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14년{AD344}갑진,

 

10월엔 백제의 <비류比流(260-344)>가 재위 41년 만에 죽고,

<분서왕 (283-304)>의 장자 <계契(300-358>가 섰는데,

드높은 기품에 강직하며 용감하였고 기사에도 뛰어났었다.

<고구려사초>

 

 

비류41년(344년) 겨울 10월, 왕이 사망하였다.

 

계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전에 분서왕이 죽었을 때(304년)는 계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계(契, 또는 설, 결, 글로도 발음됨)왕은 분서왕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는 매우 간단하다.

 

 

그의 즉위 경위에 대해 이전에 분서왕이 죽었을 때는

계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재위 3년 9월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계왕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하지만 계왕의 즉위와 죽음은『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도 평이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류왕은 계왕의 아버지 분서왕이 살해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고,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볼 수 없다.

 

때문에 비류왕이 죽은 뒤에 계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계왕의 즉위와 2년이 채 못 되는 짧은 치세, 그리고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의 즉위,

 

이 일들은『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순리적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수 없었다.

   

 

계왕은 정식 묘호가 아니라 단순히 ‘계’라는 이름에 왕을 붙인 형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계왕은 묘호가 아니다.

   

 

온조왕 이후 계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묘호는

 

온조, 다루, 기루, 개루, 구지, 초고, 구수, 고이 등등 모두 두 글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계왕만 외자로 되어 있다.

 

 

후대에 있어서도 근초고, 근개루 등의 2세적 개념이 있는 묘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두 글자로 이뤄졌고,

 

말기의 성왕 이후에 혜왕, 법왕, 무왕만이 외자 묘호이다.

 

 

성왕 시절 이후에 외자 묘호가 나타나는 것은 남북조나 당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근초고왕 시절에 두 글자로 이어져 오던 묘호의 전통을 깨고

 

계왕이 외자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점이다.

 

 

즉, 계왕은 두 자 묘호의 전통을 깬 것이 아니라 아예 묘호를 받지 못해

 

그저 이름에다 왕이라는 칭호를 갖다 붙인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계왕의 즉위는 정상적인 형태일 수 없고,

 

죽음 또한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계왕은 어떤 형태로 즉위하여 죽음에 이르렀을까?

   

 

분서왕이 죽자 비류왕이 한반도 백제를 장악하여 왕위에 올랐고,

 

어린 계왕은 대륙 세력에 의해 대륙백제의 왕으로 옹립된 듯하다.

 

 

그러다가 비류왕이 늙고 병들자 왕권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했을 터이고,

 

이 과정에서 비류왕이 죽자,

 

계왕은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백제왕임을 공포했을 것이다.

 

 

이에 당황한 근초고는 군대를 동원하여 계왕을 치기에 이르고,

 

결국 백제는 둘로 갈려 전쟁을 치른 끝에

 

근초고왕이 승리함으로써 백제는 다시 통일되었을 것이다.

   

 

비류왕 대에는 철저하게 주변국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던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갑자기 고구려와 세력을 다툴 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하는 것도

 

대륙백제와 구주백제의 힘을 바탕하여 이뤄진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왕의 능과 가족은 물론이고 그 후손에 대한 내용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