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30년(375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紀)를 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근구수왕[휘수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직접 와서 침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 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 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 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수 <막고해>가 간하였다.

 

"일지기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는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윗돌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 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흘해왕 6년(A.D.375) 청시(靑豕=乙亥)

 

11월 근초고(近肖古)가 죽어 근수(謹須, 근구수)가 섰다.

 

<발해發亥>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발해發亥>는 상장돈장에 비록 가계도가 없다 하더라도

<발강發康>이 <세기世己(335-391)>와 동갑으로, <아이阿尒>의 오빠이므로

<발해發亥>,<발강發康>,<백강白康>은 <백발白發>의 아들로

근구수왕의 처인 <아이阿尒(336-390)>와 오누이 간임을 추정할 수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