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15년{AD345}을사,

 

춘정월, 왕이 용강(龍江)에 거동하여 용주희(龍珠戱)를 하여

평양(平壤){今 遙陽}의 부로들 71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0월에 <모용각慕容恪>이 쳐들어오자,

남소(南蘇)의 소수(小守) <승융勝戎>이 연(燕)에 투항하고 나서

<각恪>과 함께 남소(南蘇)를 협공하여 빼앗았다.

 

이에 패자(沛者) <빈조賓兆>와 사마(司馬)<우매牛買>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모용각>이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이듬해 1월 <모용황慕容皝>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있던 <봉유封裕>가

모용황에게 표문을 올려 간언했다.

 

“고구려(句麗)와 백제(百濟) 및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兵勢)에 의하여 옮겼으므로,

중국(中國, 중화)인과 같이 의(義)를 사모하여 온 것이 아니므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거의 10만호에 육박하나, 도성(都城)으로 급하게 몰려서,

이제 곧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와 종속(宗屬)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기고,

이들을 은혜로 위무하는 한편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345년 고구려 서부지역 최후의 방어성인 남소가 燕의 모용황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국원제는 이 해 342년 불탄 환도성의 궁궐을 복구하고

평양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하여 고구려의 서부지역을 탈환코자 한다. 

 

 

 

- 라마동 고분군의 한반도 진출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연구팀은

서기 3세기 말에 축조 시작하여 4세기 중반에 축조가 중단되기까지

모용선비와 함께 존속한 요서의 라마동 고분군이 기존 설대로

삼연문화의 모용선비족이 이룬게 아닌 부여족이 주체적으로 이룬 것이라고 밝혔다.

자치통감에 서기 3세기 말에 부여가 전연 근처로 이동한 후

(선비족의 침공으로 패망하고 晉나라가 부여인들을 요서로 이주시킴)
성장하다가 서기 346년 모용황에 의해 크게 붕괴되고

왕 '여현'과 5만 인구가 포로로 잡혔다고 나온다.

 

3년{모용황 13년(=346년)의 오기}그의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니

모용각과 함께 기병 1만 7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습격하여 이기고는

그 왕(王)(→부여왕)과 부중(部衆) 5만여 구(口)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이로 보아 라마동 고본군은

부여성씨 '여'씨를 쓰는 여현 왕의 부여 호족 집단이 있던 곳이다.

이들은 모용선비족과 고구려사이에서 거주하다가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지금의 요서 라마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모용선비족의 문화와 에맥의 문화를 아우르며 성장.

이 지역 일대의 강한 호족 집단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서 모용황 재기의 서기 345년 연도 기록에 보면

모용선비족은 이들을 '백제'라고 보았다.

모용황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구려와 백제 및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의를 사모하여 온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십만여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진서(晉書) 권109 재기9 모용황 >

 

 

모용황 재기에는 도성을 비좁게할 정도로 십만여호나 되는 거대한 집단이

연나라 안에 있어 모용선비족이 이들을 견제했다고 나온다.

 

이 집단은 구려,백제,우문부,단부 포로들로 구성되어있었다.

부여의 이름은 없는 것이 이상하다. 그것이 바로 힌트다. 

 

진나라에 의해 요서로 이주하여 요서부여를 일구게된 부여인들은

모용선비는 '백제'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라마동고분군 집단이 한강 유역,천안 방면으로 이동하여

한성백제왕실을 대체하여 '비류왕의 근초고왕이 한성왕조'를 일구기 때문이다.

 

라마동고분군의 수장이 '여현'이라는 기록 역시 그렇다.

 

3세기 말 부여 왕실은 특정한 성씨를 쓰지않았다.

당시 부여 왕의 이름은 '의려','의라'였다.

 

그 전에는 위구태, 간위거, 마여등 특정한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요서로 이주해 요서부여를 세운 후부터

부여 왕족은 '여씨'  즉 부여씨라는 성씨를 쓰게된다.

3세기 백제는 고이왕 때 까지는

우씨優氏 가 왕통을 잇고 진씨,해씨의 귀족이 있었지만

4세기 한성백제 때부터는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때부터 여씨 성씨 즉 부여씨를 쓰게된다.

 

그런데 근초고왕의 즉위는 서기 346년에 있었다.

 

이것은 라마동고분군이 모용황에게 침입당해 크게 붕괴하는

서기 346년과 궤를 같이 한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라마동고분군에서 제작한 금동제마구,금동안장,말 보호구,

부여기마민족의 동복(청동솥)이 4세기 백제 지역과 김해의 금관가야,
일본열도에서 출토되는건 라마동고분군 집단의 한반도 이동을 증명하는데.
이 이동의 루트는 어떻게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가 요동을 약탈하고 점유하자 백제(낙랑)가 요서를 경략해

진평군을 설치하였다."라고 나오며
"낙랑,대방군의 태수와 유민이 모용외의 도움으로 요서로 이주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낙랑이 여씨부여로 비류왕때 진평군으로 이주하고,

대방부여는 남으로 이주하여 한반도 가야에 정착한다.

 

 

4세기 초 고구려의 미천태왕이 요동의 낙랑군,대방군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낙랑,대방군의 태수,유민들은 모용선비족 모용외의 도움으로 요서로 이주한다.

모용외는 낙랑,대방군을 이용해 새로운 무역항로를 개척하려하고있었다.

동북아 항로에서 중간 항로를 위치하여 이득을 보던 3세기 한성백제는

낙랑군이 멸망하자 4세기 초 요서로 사신과 군대를 보내
라마동고분군 집단과 무역 계약을 맺고

요서 라마동 고분군 ---> 한성백제 ---> 금관가야 -->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였다.

 

이것이 요서백제의 진실이었다.

라마동고분군 호족들은 이를 기회로 한성백제로 진출하여

한성백제의 귀족들과 안면을 트고 뇌물공세를 하여
백제 우씨인 고이왕통을 몰아내고

비류왕->근초고왕->근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부여 왕통을 창출했다.


끝으로 라마동고분군은 서기 346년 모용황에게 크게 침략당해 붕괴된 후

모용황의 전연이 모용황이 죽은 후
전진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모용수에 의해 후연이 세워진 후 다시 세력을 시작하지만

4세기 말~5세기 초에 또 다시 멸망하고만다.

이 집단이 바로 라마동고분군이었다.

 

 

 

<라마동 호족의 이동>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