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연과 고구려의 전쟁

 

 

1. 요동 탈환

 

 

고국양대제2년{AD385}을유,

 

6월, <부견苻堅>이 나이 48살에 <요장姚萇>에게 피살되었다 들었다.

 

황상의 아우 <붕련朋連>에게 명하여,

<용궐龍厥>·<해언觧彦> 등을 데리고 4만병을 끌고나가

토성(菟城)장무(章武) 등을 쳐서 빼앗게 하였더니,

그곳의 장수 <학경郝景> 등 10 인의 목을 베었으며,

용성(龍城)을 노략하여 남녀 1만여 인을 잡아서 돌아왔다.

 

노획한 진보와 값진 노리개들도 무수하였다.

 

<부견苻堅>이 업(鄴)을 깨뜨린 이후에 요동(遼東)의 땅은

秦과 서로가 지키기만 하고 군병을 써 본 적이 오래되어,

거란(契丹)이 땅을 크게 깔고 앉게 만들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 조정이 이 두 성을 되찾기로 하여 군대를 보내서 되찾은 것이었다.

<박창화 필사본 고국양대제기>

 

 

 

六月慕容垂遣其將佐鎭龍城來侵遼東 

王命新銊等 迎擊大破之 

<박창화 필사본 국양천왕기> 

 

 

6월, 모용수가 장수 <좌佐>를 보내 용성을 진압하고 요동을 침입해왔다.

왕이 <신술新銊> 등에 명하여 맞아 싸우게 하니 크게 이겼다.

 

 

 

庚戌 燕王垂至常山圍翟成於行唐

命帶方王佐鎮龍城

六月 高句麗寇遼東 佐遣司馬郝景將兵救之 為高句麗所敗 

高句麗遂陷遼東 玄菟

<자치통감> 

 

경술, 燕王 <수垂>가 상산(常山)에 도착하여

행당(行唐)에서 책성(翟成)을 포위하였고,

대방왕 <좌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진압하였다.

 

6월, 고구려가 요동을 노략질하자 <좌佐>가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이를 구하라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였다.

 

고구려가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함락시켰다.

 

 

 

후연(後燕)은 <모용수>가 서기384년에 세워 서기407년까지

용성(龍城)중산(中山)중심으로 아주 짧은 기간 존속했던 나라이다.

 

그 짧은 기간에 임금은 4명이나 바뀐다.

 

이들이 자몽천에 거주할 때 고구려가 제후국으로 삼아

구려의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모용외가 단부를 공격하여 극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모용황이라는 걸세출의 영웅을 맞아 고구려를 제압하고, 

하북의 패자로 등장한 것이 전연(前燕)이며 이를 이어받은 것이 후연(後燕)이다.

  

 

전투가 벌어진 원인은,

前秦이 힘을 잃자 고구려는 과거 그들의 땅이었던 요동을 차지하려고 나섰고,

後燕은 前秦에게 패망한 그들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옛 터전인 요동을 확보하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간의 1차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2. 모용수의 반격

 

 

고국양대제2년{AD385}을유

 

8월에 <慕容垂 326-396>는 용성(龍城)이 패한 것을 듣고는

열옹(蠮翁)에 있는 자신의 동생 <모용농慕容農>을 불러들이니,

범성(凢城)을 거쳐서 용성(龍城)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의 행적이 지극히 신속하였기에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였었다.

 

3만 정병을 몰래 훈련시키면서,

겉보기엔 분묘를 손보는 것처럼 하여 싸울 뜻이 없는 체 하다가는

11월에 돌연 장무(章武)를 공격해오니 {우리의} 장수 <뉴비紐庳>가 패하여 죽었다.

 

다시금 군대를 돌려 토성(菟城)으로 쳐들어오기에 <용궐龍厥>이 맞싸워서 깨뜨렸다.

 

이에 <모용농慕容農>은, <방연龐淵>을 장무령(章武令)으로 삼아놓고,

자신은 요동태수를 칭하고는, 유주와 기주의 투항해 온 백성들을 불러 꼬드기니,

그들 중 많은 이가 황상의 백성이 되기를 마다하고 그에게로 귀의하였다.

<박창화 필사본 고국양대제기>

 

 

 

頃之 農將步騎三萬至令支 巖眾震駭 稍稍逾城歸農

巖計窮出降 農斬之

進擊高句麗 復遼東,玄菟二郡

還至龍城上上疏請繕修陵廟

燕王垂以農為使持節 都督幽,平二州 北狄諸軍事 幽州牧 鎮龍城

徙平州刺史帶方王佐鎮農於是創立法制 事從寬簡 清刑獄 省賦役 勸課農桑 居民富贍 四方流民前後至者數萬口

先是幽,冀流民多入高句麗 農以驃騎司馬范陽龐淵為遼東太守 招撫之 

<자치통감>

 

 

이윽고 <모용농>이 보기3만을 이끌고 영지(令支)에 도달하니,

<여암餘巖>의 무리가 벌벌 떨며 차츰차츰 성을 넘어 <농農>에게 돌아왔으며,

<여암餘巖>이 별수 없이 나와서 항복하자 <농農>이 그를 참하였다. 

 

고구려로 진격하여 요동, 현토 2군을 다시 회복하였다.

 

용성(龍城)으로 돌아와 상소를 올려 능묘를 수선하라 청하였다.

 

燕王 <수垂>가 <농農>을 ‘사지절 도독 유, 평 2주 북적제군사 유주목’으로 삼아

용성을 지키라 하였다.

 

평주자사 대방왕 <좌佐>를 옮겨 평곽(平郭)을 지키게 하였다. 

 

<농農>이 이때에 이르러 법제를 만들었는데,

업무는 관대하고 간소하게 처리하였으며, 형벌과 뇌옥은 분명하게 하였으며,

부역을 덜어주었고 농상을 권장하고 거주민들을 풍족하게 하니,

사방의 유민이 앞뒤를 다투어 오는 자가 수만 명이었다.

 

일찍이 유(幽), 기(冀)의 유민들 다수가 고구려로 들어가자

<농農>이 표기사마 <범양范陽>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그들을 불러 위로하게 하였다.

  

 

 

 

後燕의 <모용수>는 죽을 힘을 다해 용성(龍城)을 차지하고 지킨다.

 

그리고 장무(章武)를 확보하였으나 현토의 탈환은 실패로 끝이 났다.

  

 

당시 燕軍은 신속하면서도 조용히 용성(龍城)에 도달하였는데,

<자치통감>에서는 <모용농>이 말하기를

반란을 일으킨 여암(餘巖)이 산을 넘어 양민을 괴롭힐까봐서라고 하지만,

실상 이들은 <여암>이 고구려와 합세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어쨌든 모용농은 <여암>을 물리치고 영지(令支)를 확보한 후

고구려를 공격하여 장무(章武)를 탈환한다. 

 

유주와 기주의 유민들이 고구려에 들어갔다는 것은

모용농 보다는 고구려가 더욱 살기 편하고 안전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3. 장무 탈환

 

 

十年 庚子二月 慕容盛引兵三万 来侵新城 先鋒熙迂入南蘇

上引精騎八千 擊熙於鵠林大破之

朋連龍臣大戰于新城追擊于河上 斬獲甚多

上仍擊章武以西拓地七百余里 徒戶五千余而還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10년(AD400) 경자 2월,

 

<모용성>이 병사 3만을 이끌고 와 신성(新城)을 침범하였고,

선봉 <모용희>는 남소(南蘇)로 돌아들어왔다.

 

상은 정예기병 8천으로 곡림(鵠林)에서 <모용희>를 쳐서 크게 깨뜨렸다.

 

<붕련朋連>과 <용신龍臣>은 신성(新城)에서 큰 싸움을 벌였고,

하상(河上)까지 쫓아서 상당히 많은 수를 참획하였다.

 

상은 오히려 장무(章武) 서쪽을 공격하여 7백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왔다.

 

 

高句麗王安事燕禮慢

二月 丙申 燕王盛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國熙為前鋒 拔新城 南蘇二城 開境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熙勇冠諸將 盛曰叔父雄果 有世祖之風 但弘略不如耳

<자치통감>

 

 

고구려왕 <안安>이 燕을 섬기기를 태만히 하였다.

 

2월 병신, 연왕 <모용성>이 직접 병3만으로 고구려를 습격하였다.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 두 성을 뿌리 뽑아

국경을 7백여 리 늘였으며,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왔다.

 

 

 

永樂十年 庚子正月命解橡 率步騎五萬 往救新羅

王以南方多事 命宙及往燕見其主盛 欲定國界

盛知我無備 自將兵三萬 使熙爲先鋒 襲取新城南蘇 拓地七百余里 徏戶五千而去 

 

_____  중략  ______

 

七月以馬回爲新城太守 

<국강호태왕기>

 

 

영락10년 경자(400) 정월,

 

<해상解橡>에게 명하여 보기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구하라 하였다.

 

왕이 남쪽에 많은 일이 있었기에 <주급宙及>에게 명하여 燕으로 가서

그 임금 <모용성>을 만나게 하고 국경을 정하고자 하였다.

 

<모용성>은 우리의 방비가 허술함을 알았기에 직접 병 3만을 이끌고

<모용희>를 선봉으로 하여 신성과 남소를 공격하여

7백여 리의 땅을 넓히고 5천 호를 얻어 돌아갔다.

 

(중략) 

 

7월, 마회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고구려가 다시 장무(章武) 일대를 장악하였다는 내용이다.

 

장무(章武)를 빼앗긴 지 4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같은 사건을 <자치통감>에서는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다.

 

 

동일 사건에 대하여 이처럼 완전히 반대로 기록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묘하게도 두 기록이 다 서로 땅을 7백여 리 늘였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모용수에게 장무(章武) 를 빼앗긴 후 잠시 이 지역을 보류한다.

 

 

고구려는 그 북쪽의 거란을 장악하고, 또 남으로 백제를 정리하였다.

  

 

그러던 중 <모용성>과 <모용희>가 무모하게 고구려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강호태왕기>에는 분명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여 왜를 치다가

후연에게 공격당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성에서는 잘 막아내고 오히려 장무 서쪽까지 진출한 것이 기록되어있으나,

남소는 막았다는 기록이 없고 단지 곡림에서 모용회를 이겼다고만 되어있다.

  

즉, 신성으로 공격한 <모용성>은 고구려에게 패하여

오히려 장무의 서쪽까지 7백여 리를 빼앗긴 것이고,

남소로 공격한 <모용희>는 남소를 함락시키고

고구려 땅 7백여 리를 빼앗았다는 이야기이다.

  

<자치통감>에서도 <모용성>이 <모용희>를 극구 칭찬하여 아부하는 것으로 보아,

<모용희>만이 승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또 같은 해 7월에 고구려가 단지 신성태수만을 다시 봉한 것으로 보아

이 같은 사실이 확인이 된다.

 

즉,고구려가 왜를 비롯한 남쪽을 정리하는 틈을 타

신성과 남소를 공격한 후연이 남소는 얻었으나

장무는 빼앗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록인 것이다. 

 

 

 

 

4. 요동 평정

 

 

四月遣朋連龍臣胥狗伐契丹 虜其主烏貴 拔句麗大棘等城

仍擊慕容敀于宿車 斬其先鋒段開

敀棄城西走 熙走保遼隧 遼東悉平 

上奉解太后于鸞宮大宴三日命暐女雋女等行酒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 12년(AD402)

 

4월, <붕련朋連>, <용신龍臣>,<서구胥狗> 등을 보내서 거란을 정벌하여

그 주인 <오귀烏貴>를 사로잡고 구려(句麗), 대극(大棘) 등의 성들을 빼앗았다.

 

거듭 <모용귀慕容敀>숙거(宿車)에서 공격하여 그 선봉 <단개段開>를 참하였다.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가고,

<모용희>는 달아나 요수(遼隧)를 지키니,

 

요동(遼東)이 모두 평정되었다.

 

상이 해 태후를 받들어 난궁(鸞宮)에서 3일간 큰 잔치를 열고,

<모용위暐>와 <모용준雋>의 딸들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하였다. 

 

 

※ 참고

 

숙거(宿車)는 숙군(宿軍)과 동일지명이다.

숙군은 용성의 동북쪽에 있었다.

 

 

五月............

高句麗攻宿軍燕平州刺史慕容歸棄城走 

<자치통감> 

 

고구려가 숙군(宿軍)을 공격하였다. 燕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六月 又如故國原告滅燕于國原陵

行周紀祭于國襄陵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6월에는 또 고국원(故國原)으로 가서 국원릉에 燕을 멸망시켰노라고 고하고,

국양릉에서 주기제(周紀祭)를 행하였다.

 

 

 

당시 모용귀는 후연의 평주자사였고,

고구려가 숙군을 공격한 것은 5월이었다.

 

고구려는 두해전인 서기 400년에 후연을 공격하여 장무의 서쪽까지 이미 장악하였다. 

 

전연이 전진에게 패한 후 전진과 고구려의 국경지대인 이 요동지역에

거란이 서서히 일어났으나, 이때 고구려에게 정리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다시 숙군을 공략하여 마침내 요동을 모두 평정하고,

전연의 황제들이었던 <모용위>와 <모용준>의 딸들을 잡아와 술을 따르게 한 것이다. 

  

영락대제는 이해 6월,고국원제의 능인 [국원릉]을 찾아가 연을 멸하였다고 고한다.

 

 

 

5. 모용희의 반란

 

 

 

十四年甲辰.....................

五月 龍城反 命朋連討之熙死守不拔  

時 倭寇帶方命朋連移攻倭船 斬獲無算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 14년(AD404) 갑진.................

5월, 용성이 반란하여 <붕련>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용희>가 목숨을 걸고 지켜 빼앗지 못하였다.  

 

이때 왜가 대방을 약탈하기에 <붕련>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왜선을 공격하게 하니,

죽이거나 생포한 자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十一月命解放等率師五萬伐燕 

<박창화 필사본 국강호태왕기> 

 

11월, <해방解放> 등에게 명하여 5만을 이끌고 연을 벌하라 하였다.

 

 

 

서기402년, 고구려는 요동을 평정하여 연나라를 패망시켰노라고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도망갔던 <모용희>는 다시 흩어진 세력을 모았고,

서기404년 용성을 탈환하며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용성을 장악하고 고구려와 대치하는 것이다.

  

<모용희>는 터전을 확보하기위해 죽기 살기로 덤볐다.

 

그리고 때마침 고구려의 남쪽으로 왜가 침공하였기에,

용성 진압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였던 것이 <모용희>의 목숨을 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용희에게는 용성이 전부였지만,

고구려에게는 용성은 일개 변방의 한 성일 뿐이고,

남쪽의 국경수비도 또한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고구려는 남방이 안정되자 다시 후연을 공격한다.

  

위의 전투가 <자치통감>에서는 12월에 “高句麗侵燕”이라고만 기록되어있으나,

<진서>에서는“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라고 기록되어있다. 

 

즉 “때마침 고구려가 연군을 노략질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라고 되어있으니, 이때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탈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연군은 북경인근이 아니라 용성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모용희의 근거지인 용성을 차츰차츰 목 죄어오자,

모용희는 한 달 후 무모하게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혼쭐이 나고,

스스로 패망의 길을 앞당기게 되는 것이다.

 

 

 

6. 바람이 지켜낸 요동성

 

 

永樂十五年 乙巳正月燕主熙與其妻符女 侵遼東城

太守天益與城主葛友力守甚危

益乃親自上城冒矢石而督之曰 吾等受國大恩 雖死不可棄城

拔釼大呼曰 舅公如是 誰敢後之 乃當前斬擧城者

 

於是士氣大振 熙軍不能進 

熙將士請火攻 熙曰朕與皇后 將同輦而入城 按驗府庫 勿爲火攻

以是 少緩城中 備益嚴

解放馬回等引軍救之乃大破熙軍 獲其兵仗及士馬 

<박창화필사본 국강호태왕기> 

 

 

영락15년(AD405) 을사

 

정월, 燕主 <모용희>가 그 처 부녀와 같이 요동성을 침입했다.

 

 

태수 <천익天益>이 城主 <갈우葛友>와 함께 힘써 막았으나 매우 위험하였다.

 

<천익>이 이에 직접 성위에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전쟁을 독려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죽어도 성을 버릴 수는 없다.”

 

 

<갈우>가 칼을 빼어들고 크게 외쳐 말하기를

 

“구공(장인)께서 이러하시니 누가 감히 물러나겠습니까?

마땅히 성을 버리는 자는 먼저 참할 것입니다.”

 

이에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모용희>의 군사가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모용희>의 장졸들이 화공을 청하였으나 <모용희>가 말하기를

 

“짐과 황후가 가마를 같이 타고 성으로 들어가서

부고(곳집)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니 화공은 하지마라.”

 

이리하여 성 안에서는 약간 여유가 생겨 준비를 더욱 엄하게 하였다.

 

<해방>과 <마회> 등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구원하여

<모용희>의 군대를 대파하였고 그 무기와 군사와 말을 노획하였다.

 

 

燕王熙伐高句麗

戊申 攻遼東

城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剷平其城 朕與皇後乘輦而入

由是城中得嚴備卒不克而還 

<자치통감> 

 

 

연왕 <모용희>가 고구려를 쳤다.

 

무신(戊申)(408년), 요동을 공격하였다.

 

성이 막 함락되려할 때 <모용희>가 장사들에게 명하여 먼저 오르지 말라하고는,

그 성을 깎아 평평하게 고른 다음 짐과 황후가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안에서는 단단히 대비하였고 군사들은 정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十五年 乙巳正月 熙與其妻 来侵章武城 大敗而去

熙素以無謀悍惑於妖女 殺其侄盛而自立 徒行暴力 故其衆不服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 15년(AD405) 을사 정월,

 

<모용희>가 자신의 처와 함께 장무성으로 쳐들어왔다가 대패하여 물러갔다.  

 

<모용희>는 평소 무모하고 난폭하였다.

 

요녀에게 현혹되어 그 조카 <모용성>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공연히 폭력을 행하니 그 무리가 불복하였다.

 

 

 

 

 

<모용희>에게는 사랑하는 두 여인이 있었는데,

 

중산윤(中山尹) <부모苻謨>의 딸인 <부융아苻娀娥>와 <부훈영苻訓英>이 그들이며,

 

동생인 <부훈영>이 더 예뻤던 탓인지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용희>는 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이 통치할 제대로 된 땅도 확보하지 못한 모용희는,

 

이들을 위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치하여 민심을 거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요동성을 함락시킬 기회가 있었는데,

 

말 같지 않은 이유로 머뭇거리다가 고구려 군대에게 역습을 당하였다는 기록이다.

 

  

화공을 하자는 건의를 물리쳤든, 성을 깎기를 기다렸든 간에,

 

<모용희>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땅은 계절풍이 부는 땅이다.

 

즉,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남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화공을 쓰기가 어려웠다.

 

 

창고가 불타 없어질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화공을 해봐야 불과 연기가 자신들에게 날아들기에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먼 훗날 당 태종 이세민은 바로 이 요동성을 화공으로 점령하는데,

 

그때는 5월로 남풍이 불 때이다. 

 

 

고구려가 지키던 요동성은 때를 맞추어 화공을 쓰지 않으면 공략할 수 없었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음이 역사에서 증명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모용성이 그를 가리켜 모용수처럼 용감은 하지만

 

지략은 같지 않다는 말이 그를 정확히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락대제기>에서는 여러 소리 없이 모용희가 장무성,

 

즉 요동성을 쳐들어왔다가 대패하고 물러갔다고만 되어있다.

  

 

결국 이 서기 405년 정월의 전투는 한 달 전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약탈하자

 

이에 대한 보복을 한 것인데,

 

공격 시기를 잘 못 택한 모용희가 공연히 부씨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가,

 

고구려 지원군이 도착하자 개망신을 당하고 도망간 전쟁인 것이다. 

 

 

 

 

7. 목저성 전투

 

 

十六年丙午十二月 慕容熙契丹至陘北 

潛軍迂回入寇木底城大敗而去 

<박창화 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16년(AD 406) 병오

 

12월,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陘北)에 이르렀는데,

 

군사를 몰래 우회하여 목저성(木底城)으로 쳐들어왔으나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十二月 慕容熙襲契丹至陘北 仍棄輜重而輕兵襲我木底城

其軍行三千余里 士馬疲凍死者相枕

馬回迎擊大破之得其兵仗無數 

<박창화 필사본 국강호태왕기> 

 

 

12월,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

 

거듭하여 짐을 버린 경병으로 우리의 목저성을 습격하였다.

 

그 군사들의 움직임이 3천여 리였으니 병사와 말이 지쳤고,

얼어 죽는 자가 서로 포개질 정도로 즐비하였다.

 

<마회>가 맞받아쳐 대파시키니 얻은 병장기가 무수히 많았다.

 

 

 

모용희는 서기404년,고구려가 남쪽 방어에 힘쓰는 틈을 타서

가까스로 용성을 다시 확보하고 재기를 꿈꾸지만,

요동에서 그들이 안정적인 터전을 확보하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항상 실패뿐이었다.

고구려가 너무나 힘든 상대임을 잘 아는 <모용희>는

서북쪽으로 눈을 돌려 형북에 있는 거란을 건드려보지만,

거란의 주력부대가 버티고 있는 형북을 공격하지 못하고,

또다시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해온다.

 

형북은 탁발의로가 서진(西晉)의 병주자사 <유곤>을 협박하여 얻어낸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태원의 북쪽에 있는 땅이다. 

 

모용회가 터전을 잡기위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거란을 건드려보고,

다시 고구려 목저성을 건드려보지만,

이러 저리 3천여 리를 헤맨 병사와 말들은 더 이상 걷기도 힘들었다.

 

용맹은 하였으나 지략은 없었던 모용희는 그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기야 지략을 갖추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8. 모용희의 최후

  

 

十七年 丁未二月增修宮室

命朋連解猩 引兵五萬伐慕容熙

戰于章武之西 斬殺蕩盡 獲鎧甲萬領 軍資器械 不可勝数

拔沙溝等六城

馮跋高雲等殺熙 而來謝約貢   

<박창화필사본 영락대제기>

 

 

영락 17년(AD407) 정미 2월, 궁실을 증수하였다.

 

<붕련>과 <해성>에게 명하여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모용희>를 치라하였다.

 

장무(章武)의 서쪽에서 싸워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갑옷 만 벌과 셀 수없이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았다.

 

사구(沙溝)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풍발>과 <고운>은 <희>를 죽이고 찾아와서 사죄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中衛將軍馮跋左衛將軍張興 先皆坐事亡奔 以熙政之虐也

與跋從兄萬泥等二十二人結盟 推慕容雲為主 發尚方徒五千餘人閉門距守

中黃門趙洛生奔告之 熙曰此鼠盜耳 朕還當誅之

乃收發貫甲 馳還赴難

 

夜至龍城 攻北門不克 遂敗 走入龍騰宛 微服隱于林中 為人所執 雲得而弑之 及其諸子同殯城北

時年二十三 在位六年 雲葬之於苻氏墓 偽諡昭文皇帝 

<晉書> 

 

 

중위장군 <풍발>, 좌위장군 <장흥>은 앞서 모두 일에 연루되어 도망갔었는데,

<모용희>의 학정 때문이었다.

 

<풍발>의 종형 <만니萬泥> 등과 함께 22인이 결맹하여

<모용운>을 주군으로 추대하였으며,

상방(尚方)의 무리 5천여 명을 보내 문을 닫고 막아 지켰다.

 

중황문(환관) <조락趙洛>이 살아 도망쳐 이를 고하니,

 

<모용희>가 말하기를

 

“이 좀도둑놈들, 짐이 돌아가 죽이리라.”

 

하고는 일어나 갑옷을 입고 난을 정리하고자 달려 돌아왔다.

 

밤에 용성에 도착하여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고,

용등원(龍騰宛)으로 도망쳐 들어가 미복으로 수풀사이에 숨었으나,

사람들에게 잡혔는데 <모용운>이 그를 데려와 죽이고, 

또 그의 여러 자식들을 성의 북쪽에 함께 묻어버렸다.

 

이때 나이가 23살로 재위 6년째였다.

 

<모용운>은 그를 <부>씨의 묘에 묻어주었으며 시호를 소문황제라 하였다.

 

 

 

※ 참고

 

상방(尚方) : 임금이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기관

  

 

 

 

 

서기 407년의 날이 밝자 고구려는 후연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공격을 준비한다. 

 

2월에 고구려는 후연을 공격하여 6성을 공략한다.

 

이는 광개토호태왕비에도 기록된 전투이며 고구려와 후연의 마지막 전투이기도하다.

 

 

그리고 이해 4월에는 <모용희>가 그렇게 아끼던 처인 <부>씨가 죽게 되자

<모용희>는 거의 정신 줄을 놓았고, 마침내 7월에 <모용운>에게 피살되었다. 

 

 

후연의 신하들은 전쟁 마다 패하고 학정만 일삼는 모용희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마침 <모용희>의 애처 <부>씨가 죽어 상여와 함께 <모용희>가 성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풍발>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 <모용희>를 나중에 <고운>이라고 불리는 <모용운>이 죽여 버리니,

마침내 후연이라는 나라가 4대 22년의 통치를 마치고 그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모용씨는 선비족으로 자몽이라는 이름으로 북부여의 한 제후국으로,

그리고 또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살아왔던 종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용외와 모용황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등장하여,

일약 제후국의 역할에서 중원을 호령하는 천자국으로 성장하였던 나라였다.

  

선비족의 한 기둥으로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버텨온 민족이다.

 

이들이 고구려로 이동하여 집안(集安)일대에 무덤 군을 남기고,

또 한반도로 건너와 많은 흔적을 남겼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는

모용희의 애처 부씨의 무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營陵周輪數里 下涸三泉 內圖畫尚書八座之像

  

무덤을 만들었는데 둘레가 수리인데 세 개의 샘을 말려 없앴다.

 

안에는 상서팔좌지상(尚書八座之像)을 그려 넣었다.

 

 

덕흥리 벽화분이나 안악3호분의 벽화들이 생각나게 하는 기록이다. 

 

 

이들이 외부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인물들일 가능성이 짙다. 

 

 

요동성이 그려진 벽화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군의 요동성총(遼東城塚)도

 

역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식의 무덤과는 거리가 있다.

 

 

이들이 전연이나 후연의 패망과 더불어 한반도로 건너온 유민들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낙랑을 포함한 요동의 향기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남겨놓은 발자취에서 그 낙랑의 체취가 남아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양은 대륙에서 흘러들어온 유민들의 새로운 낙원이었다.

 

 

 

 

 

<後燕과 고구려의 주요 戰場>

 

 

 

- 모용수(慕容垂)

 

 

모용수(慕容垂, 326~396, 재위: 384~396)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1(초대) 황제.

 

자는 도명(道明),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무제(成武帝)이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모친은 단씨(段氏)이며

 

원래 이름은 모용패(慕容覇)이다.

 

 

 

326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다.

 

 

 

모용황은 모용패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태자 모용준(慕容俊)보다 모용패를 더 총애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준은 모용패를 시기하였다.

 

 

 

모용준이 즉위한 이후

 

모용패는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많은 제한을 받았다.

 

 

 

모용패는 낙마하여 앞니가 부러지게 되자 이를 핑계로 이름을 수()로 바꾸었다.

 

 

 

모용수의 부인은 단씨(段氏)였는데,

 

모용준의 황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불화가 있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황후는 동생을 모용수의 부인으로 삼았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였다.

 

 

 

 

360, 모용준이 죽자 모용위(慕容暐)11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었으며,

 

모용수의 형 모용각(慕容恪)이 정권을 잡았다.

 

 

 

모용수는 모용각에게 협력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모용각이 367년에 죽자

 

모용수는 권력자 모용평(慕容評)의 시기를 받아 다시 견제를 받게 되었다.

 

 

 

369,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으로 쳐들어오자,

 

모용수는 북벌군을 물리치는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에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모용평과 태후 가족혼씨는

 

모용수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하여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전연의 귀족들을 회유하는 한편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383년에 부견(苻堅)이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일으키자

 

모용수는 군단을 이끌고 형주(荊州)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부견이 비수에서 패전하자 대부분의 군대가 와해되었으나

 

모용수의 부대만 온전히 퇴각에 성공하였다.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퇴각하였다.

 

 

 

모용수는 부견이 몰락한 것을 깨닫고 독립할 것을 꾀하였는데,

 

부견을 설득하여 업()에서 북방을 방어하도록 허락받아 부견의 곁을 떠났다.

 

 

 

 

업에는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수는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때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명받아 업에서 출진하였다.

 

 

 

모용수는 감시역으로 파견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으는 한편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384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이후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포위하고 1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부비의 수비가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3858월에 부비가 업에서 빠져나가자 업을 점령하였고

 

황하 이북 일대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3861월에는 황제에 즉위,

 

수도를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정하고 내정을 정비하였다.

 

 

 

392년에는 정령족 적교(翟釗)의 적위(翟魏)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西燕)을 멸망시켜 화북 일대를 평정하였다.

 

 

 

동진과는 주로 산동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394년 이후 동진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한편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한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보내 북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학살되었고,

 

이에 모용수는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정벌하였다.

 

 

평성(平城)을 점령하고 북위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모용수는

 

전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군대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

 

 

이로 인해 북위 정벌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 모용보(慕容寶)

 

 

 

모용보(慕容寶, 355~398, 재위 : 396~398)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2대 황제이다.

 

자는 도우(道祐), 묘호는 열종(烈宗), 시호는 혜민제(惠愍帝)이다.

 

 

 

 

모용수(慕容垂)의 넷째 아들로 모친은 난빈이다.

 

 

 

369년에 모용수가 전진(前秦)으로 망명하고 전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모용수의 장남이 죽었기 때문에 모용조가 황태자가 되었다.

 

 

 

부견(苻堅)의 궁정에서 전진 태자의 말을 씻기는 직책을 맡았다.

 

 

 

383, 부견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하자 모용수가 거병하는 것을 도왔으며

 

39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395년에 북위(北魏)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복수전을 치르던 도중

 

모용수가 3964월에 진중에서 병사하여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 등의 보좌를 받으며 치세를 시작하였다.

 

 

 

즉위하자마자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

 

 

 

8월에 북위가 침공을 개시하여 하북 일대를 석권하자

 

모용보는 중산, (), 신도 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농성을 시작하였다.

 

 

 

397년에 탁발규가 신도를 함락하자 모용보는 반격을 개시하여

 

북위군과 호타수에서 맞붙었으나 대패하여 다시 중산에서 농성하였다.

 

 

 

3월에 대장군 모용린(慕容麟)이 모용보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모용린이 유주의 군대를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용성으로 이동하던 도중 차남 모용회(慕容會)의 군대를 만나 호위를 받았는데,

 

모용회가 모반을 일으켜 모용륭이 풍발의 도움으로 간신이 살아남고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도망쳤다.

 

 

 

모용회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추스렸다.

 

 

 

397년 말에 북위의 군대가 약화되고

 

업을 지키는 모용덕(慕容德)이 남쪽으로 되돌아 올 것을 주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모용보는 대군을 동원하여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꾀하였다.

 

 

 

398년 봄, 모용보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작전을 수립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끈 채 갈팡질팡하였으며,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군대가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보는 모용농, 모용성(慕容盛)과 함께 용성으로 들어왔는데,

 

모용진이 군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켜서

 

모용보,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용성을 되찾고

 

풍발이 용성에서 모용진을 잔인하게 죽였다.

 

 

 

 

398년 난한은 군사를 이끌고 용성 앞에 군사를 공격할 만큼 포진시켜 두었다.

 

 

그리고 난한은 용성을 공격하고 황궁 앞까지 군사를 끌고 들어왔다.

 

 

난한은 모용보에게 항복을 청했으나

 

모용보는 거절하고 반란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모용보가 죽은 뒤 반란군과 끝까지 싸운 풍발은

 

반란군이 너무 많아 병력이 부족하여 난한에게 거짓 충성을 하고

 

용성에서 모용성과 함께 탈출하고 나중에 모용성과 풍발이 연합하여

 

난한의 반란군을 모두 진압하고 풍발은 난한을 잔인하게 죽이고

 

난한의 목을 까마귀 밥으로 넘겨주었다.

 

 

모용성은 풍발 대장군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난한의 몸뚱아리를 불덩이에 구워서 까마귀 밥으로 주었다.

 

 

모용주, 모용륭, 모용농은 풍발을 불러서

 

풍발에게 다시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고

 

풍발은 모용주, 모용륭, 모용농 황자의 말을 가슴 깊이 섀겨

 

다시는 그런 일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풍발은 모용주, 모용륭, 모용농 황자가 죽은 뒤에도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인 적도 있었다.

 

 

여기서 모용진은 모용주 황자와 풍발의 누나의 아들이다.

 

 

모용주 황자와 풍발의 누나와 은밀한 관계를 맺어 모용진을 낳았다.

 

 

 

 

- 모용성(慕容盛)

 

 

 

모용성(慕容盛, 373~401, 재위 : 398~401)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4대 황제이다.

 

자는 도운(道運),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소무제(昭武帝)이다.

 

 

 

 

모용성은 모용보(慕容寶)의 장남으로 모후는 정씨(丁氏)이다.

 

 

 

어린 시절부터 모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전진(前秦)의 장안(長安)에서 출생하여

 

비수대전이 벌어졌을 무렵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385, 장안이 서연(西燕)에 의해 포위되자

 

부견(苻堅)은 장안 성내의 모용씨들을 학살하였는데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용성은 서연의 모용충(慕容沖)을 의지하여 386년에 병주까지 이동하였으며

 

12월 경에 서연의 진중을 탈출하여 387년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에게 귀환하였다.

 

 

모용성은 장락왕(長樂王)에 책봉되었다.

 

 

 

 

398,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반란군에게 함락되자

 

모용성은 모용보와 함께 탈출하여 각지를 떠돌았다.

 

 

 

모용보가 난한(蘭汗)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던 모용성은 결국 이탈하였고,

 

모용보가 난한에게 살해되자 모용성은 복수를 위해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였다.

 

 

 

 

난한은 모용성이 자신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측근으로 삼았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용기(慕容奇)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모용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의 지휘권 문제로 난제(蘭堤)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고 돌아온 난목(蘭穆)을 모용성이 살해,

 

난한도 군대에 의해 주살되어 난한의 찬탈은 종식되었다.

 

 

 

모용성은 황제로 즉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을 자칭하며 후연의 황제를 대행하였다.

 

 

 

 

모용성은 치세 내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공신과 종친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폭정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모용성은 398년 말에 황제에 즉위하고 건평으로 개원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다시 서민천왕(序民天王)으로 칭호를 깎았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과 남소(南蘇)2개 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4018, 용성 내부에서 일어난 단기(段璣)의 반란으로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 모용희(慕容熙)

 

 

 

모용희(慕容熙, 385~407, 재위 : 401~407)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5(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제(昭文帝)이다.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8남으로 모후는 황후 단씨(段氏)이다.

 

 

 

모용수가 거병한 뒤에 태어나 총애를 받았으며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398년에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보(慕容寶)가 죽고

 

난한(蘭汗)이 권력을 잡았는데,

 

13세의 모용희는 고양왕 모용숭(慕容崇)의 보호에 힘입어 살아남고

 

대신 요동공(遼東公)으로 작위가 격하되는 데 그쳤다.

 

 

 

곧이어 모용성(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모용희는 하간공(河間公)으로 책봉되었다.

 

 

 

400년에는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써 모용성에게 용맹함이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평가되었다.

 

 

 

 

이후 401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던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태후 정씨(丁氏)의 지지를 받아

 

태자 모용정(慕容定)과 평원공 모용원(慕容元)을 제치고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이는 당초 모용희가 태후 정씨와 사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즉위한 뒤 모용희의 총애가 황후 부씨(苻氏)에게로 쏠리자

 

정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병부상서 정신(丁信)과 더불어

 

모용희를 폐위시키려 의논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모용희는 정씨를 핍박하여 자살시키고 정신(丁信)을 주살하였다.

 

 

 

 

이후 황후 부씨와 소의 부씨를 총애하여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는데,

 

이로써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짓고 그 안에 경운산(景雲山)을 조성하며

 

소요궁(逍遙宮), 감로전(甘露殿), 홍광문(弘光門)을 짓고

 

천하거(天河渠), 곡광해(曲光海), 청량지(清涼池)를 파는 등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또한 귀빈 부씨와 소의 부씨가 민간에 다니며 잔치를 벌이는 것을 방조하였고,

 

그 자신도 전국 각지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 가운데 황후 부씨를 황후로 삼았고,

 

소의 부씨가 죽자 그녀를 치료하던 왕온(王溫)을 잔인하게 죽였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이 공격당하자

 

405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성을 거의 함락하였으나,

 

성에 자신과 황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성을 깎아 평지가 되길 기다려 짐이 마땅히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가리라,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

 

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40512월에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러 출정하였다가

 

거란의 기세에 겁을 먹고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

 

 

 

그러나 황후 부씨가 이에 따르지 않자 목표를 변경,

 

치중도 버리고 3천여 리를 달려

 

이듬해 정월에는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하였으나 또한 실패하였다.

 

 

 

 

407,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관을 열고 이미 대렴까지 마친 시신과 교접하였다.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고 곡하지 않는 자를 조사하여 벌주었으며,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맨발로 황후 부씨를 들고 무덤안에다 묻어두고 장례를 치렸다.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후연의 장군 풍발(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의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용등원으로 달아나 숨어있던 모용희도 사로잡혀 처형되니

 

향년 22세였다.

 

 

 

 

- 고운(高雲)

 

 

 

고운(高雲, ?~409)은 북연(北燕)의 초대 황제이다. 시호는 혜의제(惠懿帝)이다.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후연(後燕)에 패배하여 붙잡혀 온

 

고구려의 지파 고화(高和)의 손자이고, 고발(高拔)의 아들이며,

 

()는 자우(子雨)이다.

 

 

 

모용보의 양자로서 모용운(慕容雲)이란 이름을 썼었기 때문에 모용운이라고도 불린다.

 

 

 

후연 2대 황제 혜민제(惠閔帝)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고운은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보가 등극한 후 시어랑(侍御郞)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물러났다.

 

 

 

 

그는 397,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 공으로 인해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는 한편 모용씨를 하사받았는데,

 

이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북연의 두 번째 황제가 되는 풍발(馮跋)과 두터운 친교를 쌓게 된다.

 

 

 

 

후연 4대 황제 소문제(昭文帝) 모용희(慕容熙)는 성격이 광폭한 폭군이었다.

 

 

 

407년 황후인 부씨(苻氏)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풍발은 고운을 추대할 거사계획을 알리고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다.

 

 

 

 

고운은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풍발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은 후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진서 모용희 재기에 따르면 이에 앞서

 

"볏짚 하나 묶어, 두 머리를 태우네. 대머리의 어린 아들이 와서 연을 멸하리"

 

라는 참요가 떠돌았는데,

 

볏짚()에서 위의 초두머리()와 아래의 벼화()변을 지우면 고()자가 되며,

 

운의 아버지 발의 어릴 적 이름이 바로 대머리라는 뜻의 독두(禿頭)였다고 한다.

 

 

 

 

고운은 음력 4월에 황제로 즉위하였고 자신의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되돌렸다.

 

 

스스로를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으나

 

오늘날은 모용씨가 지배하던 시기와 구분하여

 

모용희가 지배하던 때까지를 후연(後燕),

 

고운의 등극 이후를 북연(北燕)으로 구분하고 있다.

 

 

 

 

408년에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푸니

 

고운도 북연의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이에 답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운이 고구려 왕족 혈통이라는 것에 주목하여

 

광개토왕이 두 나라의 연대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이득이 되는 상황을 만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해에 부인을 황후로,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재위 3년째인 409년 겨울,

 

고운은 총신(寵臣)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고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풍발이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 풍발(馮跋)

 

 

 

풍발(馮跋, ?~430)은 중국의 오호 십육국 시대의

 

북연의 제 2대 황제(재위409~430)이다.

 

자는 문기(文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성제(文成帝)이다.

 

 

선조는 춘추전국시기 진나라의 대부였던 필만(畢萬)이고

 

조부는 풍화(馮和)이며 부친은 서연에서 장군을 역임안 풍안(馮安)이다.

 

 

 

 

후연의 태합으로 407년 후연황제 모용희(慕容熙)을 폐위하고 북연을 건국하였다.

 

 

 

처음엔 고구려(高句麗)계인 고운(高雲/高云)을 왕위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천왕(天王)으로 등극했다.

 

 

 

 

풍발은 용성(龍城)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영유했다.

 

 

 

430년 동생인 풍홍(馮弘)이 뒤를 이었다.

 

 

 

 

- 풍홍(馮弘)

 

 

풍홍(馮弘, ?~439)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북연의 제3(마지막) 황제(재위430~435)이다.

 

자는 문통(文通). 시호는 소성제(昭成帝)이다.

 

 

 

 

430년 풍발(馮發)이 병사하자 풍발의 아우 풍홍과 아들 풍익이 왕위 다툼을 벌였고,

 

결국 풍홍이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풍홍은 화북을 통일한 북위(北魏)의 압박을 받아

 

436년 고구려(高句麗)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풍홍으로 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고구려 장수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북연의 밀사 양이와 함께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자신을 맞이하려 하자

 

풍홍은 도성인 화룡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동쪽의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고구려 땅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수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북풍에서 풍홍의 황후가 풍홍을 지키다가 결국 풍홍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훗날 북위의 풍태후가 풍홍의 손녀이다.

 

 

 

 

 

 

- 모용덕(慕容德)

 

 

 

 

모용덕(慕容德, 336~405, 재위 : 398~405)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남연(南燕)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현명(玄明),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무제(獻武帝)이다.

 

 

 

 

모용덕은 전연의 초대 군주 모용황(慕容皝)의 막내아들로

 

어머니는 공손씨(公孫氏)이다.

 

 

 

모용준의 재위 시기에는 양공(梁公)에 책봉되었고,

 

모용위의 재위 시기에는 범양왕(范陽王)에 책봉되었다.

 

 

 

396년에 환온(桓溫)의 북벌군의 침입에 맞서

 

모용수와 함께 전쟁에 나서 큰 전공을 세웠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하자 모용덕은 장액(張掖)태수에 임명되었다.

 

 

모용덕은 아들들과 어머니 공손씨, 동모형 모용납(慕容納),

 

모용납의 부인 단씨(段氏) 등과 함께 장액으로 이주하였다.

 

 

 

 

383년에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가족들을 모두 장액에 남겨두었다.

 

 

 

모용덕은 떠나면서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몰락한 이후 384년부터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와 전쟁을 벌였다.

 

 

 

이 소식이 장액에 전해지자 모용덕의 일족은 모두 처형되고

 

어머니 공손씨와 형수 단씨만 살아 남았다.

 

 

 

 

모용덕은 모용수에 의해 다시 범양왕에 책봉되었으며

 

단씨(段氏)를 새로 부인으로 맞았으나 아들을 얻지는 못했다.

 

 

 

396년에 모용수가 죽자 모용덕은 업()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396년 말부터 북위(北魏)가 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화북 대부분이 북위군의 지배하게 놓이게 되었다.

 

 

 

모용덕은 업에서 오랫동안 농성하였는데

 

39710월에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이 함락되자

 

모용덕은 위협을 느끼고 업을 포기하고 황하를 건너 활대(滑臺)로 근거지를 옮겼다.

 

 

 

 

398, 활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모용덕은

 

모용린(慕容麟)의 건의에 따라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원년을 칭했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남연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399년에 망명 세력인 부광(苻廣)이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덕이 부광을 토벌하러 출정하자 활대에서도 모반이 일어나 북위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잃은 모용덕은

 

부하들의 건의를 따라 남하하여 연주(兗州) 북부를 장악하였다.

 

 

 

뒤이어 동진하여 청주(靑州)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벽려혼(壁閭渾)을 쳐서 무너뜨리고 광고(廣固)를 수도로 정하였다.

 

 

 

 

400, 모용덕은 광고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고쳐 모용비덕(慕容備德)이라 하였다.

 

 

 

모용덕은 청주와 연주 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내치를 다졌고,

 

동진(東晉)이 환현(桓玄)의 찬탈로 인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강소성 일대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용덕은 나이가 많았고,

 

황제에 즉위하고 얼마 있지 않아 가족들이 장액에서 변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아 병에 걸렸다.

 

 

 

이로 인해 동진 정벌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405, 모용덕은 모용납의 유복자가 장안(長安)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았다.

 

 

 

장안에서 모용초가 증표인 칼을 들고 찾아오자 모용덕은 그를 태자로 세웠다.

 

 

 

모용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모용덕의 장례는 비밀에 붙이기 위해 10여 개의 가짜 관을 만들었으며

 

실제 능은 산속의 계곡에 은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짜 릉인 동양릉(東陽陵)을 만들었다고 한다.

 

 

 

 

- 모용초(慕容超)

 

 

모용초(慕容超, 385~410, 재위 : 405~410)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남연(南燕)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조명(祖明), 묘호나 시호는 없다.

 

 

 

 

모용초는 전연의 북해왕(北海王) 모용납(慕容納)의 아들로 어머니는 단씨(段氏)이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납의 동생 모용덕(慕容德)

 

전진(前秦)의 부견에 의해 장액(張掖)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모용납은 모용덕을 따라 온 가족을 이끌고 장액으로 이주하였다.

 

 

 

 

383년에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가족들을 모두 장액에 남겨두었다.

 

 

 

모용덕은 떠나면서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몰락한 이후 384년부터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와 전쟁을 벌였다.

 

 

 

이 소식이 장액에 전해지자

 

장액을 지키던 부창(苻昌)은 모용덕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다만 모용납, 모용덕 형제의 어머니 공손씨(公孫氏)는 나이가 많아 처형을 면했고,

 

모용납의 부인 단씨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결정하지 못해 감옥에 남아 있었다.

 

 

 

이때 감옥을 관리하던 관리인 호연평(呼延平)은 과거 모용덕의 은혜를 받은 일이 있어

 

공손씨와 단씨를 탈출시켜 주었고, 함께 강족(羌族) 부락으로 도망쳤다.

 

 

 

 

호연평의 보호 아래 단씨는 모용초를 낳았다.

 

 

 

모용초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공손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용초에게 모용덕이 증표로 남긴 금칼을 물려주었다.

 

 

 

 

얼마 후 이들은 후량(後凉)의 고장(姑臧)으로 이주하였으며

 

후량이 멸망하자 다시 후진(後秦)의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호연평이 죽자 모용초는 어머니 단씨의 뜻에 따라 호연평의 딸과 결혼하였다.

 

 

 

모용초는 자신의 숙부가 남연의 황제였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 하여 후진의 천왕 요흥에게 등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405, 모용초는 모용덕이 보낸 밀사를 통해

 

모용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밀사를 따라 모용덕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모용초는 모용덕의 부하 모용법(慕容法)과 알력을 가졌다.

 

 

 

모용덕은 모용초가 조카인 것을 확인하고 곧 태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뒤를 이어 남연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옛 부하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자신의 친우인 공손오루(工孫五樓)를 중용, 측근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용법, 모용종(慕容鐘), 단굉(段宏) 등은

 

406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모용초는 모반을 진압하여 불만세력을 일소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407, 모용초는 후진에 사신을 보내

 

어머니와 부인 호연씨를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모용초의 요구에 대한 조건으로

 

남연이 후진에 신속할 것과 태악(太樂)을 바칠 것을 걸었다.

 

 

 

이에 모용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태악을 바치고

 

어머니와 부인을 돌려 받았다.

 

 

 

 

409, 모용초는 태악을 다시 구하기 위해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악공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동진의 권력자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하였다.

 

 

 

 

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모용초는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였다.

 

 

 

 

410년에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힌 모용초는 건강(建康)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 모용홍(慕容泓)

 

 

 

모용홍(慕容泓, ? ~ 384, 재위384)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의 초대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모용홍은 전연(前燕)의 황제 모용준(慕容儁)3남으로

 

모용준에 의해 제북왕(齊北王)에 책봉되었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苻堅)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홍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모용홍은 북지(北地)의 장사(長史)로 임명되었다.

 

 

 

383,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384년에 모용수(慕容垂)가 관동(關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홍은

 

북지를 떠나 화음(華陰)에서 선비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도독섬서제군사·대장군·옹주목·제북왕을 자칭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모용홍은 곧 부견이 파견한 토벌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토벌군 대장 부예(苻睿)가 섣부른 공격을 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장안(長安)을 점령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기 동생 모용충(慕容沖)이 하동(河東)에서 전진에 반기를 들었는데,

 

토벌군에게 패하여 모용홍의 진영으로 도망쳐왔고

 

모용홍은 모용충의 군사를 흡수하여 세를 불리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였다.

 

 

 

 

3846, 장안으로 진격하던 모용홍은

 

가혹한 군령에 반감을 품은 부하 고개(高蓋) 등에게 살해되었다.

 

 

 

모용홍은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모용홍이 거병한 시점부터를 서연의 건국으로 본다.

 

 

 

 

- 모용충(慕容沖)

 

 

연 위제 모용충(燕 威帝 慕容沖, 359~ 386, 재위384~ 386)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2대 군주이다.

 

 

 

 

모용충은 전연(前燕)의 황제 모용준(慕容儁)4남으로

 

모용준에 의해 중산왕(中山王)에 책봉되었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苻堅)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충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모용충은 12세였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부견은 모용충을 총애하였고 남색의 상대로 삼았다고 한다.

 

 

 

 

383년 무렵에는 평양(平陽)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384년에 모용수(慕容垂)가 관동(關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연(後燕)을 건국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모용충의 형 모용홍(慕容泓)도 거병하였다.

 

 

 

 

이에 모용충도 평양에서 거병하였는데 부견이 파견한 토벌군에게 패배하고

 

모용홍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모용홍과 모용충은 장안(長安)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6월에 모용홍이 부하 고개(高蓋) 등에게 살해되었다.

 

 

 

모용홍을 살해한 고개는 모용충을 황태제(皇太弟)로 추대하고 지도자로 삼았다.

 

 

 

 

모용충은 전진의 군대를 격파하며 장안으로 진격하여

 

7월에 아방성(阿房城)을 점령하고 거점으로 삼았으며 장안을 포위하였다.

 

 

 

 

385년 정월, 모용충은 아방성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경시(更始)라 개원하였다.

 

 

 

6월 말, 부견과 부굉이 장안을 버리자

 

모용충은 장안에 무혈입성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후 장안에 거점을 둔 모용충은

 

궁실을 축조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등 장안을 중심으로 정착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비족들은 고향인 관동(關東)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모용충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3862, 부하 한연(韓延) 등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모용충의 아들인 모용요(慕容搖)가 모용충에게 위황제(威皇帝)라 시호를 올렸다.

 

 

 

 

 

- 모용의(慕容顗)

 

 

 

모용의(慕容顗, ? ~ 386, 재위386)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4대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모용의는 전연(前燕)의 군주 모용황(慕容皝)의 손자로,

 

아버지는 의도왕 모용환(慕容桓)이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苻堅)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의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384년에 모용홍(慕容泓)이 서연을 건국하였는데,

 

이에 참여하였다.

 

 

 

3863, 당시 서연의 군주였던 단수(段隨)가 좌복야 모용항(慕容恒),

 

상서 모용영(慕容永)에게 살해되고 모용의가 연왕(燕王)에 옹립되었다.

 

 

 

 

모용의는 건명(建明)으로 개원하고 모용항, 모용영 등을 따라

 

선비족 40만 명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臨晉)에서 모용항의 동생 호군장군 모용도(慕容韜)에게 살해되었다.

 

 

 

이름이 자치통감에는 모용의(慕容顗),

 

위서(魏書)에는 모용개(慕容凱)로 기록되어 있다.

 

 

 

 

 

- 모용요(慕容瑤)

 

 

 

모용요(慕容瑤) 또는 모용 망(慕容 望) ( ? ~ 386, 재위386)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5대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모용요는 서연의 2대 군주 모용충(慕容沖)의 아들이다.

 

 

 

386년에 모용충이 살해당한 후

 

단수(段隨), 모용의(慕容顗)가 차례로 왕에 옹립되었으나

 

모두 내분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모용의가 호군장군 모용도(慕容韜)에게 살해되자

 

모용도의 형 모용항(慕容恒)은 노하여 모용도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모용요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모용요는 건평(建平)으로 개원하고 아버지 모용충을 위황제(威皇帝)로 추존하였고

 

버려진 모용도는 모용영(慕容永)의 습격을 받아 패주하여 모용항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모용요는 곧 민심을 잃어 선비족들은 모용영에게 귀의하였고

 

모용영은 모용요를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이름이 자치통감에는 모용요(慕容瑤),

 

위서(魏書)에는 모용망(慕容望)으로 기록되어 있다.

 

 

 

 

 

- 모용충(慕容忠)

 

 

모용충(慕容忠, ? ~ 386, 재위386)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6대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모용요는 서연의 초대 군주 모용홍(慕容泓)의 아들이다.

 

3863월에 서연의 군주 단수(段隨), 모용의(慕容顗), 모용요(慕容瑤)가 차례로

 

군주로 옹립되었으나 모두 내분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모용요를 살해한 모용영(慕容永)은 모용충을 옹립하여 황제로 삼았다.

 

 

 

 

모용충은 건무(建武)로 개원하였으며

 

모용영을 태위로 삼고 하동공(河東公)에 책봉하였다.

 

 

 

권력을 잡은 모용영은 동요하는 선비족들을 안정시켜 동쪽으로 이주를 계속하였다.

 

 

 

문희(聞喜)에 이르렀을 때 모용충 등은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한 소식을 들었다.

 

 

 

 

이에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멈추고 연희성(燕熙城)을 쌓고 머물렀으나

 

6월에 서연의 장수 조운(刁雲) 등에게 살해당했다.

 

 

 

 

 

- 모용영(慕容永)

 

 

모용영(慕容永, ? ~ 394, 재위386~ 394)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의 마지막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모용영은 모용섭귀의 3남 모용운(慕容運)의 손자이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당한 뒤,

 

전진의 부견(苻堅)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충도 이때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384년에 서연이 건국되자 모용영은 상서(尙書)에 임명되었다.

 

 

 

3862월에 단수(段隨)가 연왕(燕王)이 되었는데,

 

3월에 이르러 좌복야 모용 항(慕容 恒)과 함께 단수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모용의(慕容顗)를 연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선비족 40여 만 명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臨晉)에서

 

모용의가 모용항의 동생 모용 도(慕容 韜)에게 살해되었다.

 

 

 

 

모용항은 모용도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모용요(慕容瑤)를 옹립하였는데

 

모용영은 모용요를 따르지 않고 모용도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곧이어 모용요는 민심을 잃어 선비족들은 모용영에게 귀의하였고

 

모용영은 모용요를 사로잡아 죽이고 모용충(慕容忠)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모용충은 모용영을 태위로 삼고 하동공(河東公)에 책봉하였다.

 

 

 

권력을 잡은 모용영은 동요하는 선비족들을 안정시켜 동쪽으로 이주를 계속하였다.

 

 

 

문희(聞喜)에 이르렀을 때

 

모용영은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한 소식을 들었다.

 

 

 

이에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멈추고 연희성(燕熙城)을 쌓고 머물렀다.

 

 

 

6월에는 서연의 장수 조운(刁雲) 등이 모용충을 살해하니 모용영이 뒤를 이었다.

 

 

 

 

모용영은 대도독·대장군·대선우·진옹량량사주목·하동왕을 자칭하고

 

후연의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였다.

 

 

 

10, 모용영은 전진의 부비(苻丕)에게 사신을 보내

 

동쪽으로 갈 수 있게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거절당하였다.

 

 

 

이로 인해 모용영은 양릉(襄陵)에서 부비를 격파하고 병주(幷州) 일대를 장악하였다.

 

 

모용영은 장자(長子)에 수도를 두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중흥(中興)이라 개원하였다.

 

 

 

모용영은 동진(東晉)이나 후진(後秦) 등과 대립하고

 

후연이나 적위(翟魏)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적위가 392년에 후연에게 멸망하자 적위의 황제 적교(翟釗)가 서연으로 망명하였다.

 

 

모용영은 적교를 받아들였는데 1년 뒤 적교가 모반을 꾀하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39312, 모용수가 서연을 공격하자

 

모용영은 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섰다.

 

 

 

수개월 동안 대치가 계속되었는데 모용영은 모용수가 속임수로

 

남쪽의 태행(太行)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추측하여 태행 쪽으로 병력을 이동하였다.

 

 

 

 

3944, 모용수는 모용영이 없는 틈을 타

 

치중이 있던 대벽(臺壁)으로 쳐들어왔으며

 

뒤늦게 돌아온 모용영은 매복에 당해 크게 패배하였고

 

장자에서 농성하던 모용영은 8월에 이르러 내부 반란으로 성이 함락되었고

 

모용수에게 처형되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