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 25년(A.D.349) 황계(黃鷄=己酉)

 

정월, <오흥烏興>을 이벌찬으로, <양흠陽欽>을 다시 품주로 삼았다.

 

<오흥烏興>은 <대오부大烏夫>의 아들이다.

 

부여(夫余)가 공물을 바치고 혼인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3월, 가물었다.

 

니금(尼今)이 조정에서 자책하여 말하기를

 

“사치(奢侈)는 일어나고, 음양(陰陽)은 막히고, 백성은 고생함이 많고,

신하는 원망함이 많으며, 군의 사기는 일어나지 아니하고, 문(文)이 흥미를 잃었다.”

라고 하며 이에 반찬을 먹지 아니하였다.

 

부군이 여러 차례 반찬을 들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부군(副君, 유례)이 이에 신후에게 반찬을 권하도록 여쭈었다.

 

신후가 이에 니금을 꾸짖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속이 좁은 소인배처럼 행동하느냐?”

라고 하였다.

 

아마도 니금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곧 부군에게 효과가 나타나 식사를 하지 않는 까닭이다.

 

후(后)는 사치를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궁중에서 옥(玉)을 많이 사용함이 많고,

가산(假山)을 쌓고, 진귀한 그릇을 사용하였으며, 호피(虎皮)를 깔고,

꿩의 머리털로 곤룡포를 지어 입으며, 8가지 보석으로 금관(金冠)을 만들고,

진주(眞珠)와 산호(珊胡)로 부채를 만들고,

또 화조(花鳥)의 재주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기초(碁草, 도꼬마리?)를 불알(囊)에 던지는 기술을 보이며

여러 폐인(嬖人)과 유희(遊戱)하거나 탐락(耽樂)하였다.

 

니금은 몸소 검소함을 행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사(政事)를 행하였다.

 

그런 연유로 부군이 둘 사이에서 어려워하였다.

 

后는 '국가의 태평은 모두 나(朕)의 복이며,

비록 적은 가뭄이 있을지라도 자책하는 것은 불요하며,

어찌 식사까지 줄이며 궁색하게 구는 것인가?

 

이 늙은 아내 때문이로구나!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 죽지 않을 것이니,

나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외롭게 할 것이다' 라며

后는 자못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경도(京都)에는 인력과 물자가 심히 번성하였다.

 

호(戶)가 129,000여 호에 이르고, 황옥대궁(黃屋大宮)이 30개,

금입대택(金入大宅)이 90개, (금입)소택이 500여개,

경도의 밖에는 (금입)대택이 100여개 있었다.

 

모두 노비와 장원(庄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공(百工)이 일어나고, 물화(物貨)가 풍성하였다.

 

니금이 항상 축적(畜積)하고 사용함을 들어주지 않았다.

 

后가 여러 차례 궁실을 고치고자 하였으나, 니금이 급하지 아니하다 하여 만류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사로이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수보(修補)함을 비밀리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니금이 궁실을 수리함을 알면,

아마도 신(臣)과 후(后)가 공모하였다 생각할 것이고,

(니금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행하였으니

신이 장차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后가 이에 부역을 그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니금이 자책한 까닭은

后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도록 한 것이나 (오히려) 노하게 한 것이다.

 

니금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선위(禪位)를 하고자함이 이미 오래이니, 오늘 너에게 선위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

 

끝내 새보(璽寶)를 <유례>에게 전하고 (궁을) 나가서 도산(桃山)에 있었고,

부군은 울면서 사양할 뿐이었다.

 

곧바로 도산에 이르러 니금이 <홍권弘權>에게 명하여 택일(擇日)하게 하였다.

 

<조분助賁>의 고사(古事)에 의하여, 도산에서 선위의 례(禮, 의식)를 행하였다.

 

니금은 선금(仙今)이라 칭하고, 부군은 신금(新今)이라 칭하였다.

 

신금이 이에 신후(神后)와 백대마(白大馬)를 함께 타고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고,

남당(南堂)에서 백관(百官)의 축하를 받았다.

 

신금이 백관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은 어리석으나 신후와 선금의 은덕으로 선위를 받았다.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짐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

모두 선금에게 품(稟)하여 결정하겠다.”

라고 하였다.

 

부여(夫余)의 태자 근수(謹須, 근구수왕)가 입조하여

백발(白發)의 딸 아이(阿尒, 침류왕의 모친)를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7월 <석종石宗>을 이벌찬으로 <승화勝華>를 품주로 삼았다.

 

<석종>은 <익종翊宗>의 아들이고 <난석蘭石>의 소생이다.

 

<승화>는 니금(尼今, 미추)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그런 연유로 신금(新今)이 선금(仙今, 미추)을 위로하고자 하여 품주로 삼았다.

 

선금은 이 때부터 우유(優遊)하며 나라 안의 산천을 유람하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며,

현명한자를 천거하고, 재주 있는 문필가를 양성하였다.

 

선지(仙志)에는 유례니금 13년(AD.362) 신림(新林)에서 (아이혜를) 따라 죽었고,

이에 화궁(花宮)을 대릉(大陵)으로 하고, 사당(廟)을 명당(明堂)이라 이름 하였다.

 

선금의 신장(身長, 키)은 8척이고,

크고 위대한 덕이 있어 집집(家家)마다 상(像, 초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신금은 조분(助賁)의 아들이고,

아소례(阿召禮)후가 밤에 수왕(樹王)에게 기도하면서 별빛을 삼켰는데,

(조분의) 행차를 받아 임신하여 태어났다.

 

성덕(聖德)이 있었으며,

선금이 사랑하여 장녀 선추(宣秋)를 시집보냈고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끝내 대위(大位)를 전하였다.

 

 

※ 참고

 

가산(假山) : 정원등을 꾸미기 위해 만든 산의 조형물,

                 중국에서는 宋나라 때에 생겨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와 신라에서 활발하였고

                 오늘날 일본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가 되었다

 

우유(優遊) : 하는 일 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