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왕 8년(A.D.377) 정월

 

신후(神后 光明 324-392)와 부군(副君 奈勿 350-402)이 조회를 받았다.

 

왕(訖解 329-392)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왕이 누차로 (신후의) 총애를 다시 받고자 하여 후의 곁에서 아첨하여 말하기를

 

“신은 스스로 총애를 믿어 바깥사람에게 바람을 피웠으니

성처(聖妻)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금일부터는 두 번 다시 (남편을) 경신(更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后가 웃으며 말하기를

 

“짐은 본래 시새움을 하지 않는다. 너 또한 시새움하지 않음이 옳은 일이다.

신선의 약이 비록 여기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시새움은 백악(百惡)의 으뜸이니 너는 시새움을 하지 말거라.

짐은 새로운 남편을 사랑하고 아들을 낳으니 몹시 즐겁다.

애련(愛憐)하나 너를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

라고 하였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 유례(儒禮)와 기림(基臨)의 꼴이 되겠구나!”

라고 하며 선위하려 하였다.

 

<산공山公> 등이 선위를 막으며, 다시 후의 총애가 돌아오기를 바랐으나

후가 총애할 뜻이 없으므로 부군에게 정치를 오로지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후와 부군이 <호동好童 376-405>을 안고 조회를 받으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호동(好童)을 낳았으니 짐은 소원을 충족하였다.”라고 하였다.

......(중략)

 

5월 2일 비가 또 그치지 아니하였다.

 

집서(執書) <화종華宗> 등이 왕의 거처에 이르러 힘써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거듭하여 나타나니 마땅히 선양(禪讓)을 결정하여

이로써 하늘에 대답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신후(神后)의 의중이 어떠하냐?”

라고 물었다.

 

<화종華宗>이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의 뜻에 따를 뿐이고, 신후 또한 성인일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광원光元 (310-392)>궁주와 정사의 큰일을 의논하고,

도산(挑山)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부군(副君)에게 선위를 행하자 비를 거두고 하늘이 맑아졌다.

 

사람들이 다 기이하다 하게 여겼는데

왕이 이미 양위를 하여 도산에 머물며 내려오지 않았다.

 

새로운 왕(新帝, 내물)이 왕과 <광원光元>을 높이어 선제(仙帝)와 선후(仙后)로 삼고,

받들어 모심이 왕일 때보다 배(倍, 곱절)는 나았다.

 

또 도산에 선궁을 경영하여 행재소(行在所)로 삼았다.

 

왕이 이에 스스로 기쁘게 생각하여

비빈등과 더불어 신산(神山)을 우유(優遊)하고 선문(仙門)을 지원하였다.

 

 

 

(392년) 신후(神后)가 죽음에 이르자 흘해가 애훼(哀毁)하여 병이 되었다.

 

장사를 지내는 기간이 가까워지자 따라 죽었다.

 

<광원光元(310-392)>후 또한 3일후에 죽었다.

 

그 유명(遺命)에 따라 우곡(牛谷)에 장사를 지냈으며,

神后 또한 분골하여 <광원光元>, <명원命元(307-374)>과 함께 묻었다.

 

그런 연유로 자모릉(子母陵)이라 불렀고,

사당은 황릉(黃陵)이라 하여, 그의 자녀 32인을 봉(封)하였다.

 

우도(牛徒)가 제사(奉)지내고 새로운 산주(山主)로 하였다.

 

왕{흘해}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어려서부터 神后에게 종사(從事)하였으며 총애를 받는 자리에 무릇 46년 동안 있었다.

 

后의 뜻을 거스름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后를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선선의 무리를 어루만졌다.

 

공적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선사(仙史)에서 보이는데,

여러 기록에서 울며 부르짖었다고 한다. 참으로 지극히 성인이라 하겠다.

 

 

 

<명원>은 374년, <광명>, <흘해>, <광원>은 392년에 죽었다.

 

<흘해>는 <우로>와 <명원>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명원>과 <광원><광명>은 자매간이다.

 

392년 <광명>이 죽자 <흘해>와<광원>이 죽고

이들을 <명원>의 릉에 함께 합골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흘해의 재위기간(A.D.310-A.D.356)이 47년인데,

남당 유고에는 총위(寵位)에 46년 동안 있었다고 하였다.

 

남당유고에는 흘해의 생몰년이 A.D.329.8.- A.D.392.5.(壽 64)이므로

광명이 흘해를 총애하기 시작한 시기는 346년 전후로 추정된다.

346년은 광명이 후(后)로 봉해진 시기로 기록이 대체로 일치한다.

 

 

 

내물왕 원년(A.D.377) 정축(丁丑)

 

5월 도산(桃山)에서 선위를 받아 명궁(明宮)에서 즉위하였다.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였다.

 

아버지 <말구末仇>각간을 높이어 제(帝)로,

어머니 <휴례休禮>궁주를 태성(太聖)으로 하였다.

 

의붓아버지 <대서지大西知>를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7월 <대서大西>{대서지}와 <장흔>은 미제(味帝){미추}시기부터

<말구末仇>제(帝)를 계승하여 오래도록 병권을 잡고 있어 위세가 나라 안을 떨쳤다.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결국 김씨(金氏)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신후(神后)가 꿈에 해궁신(海宮神)을 보고, 해궁(海宮)을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11월 가야(加耶, 대가야)왕 <수극守克>이 죽어 <모가慕訶>가 섰고,

<선실宣失>을 태후로 삼았다.

 

당시 가야와 왜가 상통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는 왜왕녀를 처로 삼고 선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어 꾸지람하였다.

 

부여(夫餘)가 고구려와 쟁지(爭地)하여 청목(靑木)에서 싸웠다.

 

10월에 근수(謹須, 근구수왕)가 병사 3만으로 평양(平壤)성을 습격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이때에 이르러

구부(丘夫)가 그의 동생 이연(伊連)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한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