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23년{AD353}계축,

 

정월, <청발靑發>을 燕에 보내서 <준雋>의 등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대방(帶方)태수 일을 설명하였다.

 

<준雋>은 지난 해 11월 이래로 칭제를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대례(大禮)를 치르고 곧 중원으로 들어갈 것이어,

 

우리와는 일을 두고 다투기를 피하고자 내내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면서 말하길;

 

“동방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니 잘 처리하시오.

짐은 장차 그대를 나의 아들로 삼을 것이오.”

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13살 먹은 <호인好仁>공주를 상의 처로 주었고,

상을 부마도위(駙馬都尉) 현도군왕(玄菟郡王)으로 봉하였다.

 

상은 서하(西河)로 나가서 공주를 맞이하여 온탕으로 들어갔으며,

공주에게 딸려 온 신하들에게는

용산(龍山)행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황상의 동생 <림琳 329-397>을 천원공(天原公)으로 삼았다.

 

 

 

 

지금의 풍녕만족자치현{潮河 상류}자몽이라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문부의 치소였던 자몽천이 모용부(慕容部)에게 점령당하고

우문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모용부는 모용황이 337년 燕을 건국하게 된다.

 

역사에서 말하는 전연(前燕: 337~370)이다.

 

前燕은 중국의 나라가 아니고 선비족의 나라이며

북부여의 제후국으로 살아왔던 나라이다.

 

중원과 북부여 혹은 고구려 사이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면서

이쪽저쪽을 옮겨 부용 하기는 하였지만 중국보다는 우리에 속하는 나라였다.

 

<모용외>의 어머니는 졸본의 성씨인 을씨(乙氏)였으며

주몽의 아들인 <을두지>의 후손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동명의 적손(東明嫡孫)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중원을 넘보게 되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이웃한 고구려와 화친을 하고자하였지만 고구려의 미천대제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들을 여전히 고구려에 복속해야만 하는 상대로 얕보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燕과 고구려의 두 세력은 부딪혀야했고

마침내 서기342년 10월, 모용황은 고구려 정벌의 길을 나서게 된다.

 

고구려의 환도성이 불타고 고구려는 다시 평양(今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前燕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중원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한낱 제후국으로 전락시키며 한 시대를 호령하게 된다.

 

서기353년 모용준은 고국원제를 부마도위 현도군왕(駙馬都尉 玄菟郡王)으로 봉했다.

이듬해 다시 부마도위 양맥대왕(駙馬都尉 梁貊大王)으로 봉한다.

 

고구려가 패망하여 모용씨 연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아주 짦은 기간이었지만 고구려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