓히면서 <범성凢城>에 이르렀다.

 

<봉추封抽>·<송황宋晃>·<유홍游泓> 등은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때는 5월이었다.

 

 

 

후조(後趙)는 석씨가 세운 조나라를 말한다.

 

같은 시대에 유연이 세운 조나라가 존재하였기에

유연의 趙를 전조(前趙), 석륵의 趙를 후조(後趙)라 부른다.

 

이 석륵의 후조는 지금의 하북성 형태(邢台)시를 중심으로 존재한 나라였다.

 

고국원제 8년 서기338년,

 

마침내 이 후조가 하북 중북부지역의 패권을 쥐고자

선비족인 모용씨와 다투게 된다.

 

그 싸움에 후조의 <석호石虎>가 고구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모용씨를 상당히 두려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봉상제 시절부터 <모용외>는 자주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미천대제와 고국원제 시절에도

항상 고구려 서부지역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모용씨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고구려로서는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후조를 돕기를 주저한다.

 

다급해진 <석호>는 황급히 3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군량미를 고구려의 점제(占蟬)로 보내고

또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어 통사정을 하게 된다.

 

난감해진 고구려는 어쩔 수없이

<뉴벽紐碧>과 <조문祖文>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안평에서 나가게 하였지만 모용씨를 공격하지 말고 지켜보라고만 하게 된다.

 

<석호>는 고구려의 후원으로 모용씨의 극성을 공격하는 등

한때 승기를 잡는듯 하였으나

고구려가 관망하고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알고는 후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용씨는 이를 놓치지 않고 석호를 추격하여 대패시키게 된다.

 

모용씨가 하북 일대를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호랑이 새끼를 키워준 셈이 되었다.

 

그 대가로 고구려는 <모용황>에게 요동을 내어주게 되고

미천대제의 능이 파헤쳐지고 태후와 공주가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 7년, 8년 기사가 통째로 없다.

 

고국원왕 12년(342년)에 모용황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한 전쟁은 상세히 기록하면서

후조의 <석호>가 고구려에게 다급히 원조를 요청한 사실은 통째 빼버렸다.

 

하지만 이 기사는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과 <고구려사초>에 실려 있다.

 

趙王虎遣渡遼將軍曹伏將青州之眾戍海島 運谷三百萬斛以給之

又以船三百艘運谷三十萬斛詣高句麗 使典農中郎將王典帥眾萬餘屯田海濱

又令青州造船千艘 以謀擊燕

<자치통감>

                                                                                                             

趙왕 <석호石虎>가 도요장군 <조복曹伏>을 보내

청주(青州)의 무리들로 하여금 해도를 지키도록 하고자 하였다.

 

곡식 삼백만곡을 보내주었다.

 

또 배 삼백소로 곡식 삼십만 곡을 고구려로 보냈다.

 

전농중랑장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해빈을 둔전케 하였으며

또 청주(青州)에 명하여 선박 천소를 만들라 하며 燕을 공격할 모의를 하였다.

 

 

虎遣曹伏請我助戰 辭以粮盡 伏發船三百艘 運穀三十万斛于占蟬 使達南蘇

王不得已命紐碧祖文引兵三萬 出安平觀望不動

<고구려사초>

                                                                                     

<석호石虎>가 <조복曹伏>을 우리에게 보내 전쟁을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양식이 없다하여 거절하였더니 <조복曹伏>은 300척의 배를 보내

곡식 30만곡을 점제(占蟬)로 보내고, 사신이 남소(南蘇)로 왔다.

 

왕은 부득이 <뉴벽紐碧>과 <조문祖文>에게 명하기를

병3만을 이끌고 안평(安平)을 나가되 형세만 살피고 움직이지는 말라하였다.

 

 

<삼국사기>가 제대로 된 역사서인가? 

 

後趙의 <석호石虎>가 곡식 30만곡을 300척의 배에 실어 낙랑의 점제(占蟬)로 보내

고구려의 지원을 청하였다고 자치통감과 고구려사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런 중요한 기사가 삼국사기에는 통채로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의 누락은 일제 어용사학자 <금서룡今西龍>으로 하여금

평남 용강군에 점제현 신사비를 세우고 평안남도 용강군이 낙랑군이라 하여,

한반도는 한 무제가 정복한 땅이 되고,

그 곳에 한사군(漢四郡)이 존재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금서룡今西龍>은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친 우리역사 왜곡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일제에 의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어용사학자이다.

 

 

근래에도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구석기 유물을 땅 속에 파묻어 

 

일본의 고대사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져 일본 역사가 수정되고

 

고고학계에서 영원히 추방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역사에 저지른 만행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점제(占蟬)는 미천대제 <을불>이 창포왕으로 자리잡은 최체와 이웃한 곳으로

 

모용외와 다투던 곳이다.

 

 

남소(南蘇)는 조연전쟁시 후조의 사신이 달려간 고구려의 서부 국경지역이다.

 

남소는 과거 구다국(勾茶國)의 도읍이었다.

 

구다국(勾茶國)은 개마국과 이웃하였고 개마국은 황룡국과 이웃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좌우12군으로 공격할 때 좌12군의 침공경로에 남소(南蘇)가 있다.

 

이 땅은 그 옛날 온조가 다스렸던 한남(汗南)이었으며

현도가 이웃하였으며 요동이 이웃한 땅이었다.

 

그 땅이 일본이 구다라라 부르던 그 구다국(勾茶國)이었으며

백제고지(百濟故地)이자 대방(帶方)이라 불린 땅이었다.

 

 

낙랑과 대방과 요동은 공손씨와 모용씨가 일어나 중원을 위협한 지역인데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과 대방이라면

 

後造의 <石虎>와 前燕의 <모용황>이 싸운 곳이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이란 말인가? 

 

 

 

 

<趙燕전쟁시 後趙의 군량미 수송로>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