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40년{AD370}경오,
정월, <燕>의 사신 <을육乙育>이 와서 군사 내어주길 청하였다.
상은 치양(雉壤)에서 패한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들어주지 않으며 청목궁(靑木宮)에서 <육育>에게 연회를 베풀고는
<천강天罡>에게 술을 따라주게 하였더니, <육育>은 크게 놀라 엎드려 절하며;
“신이 <천강天罡>을 뵌 지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었고,
폐하의 보배가 되어 계심을 뵙니다.”라 아뢰니,
상은 크게 기뻐하며 이르길;
“짐에게 보배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귀한 것 셋을 말한다면,
첫째는 내 처 <해觧>后이고, 둘째로는 내 여동생 <해觧(천원공妃)>妃이고,
셋째로는 내 며느리 <천天>妃(천강)가 되겠소.”라 하더니만,
<해觧>后와 <천원天原>妃를 불러서 <을육乙育>에게 술을 내리게 하였다.
모두가 절세미색이었더니, <육育>이 크게 놀라 절찬하였다.
<육育>은 어미가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었기에,
우리를 상국으로 여기고 귀순할 뜻이 있어,
<燕>이 오래 가지 않을 조짐이 있음을 몰래 알려왔다.
이에 상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서쪽의 방비를 새롭게 하였다.
상이 애후와 여동생 그리고 며느리를 3寶로 칭할 정도였으니,
다른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 정사의 실상은 이로써 가히 볼만한 것이었다.
대저 인간의 복 가운데 부부만한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상의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의) 인간된 도리도
역시 지극히 아름다웠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민을 다스리고 사이{四夷}를 손에 넣은 이었으니,
당연히 훌륭한 장수와 현명한 재상을 보배로 여겼을 것이지,
어찌 잠자리의 쾌락에 안주하였겠는가.
<상량尙椋>을 비고령(秘庫令)으로 삼아서
궁내에 있는 귀한 것들의 관리를 주관하게 하였다.
<왕맹王猛>이 <모용수慕容垂>의 용도(佣刀)를 빼앗고 낙양에 이르렀다.
10월, 상이 후를 데리고 마산(馬山)으로 거둥하여
백성들의 동맹제를 돌아보았다.
<秦>의 <왕맹王猛>이 로원(潞原)에서 <모용평慕容評>을 대파하니,
11월엔 <부견堅苻>이 업(鄴)으로 들어갔고,
<燕>의 <위暐>는 고양(高陽)으로 도망하다가
<秦>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모용평>이 업에서 도망하여 우리에게로 왔더니,
상은 <남楠>·<민玟>·<람국藍國>에게 명하여
군사를 끌고나가 평곽과 안평을 취하게 하였고,
<방식方式>·<성백星白>·<우철于徹>에게는 현토와 남소를 빼앗아서 지키게 하였다.
상이 <평評>의 불충하였던 죄를 조목조목 따지고서,
이르길;
“그대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찾아 왔는가?”라 하였더니,
<평評>이 답하길;
“나는 대왕과 함께 힘을 합쳐서 <연>나라를 일으키고 싶소.”라 하였다.
이에 상은 노하여 질책하며, 이르길;
“하늘은 그대의 악행에 넌더리가 났는데,
그대는 어찌 감히 다시금 큰소릴 하시오!”라 하고는,
그를 참하라 명하였더니,
<평評>은 신하와 첩이 되어서라도 {상을} 섬기겠다고 애걸하였다.
이에 좌보 <인仁>이 아뢰길;
“우리 쪽에서 요동을 취하는 것은 {<평評>을 죽이지 않고} 결박하여
<진秦>으로 보내서 화친을 이룸만 같지 못합니다.”라 하였다.
<평評>은 <견堅>에게 보내졌다.
서기370년, 모용씨의 연(燕)이 연일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패하며
그 운을 다하게 될 즈음,
전연의 <모용평>이 노원(潞原)에서 전진의 <왕맹>에게 대패하고
업을 거쳐 고구려로 도망을 온 사건이 발생했다.
업은 현재 하북성 한단시 임장현이다.
모용씨의 燕이 업을 포기할 때 고구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빼앗겼던 평곽, 안평 그리고 현토와 남소를 되찾게 되는데,
위의 사건은 <자치통감>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노원(潞原)을 노천으로 표기한 것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기록에 따르면 전진(前秦)과 전연(前燕)은 산서성에서 충돌했다.
서기370년 8월,
<왕맹>이 호관(산서성 장치)을 장악하고
<양안楊安>은 진양(산서성 태원)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진양이 <왕맹>과 <양안>에게 탈취 당하자
<모용평>은 노천(潞川)에서 이들과 대치하던 중,
10월에 벌어진 노원전투에서 <모용평>은 <왕맹>에게 대패하고
홀로 업으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노원전투는 당시 <왕맹>이 태원에서 노원으로 진격하여 모용평을 대패시킨 전투이며
그 전투에서 패한 <모용평>은 태원에서 한단으로 도망 왔다가
고구려로 다시 피신한 것이다.
<모용평>은 산서성 태원, 하북성 한단을 거쳐 고구려로 왔다는 말이다.
중국역사서 <자치통감>에 그렇게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요동을 되찾은 이 기사는 삼국사기엔 한 줄의 언급도 없다.
<노원(潞原)전쟁과 모용평 퇴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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