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16년{AD346}병오,

 

9월, 백제의 <계契>가 죽어 <비류比流>의 둘째 아들

<근초고 (295-375)>가 뒤를 이었는데, 체모가 특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알았다.

<고구려사초>

 

계왕3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미추왕 22년(A.D.346) 화마(火馬=丙午)

부여(夫余)의 임금 계(契)가 갑자기 죽었다.

비류(比流)의 둘째아들 근초고(近肖古)는 보과(宝果)의 아들인데, 보과가 그를 세웠다.

체격과 용모가 기위(奇偉, 뛰어나고 훌륭함)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신라사초 미추왕기>

 

 

일본서기에서 일본열도의 九州와 야마토를 정복하고

東征을 계속하여 도쿄지방까지 진출한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로 알려진

근초고왕 <여구餘句(295-375)>의 즉위 기사에 

삼국사기는 그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계契(295?-346>왕이 사망하여 왕위를 이었다는 단 두줄의 기사를 싣고 있다.

 

<여구餘句(295-375) 재위 346-374>가 백제왕으로 즉위 할 때의 나이가 52세이다.

 

그의 왕자 시절에 대한 기록과 즉위 후 20년 동안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통채로 빠져있어 일본서기를 통하여 그의 일생을 단지 추정할 뿐이다. 

 

백제의 중흥군주로 마한을 정복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백제 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위대한 군주에 대한 기록이

어찌 이리도 빈약할 수 있단 말인가?

 

김부식은 대륙백제와 구주백제의 위대한 역사를 믿을 수 없어 삭제하였을 것이다.

 

신라사초에 <계契>왕이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정변이 있은 것 같다.

 

<계契>는 <고이>왕계로 대방과 연합한 세력이고,

<여구餘句>는 <구수>왕계로 백제의 토착 귀족세력과 연합한 세력이다.

 

355년 일본열도의 성무천황(309-355){계契의 아들}도

<여구餘句>의 아들 <구수仇首(320~394)>에게 패하여 퇴위된다.

 

이후 고이왕계는 백제와 일본열도의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차남이며 295년에 태어났다.

 

체격이 크고, 외양이 기이하게 생겼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전한다.

   

초고왕 2세를 뜻하는 근초고라는 묘호가 말해주듯,

그는 자신이 초고왕의 혈통을 이었음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방계 혈통에 속하는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는

고이왕계 왕실을 종식시키고 적통 왕실을 복구했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조처였다.

 

비류왕이 죽은 뒤, 그는 대륙백제의 계왕과 왕위계승권을 다퉈야 했고,

그 때문에 2년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계왕을 쫓아내고 대륙백제를 아우른 뒤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른다.

 

그는 즉위 이후에도 여전히 왕위 계승의 명분을 얻지 못해 시달린 모양이다.

 

그래서 스스로 초고왕의 직계 혈통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바로 초고왕 3세를 뜻하는 ‘근초고’라는 묘호였다.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 후, 약 20년 동안의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재위 21년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근초고왕 20년까지의 기록들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빼버린 결과이다.   

 

 

근초고왕은 대륙백제의 계왕을 내쫓고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를 통일했기 때문에

즉위 후 상당 기간 동안 대륙백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몰두했을 것이다.

 

하지만『삼국사기』편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의로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재위 2년 기사에 뜬금없이 조정좌평 <진정眞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해

일을 처리함에 있어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으며,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삼국사기』는 <진정>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또 근초고왕이 <진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부연 기사는 없다.

   

그렇다면 <진정>이 학정을 지속하고 있던 그때에 근초고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백성들의 원망이 극도에 달할 정도였다면,

당연히 왕은 그를 파직시키든지 형벌을 가하든지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이 순리다.

 

만약 왕이 그런 <진정>의 행동을 묵과했다면,

역시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삼국사기』는 <진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있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근초고왕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부연하지 않았다.

   

이것은『삼국사기』편자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의로 누락시킨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란, 근초고왕이 한성에 머물지 않은 상황을 의미한다.

   

근초고왕은 즉위 당시 한성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대륙백제를 지배하고 있던 계왕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을 것이고,

계왕과 전쟁 끝에 승리하여 그 곳을 장악했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계속 대륙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당시 근초고왕은 한성에 머물지 않았으며,

한성은 <진정>을 비롯한 왕후의 척족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던 까닭에

한반도 백제의 백성들은 그들 척족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뜬금없이 외척에 불과한 <진정>의 성품과 학정이 언급되고,

백성들이 그를 미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또 그런 기록을 남기려면 의당 근초고왕의 후속 조치에 대한 언급이 뒤따라야 했는데, 그것도 없다.

 

이는 <진정>을 비롯한 척족들이 한반도 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던 방증이다.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근초고왕이 대륙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346년 무렵에 대륙엔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친 뒤였다.

   

비류왕 재위기인 311년에 흉노의 귀족 <유연>은 아들 <유총>과 함께

여러 차례 낙양을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서기 316년에 장안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서진은 몰락하였고,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리는데,

이 혼란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선비족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이미 311년에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313년에는 현도성을 장악하였다.

   

낙랑과 대방은 백제가 개척한 영토인 만큼 미천왕의 세력 확대는

대륙백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와 대륙으로 분리되어 있던 백제는

군사적 열세로 계속 남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근왕 세력의 호위를 받으며 가까스로 왕실을 유지하고 있던 어린 계왕은

무섭게 밀려드는 고구려 군을 상대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선비족도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선비족은 모용 선비, 단 선비, 우문 선비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장 강력한 세력은 모용외가 이끄는 모용 선비였다.

 

모용외는 319년에는 유주(황하 동북방) 일대를 거의 장악했고,

이에 따라 320년 이후엔 모용 선비와 고구려가 치열한 영토 싸움을 전개했다.

   

양국의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용 선비가 조금씩 우세를 보였다.

 

모용 선비는 337년에 국호를 연(燕)이라 하여 요하 상류의 양안에 도읍을 정하였고, 339년에는 고구려의 신성까지 밀고 들어가 고국원왕으로부터 화의 약조를 받아냈다.

 

약세에 몰린 고국원왕은 태자 구부(소수림왕)를

연의 도성에 입조토록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342년에 연은 수도를 북경 서남쪽의 용성{유성}으로 옮기고,

그해 11월에 고구려를 침략했다.

   

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고구려는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결국 도성인 환도성{조양}이 무너지는 지경에 처했다.

 

고국원왕은 가까스로 환도성에서 몸을 빼 목숨을 구했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왕족과 왕후, 태후 등이 모두 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연은 고구려의 반격을 막기 위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싣고 갔다.

   

이 때문에 고국원왕은 연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굴욕적인 서약을 해야 했고,

최대의 강적 고구려를 무릎 꿇린 모용황은

수도를 계현(산서성 대현 인근)으로 옮겨 더욱 세력을 확대했다.

 

그 후 묘용황은 344년에 우문 선비를 멸하여 병합하고,

345년에는 고구려의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346년 무렵에는 고구려의 라마동{요령성 부신시}지역을

침공하여 부여의 호족들을 낙랑과 대방지역으로 이주케 한다.

 

고구려와 우문국의 정벌을 마친 모용황은 중원으로의 남하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백제를 인수한 근초고왕은 한성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북쪽에선 연나라가 급속히 팽창하며 남하를 지속해왔고,

서쪽에선 유총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후조의 석륵 세력이 뻗쳐오고 있었으며,

남쪽에선 동진이 안정을 되찾으며 북진 정책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대륙백제는 사면이 적으로 휩싸인 꼴이었다.

   

근초고왕의 재위 20년까지의 기록이 전무한 것은

바로 그가 이 기간 동안 대륙백제의 안정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당시 대륙에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는 증거는

일본의『고사기』기록에 나타난다.

 

응신천황 기사에 일본 왕의 부탁을 받은 백제왕이

왕인 박사를 일본에 파견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 때 왕인과 함께 간 일행 중에 오인(吳人) 베틀장인 서소(西素)라는 사람이 있다.

 

서소는 기록대로 오나라 사람이었다.

 

오나라는 중국의 양자강 하류 남북 땅을 지칭하는 땅으로,

오나라는 주로 남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백제에서 보낸 서소가 양자강 근처의 오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대륙백제의 힘이 그 곳까지 미쳤다는 의미가 된다.

 

이 사실은 대륙백제의 세력이 양자강 근처에까지 뻗쳐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사기』엔 왕인 박사를 파견한 왕이 근초고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엔 아화왕(아신왕) 대인 40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술 관계와 사료의 신빙성에 비춰볼 때,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는 근초고왕 대가 아니라

아신왕대로 보는 것이 옳겠다.

 

따라서 서소 또한 아신왕 대에 일본에 보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아신왕 대에 대륙백제의 영토는 양자강까지 뻗쳐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영토적 기반은 근초고왕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북사』에 ‘백제(百濟)…… 거강좌우(據江左右)’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강’이란 양자강을 일컫는다.

 

풀이하자면 ‘백제가 양자강 좌우 땅을 차지하고 막아 지켰다’는 뜻이다.

 

근초고왕이 오나라 베틀장인 서소를 일본에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강 좌우 땅을 차지했다는『북사』의 기록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일이다.

   

근초고왕은 재위 21년(366년)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367년에는 왜에도 사신을 보냈다.

 

또 368년에는 신라에 명마 두 필을 보냈고,

그해에 왜에도 구저를 사신으로 보냈다.

   

근초고왕이 신라와 유화책을 쓴 것은 그들 국가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근초고왕은 계왕 시절에 상실한 대륙백제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와 대치 중이었고, 그것은 심화되어 점차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신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화의를 맺어뒀던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재위 24년(369년) 9월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직접 병력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태자(근구수왕)에게 군대를 안겨 고구려 군을 격파했다.

 

백제군은 고구려 군 5천을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뒀고,

이 싸움을 기점으로 백제의 힘은 고구려와 대등해진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그해 11월에 한수 근처에서 대대적인 군사 사열을 감행했다.

 

이 때, 황색의 깃발을 사용했는데, 황색이란 곧 황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근초고왕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년 뒤인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대병을 이끌고 남진을 감행해왔는데,

근초고왕은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대승을 낚았다.

 

근초고왕은 그 여세를 몰아 그해 겨울에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고구려의 한성(漢城){今 平陽}을 공격하였다.

   

백제의 급습을 받은 고국원왕은 당황한 가운데

수성전을 펼치다가 화살을 맞아 사망하였고,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을 죽인 데 만족하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그 뒤로도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375년엔 고구려가 백제의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며

다시 한 번 압박을 가해왔다.

 

근초고왕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지만,

흉년이 드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그해 11월에 파란만장한 생을 접어야 했다.

   

그는 재위 내내 영토 확장에 매달렸고,

덕분에 백제는 대륙과 구주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신라와 화친을 맺어 대륙 정책에 문제가 없도록 애를 썼으며,

특히 그의 아들 구수가 다스리는 일본열도는 여러 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삼국사기』는『고기(古記)』라는 책을 인용하여

근초고왕 대에 처음으로 백제의 역사가 정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당시 쓰여 진 역사서는『서기(書記)』이며, 저자는 <고흥>이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흥>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서기』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근초고왕의 업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토 확장이다.

 

그는 대륙백제의 땅을 크게 확장하여 남쪽으로는 양자강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요동 지역에 육박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덕주ㆍ곡부ㆍ청강ㆍ양주에 이르렀으니,

그 영토는 본토인 한반도 백제의 몇 배나 되었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이러한 영토 확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패권 다툼의 결과였다.

   

고구려는 미천왕 이래 남하 정책을 실시하여 요서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것은 곧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모용 선비와의 전쟁을 유발했다.

 

양국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며 팽팽한 접전을 지속하다가

342년에 모용황이 병력 5만 5천으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무너뜨리면서

고구려의 힘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고구려는 이 전쟁 이후 모용 선비가 세운 연나라에 태자를 입조시키는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형성했는데, 근초고왕이 즉위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근초고왕 즉위 무렵, 분단의 여파로 대륙백제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어 있었는데,

통일을 이룬 근초고왕은 잃은 영토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혼란스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대륙백제의 거점은 산동성 지역이었는데,

서진이 몰락한 이후 중원의 변방에 해당하는 산동성과 강소성엔

백제를 능가하는 거대 세력이 없었다.

 

백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선 남진 정책을 감행하여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제24대)에 제나라에 보낸『남제서』의 글을 보면

이 때 백제가 장악한 지역이 관직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 지역들을 열거하면 광양, 조선, 낙랑, 대방, 광릉, 청하, 성양 등이다.

 

 

 

 

 

<근초고왕대 대륙백제의 영토> 

 

 

또『송서』에는 백제의 비유왕이

대사 풍야부를 서하 태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대방은 지금의 창주 지역, 낙랑은 그 서쪽의 보정시, 조선은 낙랑지역을

서하와 광양은 북경인근, 청하는 청도지역 성양, 광릉등은 강소성 지역이다.

 

비록 동성왕 대에 등장하는 지명이기는 하나

근초고왕이 남쪽으로 오나라 지역을 장악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 지역은 이미 근초고왕 초기에 개척한 영토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듯 근초고왕은 즉위 초에는 주로 대륙백제의 거점인 산동성 지역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다가 점차 북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가 북진을 시작한 시기는

모용 선비가 세운 연이 몰락하고 있던 360년대였을 것이다.

 

당시 모용 선비는 세력이 약화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저족의 부씨 일족이 세운 진(秦)이 북방으로 세력을 확대해오고 있었다.

 

모용 선비의 급격한 몰락은

북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제에겐 호기가 아닐 수 없었고,

역시 남진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고구려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모용 선비의 쇠락을 틈타 영토 확장을 추구하던 고구려와 백제는

세력을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고,

369년 9월에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을 침략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하였다.

   

고구려 군이 치양을 약탈하자, 근초고왕은 태자 구수(근구수왕)를 시켜 방어했다.

 

이 때 고구려 진영에서 사기(斯紀)라는 자가 은밀히 찾아왔다.

 

그는 원래 백제인 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여 고구려로 도망했던 자였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을 치르게 되자,

백제를 염려하여 중요한 정보를 안고 달려와 이렇게 고했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군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격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구수는 사기의 말을 믿고 붉은 깃발의 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결국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는 대승을 낚았다.

 

기세를 세운 백제군은 달아나는 고구려 군을 후려 수곡성 서북 지역에 이르렀다.

 

이 때 장수 <막고해>가 진격을 만류하며 태자에게 말했다.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막고해>의 그 충고를 옳게 여겨 <구수>는 추격을 중단했다.

 

그리고 즉시 그 곳에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겠는가?”

   

구수 태자의 자신만만한 말투에서 드러나듯

당시 백제 군대의 위세는 대단했다.

 

치양을 공격한 고구려 군을 격퇴시킨 근초고왕은

그해 11월에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사 사열을 감행했다.

 

이것은 일종의 무력시위이자, 고구려 군에 대한 경고였다.

 

이 때 근초고왕은 휘하 병력으로 하여금 황색 깃발을 사용토록 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황제의 군대임을 공포한 일이었다.

   

그런 백제의 위세에 눌린 고구려 군은 한동안 백제 땅을 침략하지 않았다.

 

치양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로 기세가 한층 꺾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2년 뒤인 371년 9월에 고국원왕은 다시 공격을 감행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패하 강가에 숨어 있던 백제군에게 당해 쫓겨 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자신이 직접 병력 3만을 이끌고

고구려 군의 뒤를 쫓아 한성까지 밀고 올라갔다.

 

백제 정예 병력 3만의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고구려 군은 크게 당황하였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백제군의 공세에 밀린 고구려 군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수세에 몰린 고구려 군은 태자 구부(소수림왕)의 지휘 아래

한성으로 물러나 수성전을 펼쳤고,

근초고왕은 고구려 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하고 병력을 물렸다.

   

백제군이 돌아간 뒤, 고국원왕은 화살의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 소식을 듣고 근초고왕은 더 이상 고구려가 공격해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대륙백제를 태자에게 맡기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 때 근초고왕이 한성으로 돌아온 일을『삼국사기』는

‘왕인군퇴(王引軍退) 이도한산(移都漢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학계 일부에서는

‘왕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해석은 당시 정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면 도읍을 한산성, 즉 산성으로 옮겼다는 뜻인데,

이후에 산성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어떤 이는 여기서 언급된 한산을 북한산으로 해석하여

백제가 도성을 한강 북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또한 전혀 근거 없는 발상이다.

 

『삼국사기』는 한산과 북한산을 분명히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 그 이후에도 백제는 여전히 한성을 도읍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당시 전황이 유리하고 대승을 거둔 상황에서 굳이 도성을 옮길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삼국사기』의 ‘이도한산’은 한산의 도성

즉, 한성으로 옮겨왔다고 해석해야 옳다.

 

말하자면 그 때까지 근초고왕은 대륙백제의 도성에 머물다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대승을 낚은 뒤에야

비로소 본국 도성인 한성으로 옮겨 앉았다는 뜻이다.

   

당시 대륙백제의 땅은 한반도 본토보다 몇 배나 컸기에

당연히 대륙백제에도 한성 못지않은 거대한 왕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근초고왕은 즉위 초 십수 년간을 대륙에서 지냈는데,

그 곳에 왕성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륙백제의 도성은 책계왕 원년에 보수한 대방 땅의 위례성(하남 위례성)일 것이다.

 

근초고왕은 대륙에서 줄곧 위례성에 머물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뒤에야 한성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뒤로 고구려는 쉽사리 백제를 침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375년 7월에 백제의 북쪽 변방인 수곡성을 공략해왔다.

 

이 때 고구려가 자신 있게 수곡성으로 쳐들어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간 위용을 떨치며 고구려 군을 떨게 만들었던 근초고왕이

노환이 들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백제 땅에 크게 흉년이 들어 대병을 일으킬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의 판단은 적중했다.

 

근초고왕의 노환으로 기세가 떨어진 백제군은 수곡성에서 대패하였고,

결국 수곡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은 377년에 근구수왕이 재차 한성을 공격하는 원인이 된다.

   

 

※ 餘句(295-375) 일대기

 

295년  比流(260~344)와 대방왕 沼(223~283)의 딸 宝果(267~?) 사이에서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남

 

318년  일본열도에서 숭신천왕(의라 260?-318)과의 전쟁에서

          쌍둥이 형은 전사하고 의라를 죽이고, 東征을 완성한 후, 

          야마토 타게루(倭建命, 日本武尊)라는 칭호를 얻게 됨

 

319년  眞淨의 딸 眞씨와 결혼함

 

320년  眞씨와의 사이에서 근구수가 태어남

 

333년  일본열도에서 백제로 귀국함(일본열도에 백조릉을 남김)

 

337년  근구수가 <대초료大鷦鷯(337-419 인덕천황)>을 낳음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으로 즉위함

 

347년  진정(真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임명함

 

349년  근구수가 신라 백발의 딸 아이(阿尒){神功황후}와 결혼함

 

350년  근구수와 아이(阿尒)사이에서 兎道稚郞子(350-422 침류왕)가 태어남

 

352년  근구수가 大山守命(352-395 진사왕)을 낳음

           해발에게 대방과 관미령을 빼앗김

 

355년 근구수가 <성무>천황을 퇴위시킴

 

357년  해발에게 2개의 城을 빼앗김

 

358년  해극에게 수곡성을 빼앗김

 

359년  미녀 5인과 백마 1쌍, 구슬 5과를 주며 고구려와 화친함

 

363년  근구수가 왜의 응시천왕으로 즉위함

 

364년  <양주陽疇>가 백제의 북변을 침공함

 

365년  <선극仙克>이 백제의 이진성(伊珍城)을 정벌함

 

366년  복수천(福水川) 전투에서 <진벽真璧>과 <사리沙利>가 사로잡힘

           신라에 사신을 보냄

           대방과 낙랑이 신라에 공물을 보냄

 

367년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이 (백제 태자) <길회吉湏>에게 시집옴

 

368년  고국원제 <사유斯由>가 백제 북변을 순회함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냄

 

369년  백제가 이진성(伊珍城)과 수곡성(水谷城)을 되찾음

 

371년  고국원제 <사유>가 전사함

 

372년  근구수가 稚野毛二派(372-424 아신왕)를 낳음

 

373년  晉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함.

          독산성주가 신라에 투항함.

          청목령에 성을 쌓음

 

375년  고구려가 수곡성을 공격함

           근초고가 죽고 근구수가 즉위함

 

384년  근구수가 침류에게 양위하고 왜로 돌아감

 

394년  근구수가 죽음

 

397년  인덕천왕이 즉위함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