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왕 원년(AD.350)

 

4월 왜가 일례(一禮)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남녀 일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신라사초>

 

 

유례이사금 4년(287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창화 필사본 신라사초와 삼국사기 기록간에 63년의 기년차가 난다.

 

402년 실성왕 원년부터는 기년이 일치한다.

 

두 사서를 비교해 보면 신라사초는 흘해(7년)와 내물(25년)의 재위 기간이 32년인데

삼국사기는 흘해(47년)와 내물(47년)의 재위기간이 94년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가 실성왕부터 기년을 맞추기 위하여 흘해왕과 내물왕의 재위기간을 합하여

62년이나 늘여 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사초와 삼국사기 중, 어느 것이 역사의 실체일까?

 

신라사초에 의하면

 

흘해는 <우로于老(277-331)>와 <명원命元(307-374)>사이에서 329년에 태어났다.

 

이때 <우로>는 53세, <명원>은 23세이다. 

 

흘해는 42세에 즉위하여 6년간 재위하고 내물에게 선위한다.

 

 

내물은 <말구未仇(297-358)>와 <휴례休禮(331-399)>사이에서 350년에 태어났다.

 

이때 <말구>는 54세, <휴례>는 20세이다.

 

내물은 28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고 52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우로>와 <명원>, <말구>와 <휴례>는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난다.

 

손녀뻘인 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김부식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기년을 늘여 놓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지도 않은 왕이 재위에 오르는 희한한 일이 발생한다.

 

 

기림13년(310년)

여름 5월, 왕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왕이 별세하였다.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기>

 

흘해47년(356년)

여름 4월, 왕이 별세하였다.

 

내물[나밀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며,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므로 내물이 그 뒤를 이었다.

[말구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다.]

<삼국사기>

 

 

내물47년(402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흘해>가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47년간 재위하였는데

아들이 없어 <내물>이 즉위하였고,

<내물>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실성>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흘해가 47년간 재위하였는데 아들이 없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신라는 아들이 없어도 여왕이 그가 좋아하는 왕손을 부군으로 삼아

보위를 잇게 할 수 있는 女王의 나라였고, 神國의 나라였고, 二聖의 나라였다. 

 

이때 <조분助賁(254-329)>과 <아이혜阿爾兮(286-362)>의 딸인

<광명光明(324-392)>은 성골로서

<미추味鄒(292-362)>와의 사이에서 <보반保反(362-428)>을 낳고,

<유례儒禮(306-367)와의 사이에서 <기탄其炭(364-? )>을 낳고,

<기림基臨(330-372)>과 <흘해訖解(329-392)>의 神后로서

<기림基臨(330-372)>을 <흘해訖解(329-392)>에게

<흘해訖解(329-392)>를 <내물奈勿(350-402)>에게 선위케 하고

<내물奈勿(350-402)>의 신후로서

<호동好童(376-405)>과 <숙단叔丹(378-?)>을 낳은

다섯 남왕의 神后로서 두명의 남왕을 자기의 의사대로 선위케 한 여왕이었다.

 

<광명>에게는 <내물>의 아들인

성골의 <호동好童(376-405)>과 <숙단叔丹(378-?)>이 있었다.

 

내물이 죽었을 때 <호동>은 27세 <숙단>은 25세이다.

 

내물이 죽었을 때 아들이 어렸으므로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내물>은 그의 동생 <호물好勿>이 전횡을 일삼자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지원을 받은 <실성實聖(359-417)>을 불려들여 

<호물>을 견제코자 한 것이다.

 

내물의 사망년도와 실성의 즉위년도부터는 기년이 일치한다. 

 

<실성>은 <내물>과 <광명>의 딸 <보반保反(362-428)> 사이에서 태어난

<눌지訥祗(387-458)>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투신 자살하게 된다.

 

 

 

신라의 기년이 뒤틀어진 것은 모두 김부식의 원죄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 할 당시 고려는 서경파와 개경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김부식은 고려의 정통성이 신라에 있다고 주장하며

신라를 삼국의 首位에 올려 놓기 위하여

신라의 기년을 늘여 신라 건국을 BC 57년으로 잡았다.

 

그리하여 신라의 기년이 1갑자 정도 앞 당겨진 것이다.

(45. 신라 건국년도 BC 57년은 김부식의 뻥이다. 참조)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