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 2년(AD.378) 병인(丙寅)

 

5월 <아이阿尒>{근구수의 처}가 그의 어머니를 만나 뵙기를 청하니,

명으로 <백강白康>에게 부여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10월 <세기世己>가 새로운 법 12장(章, 조목)을 진상하였다.

 

모두가 의론함에 골문이 비등(沸騰)해져서 행하지 못하고 잠자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까워하였다.

 

그 법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골(神骨), 선골(仙骨), 재골(才骨)은

나라의 대경(大經)이고 골품을 정하는 법인데,

완전무결하지 못하여 공정하지 않음이 많습니다.

 

신의 부친 <유례儒禮>는 제위에 있지 아니할 적에 신을 낳은 연유로

신은 아버지라 하지 못하였으며,

신의 할아버지 <미추味鄒>가 제위에 있지 아니할 적에

신의 모친을 낳은 연유로 신은 (외)할아버지라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지극히 원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의 모친이 음란함을 좋아하여 많은 남편을 둔 연유로

신이 <유례>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도 신이 가히 하소연할 수도 없었는데,

신의 용모가 <유례>와 몹시 닮았음은 신후(神后)께서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신을 <유례>의 아들이 되게 하여 주시어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잘못되지 않게 함이 첫 번째입니다.

 

신의 고조부 <손광孫光>은 일찍이 오(吳)나라에 들어갔다가

그 나라가 만이(蠻夷)로 대접하는 것에 분개하면 곧 오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아우를 아들로, 누이를 처로 삼으니, 어찌 만이가 아니라하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손광>이 어렸을 적에 모자의 법도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 손씨(孫氏)가 옥문에 부스럼이 생기자 <손광>에게 도약(塗藥)하도록 명하여

행방(行房)으로 인하여 포자(布子) <손억孫億>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런 말을 듣고도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귀국함에 이르자 남녀 간의 풍속, 포자의 관습을 고치고자 하여

선문(仙門)에 유명(遺命)을 남겼습니다.

 

신의 (세대에) 이르러서도 포자의 아기를 배는(身) 일을 숭상하여,

법을 정하여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모자와 남매가 서로 혼인하는 풍속을 금지하여 청하오니

만이를 면하게 하고자 함이 두 번째입니다.

 

신과 <도류道留>공주, <옹판雍判>공주는 귀천이 비록 다르나,

또한 어머니가 다른 남매로 삼는다면 같은 무리나 병렬하지 못하므로,

아버지가 같다고 보아주십시오.

 

노복(奴僕)인 신이 일사(日師)가 되어 처음으로 공주들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공주께서는 동기(同氣)의 지친(至親)함을 몰랐다가 신이 종용(從容)히 말해주자

급기야는 모두 울면서 신을 오라버니로 부르니, 이것이 사람의 정입니다.

 

청 하건데, 골품의 귀천에 따라 그 친숙함에 차례를 정하고

이로써 인정(人情)을 막음이 없음이 셋입니다.

 

우리나라의 진골(眞骨)의 법은,

진골인 왕과 후가 낳은 자녀(子女)를 진골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옥모玉帽>와 <구도仇道> 계통을 진골의 두 가지 흐름으로 삼는데,

이것은 천신소문지설(天神召文之說)을 쓰는 것이지 옛날 진골의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신후(神后)의 자녀만을

그 아비의 골품을 묻지 아니하고 진골로 정하고,

번론(煩論)이 없고 여러 계통들이 서로 의심하는 폐단이 생겼으니 이것이 넷입니다.

 

지금 부여(夫余)와 고구려(句麗) 그리고 중원(中原)의 여러 나라는

모두 남자를 임금으로 삼은 까닭으로 병사가 강하고 나라는 커졌지만,

우리나라만은 홀로 여자 임금을 중요시하여 그런 연유로 비록 남편인 왕을 세웠으나

사사로운 애인이나 다름없으니 나라의 위엄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의 신후께서 <호동好童>태자를

후계자(國嗣)로 정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니,

일찍이 태자를 세움이 마땅하며,

이로써 남통(男統)을 정하고자 함이 다섯입니다.

 

선골(仙骨)이 신골(神骨)을 보(輔)하고, 재골(才骨)이 선골(仙骨)을 보좌하는 것은,

모두 그 선학(仙學)의 재예(才藝)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골품제가 있지 않다면 어찌 보좌함이 있겠습니까.

 

그런 연유로 상고지세(上古之世)에 배움이 있거나 재주가 있는 자는

비록 노예(奴隸)나 다른 나라의 사람이더라도 가취(嫁娶)하여 그 자손을 채용하며,

그런 연유로 선골과 재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음이 많아서

그런 연유로 인재(人才)가 핍절(乏絶)함이 있습니다.

 

이를 따르면 구차함이 없으며,

그 재주와 학문이 있는 자가 그 직무를 맡지 않으려 하거나

부림을 받지 않으려는 무리는 공허하게 숭상되는 골품이 될 것입니다.

 

곧 백공(百工)이 가히 흥하게 됨이 여섯입니다.

 

품주의 직은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비록 삼년을 지냈더라도

그치게 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인데,

지금에는 비록 재주가 높더라도 오래 둘 수 없고,

비록 그 일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맡기니,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사람을 시간으로써 정하지 아니함이 일곱입니다.

 

리방(理方)의 법은 위로는 공경(公卿)부터

아래로는 민서(民庶)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종해야 하는데,

공경의 집안에서는 각자 법을 설파하여 그 백성에게 베푸니,

이는 내외(內外)와 상하(上下)가 다른 법이 되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법을 하나로 함이 여덟입니다.

 

오랜 옛날 왕공(王公)이 중첩(衆妾)을 내려 신민(臣民)에게 하가(下嫁)하게 함은

색(色)을 베푸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처와 딸의 아름다움만 있으면

곧 색을 베푸는 것이라 하며 음란하고, 급기야 아들과 딸이 생기면 스스로 기르지 않고

(오히려) 그 재물을 빼앗아 같이 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급 관리와 서민이 스스로 편안함을 얻지 못하니,

청하건대, 색공(色供)을 폐지함이 아홉입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혹은 삼년 동안 돌아가지 못하니,

처의 색공(色供)이 있더라도 데리고 갈 수 없는 연유로,

혹은 (처가) 노비와 통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아들과 딸을 낳으니,

나라를 위하여 변방을 지키느라 비상(備嘗) 신고(辛苦)함에도,

집으로 돌아오면 처가 집에 없으니

그런 연유로 모두가 변방으로 나가기를 기피합니다.

 

청하건대, 변방의 장수와 관리로 하여금 모두 처자를 데리고 가게 하여

그 마음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열입니다.

 

마도, 우도, 양도, 구도, 호도, 계도는 여러 해 동안 상지(相持)하고,

혹은 합하거나 혹은 나뉘어져 서로 간에 높낮이가 있습니다.

 

조정에서도 대우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그런 연유로 갈수록 점점 더 다툴 뿐입니다.

 

성인은 당(黨)을 두지 않으니,

청하건대, 하나로 보고 치우치지 말고 여섯 무리를 수합(收合)함이 열하나입니다.

 

나정(蘿井)과 양정(壤井)의 후예는 모두 진골의 말류(末流)가 되었습니다.

 

조상의 사당을 살핌에 어찌 피차(彼此)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그 가난한자는 혹은 천한 노예가 되고 혹은 음탕한 무당 짓을 행하는데,

심히 선대에 보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관(府)을 설치하여 가르치고, 재예(才藝)로써 제사를 모심을 맡기고,

제사를 받드는 직(職)을 내려서,

그 업(業)은 모두 그 자손들이 얻을 수 있게 함이 열둘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고 여기어 후에게 여쭈었으나, 군신들이 헐뜯어 잠자게 되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