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기는 경행(景行)천황이 기록에 남은 아들만 해도 21명,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59명 도합 8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다.

 

숭신천황에게 빼앗긴 열도를 탈환하기 위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일본열도에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분할하여 후세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한 것 같다.

 

소위 분봉정책이다.

 

 

그 자신의 후계자인 성무(成務)는 근강국(近江國) 즉 현 시가현 (滋賀縣)을 맡고

야마토 타케루{근초고왕}의 아들 중애(仲哀)는 야마토를 분봉받았다.

 

그런데 야마토 타케루가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경행(景行)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백제 비류왕의 아들이다.

 

경행(景行) 말년 중애(仲哀)가 야마토를 맡았다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의 영향력이 경행천황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 344년 백제의 비류왕이 죽자 경행(景行)천황 <계契>는

아들 성무(成武)천황에게 선위하고 백제로 돌아가 즉위한다.

 

<성무成務 (327-355)>와 <중애仲哀(327-362)>는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백제 왕자로 경쟁관계이다.

 

<성무成武>는 <계契>의 아들로 근강국(近江國)의 왕,

<중애仲哀>는 <근초고왕>의 아들로 야마토의 왕이다.

 

산성(山城)이라는 땅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땅이다.

 

<기장족희氣長足姬(336-390)>의 조상들의 근거지가 이 지방이며

근강(近江)의 고혈수궁 (高穴穗宮)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일본서기는 그녀를 <중애仲哀>의 황후라고 기록했으나

우리는 그녀가 <성무成務>의 아내였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록할 때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성무>와 <중애>를 바꿔 기록했다고 본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이들의 무덤의 위치이다.

 

신공황후와 성무는 지하에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죽으면 첫 남자의 무덤 옆에 묻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그러면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란 무었이었을까?

 

그만큼 은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神功 – 應神 시대에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왕래는 눈 부신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눈 부신 교류의 기록을 일관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한다.

 

권력의지의 주체는 백제의 귀수왕자와 열도의 神功황후이다.

 

 

귀수왕자의 또 다른 얼굴이 응신(應神)이며 그는 <중애仲哀>의 형이다.

 

일본서기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것이 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도의 야마토 타케루는 서기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었고

 

귀수왕자는 바로 그의 아들 근구수왕이다. 
 

경쟁관계인 <성무>와 <중애>간의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

일본서기 <중애>조에 적혀있다.

 

월국(越國, 현 후쿠이현)에서 <중애>에게 헌상하는 백조(白鳥)가

산성(山城) 우지강(菟道河)에 왔을 때 훼방꾼이 나타나 헌상품인 백조를 훼손한다.

 

<중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애>는 군사를 보내 범인을 찾아 처형한다.

 

자기의 영토에서 벌어진 <중애>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성무>가 항의한다.

 

이렇게 시작되어 서기 344년경 전면전으로 발전한다.

 

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이 다름아닌 환이신(丸邇臣)의 조(祖)

<건진웅建振熊>이며 그가 신공황후의 부친이다.

 

 

신무(神武)에서 원정(元正)천황까지 일본천황의 한풍시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이후에 <염해삼선淡海三船,(722 – 785)>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슬픈 이름을 받은 중애(仲哀)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대부분의 천황에게 60여년의 넉넉한 재위기간을 할해한 일본서기가

그에게 부여한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이다.

 

또 모든 천황들의 궁이 야마토나 하내(河內)에 있었는데

<중애>는 재위 9년 가운데 6년을

산구현(山口縣) 혈문(穴門)의 풍포(豊浦)궁에서 보냈다.

 

 

일본서기는 왜 그가 서울을 떠나 궁벽한 한촌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중애>의 주력부대를 산성(山城)에서 궤멸시킨 뒤

<성무>의 군대는 야마토를 접수한다.

 

 

서기 344년 <중애>는 오오사카를 버리고 산성(山城)의 풍포진(豊浦津)으로 도망간다.

 

거기서 그는 혈문풍포궁 (穴門豊浦宮)을 짓고 6년을 보낸다.

 

이것이 중애천황이 혈문(穴門, 현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이다.

 

 

<중애>가 시모노세키를 피난처로 선택한 것은

백제의 도움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백제로 탈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왕이 누구인가? 바로 <중애>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아닌가?

 

 

<중애>는 혈문의 피난처에서 <성무>에게 저항하였으므로

<성무>는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인 것이 서기 349년경이다.

 

 

서기 349년은 귀수 왕자 30세, 성무 23세, 중애 23세, 신공황후 14세 때이다.

 

 

이 전쟁에 <성무>와 동행한 것이 그의 비(妃) 기장족희(氣長足姬)였다.

 

그녀는 당시의 전쟁영웅 건진웅(建振熊)의 딸이다.

 

 

<중애>가 6년간 기거하던 혈문풍포궁(穴門豊浦宮)를 버리고

축자(筑紫)의 난현(儺県, 博多湾岸)으로 도망가서

강일궁(橿日宮, 福岡市香椎)에 머물렀다.

 

<성무>의 추격이 계속되고 큐우슈우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큐우슈우의 각 나라들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중애 8년 9월

천황은 카시이궁에서 신하들과 웅습(熊襲) 토벌에 관해 협의 한다.

 

그 때 황후가 귀신에 씌어

 

“쿠마소(熊襲)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그보다 신라(新羅)라는 보물로 가득 찬 땅이 있지 않느냐?

그 곳을 쳐라. 그러면 쿠마소는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쿠마소 정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5일 천황은 신의 저주로 급사했다.

 

위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중애>의 기사로 취급되고 있지만 <성무>에 관한 기사로 읽어야 된다.

 

 

이 무렵의 역사기록에 신(神)과 신탁(神託)의 출현이 빈번해 진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주인공들의 시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붙여진다.

 

응신(應神)과 신공(神功)이 그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귀신을 의미할까?

 

아니면 지금 일본열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간 누군가를 의미할까?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는 신탁은

백제의 귀수왕자가 <성무>에게 보내는 경고이다.

 

열도에서 집안 사람들 끼리 싸울 힘이 있거든 그 힘을 차라리 신라를 치는데 써라.

 

그러나 <성무>는 귀수왕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귀수왕자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귀수는 백제의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열도내의 국조(國造)들을 동원하여

<성무>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귀수왕자는 일거에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성무>는 서기 349년 항복하였고 귀수왕자는 <성무>를 비롯한

<기장족희氣長足姬><무내숙녜 内宿禰>등의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 때 귀수왕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기장족희氣長足姬>를 처음 면담하였다.

 

 

고사기는 응신(應神)천황이 <기장족희氣長足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어느 때 천황이 근염해국(近淡海)에 넘어 가려고 우지노(宇遅野) 주변에 서서

카즈노(葛野)를 바라보며

 

“카즈노를 바라보니 넉넉하게 사는 민가의 정원이 보이네.

풍요로운 나라의 모습이 보이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목번촌(木幡村)에 왔을 때 십자로에서 빼어난 미모의 처자와 마주쳤다.

 

천황이 처자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으니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로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하에 히메 (宮主矢河枝比)>라 하나이다.” 라 하였다.

 

천황이

 

“내일 돌아 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리겠다.”하고 길을 떠났다.

 

<야카하에 히메>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자

 

“천황에 틀림없다. 받들어 모셔야 한다.”하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기다리니 이튿 날 천황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큰 잔치가 벌어지고 <야카하에 히메>의 큰 술잔을 받은 천황이

 

흥에 겨워 노래하였다.

 

“이 이쁜 게(蟹)야! 어디서 온 게(蟹)냐?

머나 먼 쯔누가(角鹿)에서 온게(蟹)다. 옆으로 기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찌지시마 (伊知遅島)나 미시마(美島)에 닿는다.

 

거기 사는 물새가 잠수하거나 밖에 나와 숨을 쉬듯

 

기복이 있는 사사나미(佐佐那美) 의 길을 가다 목번(木幡)의 길에서 마주친 처자여.

 

뒷 모습은 방패와 같이 날렵하고 치열은 잣나무 씨알처럼 고르고 희구나.

 

이찌히이(櫟井)의 와니사(丸邇坂)의 흙을,

표면의 흙은 너무 연하고 깊은 곳의 흙은 너무 진하여 가운데 흙을 골라

불에 직접 닿지않게 만든 물감으로 이마를 그리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비너스같은 여인이여!

 

이렇게 하고 싶다 또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마주하고 있다.

가까이 하고 있다.”

 

 

응신(應神)천황이 소년처럼 즐겨워 하던 때는 서기 349년 경이며 응신(應神)이 30세, 야카하에 히메 14세 정도였다고 본다.

 

이렇게 혼인하여 생긴 황자(御子)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가

서기 350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 (宇美 神宮)에서 태어났다.

 

 

박창화 필사본 신라사초에서는 <건진웅建振熊>이 家系가 불명한 이벌찬<백발白發>로

신공황후가 <백발>의 딸 <아이阿尒(336~390)>로

349년 <구수>왕자와 신라의 포사에서 혼인하여

350년에 침류왕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다.

 

 

<무내숙녜 内宿禰>는 <성무>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으므로

 새로운 정권에서 등용하기 거북한 사람이었다.

 

 

4세기의 백제는 비류왕 (서기304 – 344 재위), 계왕 (344 – 346),

근초고왕 (346 – 375), 근구수왕(375 – 384), 침류왕(384 – 385),

진사왕(385 – 392), 아신왕(392 – 405), 전지왕(405 – 420)의 순서로 왕위를 잇는다.

 

이 기간 일본열도는 숭신(崇神) – 경행(景行) – 성무(成務) – 중애(仲哀) – 신공(神功) – 응신(應神) – 인덕(仁德)의 순이다.

 

 

일본서기는 수인(垂仁)을 숭신(崇神) 다음 세대로 배치하였으나

수인(垂仁)은 숭신(崇神)보다 앞 선 세대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년(紀年)의 개념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주변국과의 외교기사를 보고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무렵 경행(景行) – 성무(成務) – 중애(仲哀) – 신공(神功) – 응신(應神) – 인덕(仁德)의 6대의 천황을 모신 것으로 기록된 무내숙녜(武内宿禰)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서기 경행(景行) 3년조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기사가 인덕(仁德) 50년에 나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경행(景行) 3년과 인덕(仁德) 50년이

서력으로 몇년에 해당하는지 보증할 권위를 갖는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현 주소이다.

 

 

일본서기는 각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무내(武)의 수명을 계산하면 287년이 된다.

 

 

인덕(仁德) 50년의 기사는

 

“야마토에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대 생각은 어떤가?”

 

하고 천황이 묻는 내용이므로 <무내숙녜 内宿禰>는 그 보다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무내숙녜 内宿禰>는 287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무내숙녜 内宿禰>

가공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간을 재는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무내숙녜 内宿禰>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무렵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숭신(崇神) 68년, 경행(景行) 60년,

성무(成務) 60년, 중애(仲哀) 9년, 신공(神功) 69년, 응신(應神) 41년,

인덕(仁德) 87년 등으로 총394년이 된다.

 

1 세기 정도의 시간이 4 배로 부풀려 있다는 뜻이다.

 

 

부여의 의라왕(依羅王)이 일본열도을 장악하고

숭신(崇神) 천황으로 기록된 것을 서기 300년,

 

그가 다시 경행(景行)에게 패하여 사망한 것을 서기 318년(무인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경행(景行) 원년을 서기 319년으로 친다.

 

일본서기는 <무내숙녜 内宿禰>를 효원(孝元)천황의 증손으로

고사기는 손자로 기술하여 1 세대의 편차를 보인다.

 

<무내숙녜 内宿禰>는 성무(成務)와 같은 날 태어나서

<성무>와 특별한 관계였다 하니 <성무>와 동갑내기라고 볼 수 있다.

 

<무내숙녜 内宿禰>의 4명의 아들들은

서기 392년 야마토의 장군의 반열에 올라

백제의 <아신>왕을 즉위시키고 <진사>왕을 야마토로 압송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이 때 45세 정도로 보면 서기 347년 경 출생한 셈이 된다.

 

<무내숙녜 内宿禰>가 장남을 20세에 보았다면

<무내숙녜 内宿禰>의 출생은 서기 327년 경이다.

 

성무(成務)천황 또한 이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무내숙녜 内宿禰>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할 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9년의 <무내숙녜 内宿禰>의 위기라는 기사는

<무내숙녜 内宿禰>가 새로운 정부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여였다는 내용이다.

 

서기 349년 <성무>를 퇴위시키고 일본열도는 귀수왕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며

이 때부터 그는 응신(應神)천황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기장족희氣長足姬>를 방면하여

자기의 비(妃)로 만들고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히메>로 바꾸었다.

 

신공황후 (神功皇后)와 무내숙녜 (内宿禰)는 화폐에 새겨질 정도로

지금도 일본에서는 위대한 인물 취급되고 있다.

 

 

<1881년 일본정부가 발행한 신공황후 지폐>

 

"신공황후는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의 인물이며,

수수께끼의 인물이며, 환상의 여인이다.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에 관한 전설적 무용담은

일제시대 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신라를 쳐서 속국을 삼았다는

그 전설적인 무용담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 제1권 「비밀의 문(門)에서 발췌>

 

 

 

<무내숙녜의 초상화>

 

'야마토 조정이 일본을 통일하는데에 천황을 섬겨 커다란 업적을 올린 인물'이라고

일본인들은 지폐를 설명하고 있다.

 

 

신공황후 (神功皇后)가 응신(應神)의 어머니라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집자들의 최대의 승부수였다.

 

이것을 뒤 집을 역사적 자료가

혹시 응신(應神)이나 신공황후 (神功皇后)의 무덤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황실은 영혼의 평안을 헤치면 안 된다면서

일본은 결사적으로 천황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다음 해 12월 백제에서 돌아오던 길에

축자(筑紫)의 우미(宇美) 신궁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 아들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350 – 422)>  백제의 침류왕이다.

 

일본서기는 이 아들이 응신(應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감추고 혈통을 바꾸며 소설을 쓰면서 감추고자 하였던 귀신은

바로 귀수(貴須)였고 응신(應神)이었으며, 그의 妃가 신공(神功)이었다.

 

 

 

※ 참고 <응신천황 (貴須)의 가계도>

 

 

비류(260-344)                                                              분서(280-304)

  재위304-343                                                                재위 298-303

  |                                                                                      |

餘句{근초고왕,일본무존,야마토 타케루(295-375)                 契{경행천황(300-346)

  |  재위 346-374                                                                 |재위 344-345

貴須{근구수왕,응신천황(320-384) = 氣長足姬{神功(336-390)} = 成務(327-355)

仲哀(327-362)                        

       大鷦鷯{인덕천황(337-419)} 菟道稚郎子{침류왕(350-422)}

       大山守命{진사왕(352-395)}        

                                              稚野毛二派{아신왕(372- 424)}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