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 26년 수호(水虎:임인402)

 

 

2월, 제(帝)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藥)을 구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제(帝)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 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賢)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행상(行祥)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359-417)>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后)를 삼았으나

음(陰)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부제(父帝)를 추존하여 나물대성신제(奈勿大聖神帝)라 하였다.

 

그 보록(譜錄)에서 말한다.

 

“<아효阿孝>聖母가 <아호阿好>聖母를 낳고 <아호阿好>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갈문왕(葛文王)을 낳았고,

<구도>갈문왕이 <골정骨正>태자의 딸 <녹모綠帽>골모(骨母)를 취하여

<말흔末昕>세신(世神)을 낳았고,

<말흔>세신이 <미추味鄒>대성태제(大聖太帝)의 어머니 <술례述禮>聖母를 취하여

<말구末仇>세신(世神)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帝{내물}의 아버지가 된다.

 

(미추)태제(太帝)에게서 제(帝)인 까닭에 내외(內外)가 중시하고 총애가 지극히 깊어

진골(眞骨) 중흥(中興)의 조상이 되었다. 그 천명(天命)이었음 이련가.”

 

 

 

내물왕 26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수호(水虎:임인402) 원년

 

2월 7일 나물제(奈勿帝)가 붕(崩)하였다.

 

<보반保反>后가 유명(遺命)으로써 <실성實聖>을 세워 계군(繼君)을 삼았다.

 

이에 앞서 <삼원三元>공주에게 딸이 있어 <예생禮生>이라했는데

꿈에서 백대마(白大馬)를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대서大西(314-382)>공(公)이 이르러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사통하여 <실성實聖(359-417>을 낳았다.

 

처음에는 <마아馬兒>라 불렀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므로

사람들이 유마아(柔馬兒)라고 했다.

 

<말구末仇(297-358)>공(公)이 몰(沒)하고

<대서지大西知>공(公)이 그 처 <휴례休禮(331-399)>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이로써 <마아馬兒>는 <나물奈勿>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는데

정호(情好)가 심히 도타웠다.

 

<나물奈勿>이 뜻을 얻기에 이르자 그를 이끌어서 등용하였는데

고구려가 남침(南侵)하게 되자 사절을 받들고

고구려에 가서는 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여주(麗主) <담덕談德>이 그 누이(妹) 두씨(杜氏)로 처를 삼게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두씨가 마침내 그를 위해 <담덕談德>을 설득해 말했다.

 

“현주(賢主)는 신의(信)를 숭상하니 볼모를 잡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첩의 남편은 저쪽으로 돌아가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따름입니다.

첩은 원컨대 그 나라에 함께 돌아감으로써 대왕을 위한 계책이 되고 싶습니다.”

 

담덕(談德)이 그를 허락하였다.

 

때에 나물(奈勿)은 병질로 정사를 볼 수 없어 <마아馬兒>를 보기 원했는데

 

돌아오게 되자 기뻐서 그 연고를 물으니 <마아馬兒>가 말했다.

 

“제가 형의 병환을 듣고서 돌아가고자 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에 까마귀의 머리가 남김없이 하얗게 되므로

고구려인들이 크게 놀라서 내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나물奈勿>은 그를 신(神)이라 여겨 이에 <실성實聖>이라 이름하고

부군(副君)의 지위에 있게 했는데 이에 이르러 보위에 오르니 춘추 44세였다.

 

<보반保反>을 상궁(上宮)으로 삼고, <내류內留>는 하궁(下宮)으로 삼고,

두씨(杜氏)는 난궁(暖宮)으로 삼아 이를 삼궁(三宮)으로 하였다.

 

왕제(王弟) <대물大勿>과 <길막吉莫>을 좌우잡판(左右匝判)으로 삼고,

부공(父公) <대서지大西知>를 추존하여 세신(世神)으로 삼으며,

모주(母主) <예생禮生>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눌기訥祇(387-458)>를 태자로 삼고 <아로阿老(392-)>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니

대개 <나물奈勿>이 남긴 유촉(遺囑)이었다.

 

3월에 <나물奈勿>을 옥릉(玉陵)에 장사하고

<옹판雍判(358- )>으로 능문사주(陵門祀主)를 삼았다.

 

<보반>后가 신제(新帝)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계부(繼夫)로 삼은 까닭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선제(先帝)가 그대를 아낀 까닭이오.

원컨대 선제(先帝)가 남긴 아이(遺兒)들을 보호하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오.”

하니

 

제(帝)는 “네(諾)”하고 대답했다.

 

이에 <보반保反>이 마침내 신제(新帝)와 더불어 성모사(聖母祠)에 참배하고

남도(南桃)에서 하례를 받았다.

 

5월, 제(帝)가 <보반保反(362-428)>에게 말했다.

 

“고구려(句麗)의 부강함은 다른 것이 없고 정치가 남자에게 있음이다.

우리나라는 골모(骨母)를 귀하게 여겨

정사(政事)가 부인(婦人)의 손에서 많이 나오니 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네 남편이 되었으니 너는 나와 한 몸이다.

이제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맡게 하여 마땅히 고구려와 같은 강성함을 닮게 하라.”

 

<보반>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있을 것 같으면 무슨 일인들 따르지 않으랴.

이제부터는 네게 맡겨 그리하리라.”

 

이에 제(帝)가 옛 제도(舊制)를 크게 개편하여 새로운 관제(新官)를 많이 설치하니

종신(宗臣)들이 그를 많이 불편해 하였다.

 

성산주(聖山主) <방단方丹>이 <나물奈勿>의 아들 <방석方石>을 낳았다.

 

7월, 고구려 사람 <토오세土五稅>에게 명하여 우마(牛馬)의 목축을 가르치게 했다.

 

<마삼馬三>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芥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9월, <일동一同>을 서로군주(西路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에서 <내물>의 아들이 어려서 <실성>이 즉위하였다는 것은 거짓이다.

 

<내물>은 동생인 <호물好勿(359-418>의 전횡을 막기위하여

<실성>의 귀국을 요청한 것이다

 

<내물>과 <광명>후 사이에 장년의 <호동好童(376-405)>과 <숙단(叔丹)>이 있었다.

 

신라사초에는  <호동好童>이 405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405년 9월 대아찬(大阿湌) <호동好童>이 졸(卒)하였다.

 

광명태후(光明太后)가 <내물奈勿>을 사(私)하여 낳았는데

교만방자하고 황음호색하였으나 <내물奈勿>이 금제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졸(卒)하자 해간(海干)의 예로 장사하였다.

 

<호동好童>은 내물이 즉위하기 한해 전에 태어났다.

 

해간(海干)은 신라 17관등 중 4번째 관등이다.

 

<광명>은 이미 죽고 없으니 아마 <실성>에 의하여 30살의 나이에 제거되었을 것이다.

 

 

 

 

 

- 實聖과 訥祗의 전쟁

 

 

1. 實聖王 馬兒

 

 

馬兒 皃美而善媚 自幼爲帝龍陽君

其母禮生宮 亦與帝私通生子女 寵漸加馬兒

至是 神后病昏 政出於帝及保反內留

馬兒 以是行副君事一國榮之 

<내물대성신제기> 

 

              

마아는 용모가 아름답고 아양을 잘 떨어

어릴 적부터 帝(내물)를 위해 용양군(龍陽君)이 되었고,

그 어미 <예생禮生>궁 또한 제와 사통하여 자녀를 낳았으니

총애가 <마아馬兒>에게 점점 더하여졌다.

 

이때에 이르러 神后{광명}가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정사(政事)가 帝 및 <보반保反>과 <내류內留(362-432)>에게서 나왔고,

이리하여 <마아>가 부군의 일을 행하니 온 나라가 이를 영광스러워 하였다.

 

 

 

水虎 元年 二月七日奈勿帝崩

保反后 以遺命立實聖爲繼君

先是 三元公主有女曰禮生夢見白大馬 而奇之

大西知公適至 聞夢而私之生實聖

初呼馬兒 皃美而柔 人以爲柔馬兒 

<실성기> 

 

               

수호(임인 402)원년 2월 7일 <내물>帝가 붕어하셨다.

 

<보반> 后가 유명으로써 <실성>을 세워 임금을 이어받게 하였다.

 

예전에 <삼원>공주의 딸 예생이 꿈에서 희고 큰 말을 보아 이를 기이하게 여겼는데,

<대서지> 공이 마침 와서 꿈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사통하여 <실성>을 낳았다.

 

처음에는 <마아>라 불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순하게 생겨

사람들이 유마아(柔馬兒)라고 하였다.

 

 

 

 

 

<실성實聖(359-417)>왕은 신라 제18대왕이고,

<눌지訥祗(387-458)>왕은 그를 죽이고 신라 제19대왕이 된 사람이다.

 

이들의 싸움이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내전이었으며,

실성왕과 눌지왕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실성왕과 그의 동갑내기 <호물好勿(359-418)>과의 싸움이었다. 

 

눌지왕은 <호물好勿>의 지지를 바탕으로 실성과 대립하게 되는데,

호물과 눌지왕의 승리의 배경에는 고구려의 한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성>의 패배는,

그 스스로 권좌에 오를 만한 인물이 되지못하였음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며,

주변 상황을 잘 판단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더욱 더 컸음이다. 

 

<마아>의 잘생긴 외모는 그가 신라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하늘의 축복을 받아 예쁘게 태어난 <마아>는

그 예쁜 용모로 인하여 어릴 적부터 <내물>의 용양군이 되었다.

 

용양군이라하면 남색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정식으로 혼인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는 못하였지만

빼어난 용모로 인하여 내물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낳은 어머니 <예생>이 내물왕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부군의 일을 하기에 이르고,

다음 왕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2. 볼모가 된 馬兒

 

 

帝遣道寧等于談德以土物答之

談德曰 汝君愛臣馬兒願欲見之 

<내물대성신제기> 

 

             

(391년 11월)

 

帝(내물)가 <담덕>에게 <도녕道寧> 등을 보내 토산물로 답하였다.

 

담덕이 말하기를

 

“네 임금의 애신(愛臣) <마아馬兒>를 보기 원하노라.”

 

 

 

黑竜 正月 送馬兒 于談德

<내물대성신제기> 

 

흑룡(임진392)정월, 마아를 담덕에게 보냈다.

 

 

 

三十七年 春正月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送伊飡大西知子實聖爲質 

<삼국사기 신라본기> 

 

 

37년(서기 392)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기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二年 壬辰 正月遣胥狗迎奈密女雲帽霞帽 爲左右小妃

以寶金 爲妃宮大夫

寶金奈密之猶子也身長而有識

以寡公主天星妻之

星 太上后解氏出也  

<영락대제기> 

 

 영락 2년(서기392) 임진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 <내밀奈密>{내물}의 딸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맞이하게 하여 좌, 우 소비로 삼았다.

 

<보금寶金>{실성왕}을 비궁대부(妃宮大夫)로 삼았다.

 

<보금>은 <내밀>의 조카로, 키가 크고 유식하였다.

 

과부 공주 <천성>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천성天星>은 太上后 解씨 딸이다. 

 

 

 

五月 角干好勿卒

好勿者 好臨伊湌之子與奈勿同母 故奈勿愛之 委以軍國大事

與實聖不合勸質之 

<눌기천왕기> 

 

                 

(눌기 2년,418년)

 

5월, 각간 <호물好勿>이 죽었다. <호물>은 이찬 <호림好臨>의 아들이다.

 

<내물>과는 같은 어머니{휴례}를 두었기에

 

<내물>이 그를 아꼈고 군국대사를 위임하였다.

 

<실성>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볼모로 보내는 것을 권했었다.

 

 

 

실성왕 <마아>는 타고난 외모로 인해 탄탄한 인생을 보장받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10년간의 인질의 삶은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고 말았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백제와 왜를 제압하며 한껏 그 위용을 자랑하던 시절,

 

영락대제는 신라가 백제정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에 신라는 391년 왕자 <도녕道寧>, 미녀 강씨(姜氏), 김씨(金氏) 등을

<보옥宝玉>과 함께 고구려에 보냈지만,

영락대제는 내물왕의 총신 <마아>와 내물왕의 딸들을 바치라고 한다. 

 

당시 백제와 왜를 정벌한 영락대제의 고구려를 누가 감히 맞설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내물>은 사랑하는 용양군 <마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인질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라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호물>에게 밀려난 <마아>가

 

고구려의 인질이 되어 10년간 청춘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마아>는 줄곧 <내물>에게 볼모를 바꾸어줄 것을 청하였고,

또 <내물>도 여러 차례 고구려에게 그의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줄곧 거부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마아의 원한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며,

401년, <마아>가 신라로 돌아오기까지 십년의 세월은

<마아>에게는 좌절의 세월이었다.

 

 

 

3. 馬兒의 여인

 

 

火猿 正月......

遣水酒干宝末 于句麗 獻美女 請還馬兒

談德以其妹杜氏妻馬兒而不送

<내물대성신제기> 

  

         

화원(병신396)정월, ......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을 고구려에 보내어 미녀를 바치고

<마아>를 돌려 달라 청하였다.

 

<담덕>이 그 누이 <두杜>씨를 <마아>의 처로 삼고 보내지 않았다.

 

 

時 杜陽公主與新羅質子馬兒相通

王命幽杜陽 于大菱院

杜陽 小獸林王女也 天亥妻菱氏生

而献之 爲龍院婢子與馬兒會於舟中 而悅之

太后謂王曰 情洽而悅之何若幽之 不如放而任之

王曰 將欲施之 以恩也

<국강호태왕기>

 

 

이때 <두양杜陽> 공주가 신라의 볼모 <마아>와 상통하니,

왕이 명하여 <두양>을 대릉원(大菱院)에 가두었다.

 

<두양>은 소수림왕의 딸이고 <천해天亥>의 처 <릉菱>씨가 낳았기에,

그녀를 권하여 용원비자(龍院婢子)로 삼았는데, <마아>와 배를 타고 만나 즐겼다. 

 

태후가 왕에게 말하기를

 

“정을 나누고 즐기는 것인데 어찌 그들을 유배시킵니까? 

이들을 풀어주어 마음대로 하게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은혜를 베풀어 그리하겠습니다.

  

 

 

 

영락대제기에서는 마아가 고구려에 들어오자,

영락대제는 그에게 집을 내어주고 <천성天星>을 처로 주었다고 기록하면서,

<천성>은 천원공의 처 <해>씨의 딸이라고 하였다. 

 

이 <천성>이라는 여인이 결국 <마아>와 함께 신라로 가서 실성왕의 비가 되는데

신라는 이 여인을 <두양杜陽>이라 기록하고 있다.

 

국강호태왕기에서도 <두양>으로 등장한다.

  

또한 그 가계도 아버지가 소수림제이고 어머니는 릉씨(菱氏)라 하니,

이 두 사람 <천성>과 <두양>이 동일인을 기술한 것이라면,

다소 복잡한 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천성>혹은 <두양>은 고구려 천자의 딸인 공주이고,

이 여인이 신라왕자 <마아>와 정분이 난 것이다.

  

이 고구려 공주 <두양>이 실성왕의 귀국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고,

또한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배경이 되어주었던 이 여인이,

자신을 죽음으로 몬 한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4. 馬兒의 귀국

 

十一年 辛丑 三月...

奈密遣使朝貢 而告曰臣今年以来 老病漸篤

猶子寶金 久在陛下之膝下尙公主而生孫 未得一見 不禁泫然

臣老死無日 所生皆幼當以宝金 陪公主君臨 以陛下之子孫 永爲南方之主

伏乞陛下 使宝金公主皈國

臣一見公主 及孫之顔而死則無餘恨矣

 

上聞之 惻然曰 果哉朕不明矣

上乃召公主問曰 娣與寶金已生三子 夫婦之義 當從之國

天星曰 妾亦願見父王久矣請送之國

<영락대제기> 

  

          

 

영락 11년 (401)신축 3월, ...

 

<내밀>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고하기를

 

“신이 금년 들어 노환이 점점 심해지는데

조카 <보금>이 폐하의 슬하에 오랫동안 지내면서

공주에게 장가들어 손자를 낳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하니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 없습니다.

 

신은 늙어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자식들이 모두 어리니,

마땅히 <보금>으로 하여금 공주를 모시고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폐하의 자손으로 영원토록 남방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 엎드려 비옵건대 <보금>과 공주를 귀국시켜 주시옵소서.

 

신이 공주와 손자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상은 이를 듣고 측은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참으로 짐이 어리석었노라.”

 

이에 상이 공주를 불러 묻기를

 

“누이는 보금과 이미 세 아들을 낳았으니,

부부의 도리로 마땅히 그 나라를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천성>이 말하기를

 

“첩 또한 부왕을 보고자 한지 오래되었으니,

청하건대 그 나라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上命有司飾車千輛而送之曰 親則弟娣 義則父女

往事爾舅 無忝朕顔 天星四拜而去

<영락대제기> 

  

           

상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천량의 수례를 장식해서 보내며 말하기를

 

“핏줄로 따지면 형제자매이나, 법도로는 아비와 딸이니,

가서 네 시아비를 섬기어 짐의 얼굴을 욕되게 하지 말거라.”

 

<천성天星>이 사배(四拜)하고 물러갔다.

 

 

 

 

 

白牛 四月 自春大旱

帝且不寧 諸王子皆以荒淫爲事

帝乃遣一同仇里迺等于麗 贈錦帛眞珠而請還馬兒

 

<내물대성신제기> 

  

           

백우(401)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었다.

 

帝 또한 편치 않은데 왕자들은 모두 황음에 빠져있었다.

 

이에 帝가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 등을 고구려에 보내,

금백(비단)과 진주를 바치고 <마아>를 돌려 달라 청하였다.

 

 

 

杜氏亦爲馬兒 說談德曰 馬兒之於吾國 九牛一毛也 不如皈

王其國以傳兗仲 則大王之骨 其王南方 不亦好乎

談德然之 乃以宝貨七車載馬兒杜氏 以精騎三百 護送之

<내물대성신제기> 

  

 

<두杜>씨 또한 <마아>를 위해 <담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마아>는 우리 나라에게는 구우일모이니 돌려보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연중兗仲> 에게 물려주면,

대왕의 골(핏줄)이 남방의 왕이 되니 이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담덕>은 이를 승낙하여 마침내 보화를 일곱 수레에 싣고,

 

<마아>와 <두>씨를 정기(精騎) 3백으로 보호하여 보냈다.

 

 

七月 馬兒入京見帝相扶而泣

帝曰 見汝可無病矣

乃命保反 行吉于豆乙以爲副君   

<내물대성신제기> 

 

          

7월, <마아>가 도읍으로 들어와 帝를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제가 말하기를

 

“너를 보니 병이 나은 것 같구나.”

 

이에 <보반>에게 명하여 두을(豆乙)에서 행길(行吉)하게 하고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마아>가 정든 고국을 뒤로하고 고구려로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서기 401년,

 

마침내 영락대제는 그의 귀국을 허락하게 된다. 

 

 

이때 영락대제를 설득한 사람은 그의 여동생이자 <마아>의 처가 된 <두양>이었다.

 

 

<연중兗仲>은 두씨가 낳은 마아의 아들이지만,

 

영락대제 <담덕>의 아들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담덕>의 아들로 신라를 다스리게 하겠으니 <마아>를 돌려주고

 

고구려가 신라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런데 <내물>이 굳이 <마아>의 귀국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역사는 <내물>의 병과 후계가 될 아들들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내물>에게는 장성한 <호동好童>과 <숙단叔丹>이 있었다.

 

 

그리고 굳이 <마아>가 아니더라도 <내물>의 후계가 될 인물들은 무수히 많았다.

 

 

또한 <내물>과 <마아>의 과거 약속 때문이라고만은 보기 힘든 상황이 존재한다. 

 

 

<내물>의 친 아들들이 내물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중 <호동>은 특히 <내물>에게는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마아>의 정적인 <호물>의 전횡이 있었다.

 

 

 

木羊 五月 保反生子實相或曰皇弟好勿通而生也

九月 ......

皇弟好勿 奪阿湌三輿妻芥臣 妻之

帝禁之不得 

<내물대성신제기> 

 

         

목양(395) 5월,

 

<보반>이 아들 <실상實相>을 낳았다.

 

혹 황제(皇弟) <호물>이 사통하여 낳은 것이라고도 한다.

 

9월, ......

 

황제(皇弟) <호물>이 아찬 <삼여三輿>의 처 <개신芥臣>을 빼앗아 처로 삼았다.

 

제가 그러지 말라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보반>은 <내물>의 처이다.

 

그녀가 <호물>과 사통하여 <실상實相>을 낳았다는 것이다.

 

 

<내물>이 <마아>의 귀국을 간절히 원하던 그 시기에,

 

<내물>은 이미 군주로서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물>은 이들을 견제할 사람으로 <마아>를 택했고,

 

또 그와 더불어 고구려의 힘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왕자들의 황음은 겉으로 표현된 것이고,

 

실상은 <호물>을 비롯한 신하들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의 뜻대로 <마아>는 마침내 기나긴 볼모의 세월을 뒤로하고 신라로 귀국하게 된다.

 

 

 

 

5. 낭주우(娘主雨)와 부군우(副君雨)

 

 

上命有司 飽車千輛 而送之曰 親則弟娣 義則父女 往事爾舅 無忝朕顔

天星 四拜而去

宝車香馬 連互百里羅人迎之如天

奈密甚愛公主 而疾愈

 

公主喜曰 妾若早来 則父皇已健矣 恨其晩矣

奈密亦然之 不使公主離側

上聞之大喜連賜医藥珍味冠盖 相連倍於玉帽之時

是年羅旱 及公主入境 大雨而穀登 羅俗號爲 娘主雨  

<영락대제기>

  

          

영락 11년 (401)......

 

상은 유사에게 명하여 천량의 수레를 장식해서 보내며 말하기를

 

“핏줄로 따지면 형제자매이나, 법도로는 아비와 딸이니,

가서 네 시아비를 섬기어 짐의 얼굴을 욕되게 하지 말거라.”

 

천성이 사배하고 물러갔다.

 

보거향마(宝車香馬){보물을 실은 수레와 아름답게 장식한 말}가 백리를 이으니,

신라 사람들이 이들을 하늘처럼 영접하였다.

 

내밀은 공주를 매우 좋아하여 병이 낫게 되었다. 

 

공주가 기뻐 말하기를

 

“첩이 일찍 왔었더라면 부황께서 벌써 건강하셨을 것인데, 늦은 것이 한이 되옵니다.”

 

내밀 또한 그러하다 하며 공주를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여,

의약, 진미, 관개(관복과 수레덮개)를 연이어 하사하시니,

연이은 것이 옥모시절의 배였다.

 

이 해 신라에 가물었는데, 공주가 입경하자 큰 비가 내려 곡식이 여물었다.

 

신라 사람들이 낭주우(娘主雨)라 불렀다.   

 

 

 

十二年 壬寅二月 遣春太子于金城 吊奈密 冊宝金羅主 天星爲羅妃

以天星之長女曉辰爲奈密子訥祇之妻 時年十一  

 

영락 12년(402) 임인 2월,

 

춘 태자를 금성(金城)으로 보내어 내밀을 조상하고,

<보금>을 신라의 主로 <천성>을 신라의 妃로 봉하였다.

 

<천성>의 장녀 <효진曉辰>으로 <내밀>의 아들인 <눌기>의 처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살이었다.   

 

 

 

七月 馬兒入京見帝相扶而泣

帝曰 見汝可無病矣乃命保反 行吉于豆乙 以爲副君

天大雨得以種植 人以爲 副君雨

帝命副君 行大政于大宮

<내물대성신제기>

  

 

(401) 

 

7월, <마아>가 도읍으로 들어와 제를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제가 말하기를

 

“너를 보니 병이 나은 것 같구나.”

 

이에 보반에게 명하여 두을(豆乙)에서 행길(行吉)하게 하고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하늘이 큰 비가 내려 종자를 심을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이 이를 부군우(副君雨)라 하였다.

 

제가 부군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대정(大政)을 보라 하였다.

 

 

 

실성왕 <마아>와 그 처 <두양> 혹은 <천성>의 신라로의 귀국은

내물왕에게는 구원의 화신이었고,

이들의 귀국과 함께 내린 비는 백성들의 삶을 충족케 하였다.

 

그 비를 고구려사에서는 두양이 몰고 온 비라하여 낭주우(娘主雨)라 하였고,

신라사에서는 실성왕이 몰고 온 비라하여 부군우(副君雨)라 하였다.

 

저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지만,

어쨌든 이들의 귀국은 신라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게 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실성>과 <천성>의 장녀를 고구려사에서는 <효진曉辰(392- )으로 기록하고

신라사에서는 <아로阿老>로 기록하였다. 

 

 

 

6. 馬兒의 보복

 

 

卽日 副君行祥于保反宮 卽宝位 是爲實聖帝

實聖在麗 思皈累請代質不得 內懷不平

及卽位 雖以保反爲后而陰有報復之意 分質宝海美海 逐出訥祇

好勿等乃擁訥祇靖之  

<내물대신성제기>

 

 

즉일로 부군이 보반궁에서 행상行祥을 하고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이시다.

 

<실성>이 고구려에 있을 때 돌아오고 싶어

누차 볼모를 바꿔 달라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내심 불평을 품었다.

 

즉위하여 비록 <보반>으로 후를 삼았으나 속으로는 보복할 뜻이 있어,

 

<보해宝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 볼모로 보내고 <눌기>를 내쫓았는데,

<호물> 등이 <눌기>를 호위하여 그를 안정시켰다.

 

 

 

初 奈勿愛其從弟實聖以保反之妹內留妻之

約以相傳骨統使居副君之位

及高麗來侵 逼令副君質之

 

實聖在麗十年 怨心內生

及皈卽祚 不愛奈勿之子 皆質于外

保反及生靑淵 實聖曰 靑淵爾我共生 而訥祇非我生也 冝傳于靑淵 

 

時 內留阿老 黨于天王以諫之曰

訥祇 乃奈勿之正骨也廢之則必有神罰

實聖不聽 使天王出視北路 密令麗人得之

天王在麗軍 有神彩麗將沛世不敢窘之 以其女獻之 使出境上 

<눌기천왕기> 

 

 

애초에 <내물>은 그 종제 <실성>을 아껴서 <보반>의 동생 <내류內留>로 처를 삼고,

서로 골통을 전할 것을 약속하여 부군의 자리에 있게 하였다.

 

고구려가 침공해 와서 부군을 핍박하여 인질로 삼았다.

 

<실성>이 고구려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속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돌아와 즉위하자 <내물>의 자식들을 미워하여 모두 바깥에 인질로 내보냈다.

 

<보반>이 <청연靑淵>을 낳자 <실성>이 말하기를 

 

“<청연>은 너와 내가 함께 낳았지만 <눌기>는 내 소생이 아니니

<청연>에게 전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때 <내류>와 <아로阿老>는 천왕(天王){눌기}의 무리이기에 그에게 간하기를

 

“<눌기>는 <내물>의 정골이니, 그를 폐하면 반드시 신벌이 있을 것입니다.”

 

<실성>은 듣지 않고 천왕(天王)으로 하여금 나가서 북로를 순시케 하고,

 

고구려 사람에게 밀령으로 그를 사로잡게 하였다. 

 

천왕이 고구려 군에 잡혔는데,

 

풍채가 훌륭하여 고구려장수 <패세沛世>가 감히 그를 핍박하지 못하고,

그 딸을 바치고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실성왕 <마아>는 귀국하여 제위에 오르자,

 

보복 차원에서 내물의 두아들을 고구려와 왜로 각각 인질로 보내고,

또 태자 <눌지>를 변방으로 내쫒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역사의 또 한편에서는 실성제가 내물의 두 아들을 인질로 내보낸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실성이 귀국하자마자 이 둘을 모두 내보낸 것도 아니고, 

<보해>는 그 처 <마련>을 따라 고구려로 들어온 것이고,

<미해>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왜가 사위로 맞아들인 것이니,

두 사람이 인질로 간 시기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들이 <실성>의 보복으로 인질이 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된다.

 

 

 

 

7. 고구려로 들어간 寶海

 

 

奈密子宝海來朝 以馬連妻之  

<영락대제기> 

 

(영락 20년,410)

내밀(내물)의 아들 <보해>가 래조하였다. <마련馬連>을 처로 삼아주었다.

 

 

 

二十二年 壬子

七月 馬連上書請還乃召宝海幷入 使居天星舊宮

<영락대제기>

 

영락 22년(AD412) 임자, ......

 

7월, <마련馬連>이 글을 올려 돌아오고 싶다고 청하기에,

<보해>와 함께 들어 오라하여 <천성天星> 구궁(舊宮)에서 살게 하였다.

 

 

 

馬連十四 爲夏太子妃 生子夏陽及宝昜

而夏太子 遊海山不返 爲宝海妻 如羅

宝金强通之 欲納後宮 與天星相妬 而皈宝海

皈爲角彦妻 生子胡彦 

<장수대제기> 

 

<마련馬連>이 열 네살 때 <하夏>태자의 비가 되어

자식으로 <하양夏陽>과 <보양宝陽>을 낳았는데,

<하夏>태자가 해산(海山)으로 놀러나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보해宝海>의 처가 되어 신라로 갔다.

 

<보금>이 강제로 정을 통하고 후궁으로 들이려 하자,

<천성>과 서로 투기하다가 <보해>의 처로 남았다.

 

(고구려로) 돌아와서는 <각언角彦>의 처가 되어 아들 <호언胡彦 >을 낳았다.

 

 

 

 

 

내물왕의 아들인 보해는 복호(卜好)라고도 한다.

 

그가 실성왕의 보복차원에서 고구려에 인질이 되어갔으며,

<박제상>이 그를 탈출시켜 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고구려로 들어간 것은 <실성>이 귀국한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는 점과,

또 다른 기록에서 말하는 것을 감안하면,

<실성>의 보복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그를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고 판단된다. 

 

서기 410년, <보해>가 고구려에 인사드리러오자

영락대제는 <마련馬連>을 처로 삼아주고 같이 돌려보낸다.

 

<마련>이 신라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을 청하게 되자,

남편인 <보해>와 같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실성왕의 보복차원으로 <보해>가 고구려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의 차원에서 <보해>가 <마련>과 혼인한 후,

<마련>이 신라에서 실성의 처인 <천성>과 불화가 생겨,

그 남편인 <보해>와 같이 돌아온 것이니 <보해>는 인질이 아닌 것이다. 

 

그해가 412년이니 <실성>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국한지

무려 10년 후의 일이다.

 

 

 

8. 美海 倭로 가다

 

 

九月 行東明大祭

倭,羅,秦,燕,晉,貊,濟·耶 八國之姬 呈舞吹歌

有國以来 初有之盛典也

上謂倭使曰 爾國僻在海中而誠心朝貢 百有余年 未有小變 可謂忠矣

今日呈舞 可見爾國之俗 皈語爾王 納女後宮 遣子來學 永爲臣民 遍被皇化 可也 

且宝金朕之股肱 其妻吾女也

爾王與莘相婚 而欲圖宝金 決不可矣

自此 亦與宝金和親 而相婚可也

倭乃以美海爲婿 而和親

美海年才十歲也 

<영락대제기> 

 

             

영락 12년(서기402년)  ......  

 

9월, 동명대제를 행하였다.

왜, 신라,秦, 燕, 晉, 貊, 백제, 가야의 여덟 나라의 가희들이

춤을 자랑하고 노래를 부르니, 나라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성대한 의식이었다.

 

상이 왜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외따로 해중(海中)에 있어도,

백여 년을 조금도 변함없이 성심으로 조공하니 충(忠)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금일 춘 춤으로 그대의 나라의 풍속을 알 수 있었으니,

돌아가 그대의 왕에게 말하여 딸을 후궁으로 바치고 아들을 보내 배우게 하여

영원히 신민이 되고 황제의 덕화를 두루 미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보금>은 짐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이고 그 처는 내 딸이다.

 

그대의 왕이 <아신>과 상혼하여 <보금>을 노리고 있으나 결코 용납될 수없는 일이다.

 

이제부터 <보금>과도 화친하여 서로 혼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왜가 <미해>를 사위로 삼아 화친하였는데, <미해>의 나이 10살이었다.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삼국사기 實聖尼師今> 

 

원년(서기402년)

3월, 왜국과 통호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三月 野人自扶余至請交質爲和 

<실성기> 

 

(실성 2년 서기403년)

3월, 야인(野人)이 부여에서 도착하여 볼모를 교환하여 화친할 것을 청하였다.

 

 

金狗 九年 三月帝以訥祇弟美海 爲阿飡

使于野 命內臣沙覽 輔之

野王見而美之 築臺以留之使其女侍之 

<실성기> 

 

                  

금구(서기 410년) 9년

 

3월, 제가 <눌기>의 아우 <미해>를 아찬으로 삼아,

야(野)에 사신으로 보내며 內臣 <사람沙覽>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도록 명했다.

 

野王이 보자 아름답다하여 대(臺)를 만들어 머물게 하고 그 딸로 시중들게 하였다.

 

 

 

 

<미해>는 서기393년 <보반保反>后가 낳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미해>를 <미사흔>이라 기록하고,

실성왕이 등극하자마자 자신을 볼모로 보낸 보복으로

미해(미사흔)를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성>은 비록 자신이 인질로 가게 된 상황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귀국을 내내 힘썼던 <내물>에 대하여 극도의 원한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성왕이 고구려에서 돌아온 해인 서기 402년은

 

고구려가 거란과 후연을 장악하고 대륙에서 그 위상을 한껏 뽐내던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에서 동명대제를 거창하게 지내게 되는데,

내노라하는 나라들이 모두 고구려의 행사에 사신과 가희들을 보내 축하해주는 것이다.

 

그 중 왜는 고구려를 백여 년간 조공하고 섬겼다는 것이고,

 

고구려의 명을 따라 신라와 화친하니 그 위세가 가히 짐작이 되지 않는가?

 

이때의 왜는 한반도 남부 해상세력이 아닌 야마토국을 말하며 

신라사초에는 왜와 구분하여 野王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미해가 야마토국의 사위가 되게 한 것은

신라를 지켜주고자 하는 영락대제의 배려이지 실성왕의 보복이 아니었다.

 

즉, 야마토국이 백제와는 화친하고 신라와는 적대적 관계임을 해결하고자,

영락대제가 야마토국과 신라가 서로 혼인을 맺어 화친하라고 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국이 10살 밖에 되지 않은 미해를 사위로 삼게 되지만,

미해가 야마토로 들어 간 시기는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다.

 

영락대제기에서는 단지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지

미해가 왜로 갔다는 말이 없는데 비해,

삼국사기는 실성 원년에 미해가 왜로 인질이 되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실성기에서는 이보다 훨씬 뒤인 실성왕 9년 410년에 그가 왜로 들어갔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미해가 야마토의 사위가 되는 시점을 인질이 된 시점으로 오해한 것이다.

 

즉, 서기 402년 미해가 야마토의 사위가 되었지만,

이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 미해가 야마토로 간 것도, 또 야마토의 공주가 신라로 온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미해의 나이가 열 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야마토는 신라를 줄곧 공격하였고,

마침내 410년에 신라가 야마토에 굴복하여

미해의 나이 18살에 야마토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9. 전쟁의 발단 <호림好臨>과 <휴례休禮>

 

 

六月 末仇角干以暑痢疾篤 密召大西知 傳其秘藏曰

吾疾而父帝已老可信者唯汝 吾死汝其妻吾妻 而子吾子 以紹花林大統

因命休禮 與大西知同枕而誓 

 

先是 休禮愛末仇兵官好臨密與相通 故欲以好臨爲繼夫而托

以月事而沮之 後数日 末仇竟不起

休禮悲歎 與奈勿禱于靈庙 

 

末仇長子冬九郞常慕休禮之美 自以爲 當爲休禮繼夫 不謹禱事

而反戱于休禮曰父死吾當爲汝夫 何歎之

爲休禮 鄙其人而不與之酬應

及末仇薨 與其弟城九郞假稱末仇遺命 逼休禮 强淫之 

 

休禮泣訴于好臨好臨奏於仙帝 而流冬仇於管城 城九於阿瑟羅

休禮乃請于仙帝欲以好臨爲夫

仙帝以其父微難之 

 

休禮不能自己私引好臨爲夫婦 而同處

大西知不悅曰 嫂當爲吾妻何愛艾少 而負兄遺命乎

休禮曰 吾心欲從汝而好臨乃阿后之寵子也 安得負之乎

大西知發歎而出

奈勿謂休禮曰 父甞言 妻吾妻 子吾子 叔父固當爲母夫 而兵官則不可爲也

休禮曰 母之所夫卽汝父也 汝何以不呼曰父 而稱兵官乎 

 

時 與休禮新夫好臨情好甚密 故奈勿妬之 不稱父而呼以兵官 而侮之

休禮乃請於光明后曰臣子慕聖女 可留宮中

先是 黃馬祭日后召奈勿於道留宮中 同處一夜

時 奈勿九歲 道留七歲而情意相得 不欲相離 故仍留之 及末仇疾篤 而出故也 

 

后知休禮與好臨相愛而遠其子 笑許之曰 汝愛吾弟 忌吾婿乎

休禮慚而退

后召奈勿與道留 置左右而撫之

雛鳳凰 甚可愛休禮不知此樂

及雍判生 后以其乳幷授奈勿 

<박창화필사본 儒禮尼今紀> 

 

             

(유례 9년, 서기 358년) 

 

6월, <말구末仇(297-359)> 각간이 더위로 인한 설사병으로 위독해지자,

몰래 <대서지大西知(314-382)>를 불러 그 비장품을 전하며 말하기를,

 

“나는 병들고 부제{미추(292-362)}는 이미 늙었으니 믿을 사람은 너 뿐이다.

내가 죽으면 그대는 내 처를 처로, 내 자식을 자식으로 삼아

화림대통(花林大統)을 이어나가라.”

 

이에 <휴례休禮(331-399)>에게 명하여 <대서지>와 동침하고 맹세하도록 하였다. 

 

앞서 <휴례>가 <말구>의 병관 <호림好臨(333-367)>을 사랑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기에 <호림>을 계부(繼夫)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다.

 

월경으로 인해 멈추고 있었는데, 수일 후 <말구>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휴례>가 슬피 탄식하며 <내물>과 함께 영묘(靈庙){선조의 사당}에서 기도하였다. 

 

<말구>의 장자 <동구冬九>郞은 항상 <휴례>의 아름다음을 사모하다가,

스스로 당연히 <휴례>의 새 남편이 될 것으로 여겨

기도하는 일에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휴례>를 희롱하며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당연히 너의 남편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니,

 

<휴례>가 그 사람됨을 천하게 여겨 대꾸하지 않았다.

 

마침내 <말구>가 죽자 그 동생 <성구城九>郞과 함께

<말구>의 유언이라 거짓으로 칭하고는 <휴례>를 핍박하여 강제로 겁탈하였다. 

 

<휴례>가 <호림>에게 읍소하니, <호림>이 선제{미추}에게 아뢰어,

<동구>는 관성(管城)에, <성구>는 아슬라(阿瑟羅)에 유배되었다.

 

<휴례>가 이에 선제에게 청하여 <호림>으로 남편 삼기를 원하였으나,

선제가 그 아비의 신분이 미미하여 꺼려하였다. 

 

<휴례>가 자기 감정을 어쩌지 못하여

사사로이 <호림>을 불러들여 부부가 되어 같이 살았다.

 

<대서지>가 화가 나서 말하기를

 

“형수는 당연히 내 처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어린애를 사랑하여 형의 유언을 저버리는가?”

 

<휴례>가 말하기를

 

“내 마음은 그대를 따르고 싶으나, <호림>은 아후(阿后)의 총애하는 아들이니

어찌하여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대서지>가 탄식하며 나가버리니,

 

<내물>이 <휴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처는 내 처요 아들은 내 아들이라’ 하였으니,

숙부가 원래 어머니의 남편이 되어야 하며, 병관은 그럴 수 없습니다.”

 

<휴례>가 말하기를

 

“어미의 남편이 되면 곧 너의 아비인데,

너는 어찌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병관이라 칭하는가?” 

 

이때에 <휴례>와 새 신랑 <호림>과의 사이가 너무 좋아

<내물>이 이를 질투하여 아버지라 칭하지 않고, 병관이라 불러 업신여긴 것이었다.

 

<휴례>가 이에 <광명(324-392)>후에게 청하기를

 

“신의 아들이 성녀(聖女)를 그리워하니 궁중에 두어도 될 것입니다.”

 

앞서 황마제(黃馬祭>의 날에 후가 <내물>을 도류궁에 불러

한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때 <내물(350-402)>은 아홉 살, <도류 道留>는 일곱 살이었고,

서로 좋아하게 되어 헤어지고자 하지 않아 그대로 머무르게 하였는데,

<말구>가 위독해지자 나갔기 때문이다. 

 

后는 <휴례>가 <호림>과 서로 사랑하여 아들을 내쫒으려 하는 것을 알고

웃으며 허락하며 말하기를

 

“네가 내 동생(호림)을 사랑하여 내 사위(내물)를 미워하는구나!”라고하자,

 

<휴례>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后가 <내물>과 <도류>를 불러 좌우에 두고는 어루만졌다.

 

어린 봉황이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휴례>는 이런 즐거움을 알지 못하였다.

 

(광명후가) <옹판雍判>을 낳자, 후가 젖을 <내물>에게도 함께 주었다.

 

 

 

 

실성왕과 눌지왕의 전쟁은 사실 실성왕과 눌지왕을 떠받든 <호물>과의 전쟁이었다.

 

이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윗대의 원한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 둘도 원수가 되어 지내온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갈라지게 만들고 실성왕을 죽음으로 내몬 이 전쟁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한 여인에 대한 남자들의 다툼으로 시작되었으니,

무릇 세상일이란 조그마한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많은 듯하다. 

 

미추왕의 딸이고 내물왕의 어머니인 <휴례>가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말구>가 죽음에 임하여 아내인 <휴례>와 아들인 <내물>을

배 다른 형제인 <대서지>에게 부탁하였는데,

<휴례>가 <말구>의 부하인 <호림>을 좋아하여 <대서지>를 거부하고,

심지어 아들까지 내팽개치고 멋대로 <호림>과 살림을 차려버린 것이다. 

 

<대서지>로서는 황당한 일이고 화가 나는 일이었으며,

<내물>로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대서지>의 아들이 실성왕 <마아>이고, <호림>과 <휴례>의 아들이 <호물>이다. 

 

<내물>이 권좌에 올라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마침내 부군의 일을 맡게 하자

<호림>의 아들인 <호물>이 고구려로 가는 인질로 <실성>을 내몬 것이다.

 

<실성>과 <눌기>의 전쟁은 이로부터 그 불씨가 시작된 것이다.

 

 

 

 

10. 實聖이 訥祗의 처 <아로阿老>를 범하다

 

 

靑兎 十四年 二月帝命太子訥祇 出視北路

三月 帝幸阿老 于仙宮

 

先是 帝累欲幸之命阿老爲枕主

阿老不肯之 乃逐太子于外而使守仙宮

帝日至 而浴于仙池湯殿命阿老洗之

 

阿老知不免 請還太子而受幸

自是 寵隆 出入同座人指之曰仙上宮 

<실성기> 

 

             

청토(415) 14년

 

2월, 제가 태자 <눌기>에게 나가서 북로(北路)를 살피라 명하였다.

 

3월, 제가 선궁(仙宮)에서 <아로阿老(392-?)>를 범하였다.

 

앞서 제는 여러 차례 그녀를 범하려고

<아로>에게 명하여 침주(枕主)가 될 것을 명했으나,

<아로>가 거부하자 마침내 태자를 바깥으로 내쫓고서 선궁(仙宮)을 지키도록 하였다. 

 

제가 매일 와서 선지탕전(仙池湯殿)에서 목욕하며 명하여 <아로>에게 씻기라하였다.

 

<아로>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자의 귀환을 청하며 잠자리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총애가 두터워져 같이 앉아 출입하니,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켜 말하기를 선상궁(仙上宮)이라 하였다.

 

 

 

 

<눌기>태자의 아내이자 자비왕(慈悲聖王)의 어머니인 <아로阿老><실성>이 탐하여 <눌기>를 북로로 쫒아버리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아로阿老>는 <실성>과 <천강>이 낳은 <효진>이다.

 

변변한 세력도 키우지 못한 채 제위에 올랐던 <실성>이 자기의 딸을 탐하는

그야말로 실성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실성>의 빗나간 행태가 주위사람들을 하나하나 적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그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11. 내전(內戰)

 

 

내전의 시작은 413년,

 

<내물>의 아들인 <숙단叔丹(378-?)>을

아슬라 신산(阿瑟羅神山)으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숙단>은 반란을 일으켰고 <호물>이 이에 동조하게 된다.

 

즉, 아슬라(阿瑟羅)가 신라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성>은  태자 <눌기>의 아내를 빼앗고 북로로 쫒아버린 후,

고구려 장수 <패하沛夏>에게 뇌물을 주고 <눌기>를 죽이게 하였고,

<패하>는 무산(毋山)에서 <눌기>를 사로잡게 된다.

 

이때가 415년이었다. 

 

이 위기의 순간이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기(387-458)>의 동생 <보해(390-441>에게 전해졌고,

<보해>는 그에게 정신을 못 차리고 푹 빠져있는 <천강(355-446)>태후를 동원하여

<패하沛夏>를 저지하게 된다.

 

상황은 급변하여 오히려 <패하沛夏>의 군대가 아슬라 반군을 지원하게된 것이다. 

 

당시 <천강>태후가 <보해>를 도운 이유는 <천강>이 <보해>를 사랑하였기 때문이고,

그 사랑의 이유는 <보해>를 <천강>에게 소개한 <작아雀兒>가

<보해>의 처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있다.

 

雀兒曰 今天后好色 如魏,,小杰輩 皆得顯

以都尉覆盆之陽 侍枕 則必得殊寵 言無不聼也

若與沛夏 引軍南下則可以王也 

<천강태후기> 

 

          

<작아雀兒>가 말하기를 

 

“지금 천후(天后)는 호색하여

<위륵>, <장강>, <소걸>과 같은 무리들이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도위(都尉) (보해)의 복분지양(覆盆之陽)으로 잠자리를 모시면,

필히 특별한 사랑을 얻을 것이니 들어주지 않을 말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패하沛夏>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면 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강>은 역사에서 다시 찾을 수없는 희대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보해>의 힘이 되어, 신라의 역사를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時 羅主馬兒 欲害其子

恐國人之不服 賂於沛夏 而欲圖之 盖宝海之同母兄也

海聞之 勸后詔沛夏反助其子 而襲殺馬兒

封爲其君是爲訥兒者也  

<천강태후기> 

 

            

이때 신라의 임금 <마아>가 그 아들을 해치려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패하沛夏>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이루고자하였다.

 

모두 <보해>의 동모형(同母兄)들이었다.

 

<보해>가 이를 듣고 后에게 <패하沛夏>에게 조서를 내리라 권하여,

반대로 그 아들을 도와 <마아>를 습격하여 죽이고,

그 임금으로 봉하니 이가 바로 <눌아訥兒>였다.

  

고구려가 <눌기>를 지원하자 아슬라와 서로군사들이 <눌기>의 반군을 지원하게 된다.

 

힘의 우위를 차지한 <눌기>와 <호물>은 단숨에 신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비운의 임금 <실성>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가게 된다.

  

 

 

訥祇 與沛夏女沛氏皈比烈城

城主好勿 奉之爲君

納尹勅爲宮人乃河期嬖姬也 

 

七月 阿瑟羅諸州皆附好勿

屈戶伊伐飡 達留禀主

帝問 誰可伐好勿者乎河期薦以垢音

沛夏遣其弟沛世 將兵一千助好勿 南侵 

 

九月 垢音降于好勿西路亦多附之

十月 以屈戶 爲正義軍主命伐好勿  

<실성기> 

 

 

(실성 15년, 416년)

<눌기>가 <패하>의 딸 <패>씨와 함께 비열성(比烈城)으로 돌아오자

성주 <호물>이 그를 받들어서 군(君)으로 삼고,

윤칙(尹勅)을 보내 궁인으로 삼으니 곧 <하기河期>의 폐희(嬖姬)였다. 

 

7월, 아슬라의 主들이 모두 <호물好勿>을 따랐다.

 

<굴호屈戶>를 이벌찬, <달류達留>를 품주로 삼았다.

 

제가 묻기를

 

 “누가 <호물>이라는 놈을 벨 것인가?” 하자,

 

<하기河期>가 <구음垢音>을 추천하였다.

 

<패하沛夏>가 동생 <패세沛世>를 보내 장병 1천으로 <호물>을 도와 남침하였다. 

 

9월, <구음>이 <호물>에게 항복하자 서로(西路) 역시 상당수 그를 따랐다.

 

10월, <굴호屈戶>를 정의군주(正義軍主)로 삼아 <호물>을 치라 명하였다.

 

 

 

赤蛇 十六年 正月京都大亂 訛說相傳 逃亡者多

釋河期等 以爲京師軍主所頭上

武謁伊伐飡 熊達禀主 

 

三月 屈戶戰敗死 帝大懼請和

四月 垢音叔丹等進圍京師 命河期禦之

西路軍主一同戰敗死 

 

五月 伊飡奈己奉保反后密詔 與河期進思等 開門納太子于城中

帝知天命已去與沙沙寵花等 出奔狼山 

<실성기> 

 

             

적사(417) 16년

 

정월, 경도(京都)에 큰 난리가 나자 유언비어가 돌고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하기河期> 등을 석방하여 경사군주(京師軍主)로 삼으니 두상(頭上)의 지위였다.

 

<무알武謁>을 이벌찬으로, <웅달熊達>을 품주로 삼았다. 

 

3월, <굴호>가 패하여 전사하자 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화해를 청하였다.

 

4월, <구음>, <숙단> 등이 진격하여 경사(京師){도읍}를 포위하자

<하기>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했다.

 

서로군주(西路軍主) <일동>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5월, 이찬 <내기奈己>가 <보반>후의 밀조를 받들어

<하기河期>, <진사進思> 등과 함께 문을 열고 태자를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제는 천명이 이미 떠났음을 알고

<사사沙沙>, <총화寵花> 등과 함께 낭산으로 달아났다.

 

이후 <실성>은 낭산(狼山)에서 화친을 청해보았지만 거절당하고,

식량도 다하고 빠져 나갈 길도 없자 마침내 성문 위에서 떨어져 자살하게 된다.

 

그렇게 신라사에 기록되어있고, 

반면에 고구려사에서는 그가 독살되었다고 하는데,

전후사정을 보아 신라사의 기록에 믿음이 간다.  

 

 

四年 丁巳 五月 訥祇殺宝金 而自立

正月 宝金使訥祇曉辰入朝 賂于邊將而害之

邊將恐朝廷 而不敢害之事遂發 

 

上命評部賓部 治其罪

訥祇含而皈之 與天星共謀 而鴆金

宝金有寵姬 生子故也

 

上欲治訥祇 春太子諫止之

訥祇甞以天星女三人 爲室 而私天星云 

<장수대제기>

 

               

4년(AD 417) 정사

 

5월, <눌기>가 <보금>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정월에 <보금>이 <눌기>와 <효진>을 보내 입조케 하고,

변장(邊將)에게 뇌물을 주어 해치라 하였는데,

변장(邊將)이 조정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였고, 일은 마침내 발각되었다.

 

상은 평부(評部)와 빈부(賓部)에 명하여 그 죄를 다스리라 하였는데,

<눌기>는 이를 감추고 돌아가서 <천성>과 공모하여 <보금>을 짐새독으로 죽였다.

 

이때 <보금>의 총희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상이 <눌기>의 죄를 다스리려 하였으나, <춘> 태자가 간하여 그만두었다.

 

<눌기>는 일찍이 <천성>의 딸 셋을 아내로 삼고, <천성>과도 사통하였다고도 한다.

 

 

 

 

12. 實聖의 비참한 말로

 

 

실성왕이 <눌기>와 <호림>에게 패하여 낭산으로 들어간 후,

목숨을 구걸해보지만 용납되지 않자,

마침내 문루에서 떨어져 자결하게 된다.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그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도 않았다가,

뒤늦게 <성명>과 <아로>의 간청으로 다행히 장례를 치룰 수 있게된다.

 

 

 

帝使享叔 請和曰可得南路 以終天年

太子曰 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而已

帝乃脫圍欲逃而左右無可爲者 侍妾多越城而走

 

至重五日 粮盡

帝謂沙沙等曰 汝等年少可事新主 朕當自處以贖之 

乃登門樓 墮之 左右號哭

好原等乃入城中 盡搜帝寶及沙沙等 献于太子

保反后乃命太子卽祚大宮 

 

天大雨暴風群臣以爲先帝之崇

乃使阿老聖明祭先帝于豆乙宮

命好原 收帝魄于狼山

七日 流久味等十五人于阿瑟羅神山

以河期 爲摠行匝判 大赦國中

 

九月 葬帝于狼山

先是 河期怨帝 曝帝魄于仙臺之庭 以爲亂軍偸去 

時 聖明得寵有娠夢見帝在仙臺木奴花下 而泣

聖明乃泣訴于王曰吾母亦以實聖之妃 受幸于聖父而生我

兄何怨姊 而不葬叔乎 恐有不祥于吾腹兒 

盖阿老不能自訴故使之言也

 

王乃搜木奴花下 得帝魄玉體不變如初

乃具棺槨 備禮而葬之

賞收魄老嫗母子以布穀 

<실성기> 

 

 제가 <향숙享叔>을 보내 화해를 청하며 말하기를

 

“남로(南路)를 얻어 천수를 다하게 해 달라.”

 

태자가 말하기를

 

“임금의 자리는 사사로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가진 자가 지킬 뿐인 것입니다.” 

 

제가 이에 포위를 뚫고 달아나고자 했으나, 좌우에 할 수 있는 자가 없었고,

많은 시첩들이 성을 넘어 달아났다.

 

5월 5일에 이르러 양식이 다하자,

 

제가 <사사>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이가 어리니 새로운 주인을 섬길 수 있으리라.

짐은 곧 속죄를 위해 자결할 것이니라.” 

 

마침내 문루에 올라가서 투신하니 좌우가 모두 목 놓아 슬피 울었다.

 

이에 <호원好原> 등이 성안으로 들어가서

제의 보물 및 <사사> 등을 모두 찾아내어 태자에게 바쳤다.

 

<보반>后가 이에 태자에게 대궁에서 즉위하라 명하였다. 

 

하늘에서 폭풍과 큰비가 내리자, 신하들이 선제를 기리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아로>와 <성명聖明>으로 하여금 두을궁(豆乙宮)에서 선제를 제사하라 하고,

<호원>에게 명하여 낭산에서 제의 시신을 수습하게 하였다.

 

5월 7일, <구미久味> 등 열 다섯 명을 아슬라 신산(神山)으로 유배시키고,

<하기河期>를 총행잡판(摠行匝判) 으로 삼고 온 나라에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9월, 제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앞서 <하기>가 제를 원망하여

제의 시신을 선대(仙臺)의 뜰에 버려두자 반란군이 훔쳐갔다.

 

이때에 <성명聖明>이 사랑을 받아 임신 중이었는데,

꿈에 제가 선대(仙臺)의 목노화(木奴花)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성명聖明>이 이에 왕에게 읍소하여 말하기를

 

“내 어머니{내류} 또한 <실성>의 비로서 聖父{내물}를 수행하여 나를 낳았습니다.

오라버니는 어찌 어머니를 원망하고 숙부를 장사지내지 않습니까?

내 뱃속의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아마도 <아로>가 직접 하소연 할 수 없었기에 그녀를 시켜 말한 것이리라.

 

왕이 이에 목노화 아래를 수색하여 제의 시신을 찾으니,

옥체는 예전과 같이 변함이 없었다.

 

이에 관곽을 구비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시신을 거둔 노파 모자에게 베와 곡식을 상으로 주었다.

  

시신마저 버려져 하마터면 장례도 치르지 못할 뻔했던 실성왕,

 

과연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까?

 

 

 

五月 帝謂保反曰 句麗之冨强無他也 政在于男子也

我國貴骨母政多出婦人之手 不能强也

我爲爾夫 爾與我一體也自今使我爲政 當似如句麗之强也

保反曰 汝若在我何事不從乎 自今任汝爲之也

於是 帝大更舊制多設新官 宗臣多不便之 

<실성기> 

 

         

(실성 원년, 서기402년)

 

5월, 제가 보반에게 말하기를

 

“구려(고구려)의 부강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자가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는 골모를 존중하여 정사가 대부분 부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에

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대의 남편이 되었으니 너와 나는 한 몸이라.

지금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하게한다면 당연히 고구려처럼 강해질 것이다.”

 

보반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보살펴준다면, 무슨 일이든 따르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그리하도록 너에게 맡길 것이다.”

 

그리하여 제가 옛 제도를 크게 바꾸어 새로운 관리들을 두게 되니,

많은 종신들이 이를 불편해하였다.

 

 

 

실성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있는 동안,

그들이 왜 대륙을 호령하며

강대국으로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의 결론은 신라사회가 모계를 중심으로 한 사조직으로 인하여,

나라의 힘이 한 곳으로 모이지 못하였기에 약소국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원의 나라들이나, 고구려가 이미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하고

군사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마당에,

신라나 신라의 주변국들은 여전히 그러하지 못했다. 

 

하지만 즉위하자마자 시도한 갑작스러운 개혁은 많은 반발을 감수하여야 했다.

 

그 감수할 힘이 부족하면 실패하는 것이다.

 

실성왕이 죽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3. 訥祗 마립간(麻立干)의 등극

 

 

乃卽宝祚曰 我朝宗 傳國以來 唯以禪讓 未有相伐

至寡人之世 始征不義寡人之過也

乃以阿老爲后 使其子得立以慰實聖之靈 大哉王謨 

<눌기천왕기>

 

 

마침내 즉위하며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이 나라를 전해온 이래로 오직 선양(禪讓)만하였을 뿐,

서로 공벌한 일은 없었다.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불의(不義)를 토벌한 것은 과인의 허물이다.”

 

이에 <아로阿老>를 후(后)로 삼고,

그 자식들로 하여금 존립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실성實聖>의 영혼(靈)을 위로하였다.

 

 

크도다, 왕의 계책이여!

 

왕은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孝友)하며 자애로웠으니

선골(仙骨)의 상하가 모두 흡족해 마지않았다.

 

진원(眞元)과 천문(天文)에 통(通)하였고,

신체가 대단히 컸으며 대력(大力)을 가져서 능히 큰 활(大弓)을 당길 수 있었고,

한 번의 식사에 꿩 5마리를 먹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백마를 타고 성안(城中)을 순시하니

아동들이 모두 그가 천왕(天王)임을 알고 다투어 그를 좇아 달렸다.

 

왕은 대체(大體)를 지녀서 편애(偏愛)하지 않는 까닭에

비빈(妃嬪)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았고, 군신(群臣)들은 저절로 서로 화목하였다.

 

자녀(子女) 수백 명이 모두 준예(俊乂)하고 영웅(英雄)이어서

능히 왕업(王業)을 떠받칠 수 있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원년(元年)은 적사(赤蛇 정사417)의 해이다.

 

 

 

신라왕들에 대한 칭호는 매우 다양하게 기록되어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립간이다.

 

그 마립간의 의미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訥祗麻立干立

(金大問云麻立者 方言 謂橛也 橛謂諴操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눌지 마립간이 등극하였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은 방언으로 궐(橛)을 말한다.

궐(橛)은 함조(諴操)를 일컫는데, 등급에 따라 설치하는 것으로,

왕궐(王橛)이 주가 되고 신궐(臣橛)은 그 아래에 배열하였기에 이름 한 것이다.”)

 

또한 이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신라 역사에서는

눌지를 시작으로 자비, 소지, 지증까지 4대가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삼국사기>

 

논하기를,

신라왕은 거서간을 칭한 이가 하나, 차차웅이 하나,

이사금이 열여섯, 마립간이 넷이다.

 

거서간은 혁거세 1명, 차차웅은 남해 1명

이사금은, 유리에서 실성까지 16명,

마립간은 눌지에서 지증까지 4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박창화 필사본에서도 이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눌지(눌기)부터이며,

또한 이 칭호가 신라의 북부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元年 赤蛇之年也

二月 比列城主好勿奉王子訥祇 爲神國大王 稱麻立干 北方盡應之 

<눌기천왕기>  

      

 

눌기 원년, 적사(정사417)의 해이다.

 

2월, 비열성주 <호물>이 왕자 <눌기>를 받들어 신국대왕(神國大王)으로 삼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하니 북방이 모두 그에 호응하였다.

  

 

王與太太小太上宮謁聖母祠

自告訥祇麻立干乃神國大日大王 又天王之義也 

<눌기천왕기> 

 

 

왕은 태태궁, 소태궁, 상궁과 더불어 성모사(聖母祠)를 배알하여,

자신을 고하기를 눌기마립간이라하고, 또 신국대일대왕(神國大日大王)이라하니,

또한 천왕(天王)이라는 뜻이었다. 

 

 

※ 참고

 

대일(大日)이라는 말은 이전부터 사용된 말로 하늘(天)을 뜻하는 말이다.

  

 

 

실성왕 시절, <호물>이 아슬라에서 <눌기>를 받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주인을 실성왕을 칭하는 이사금과 구별하여 마립간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즉, 실성은 실성이사금, 눌기는 눌기마립간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말한 것처럼,

신라에는 눌기마립간,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지증마립간,

이 네 분의 마립간이 존재할 뿐이며,

내물과 실성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