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 21년(A.D.345) 목사(木蛇=乙巳)

 

정월, <유례儒禮 (306-367)>태자를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처음에 <아소례阿召禮 (262-327))가 별을 삼키고 태자를 낳았다.

 

<유례>는 행실이 단정하고 겉모양이 아름다우며 배움(재주)이 있었다.

 

조분제(助賁帝)가 아후(阿后 阿爾兮 286-362)에게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장성함에 이르자 효경(孝經)에 능통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후(后)를 섬겼다.

 

后가 <유례>를 사랑하고자 하였으나 <유례>가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옥문(玉門)에 부스럼이 났다고 사칭(詐稱)하여

가까이 와서 유약(油藥)을 바르라 하여 통(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폐신(嬖臣)이 되고, 총애가 더하여 사랑함이 깊어지더니,

부군(副君)에 다다르게 되었다.

 

7월, 아후(阿后)가 <유례>를 부군으로 삼고자 하자,

 

<유례>가 <운두雲斗>에게 말하기를

 

“괴롭도다. 모후(母后, 아이혜)를 따르지 않으면 효가 아니요,

어머니를 따르면 <미암米諳>에 대한 예의를 잃게 된다.”

라고 하였다.

 

<운두雲斗>가 이에 <미암米諳>에게 알리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동이(夷)의 풍속이 세세대로 전하여 지고 있어,

지금 <유례> 태자가 후의 총애를 얻어 장차 부군으로 즉위하고자 하나,

스승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미암米諳>이 말하기를

 

“태자는 선제(先帝, 조분)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다.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백성을 교화함이 옳다.

한 명의 후와 두 임금의 치세 중에 나라에 또한 그러한 일이 있었으나,

어찌 또 그런 일이 누차로 일어나는가!”

라고 하였다.

 

<운두雲斗>가 이에 후와 부군에게 알리어 말하니,

후가 크게 기뻐하며 또한 <미암米諳>으로 하여금 니금에게 고하게 하여,

드디어 부군으로 세울 책략을 결정하였다.

 

이런 연유로 <운두>를 재상으로, <미암>을 부군태사(副君太師)로 삼았다.

 

<미암米諳>은 오나라 사람이다.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미암米諳>에게 해마다 곡식 300석과 베 50필을 내리고 노비 10명을 더하여 내려,

장원(庄園)과 포전(圃田)과 저택(宅)과 엽호(獵戶)를 거느리기가 왕자의 예와 같았다.

 

옛날 봉황(鳳凰) 3년(A.D.274, 오나라 연호) <손광孫光>이

<미암>의 아버지 <미회米會>를 따라 오(吳)로 들어가

6년 동안 수도(修道)를 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미회米會>에게는 2명의 첩이 있었는데,

<미암>의 어머니 유씨(劉氏)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웠다.

 

<손광>이 유씨를 몰래 흠모하였는데,

다른 첩이 시새움하여 <손광>과 상통(相通)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손광>이 변명하지 못하자, <미회>가 마침내 유씨를 <손광>에게 주며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한 여자만 사랑하겠는가. 친구(朋友)에게 짐을 지웠구나.”

라고 하였다.

 

당시 <미암>이 태어나서 두 살이었는데,

유씨가 <손광>의 딸 하나를 낳고 <손광>과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미암>이 25세가 되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동(東, 신라)으로 오니

<손광>이 양자(養子)로 삼았다.

 

마음속으로는 우리의 속세의 일을 그르다며 침을 뱉고 욕함이 많았다.

 

<양부良夫> 등이 모두 스승으로 모시니,

안에서는 잘못이 있으나 밖에서는 바른 척하며,

예교(禮敎)로 골문(骨門)을 꾸짖음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미암을 따르기를) 애쓰며,

공궤(供饋, 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함이 많아서 재화(財貨)를 얻음에 이르렀다.

 

출입하는 골녀들을 <미암>이 사적으로 끌고 가 음란하여 자녀를 낳았다.

 

리방(理方)이 노(老, 仙老)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미(阿媚, 아첨)하여 권문(權門)을 섬기니,

종횡(縱橫)하여 그 설(說,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런 연유로 식자(識子)들은 그릇되었다 하였다.

 

10월 연나라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의 남소(南蘇)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