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백제 왕자의 난

고대사 2014. 10. 10. 12:07

 

 

소수림제14년{AD384}갑신,

 

4월, <근구수近仇首>가 죽자, 그의 아들 <침류枕流>가 섰다.

 

그의 어미 <아이阿爾>가 북쪽의 승려를 맞이하였다.

 

진{東晋}>에 있던 <마라난타滅難陀>가 9월에 {<백제>로} 와서 불법을 불러들였다.

<소수림대제기>

 

 

근구수10년(384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사망하였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가을 7월, 晉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晉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내물왕 8년[갑신384]

 

부여의 <근수謹須>가 죽고 <침류枕流>가 섰다.

 

그 어머니 <아이阿尒>가 집정(執政)했다.

 

<천세千世>를 보내서 그를 조문하였다.

<내물대성신제기>

 

 

神功64년 백제 귀수왕(貴須王)이 죽었다.

왕자였던 토무루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고국양대제2년{AD385}을유,

 

이해 2월에 <침류枕流>가 漢山에 절 짓기를 시작하여 10월에 완성하고,

열 사람을 중이 될 수 있게 허락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아우 <진사辰斯>가 뒤를 이었는데,

강하고 용감하였으며 총기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이 있었다.

 

<침류枕流>의 처는 <진사辰斯>를 매우 좋아하여 새 남편으로 삼고는

정사를 독차지하고, 자신의 아들 <신莘>을 후사로 정하였다.

<고국양대제기>

 

 

내물왕 9년 목계(木鷄:을유385)

 

2월, 부여(扶余)가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창건했다.

 

10월, <침류枕流>가 졸(卒)하고 아우 <진사辰斯>가 섰다.

<내물대성신제기>

 

 

진사왕 원년 (서기 385)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神功 65년 백제의 토무루왕이 죽었다.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辰斯 (제16대,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일본서기>

 

 

 

 

 

역사는 영속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백제의 역사 또는 야마토의 역사가 따로 따로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독립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된 실체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 만 존재할 뿐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역사란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것이다.

 

피차 왕래가 많았다면 섞일 수밖에 없다.

 

지배계층의 왕래가 많았다면 한 쪽만의 역사는 반쪽의 역사에 불과하다.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최근의 용어이며

고대 역사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이 시대에 야마토와 백제가 요즘 용어로

민족이나 국가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는 땅이었다.

 

그 시대 토지는 어느 곳이고 지천으로 있었고 부족한 것은 인력이었다.

 

외부에서 이주 해 오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환영을 받았다.

 

부국강병의 알파와 오메가는 인구의 증가였다.

 

자연출산보다 인위적인 인구증가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전쟁을 통하여 적국의 백성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기사도 비일비재하다.

 

 

근초고왕과 應神천황 父子는 대대적으로 백제인을 야마토로 이주시켰다.

 

 

그 후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한반도의 피난민이 전란을 피하여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 하였다.

 

 

 

應神천황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大鷦鷯(337-419), 菟道稚郞子(350-422), 大山守命(352-395)이다.

 

384년 應神천황 근구수는 백제를 침류왕에게 맡기고 야마토로 들어간다. 

 

 

385년 백제의 침류왕 兎道稚郞子는 14살된 아들 稚野毛二派(372-424)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원으로 들어간다.

 

 

前秦황제 <부견>이 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대륙의 화북전역이 다시 권력의 재편성 단계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385년 10월, 34세의 大山守命(352-395)>이 쿠테타를 일으켜

조카 稚野毛二派를 몰아내고 백제왕이 되니 그가 제 16대 진사왕이다.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남당유고와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일본서기는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백제 관련기사는 삼국사기보다 믿음이 가는  기사이다.

 

 

 

서기 392년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을 물어

應神은 휘하의 장수 4명(모두 武內宿禰의 아들)을 백제에 보내

진사왕 大山守命을 야마토로 압송하고 실각되었던 稚野毛二派를 복위시킨다.

 

그가 아신왕이다. 아신왕도 이제 나이 21살이 되었다.

 

서기 394년 應神천황이 사망하였다.

 

태자 兎道稚郞子는 황위를 大鷦鷯에게 양보하고 즉위하려고 하지 않았다.

 

 

“ 아버지가 어린 저를 태자로 정한 것은 자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만 어린 자식이 귀엽기 때문이었읍니다.

형님은 외모로 보나 자질로 보나 대왕에 걸 맞는 분입니다.

국가나 집안을 이끌어 가기에 저는 적합하지 않읍니다.”

 

大鷦鷯도 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하루라도 황위를 비워두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너를 태자로 정하여 미리 국민에게 알린 것이다.

아버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두사람은 서로 사양하면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大山守命은 아버지 應神천황이 자기를 후계자로 하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있었고,

大鷦鷯가 국정을 대행하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둘이서 서로 양보하며 아무도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면,

태자를 죽여버리고 내가 즉위하겠다고 마음을 정 하였다.

 

大鷦鷯는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하고 태자에게 군사를 대비시키도록 당부하였다.

 

大山守命은 상대가 경계하고 있는 줄 모르고

수백인의 군사를 인솔하고 밤중에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녘 우지(菟道, 京都府宇治市)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우지강 건너 우지(菟道)마을에 菟道稚郞子가 살고 있었다

 

이 때 태자는 남루한 의복차림으로 노를 잡고 뱃사공들과 섞여

大山守命을 배에 태웠다.

 

그리고 배가 강의 가운데 쯤 왔을 때 배를 흔들어 전복시킨다.

 

大山守命과 태자는 강물에 빠져 떠 내려간다.

 

大山守命은 전투복 차림의 중무장, 태자는 간단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大山守命은 매복한 군사들이 강가로 나오는 것을 막았으므로 강에서 익사했다.

 

 

태자의 이 때의 심경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솜씨 좋은 名人이여, 우지 나루에 서 있는 가래나무(梓)여, 박달나무(檀)여,

 

그것을 베어 활을 만들까 했는데, 그것을 취하여 활을 만들까 했는데,

 

뿌리를 보면 兄을 생각하고, 가지(枝)를 보면 누이가 생각나네,

 

가슴이 매이고 슬픔이 솟구치네, 베지 말고 돌아서자, 가래나무여, 박달나무여.”

 

 

서기 394년 應神천황이 사망하여

 

중국에서 전전하고 있던 菟道稚郞子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돌아 왔을 때

 

부친이 정 한 태자가 뒤를 이어야 된다고 大鷦鷯가 주장한다.

 

菟道稚郞子는 이를 거부하고 大鷦鷯를 민다.

 

 

백제 진사왕으로 부왕의 허락없이 즉위했다가 일본으로 압송된 바 있던 大山守命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기 395년 다시 황위를 노리고 태자 菟道稚郞子를 살해하려고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사전에 대비한 太子에 의하여 우지강(宇治川)에서 익사한다.

 

우지강은 수량이 많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강이다.

 

이것이 大山守命의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황위를 사양하고 태자는 우지(菟道)의 집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大鷦鷯도 버티기를 3년,

 

역사는 이 때를 공위(空位)의 3년이라고 기록했다.

 

서기 394년에서 397년까지이다.

 

 

태자는

 

“형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살이있는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결과가 된다.”

고 생각하여 自害를 시도하였다.

 

 

태자가 빈사의 중증이라고 들은 大鷦鷯는

 

난파(難波)에서 우지(菟道)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태자가 의식을 잃은지 3일이 지났다.

 

 

大鷦鷯가 울면서

 

“나의 동생 태자여!”

 

하고 세번 부르자 태자가 눈을 떴다.

 

“너무나 슬픈 일이 벌어졌다…. 왜 자해를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 뭐라고 하겠느냐?”

하였다.

 

태자는

 

“저희들 두 사람 너무 심했다고 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형님이 몇번이고 사양했다고 말 하겠읍니다.”

라고 대답하며

 

“제 누이 팔전(八田)황녀가 걱정됩니다.

형님이 후비로 거두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하고 당부하며 숨이 멎었다.

 

大鷦鷯는 소복으로 갈아 입고 한동안 오열을 멈추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를 우지산에 매장했다.

 

그런 다음 大鷦鷯가 천황으로 즉위하니 그가 61세의 仁德천황이다.

 

 

 

일본서기는 그럴듯하게 소설을 쓰고 있으나

 

菟道稚郞子는 중국대륙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그는 야마토라는 작은 나라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3년상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 가

 

그 곳에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菟道稚郞子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때 일본을 떠난 뒤

 

다시 일본에 돌아 온 역사기록은 없다는 선언이다.

 

 

그는 이때 일본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부친의 3년상을 끝내고

 

서기 397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東晉의 정치상황은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혼란된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말 발굽은 만주벌판을 종횡무진으로 주름잡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호태왕의 시대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