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 16년 흑룡(黑龍:임진392)

 

 

2월, 신후(神后)가 침궁(寢宮)에서 붕(朋)하였다.

 

제(帝)가 그를 위하여 음식을 먹지 않으니 <보반保反>이 말했다.

“모후(母后)가 비록 그대에게 공(功)이 많으나

그대가 만약 먹지를 않으면 나는 누구를 남편으로 삼습니까?”

제(帝)가 이에 <보반保反>과 더불어 행상(行祥)하여

신후(神后)를 장릉(長陵)에 장사하고 유골을 각 남편의 융릉(隆陵)에 나누었다

 

신후(神后)는 곧 <아이혜阿爾兮>성후(聖后)의 제 7녀이다.

 

신장(身長)이 7척이요 몸무게가 2백 근이었으며

한 번의 식사에 돼지 한 마리를 다 들었다.

 

향가(鄕歌)와 신사(神事)에 능숙하고 잘 하였으며

<아이혜阿爾兮>를 이어서 자황(雌皇)이 된지 40여년에

부제(夫帝)를 바꾼 것이 5위(位)였으며 모두 자녀를 가졌다.

<미추味鄒>帝의 딸은 <막희莫姬>, <인송仁竦>, <족송足竦>,

<솔류率留>, <고류古留>, <도류道留>, <단판丹判>, <잡판匝判>,

<옹판雍判>, <보반保反>, <내류內留>이며,

<유례儒禮>帝의 딸은 <기탄其炭>이며,

<기림基臨>帝의 딸은 <동탄東炭>, <근단斤丹>, <석단昔丹>이고,

<흘해訖解>帝의 딸은 <방단方丹>이며

금제(今帝)의 아들은 <호동好童>, <숙단叔丹>이고 딸은 <성단成丹>이었다.

 

춘추는 69세였으며 왕손(王孫)은 수백 명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어질고 백성을 아꼈으며 난음(亂淫)을 좋아하지 않아

오직 부제(夫帝)와 부군(副君)외에는 사신(私臣)을 기용하지 않았다.

 

국중대사(國中大事)는 골로(骨老)와 상선(上仙)들로 하여금 결정케 하고

사사로이 행하지 않음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렸으니

상복을 입은 자들이 길을 가득 메워 나라 안이 남김없이 흰색이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