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대제(374-412) 24년 {AD414} 갑인,

 

5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溫湯)에 갔다.

 

6월엔 국양릉(國襄陵)을 찾아뵙고 비류(沸流)의 온탕궁(溫湯宮)에서 머물다가,

병이 들자 두 后와 동궁 및 두 妃를 불러서 전위하였다.

 

동궁은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 북도(北都)의 주유궁(朱留宮)에서 즉위하였다.

 

7월에 상이 주유궁(朱留宮)에서 춘추 39세에 죽자, <평양平陽>후도 따라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영락대제 담덕이 죽은 해는 412년이고 장수대제 거련이 즉위한 해는 414년이다

 

 

 

전해오길 제의 휘는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 하고, <영락제>의 둘째 아들이다.

 

<평양>후가 꿈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보고나서 낳았다.

 

걸출한 우두머리 같아 보였으며 모든 이에게 인자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백성을 아꼈고, 경적과 사서에 통달하였으며 예절을 익혔고,

장수와 병사를 아주 적절하게 통솔하였으며 특이한 지략도 있었다.

 

때가 되어 즉위하니 스물 한 살이었다.

 

 

 

원년{AD414} {갑인},

 

8월, <토吐>후를 태후로, <천강天罡>을 상태후로,

<천룡天龍>妃와 <삼산三山> 妃를 좌·우 后로 삼았고,

태보 <붕련朋連>을 연왕(燕王)으로 삼아 남소(南蘇)를 지키게 하였으며,

<연도淵鞱>를 태보로, <해성觧猩>을 좌보로, <춘春>태자를 우보로,

<연비淵鞴>를 중외대부로, <서구胥狗>를 주병대가로,

<용덕勇德>을 좌장군으로 삼았다.

 

9월, 대행을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춘春>태자가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상이 <천강天罡>后 및 <토吐>후와 더불어 란궁(鸞宮)에 들어가

란(鸞)새에게 먹이를 주었더니

8월 이래로 누런 란새들이 란궁(鸞宮)에 모여들더니 날아가지 않았기에,

다시금 서도(西都)에 거하게 되었다.

 

<천강天罡>과 <천룡天龍>은 좌궁에 기거하게 하고,

<토산吐山>과 <삼산三山>은 우궁에 기거하게 하였다.

 

상은 또한 모후를 생각하여서 <마馬>·<호胡> 두 누이를 궁중으로 들어오라 불렀더니,

멀리에서 무시로 복을 빌었다.

 

10월, 두 太后와 함께 대행의 릉을 배알하고

사천(虵川)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아서 <천룡天龍>后에게 주었다.

 

이날 저녁에 <천룡天龍>后가 승은을 입어 아이가 생겼다.

 

12월, 눈이 다섯 자나 되게 내리자,

상이 <천강天罡>을 좌궁(左宮) 유황전(乳凰殿)으로 찾아뵙고

<호태瑚太>공주를 업어 주어 위로하였다.

 

<천강天罡>이

 

“산골짜기에 눈이 가득한데 어찌 무덤을 찾으셨습니까?”라 하니,

 

상은

 

“마을에 눈이 가득한데 어찌 백성을 구휼하고 계십니까?”라 하였고,

 

이에 <천강天罡>은 고마워하며,

 

“60 먹은 늙은 여자가 폐하에게 미칠 수는 없음입니다.”라 하였다.

 

 

 

-  장수왕의 아버지 <용덕勇德(377-457)>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박창화 필사본 장수대제기에서는 영락대제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五月 命晃太子追尊勇德爲帝

晃 以爲密事不可發而諫之 

 

(464년) 5월, 황태자에게 명하여 <용덕勇德>을 제로 추존하라 하였는데

<연황淵晃>은 밀사(密事)를 발설할 수는 없다고 간하였다.

 

<용덕勇德>은 누구이며 또 왜 장수대제가 그를 제(帝)로 추존하려 하였을까? 

 

장수대제의 아버지는 영락대제인<담덕談德>이 아니고

동모제(同母弟)인 <용덕勇德>이다.

 

박창화 필사본 소수림대제기에서는

서기 377년 천강후(天罡后)가 <용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罡后生子勇德”이라고만 하여,

통상 임금의 아들일 경우 붙는 태자 혹은 왕자라는 명칭이 없다.

 

즉, 그가 소수림대제의 아들이 아니라

<이련伊連(342-391) >{고국양대제}의 아들일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장수대제의 아버지가 <용덕>이고 그 <용덕>이 소수림제가 아니라

고국양대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장수대제가 등극하게 된 사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A) 소수림 → 담덕 → 탑 태자

B) 이련 → 용덕 → 거련 

 

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오는데,

 

<천강>이 사랑한 사람은 <이련>{고국양대제}이었다.

 

그 결과로 소수림대제가 后와 <이련>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천강>은 <담덕>이나 그의 아들 <탑> 태자가 제위를 이어받는 것을

그리 탐탁해 하지 않았으며,

결국 <탑> 태자 대신 <거련>을 제위에 올리는데 성공하였으니

이는 <거련>이 <이련>{고국양대제}의 손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장수대제는 친아버지가 <용덕>이라는 사실을 임금이 된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알게 된 후에도 상당기간 그 진실을 마주하기를 꺼려하였다.

 

 

上如勇德祀 惻然良久命改勇德陵

以胡景 爲越王

漸老 容皃聲音 盖肖勇德

寬勤腆實之性 亦似勇德

食性亦頗相似龍彦¹ 

 

以爲癸巳五月 勇德因驟雨 躍入平昜宮

因宮之午睡 而潛烝而生帝

平昜畏永樂之怒 而諱之云

馬連胡連² 亦甞有聞云

上常疑其眞假 至是遂有尊勇德之意

<장수대제기> 

 

            

상이 용덕사(勇德祀)에 가서 한동안 측연하게 있다가 명하여

용덕릉(勇德陵)을 고치라 하였다.

 

<호경胡景>을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상은 점차 나이가 들면서 용모와 목소리가 모두 <용덕>을 닮고,

너그러움, 부지런함, 착함과 정성스러운 성품 또한 용덕을 닮았으며,

식성 또한 상당히 <용덕>과 비슷하였다. 

 

계사년(393년) 5월, <용덕>이 소나기로 인해 평양궁(平昜宮)으로 뛰어들었고,

궁(宮)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에 몰래 증하여 제를 낳았다 하는데,

<평양>이 영락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이를 숨겼다고 한다.

 

<마련馬連>과 <호련胡連> 또한 옛날에 들은 적이 있다고 하니,

상이 항상 그 진위를 의심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마침내 <용덕>을 존 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광개토호태왕(영락대제)의 동복동생인 용덕이 소나기를 피한다고

하필이면 황후의 궁전으로 들어갔다가

낮잠 자던 <평양> 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 <거련>{장수대제}라는 말이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졌으면 장수대제는 황위를 승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장수대제는 아버지 <용덕>을 추존하여 제(帝)로 받들려 하였으나,

<연황淵晃>이 이 사실은 끝까지 숨겨야한다고 추존을 반대하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