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제14년{AD384}갑신,

 

11월, 수림(獣林)에서 사냥하다가 갑자기 몸이 심하게 아파서,

온탕에 들어갔다가 붕어하였다. 춘추 46세였다.

 

유조(遺詔)를 따라 소수림(小獣林)에 장사하였다.

 

이 시절에 낙(酪) 주(酒) 전(饘) 병(餠) 육(肉) 채(菜) 과(果) 차(茶) 여덟 집안이

서로 다투어 진(晉)에 자식을 보내서 음식을 삼고 지지는 것을 배워 와서

도장에서 가르쳤다.

 

큰 집안의 요리사들은 심히 거만하였고,

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朱씨와 芙씨의 후예들이어서 공경들과 서로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각자는 자신의 생업을 성으로 하였다.

 

중외선인(中畏仙人)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남들과 같아지기 싫어함이 강하였었다.

 

대행의 몸이 갑자기 심하게 아프게 된 잘못을 서로가 미루고 책임지지 않았더니,

조의(皂衣)들이 죄를 받았고 멀리 유배된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전해오는{기록된} 바에 의하면

제의 휘는 <이련伊連 342-391> 또는 <어지지於只支>이고

<수림獣林>의 동복아우이다.

 

<해觧 323-404>태후가 꿈에 용산(龍山)에 올라

<추모芻牟>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賊{모용황}이 {<해觧>태후의} 승은을 입자 생겼다.

 

점괘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주周>태후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는 <추모芻牟>가 현신한 것이라 하였다.

 

<모용황>의 난리 중에, {제는 <해觧>}后를 따라 燕으로 끌려갔었다.

 

<황皝>은 后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帝)는 높이 여겼으나 后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

라 하였으며,

 

(燕의) 사람들이 <모용황>에게 제(帝){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을 때,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어찌하려 하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니, 탈나기 전에 돌려보내야 한다.”

라 하였다.

 

어려서는 신선을 즐겨 찾고 산천을 유람하였으며,

부모님과 형님이신 帝{소수림제}를 효성으로 섬겼다.

 

장성하여서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물었으며, 새로운 율령을 정하였고,

종척의 자녀를 교육함에 부지런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앞을 내어다보고 결정하였더니,

 

<수림>이 그를 아끼어 이르길,

 

“이 사람은 내 분신이다.”라 하였으며,

 

정사를 맡기고는 묻지 않는 적이 많았으니, 나라사람들은 보좌황제라 불렀다.

 

<수림>이 죽음을 앞두고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며,

 

이르길;

 

“중원은 소란하나, 동방만은 점점 고요해지는구나.

조상님들의 음덕이 있음이네.

자네도 잘 지켜서 <담덕談德>에게 물려주게나.”

라 하였다.

 

이에 상은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받았다.

 

 

원년{AD384}갑신,

 

12월, 대행을 수림(獸林)에 장사하였다.

 

<천강天罡>을 황후로 삼았는데, 이는 유명을 따름이었다.

 

<해극觧克>을 태보로, <연흥椽興>을 좌보로, <붕련朋連>을 우보·주병대가로 삼았다.

 

后의 부친 <천원공天原公><림琳>은 높여서 태상황으로 하고,

 

后의 오빠 <연도淵鞱>를 중외대부(中畏大夫) 도통내외채공사(都綂內外採供事)로

하였으며 <주덕周德>은 대주부(大主簿)와 우림(羽林)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대제기>

 

 

 

左輔完右輔轍 白于天罡后曰 今海內多事 太子年幼 奈何

后曰 太弟伊連 賢而孝友 先君許我爲繼夫 卿等輔之

轍賀之曰 誠萬世之福也 

 

乃以儀仗 迎太弟 入天罡后宮

后具翟服 而迎太弟

而謁于太后像曰 母后常言 汝爲兩兒之婦 今果然矣

 

太弟乃抱后 出坐明堂 受璽寶踐宝祚 

群臣山呼萬歲 賜宴宮中

命阿道 修齋行福 新王新后

行祥于魚翠堂 而大赦天下

改元隆福 以完爲太輔 轍左輔 解明右輔 天亥太大使者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왕기> 

 

 

좌보 <완完>과 우보 <철轍>이 <천강天罡> 后에게 아뢰기를

 

“지금 나라 안에는 사건도 많은데, 태자는 나이가 어리니 어찌하시렵니까?”

 

后가 말하기를

 

“태제 <이련伊連>이 현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있어서,

선군(소수림대제)이 내가 계부로 삼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경 등은 그를 보좌하라.”

 

우보 <철轍>이 이를 경하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만세의 복입니다.” 

 

이에 의장을 갖추어 태제를 천강후 궁으로 맞이하니,

后는 적복(翟服)을 갖추고 태제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태후상(太后象){解太后象}에 아뢰기를

 

“모후가 항상 말하기를 너는 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라 하더니

지금 과연 그러합니다.”

 

태제가 이에 后를 안고 명당(明堂)에 나가 앉아 새보를 받고 보조(宝祚)로 나아갔다. 

 

신하들이 산호만세(山呼萬歲)하니 궁중에 연회를 베풀었다.

 

<아도>에게 명하여 수재(修齋)를 행하라하고 새로운 왕과 후의 행복을 빌라하였다.

 

어취당(魚翠堂)에서 행상(行祥)을 하고 천하 대사면을 하였다.

 

융복(隆福)으로 개원(改元)하고 <완完>을 태보로, <철轍>을 좌보로,

<해명解明>을 우보로, <천해天亥>를 태대사자로 삼았다. 

 

 

※  참고

 

명당(明堂) : 천자(天子)가 정사를 돌보는 곳

보조(寶祚) : 임금의 자리

수재(修齋) : 명복을 비는 불공

행상(行祥) : 임금이 죽으면 그 후계자가 선왕의 여인과 합궁하는 의례

 

 

 

十一月 王崩春秋四十六

王痛哀太后 常抱尸而卧 不食而泣

至是 移柩於大神院 與天陽后洗尸 于天水坮

王抱尸落于深谷而崩

 

流至蛇川之濱 龍顔皆如生時

漁人往往 見王及太后 乘白馬而逍遙其中

仙巫咸以爲羽化 名其谷曰 雙仙谷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왕기>

                       

 

(14년, 서기 384년)

 

11월, 왕이 춘추 46세로 붕하셨다.

 

왕은 태후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항상 시신을 안고 누워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후의)널을 대신원(大神院)에 옮길 때

천수대(天水坮)에서 <천양天陽> 后와 함께 시신을 씻겼다.

 

왕이 시신을 껴안고 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붕하셨다.

 

흘러 흘러 사천(蛇川) 물가에 이르렀는데 용안은 모두 살아계실 때와 같았다.

 

어부가 때때로 왕과 태후가 백마를 타고 물속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선무(仙巫)가 모두 신선이 되어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여

 

그 계곡을 이름 하여 쌍선곡(雙仙谷)이라 하였다.

 

 

 

十四年 冬十一月 王薨

葬於 小獸林 號爲 小獸林王

<삼국사기>

  

14년 겨울 11월, 왕이 훙하였다.

소수림에 장례를 지냈다. 호는 소수림왕이다.

 

 

 

 

행상(行祥)은 모계사회의 유풍으로 신라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중천대제는 이런 유의 여러 가지 폐습을 고치려 노력하였는데,

그 와중에 명림전후가 중천에게 행상(行祥)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불속에 뛰어들어 순사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여,

결국 중천대제도 이러한 폐습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천자국이다.

 

고국양대제도 융복(隆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연호를 사용하고,

산호만세(山呼萬歲)를 하는 것은 천자국이어야 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삼국사기는 소수림제의 죽음을 붕(崩)이라 하지 않고 훙(薨)이라 기록하였다.

 

 

그리고 왕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그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그를 낳은 어머니가 누구인지 아무른 기록이 없다.

 

 

이러한 삼국사기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 고대사의 전부이다.

 

 

역사 속의 임금들은 많은 경우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고구려 17대 임금인 소수림대제,

그도 역시 너무나도 젊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다.

 

 

그런데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대제기와 소수림왕기의 두 기록에 차이가 있다.

 

 

소수림대제기는 소수림제가 몸이 아파 돌아가셨다는데 요리사 탓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죽음이 음식으로 인한 독살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수림왕기에는 불과 두 달 전인 9월에

소수림제의 어머니 해 태후(解太后)가 돌아가셨는데,

이를 너무도 슬퍼한 소수림제가 그녀를 따라 순사(殉死)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광개토호태왕은 소수림제가 시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어머니인 <천강>에게 따지는 기록도 있으니,

음식을 통한 소수림제 독살사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천강(天罡)이라는 여인이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