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24년{AD354}갑인,
2월, 낙랑왕 <부평芙平>이 죽어 <창번倉樊>이 대신하게 하고,
<부헌芙軒>을 태보로, <주담周淡>을 좌보로, <고수高穗>를 우보로,
<상능尙能>을 부고령(府庫令)으로 삼았다.
4월, <준雋>은 자신의 동생
<군軍>을 <양양왕襄陽王>으로,
<팽彭>을 <무창왕武昌王>으로,
<각恪>을 <태원왕太原王>으로,
<평評>을 <상용왕上庸王>으로,
<패覇>를 <오왕吳王>으로,
<우友>를 <범양왕范陽王>으로,
<려厲>를 <하비왕下邳王>으로,
<의宜>를 <려강왕廬江王>으로,
<탁度>을 <낙랑왕楽浪王>으로,
<환桓>을 <의도왕宜都王>으로,
<체逮>를 <임하왕臨賀王>으로,
<휘徽>를 <하간왕河間王>으로,
<용龍>를 <역양왕歷陽王>으로,
<납納>을 <북해왕北海王>으로,
<수秀>를 <란능왕蘭陵王>으로,
<악嶽>을 <안풍왕安豊王>으로,
<덕德>을 <양공梁公>으로,
<묵黙>을 <시안공始安公>으로 삼았다.
<루僂>는 <남강공南康公>으로 삼았는데 나이 12살이었다.
<주周>태후가 낳은 <무武>는 <납納>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함咸>은 <락안왕楽安王>으로,
<량亮>은 <발해왕勃海王>으로,
<온溫>은 <대방왕帶方王>으로,
<섭涉>은 <어양왕漁陽王>으로,
<위暐>는 <중산왕中山王>으로,
<양무陽騖>는 사공{騖}司空 겸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패覇>는 <기주冀州>에서 <신도信都>로 옮겨와서
이름을 <결缺>로 바꾸었다가 좋지 않다하여 다시 <수垂>로 바꾸었는데,
<현토玄菟>태수 <을일乙逸>을 보내서
제(帝)를 부마도위<양맥대왕梁貊大王>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때, <{모용}준雋>은 계(薊)로 천도하였고,
<{모용}수垂>는 유대(留臺)에 있으면서 <준雋>을 위해 인심을 수습하였다.
상 또한 <수垂>와 <을일乙逸>을 환대하였다.
모용황에게 환도를 농락당하고 주 태후마저 인질로 잡혀가게 된 고구려의 처지는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354년 7월,
<모용준>이 각 왕들을 봉할 때 고국원제는 그전의 현도군왕에서
다시 봉지를 옮겨 양맥대왕으로 봉해지게 된다.
길고 긴 세월동안 서부지역의 패권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모용무>가 주 태후와 <모용납> 사이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는 것은
주태후가 전연에게 인질이 되어 잡혀간 이상 어쩔 수없는 결과일 것이다.
또한 주 태후는 연에 머물 때 <모용황>을 사랑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모용씨나 고구려 모두 예맥의 후예이니 서로 큰 이질감은 없었을 것이다.
유대(留臺)는 서기352년 용도(龍都)에 세워졌다.
본문의 내용은 모용준이 계(薊)로 천도하면서 모용수를 용도(龍都)에 남겨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는 것이다.
<前燕의 천도과정>
고국원제가 봉한 낙랑왕 <창번倉樊>이 다스리는 지역은
미천대제가 낙랑국 <자술>로부터 뺏은 예맥국으로 창해군지역이고,
모용준이 낙랑왕으로 봉한 곳은 낙랑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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