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38년{AD368}황룡(무진),
3월, 천원공(天原公)<림琳>의 딸 <천강天罡 (355-446)>을 공주로 봉하여
동궁비로 봉하고 졸본으로 가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 행렬이 성대하여 수리(数里)에 뻗쳤었다.
4월, 상이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러
병부경 <방식方式>과 함께 정남군사(征南軍士)들을 위무하며 이르길;
“그대들이 오랫동안 국경에 주둔하며 창을 베개 삼아 잠을 잔 것은
필시 마음이 공을 세우는데 있었음이오.
공을 세운 것 같은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면 나서서 얘기하시오.
그러면, 자신이 공을 세웠음을 스스로 말하는 이에겐 상을 줄 것이고,
그 장수에겐 책임 묻는 것을 생각해 보겠소."
라 하였더니,
전군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가 성상께서 친히 원정에 참여하시어 상과 벌을 명백하게 가려주시길 바랐다.
상이 <양주陽疇>에게 이르길;
“그대는 갈(羯)인들의 성을 격파할 당시에,
사졸들에게 미녀들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싸움에 이기고 나서는 미녀들을 나주어 주지 않았소.
그리하였으니 사졸들이 마음을 되돌려서
과연 간사하였다라고 여기었던 것이오.”라 하니,
<주疇>가 답하여 아뢰길;
“군사들은 미녀를 얻기 위해서 용감해지기도 합니다만,
미녀와 즐기기에 빠져있게 되면 군대는 어지러워지게 되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찌 미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였겠습니까?
게다가 백제 사람들은 지키기도 잘 할 뿐만 아니라
관방(関防)엔 미녀들이 많지도 않습니다. 참언이 있었을까 두렵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설사 참언이 있다 하여도 내가 어찌 그를 믿었겠소. 지난번엔 공을 세웠는데,
이번엔 어찌하여 멀찌감치 있기만 하고 진격하지는 못하는 것이오?”
라 하니,
<주疇>가 답하여 아뢰길;
“깊은 산 속이어 호랑이가 많고, 기습하기도 불가하여, 지난번과는 형세가 다르옵니다.
게다가 이번엔 적진의 중요한 골문(骨門)이 철옹성이어 서두르면 패하기 쉬우니,
오래 끌어서 위세를 소멸시키며 안전을 꾀하는 계책입니다.
한 개라도 골문이 열리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파죽일 것입니다.”
라 하였다.
상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기고는 무산(撫山)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근초고23년(368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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