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제10년{AD380}경진,

 

신라가 위두(衛頭)를 시켜 진{前秦}으로 들어가 딸을 바쳤다.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제기>

 

 

내물왕 5년(A.D.381) 금사(金蛇=辛巳)

 

7월 <등억登檍>을 이벌찬, <선운仙雲>을 품주로 삼았다.

 

위두(衛頭) 등이 진(奏, 전진)으로부터 돌아와 금인(金人)과 옥마(玉馬) 등

보기(宝器)를 바쳤다.

 

처음에 왕의 명으로 위두(衛頭) 등 7인에게

<부량苻良> 등 7인을 秦으로 보내게 하였다.

 

진왕 부견(苻堅, 前秦의 3대왕, 재위 357~385)이 묻기를

 

“계림(鷄林)을 어찌하여 신라(新羅)라고 하는가?”

라고 물었다.

 

답을 하여

 

“계(鷄)의 상서로움이 있었던 연유로 계림이라고 말합니다.

라(蘿)를 새로이 한다는 연유로 신라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듣기에 너희 나라 임금(國君)의 (성씨가) 변했다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어진사람을 택하여 서로 전하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연유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연유로 계림과 신라는 글자가 비록 다르지만 그 말은 실상 같은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같다는 것이냐?”

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월주(月主)가 사는 성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여왕은 젊은 남편을 좋아하여 수차례 여러 남편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배우자로 삼을 만한 남자가 없는 것이냐?

짐이 장가들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神)을 높이 숭상하고 현명한 자를 받드는 것이지

젊은 남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그 대답함이 정당하다하여,

도타운 예절로 송별해주고 신후(神后)와 왕에게는 보물을 바쳤다.

 

후(后)의 명으로 부견의 상을 조각하였다.

<박창화 필사본 내물대성신제기>

 

 

내물26년(381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를 苻秦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삼국사기> 

 

六月 戊子 玄與田洛 帥眾五萬 進攻盱眙

難超又敗 退屯淮陰

玄遣何謙等 帥舟師乘潮而上 夜焚淮橋

邵保戰死 難超退屯淮北

玄與何謙戴逯田洛共追之 戰於君川 復大破之

難超北走 僅以身免

謝玄還廣陵詔進號冠軍將軍 加領徐州刺史

秦王堅聞之大怒  

<자치통감> 

 

6월, 무자일, <사현>이 <전락>과 함께 5만의 무리를 이끌고 우이(盱眙)를 진공하였다.

 

<구난>과 <팽초>가 다시 패하여 물러나 회음(淮陰)에 진을 쳤다.

 

<사현>이 <하겸> 등을 보내 수군을 이끌고 滿潮를 타고 밤에 회교(淮橋)를 불태웠다.

 

<소보>가 전사하고 <구난>과 <팽초>는 물러나 회북(淮北)에 진을 쳤다.

 

<사현>이 <하겸>, <대록>, <전락>과 함께 이를 추격하여

군천(君川)에서 전투를 벌려 다시 대파하자,

<구난>과 <팽초>는 북으로 겨우 몸만 빠져 달아났다.

 

<사현>이 광릉(廣陵)으로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號를 올렸고 서주자사(徐州刺史)를 더하였다.

 

秦왕 <부견>이 이를 듣고 대노하였다.

 

 

 

 

신라의 위두(衛頭) 등 7인이 379년에 표류해 온 前秦의 <부량苻良> 등 7인과 함께

380년에 공주를 데리고 前秦으로 가서 381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위두(衛頭)는 궁궐 시위대(侍衛隊)의 대장을 말한다.

 

오늘날 청와대 경호처장 쯤 될것이다. 

 

고구려에도 태후궁 위두(太后宮衛頭), 우림위두(羽林衛頭) 등이 있었다.

 

신라에는 위두(衛頭), 시위두(侍衛頭), 위두사인(衛頭舍人),

내위두(內衛頭), 외위두(外衛頭), 내위두상(內衛頭上) 등으로 보다 다양하게 등장한다.

  

서기 367년 10월,

<부견>의 종제인 진공(晉公) <부유苻柳>가 포판에서 반란을 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처자와 함께 참수 당하였다.

 

이 진공(晉公)  <부유苻柳>의 세자가 바로 <부량苻良>이다.

 

그가 전진(前秦)을 탈출하여 동진(東晉)으로 갔다가 신라로 표류해 온 것이다. 

 

서기 379년 6월,

<부량苻良> 일행이 신라로 표류해오기 한 달 전에,

동진(東晉)과 전진(前秦)이 수전(水戰)을 포함하여 크게 전쟁을 치르는데,

전진(前秦)이 참패하였다.

 

서기 379년 7월,

당시 표류하여 신라에 도착한 이들이

전진의 <부견>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부유苻柳>의 세자 <부량苻良>의 일행이었다.

 

서기 380년 5월,

신라는 <부량>과 함께 전진의 부견에게 공주도 함께 보낸다.

공주와 전진의 역적 <부량>이 함께가는 길이니 위두가 호위한 것이다.

 

 

新羅在百濟東 符堅建元十六年 符洛反 遣使徵兵於百濟 新羅等國 亦不從

<前秦錄>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符堅 建元十六年(380에)에 <부락符洛>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신라 등의 군사를 징발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전진왕 <부견>의 조카인 유주자사 <부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해 바다 건너 한반도에 있는 백제와 신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것은 곧 백제와 신라가 유주와 가까운 곳에 영토가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이때까지도 대륙백제와 대륙신라는 하북성 남부와 산동성에 있었다.

 

<유주자사 부락(符洛)의 반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