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 32년{AD362}현구(임술),

 

3월, <해발觧發>이 동해공(東海公)이 되어서 <양주陽疇>·<선극仙克>·<방식方式>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서 동쪽을 다스리려는 계책을 세웠다.

 

10월, <창번倉樊>이 신율령 20조를 상주하였다.

 

燕의 제도를 많이 참조하였던 바,

병제兵制는 <우신于莘>이, 재제財制는 <우영于永>이, 민제民制는 <우담于覃>이,

형제刑制는 <담기談奇>가, 신제神制는 <창번倉樊>이 주관하였다.

 

명을 내려 율령소(律令所)를 설치하고

율학제주(律學祭酒)그것들을 토의하게 하였다.

 

 

※ 참고

 

창번(倉樊) : <창번(295-365)>은 당시 오늘날 국무총리 격인

                  고구려의 태보(太輔)였으며 창조리(倉助利)의 아들이다.

 

제주(祭酒) : 제사를 지낼 때 신을 부르기 위해 땅에 붓는 술을 의미하는데

                 주로 나이 들고 존경받는 이가 이를 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관직의 하나로 발전한 것이다.

                 진(晋)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도라 하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존재하였던 관직으로 종3품에 해당했다.

 

 

 

三十五年 靑牛(乙丑) ...

四月 太輔倉樊薨 年七十一 助利子也 其(母)陰友女也

端嚴有度 治南部有績

女爲解發妻 玄亦通之

樊 因以入相 棄其本妻 以克蘭爲妻

密結于玄妻克燕 遂專國政

- 박창화 필사본 <고국원제기>

 

고국원제 35년(AD365) 청우(을축) ...

 

4월, 태보(太輔) <창번倉樊(295-365)>이 나이 71세에 훙하였다.

 

<(창)조리助利>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음우陰友>의 딸이었다.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법도가 있었으며 남부를 다스린 공적이 있었다.

 

딸이 <해발解發>의 처가 되었는데 <해현解玄>이 그녀와 상통하였다.

 

<창번倉樊>이 이로 인해 조정에 들어와 재상이 되었는데

그 본처를 버리고 <극란克蘭>을 처로 삼았다.

 

몰래 <해현解玄>의 처 <극연克燕>과 어울려 국정을 제멋대로 하였다.

 

 

 

倉樊奴婢令 只有産奴俘奴刑奴之別

官奴主官任其生殺 私奴私主任其生殺而已

至是 奴婢亦以功陞等而免良故 賤者大悅

- 박창화 필사본 <고국원제기>

 

<창번倉樊>의 노비령(奴婢令)에는

산노(産奴), 부노(俘奴), 형노(刑奴)의 구별만 있었다.

 

관노(官奴)는 죽고 사는 것이 담당 관리에게 있었고,

사노(私奴(는 주인에게 있을 따름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노비 또한 공을 세워 등급이 올라가면 양민으로 되었으니,

천민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有倉樊律二十條 行于世

曰 龍骨令 曰 仙品令 曰 公兄令 曰 巫品令 曰 香徒令

曰 五豪令 曰 三戶令 曰 工丁令 曰 軍丁令 曰 驛渡令

曰 奴婢令 曰 田宅令 曰 山庄令 曰 海浦令 曰 収歛令

曰 場院令 曰 施院令 曰 歲時令 曰 産籍令 曰 評臺令

 - 박창화 필사본 <고국원제기>

 

창번률 20조가 있어 세간에 행하여졌다.

용골령, 선품령, 공형령, 무품령, 향도령,

오호령, 삼호령, 공정령, 군정령, 역도령,

노비령, 전택령, 산장령, 해포령, 수감령,

장원령, 시원령, 세시령, 산적령, 평대령

이라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수림왕(小獸林王) 3년(373년)에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율령이 반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단에서는 율령반포를 소수림왕의 업적 중 하나로 손꼽는다.

 

그 율령반포로 성문화된 법이 비로소 존재하고 국가체계가 정비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건국한지 4백년이 지난 서기37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율령]을 제정하여 제대로 된 국가통치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국원제기>에서는 창번이 만든 율령을 신(新) 율령이라 하고 있다.

 

이는 그 이전의 율령을 대체하는 신 율령이라는 말이다.

 

고구려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나라를 통치할 율령을 갖고 있었다.

 

 

<창조리>는 봉상제 시절 국상으로 있었었고

<을불>의 정변을 도와 미천대제를 탄생시킨 공신이었던 그 <창조리>이다.

 

그의 아들이 <창번>이라는 것이다.

 

고국원제가 다스리던 시절은 해씨와 주씨가 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해현>은 주 태후의 남자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고국원제시절 고구려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었고 소수림제의 외조부가 되는 사람이다.

 

그가 여색을 심하게 밝힌 탓에

그에게 여인을 바쳐 관직을 높인 인물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창번>도 그 중 하나였다.

 

고구려도 선비족 혹 흉노의 풍습을 상당기간 유지했으므로

오늘날의 잣대로 옛 풍습을 잴 수는 없는 것이다.

 

 

서기367년 노비령의 세칙이 완성되는데,

노비를 총 8등급으로 분류하고 매년 다시 평가하여 승급을 시키는데

최종 1등급이 되면 방노비라 하여 자유롭게 풀어주게 된다.

 

단, 자유롭게 풀어주더라도 노비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며 공물을 바쳐야했으며,

이후 공을 세우면 이들도 양민이 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매년 노비사자(奴婢使者)가 점수를 매겨 1등이 되면 자유로이 풀어주게 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노비의 신분은 유지하되 정착할 곳만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해마다 바칠 공물을 정하고 공이 있을 경우 양민으로 환속시켜준다.

 

노비들의 관리는 노비사자(奴婢使者)와 봉공사자(奉供使者)가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전반적으로 노비사자가 관리하되,

여자노비 중 예쁘고 가무에 능한 자는 봉공사자(奉供使者)가 따로 관리하였다.

 

주인의 사랑을 얻은 자일 경우,

공노비는 다른 사람과 바꾸어주고 사노비일 경우는 양민이 되게 하였다.

 

노비사자(奴婢使者)는 병부경(兵部卿)에 속하고,

봉공사자(奉供使者)는 대부경(大簿卿)에 속했다.

 

이렇게 노비령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정교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을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