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25년{AD355}을묘,
9월, <민玟>을 燕에 보내 태후(291-359)를 돌려보내 달라 하였더니
<준雋>이 승낙하였다.
태후와 <민玟>은 燕의 명산대원(名山大院)을 두루 돌아보고 12월에서야 돌아왔다.
<준雋>은 전중장군(殿中将軍) <조감刁龕>을 시켜 호송케 하였다.
상을 征東大将軍 營州刺使 ·樂浪郡公 玄菟大王으로 봉하고
영화(永和)라는 연호를 쓰지 말 것이며 사사로이 왕을 봉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우리나라 역시 연호가 있는데, 어찌 영화(永和)를 쓰겠는가.
종척을 봉왕하는 것은 시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응당 그 큰 뜻은 천천히 따를 것이다.”
라 하였다.
한때 잠시나마 고구려는 모용씨의 전연(前燕)에게 굴복하여
일개 제후국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기355년 고구려는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그 자신감으로
전연의 모용준에게 볼모로 잡혀간 고국원제의 어머니인 주 태후를 돌려 달라 하였다.
그리고 연호의 사용과
천자의 지위에서 왕을 사사로이 봉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도 물리친다.
이때에 고구려는 낙랑과 현토지역을 탈환하는 등
그 국력이 전연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고 또한 동진을 이용하여 전연을 압박하였다.
영화(永和)는 동진 <사마담司馬聃>이 사용한 연호이다.
모용준은 고구려가 동진(東晋)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위협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며
그 대가로 주 태후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고구려 외교전의 승리인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가 있다 하였으니
당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인 영화(永和)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영화(永和)라는 연호를 기록한 안악3호분의 인물들이
당시 고구려 주류와는 관계없는 인물들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하다.
서기355년 고구려의 고국원제는 비록 완전히 회복한 국력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동진(東晉)을 이용한 외교전을 펼쳐 모용준을 위협하였으며
더 이상 제후국으로 살지 않을 것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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