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41년{AD371}신미,

 

정월, <우신于莘>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将軍)으로 삼고

10만군을 이끌게 하여 <燕>을 치는 계책으로 삼았다.

 

<송松>을 대방공으로, <인仁>을 태보로, <감柑>을 좌보로, <민玟>을 우보로,

<무武>를 묘왕(廟王)으로, <용백龍白>을 南蘇태수로, <람국藍國>을 新城태수로,

<중실효仲室孝>를 平郭태수로, <고장창高長創>을 安平태수로,

<주일周日>을 玄菟태수로, <우격牛鬲>을 빈강(濱江)태수로,

<재봉再逢>을 대부경으로, <담활談活>을 북부대사자로 삼았다.

 

3월, <해줄觧茁>을 平山태수로, <방식方式>을 楽浪태수로 삼았다.

 

5월, 상이 순행하여 新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10월, 백제가 우리가 군대를 움직여서 서쪽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 허를 찔러 공격해왔다.

 

이때, 상은 <燕>을 쳐서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한 것이었다.

 

낙랑 또한 대거 쳐들어와서, <양주陽疇>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대구수大仇首>가 북한성(北漢城)을 공격해 오자,

우리 군대는 한수(漢水)에 복병을 깔았다가 이를 크게 깰 무렵에

<대초고大肖古> 또한 3만 정병을 끌고 손수 와서 아들을 도우니,

<대구수大仇首>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었다.

 

우리의 군대는 서쪽을 정벌할 생각으로 요동(遼東)에 집결되어 있었고,

낙랑과 <초고> 및 <구수>를 {나머지의 군대로} 나누어 막기에 병력의 수가 딸렸다.

 

상이 친히 4위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서

진전(陳前)에 서서 장수 병사들을 독려하니 상하들이 잘 따랐다.

 

이리하여 漢城의 西山에서 크게 싸우게 되었는데, 상이 흐르는 화살 두 대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힘을 다하여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금 출진하려 하였더니, 좌우들이 죽기로 말렸다.

 

<해명觧明>은 상의 상처가 심함을 알게 되자,

이를 숨기고, 군사를 불러들여서 진지를 굳게 지키게 하였고,

<선극仙克>과 <{람}풍{藍}豊>을 시켜서 힘껏 싸우게 하였다.

 

<해명觧明>은 응당 성상을 철저히 옹호하여 <고{상}령高[相]岺>으로 물러났으나,

극심한 고통 끝에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해觧>후와 <천강天罡>을 부르심이 입에서 끊이질 않았었다.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말을 몰아 왕천(王川)에 이르러 급히 국부인 <해현觧玄>에게 알렸다.

 

이에 <해현觧玄>과 <해觧>후가 달려 나와서

상을 도성으로 모시고 들어가 발상하였다.

 

동궁 <구부丘夫>가 천룡궁(天龍宮)에서 즉위하였다.

 

<해觧>후를 태후로 하고, 국부{<해현觧玄>}를 조왕(祖王)으로,

<이련伊連>을 태제로 하였다.

 

새로이 선 황상이 원수를 갚고자 친히 정벌하려 하였더니,

조왕과 태후가 서쪽의 일이 중요함을 들어 힘껏 말렸다.

 

대행은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공손·검약하였다.

 

일찍 일어나면서도 안면하였고, 무예를 닦으면서도 농사를 장려하였다.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전쟁에 나서면 반드시 친히 앞자리에 섰으니

흠뻑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었다.

 

안으로는 후와 태자 등을 아낌에 정성이 극진하였더니 화목함이 항상 충만하였다.

 

음주가 잦지 않았고, 손으로는 노름이나 쓸모없는 것에 손대지 않았다.

 

사냥과 유희는 사슴제사나 동굴제사 등의 일이 있을 때만 하였고,

하늘을 우러름에 부지런하였다.

 

정사를 살핌에는 종척·공경들과 협의하였으며,

때때로 당신의 처자를 찾아 위로하기를 여느 사람들 하듯이 하였더니,

종실의 여인들은 상을 하늘같이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무{仙巫}와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고 유학하는 인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책을 읽게 하여 예의를 알고

천한 것과 거짓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였다.

 

황상은 동생들이 많았어도 모두를 현명하게 가르쳤는데,

항상 <유총劉聰>과 <석호石虎>의 행실을 경계하게 하고,

골육상쟁을 악행 중에 가장 큰 것으로 하였으며,

황상의 모든 동생들과 한 자리에 모이는 때이면

여느 집안사람들처럼 나란히 누워 함께 즐겼더니,

아끼는 마음이 얼굴마다 흘러넘쳐 옛 친구들과 같았다.

 

황상의 모든 동생들은 황상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받들었으며,

황상은 동생들이 얻고자 청하는 바 있으면 거의 모두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늘 3대경을 읽어 정사의 거울로 삼았고, <고국원>의 산천을 아끼었다.

 

수릉(壽陵){죽기 전에 만드는 무덤}을 쌓는 것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을 생각하여 그만두게 하였더니,

지금 대행의 시신을 빈궁에 안치하고 <고국원>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태후가 옥관과 금곽{덧관}을 쓰고 싶어 하고, <조왕> 또한 찬동하는지라,

산호와 상아 및 귀한 조가비를 구하고 있었다.

 

대행께서는 논밭 사이에 살고 있는 유학들을 조용히 찾아가

종일토록 도리{道}를 토론하심에 먹기조차 잊었다가 간략하게 하셨더니,

 

오늘에 와서 <송호宋浩>,<손긍孫肯>등의 유생이 글을 올려

 

“옥관을 쓰게 되면 대행의 검덕에 누가 될 것이오니 그만 두시라.”고 아뢰었다.

 

대행께서는 아름다운 덕행으로 집안을 교화하셨다.

 

<해>후와 <천강> 또한 부지런히 음교를 따라서 아녀자의 덕을 지킬 수 있었고,

대행의 치세 내내 하루도 해이됨이 없었다.

 

대행이 돌아가시자 태후께서는 자행{恣行}을 시도하였었으나,

세상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며 늘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지켰고,

대행께서 부지런히 선행하던 나날을 사모하여

다시금 두려운 듯 스스로 지키는 바도 많았다.

 

다음해인 임신년 2월 25일에, <고국원>에 장사하였다.

 

끝내 옥관과 금곽이 사용되었다. 춘추 61세이었다.

 

 

제는 후궁이 칠백 인이었으며 황자는 이백 오십팔 인 이었다

 

전하여 오길, 제의 휘는 <구부丘夫> 또는 <소해小觧>이다.

 

초기에는 <주유대왕朱留大王>으로 불렸는데,

 

모친 <해觧>태후가 꿈에 대무제(大武帝>를 보고나서 낳았기 때문이었다.

 

체격은 장대하였고, 웅장한 계책이 있었으며, 정사의 개요를 능히 꿰뚫었었다.

 

아울러 궁마와 병법에도 능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어질고 화목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고국원제 퇴각로 및 고구려 首都 변천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