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왕 4년(A.D.367) 적토(赤兎=丁卯)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길회吉湏>{근구수}에게 시집보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기림왕 5년(AD.368) 황룡(黃龍=戊辰)

 

3월 부여(夫余)가 보마 2쌍을 바쳤다.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왜(倭) 태자에게 시집보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목라근자木羅斤資>는 오직 일본서기에서만 존재가 언급되는 인물이다.

 

아들의 이름은 <목만치木滿致>이다.


근초고왕이 벌였던 백제의 가야 정벌 당시에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368년에 <목라근자>는 근초고왕, 사백, 개로, 장군 사사노궤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탁순국에서 모였다가

가야 지방을 공격하여 신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비자벌(比自伐) 남가라(南加羅)·, 탁국(啄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의 가야 7국을 평정하였다.

 

가야 7국을 평정하였다지만 그렇다고 가야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가야는 백제군에게 패배 이후 이후로 멸망하지 않고 잘 지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성왕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가 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기선제압을 한 후 외교적으로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목라근자>는 가야지역과 신라를 공격 혹은 회유하여 선린관계를 맺는 한편,
백제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는 훗날에 신라 여자와 혼인하여 아들인 <목만치>를 얻었다고 하는데,
<목만치>는 아버지의 공이 큰 덕분에 임나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전지왕>이 즉위하자 권신이 되어 높은 권세를 부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백제는 신라와 가야 7국을 묶어 강력한 패권을 형성하고

한반도 남부의 진정한 패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현장에서 이를 집적 주도한 인물인 <목라근자>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일본은 <목라근자>를 비롯한 목씨 일족이 백제의 장군으로 수행한 임나경영이

일본 천황의 명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기술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어쨌든 백제의 <목라근자>가 가야 7국을 정벌하자

기림왕은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부여(夫余)태자 <근구수>에게 시집보내고,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근구수>의 아들인 왜 태자 <인덕>에게 시집보내어 女色으로 그들을 달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