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2년 황마(黃馬:무오418)

 

 

2월, 왕제(王弟) <보해宝海>가 <제상堤上>과 더불어

 

고구려를 탈출하여 국경에 이르렀다.

 

 

때에 <거련(巨連>은 남하(南下)하여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자하여

 

우리에게 부여(扶余)를 침탈하도록 권했다.

 

 

<제상堤上>이 이에 미녀와 보화를 <거련巨連>에게 바치며 말했다.

 

 

“소국(小國)은 동쪽에 야인(野人)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여(扶余)와 접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성심을 다해 상국(上國)을 섬김으로써 인민을 보전코자 합니다.”

 

 

<거련巨連>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장차 부여(扶余)를 토벌함으로써 네 나라의 원한을 갚아 주리라.”

 

 

<제상堤上>이 이에 <보해宝海>를 시켜 <거련巨連>을 설득하여 말하도록 했다.

 

“신(臣)은 상국의 종녀(宗女)를 처로 맞이함으로써 자식 3인을 낳았으니

 

다시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원컨대 돌아가서 신의 형을 설득함으로써 부여(扶余)를 침공하여

 

남쪽 땅을 상국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련巨連>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허락하였다.

 

 

7월에 보해(宝海)가 돌아왔다.

 

이에 앞서 <거련巨連>은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나

 

참언을 듣고는 다시 그를 추격했다.

 

 

이에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와 달이홀(達已忽)의 수구(水口)에 이르렀는데

 

추격자는 <제상堤上>에게 금(金)을 받고

 

(촉을 뺀) 빈 화살로 그를 쏘았으므로 맞지 않았다.

 

 

마침내 아슬라(阿瑟羅)로 들어와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돌아왔다.

 

 

왕은 교외에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태후(太后)를 뵙고 나자,

 

크게 잔치를 열어 공로(功)를 포상하였다.

 

 

<보해宝海>를 잡판(匝判)으로 삼아 골문(骨門) 두상(頭上)으로 하였다.

 

 

9월, <제상堤上>은 <미해美海>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 처를 보지도 않고 야국(野國)을 향해 출발했다.

 

 

<치술鵄述>은 그 때에 궁중에서 황아(皇我)를 낳았는데 그 출발소식을 듣자 뒤쫓아 가

 

장사(長沙)에 이르러서 그를 불렀으나 (제상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듣고는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문(望德寺門) 남쪽의 모래사장(沙上)에 이르자 벌렁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그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沙)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곁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 부인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그대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사당(祠堂)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 박제상의 징심록(澄心錄)

 

 

징심록(澄心錄)은 신라 18대 실성왕(재위402~417) 때

 

<박제상朴堤上(363-422) 선생이 저술한 고대(古代)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이고,

 

금척지(金尺誌)는 그의 아들인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 (414~?)>이

 

저술한 고대 역사 선가서이다.

 

 

<박제상>은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이며,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징심록(澄心錄)은 박제상이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때 열람한 자료들과

 

가문(家門)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서(秘書)들을 종합하여 저술한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로서, 총 3교(敎) 15지(誌)로 구성되어 있다.

 

 

상교 : 부도지(符都誌),음신지(音信誌),역시지(曆時誌),천웅지(天雄誌),성신지(星辰誌)

 

중교 : 사해지(四海誌),계불지(禊祓誌),물명지(物名誌),가악지(歌樂誌),의약지(醫藥誌)

 

하교 : 농상지(農桑誌), 도인지(陶人誌), 나머지 3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징심록(澄心錄)의 상교(上敎) 중 제1지(誌)가

 

오늘날 전해 내려오고 있는 부도지(符都誌)로서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와 신라 초기역사를 적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이다.

 

 

음신지(音信誌)는 소리와 뜻 전달을 의미하는 음신(音信)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원시 한글인 가림토가 실려져 있다고 보인다.

 

 

김시습 선생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하였다고 했는데,

 

바로 이 음신지(音信誌)에서 취한 걸로 보인다.

 

 

역시지(曆時誌)는 역법(曆法, 달력)에 관한 책이며,

 

천웅지(天雄誌)는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에 관한 책이며,

 

우리민족 고유의 도(道)를 이르는 것이다.

 

 

성신지(星辰誌)는 별자리에 관한 책이며,

 

사해지(四海誌)는 영토 지리에 관한 책이며,

 

계불지(禊祓誌)는 제사 의식 행사에 관한 책이며,

 

물명지(物名誌)는 동식물 등에 관한 책이며,

 

가악지(歌樂誌)는 음악 율려에 관한 책이다.

 

의약지(醫藥誌)는 의학에 관한 책이며,

 

농상지(農桑誌)는 농사에 관한 책이며,

 

도인지(陶人誌)는 도자기 제조에 관한 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지식인이며,

 

나이 5세에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은 김시습 선생은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를 직접 읽고

 

그 유래와 내용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놓은 징심록(澄心錄) 추기(追記)를 썼다.

 

 

이는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의 문헌적 가치를 현대에 고증해주는

 

유일하고도 귀중한 문헌으로, 그 내용을 대략 소개하면 이렇다.

 

 

징심록(澄心錄)은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지은 것으로,

 

영해 박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 천여 년이 되었으니,

 

그 귀하고 소중함이야말로 어떠하겠는가.

 

 

박제상 선생은 진리(眞理)를 꿰뚫은 자요,

 

원만하게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징심록(澄心錄)의 기록은

 

옛 역사에 뿌리를 둔, 도(道)를 깨달은 정각자(正覺者)에게서 나온 것이다.

 

 

징심록(澄心錄)은 멀리는 태고(太古)의 일에 관계되고,

 

넓게는 우주(宇宙)의 일에 관여 되어, 그 광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며,

 

동방 창도의 역사와 하토 변이의 기록이 들어 있다.

 

 

신시(神市) 이래 왕의 설과 유호씨 전교의 일에서 천하의 모든 법이 나왔는데,

 

이는 유·불·도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의 역사요 사상이다.

 

 

박제상 선생의 집안은 금척(金尺)을 보유한 연리지가(硏理之家)로서

 

가문의 전통에 특별한 이치가 있는데,

 

이것은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의 전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천웅도(天雄道)는 금척(金尺), 곧 천부경(天符經)의 도(道)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민족 고유의 도(道)이다.

 

 

사람들이 해가 동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것만 알고

 

서쪽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모르니,

 

이는 소위 징심록(澄心錄)이 말하는, 눈이 너무 밝기 때문이다.

 

 

지금 한 사람이 밤중에 눈을 감고 해의 뒤를 따른다면,

 

반드시 이 해가 서쪽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것이니,

 

편견을 버리고 또 대지와 산천이 공중에 떠서 함께 도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쪽이 바로 서쪽이요,

 

서쪽이 바로 동쪽이 되어 마침내 동서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때에 곧 원만한 깨달음(圓覺)을 얻을 것이다.

 

 

사물을 성찰하여 증리하는 진법과 신라가 금척(金尺)과 옥적(玉笛)을 쓴 것은

 

상고(上古) 시대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태고불역(太古不易)의 진법이라 할 수 있다.

 

 

신라 52대 효공왕 때,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으므로, 영해 박씨 종사(宗嗣) <박문현朴文鉉(810-?) 선생은

 

선세 입언(立言)의 전통을 계승하여,

 

100세의 고령으로 조정에 나가 세론(世論)을 환기시켰다.

 

 

“신라를 세운 근본은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하는 데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榮華)를 도모해서는 안된다.

 

이는 입국(立國)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本意)를 잊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은 곧 사해(四海)의 공도(公都)요,

 

일역(一域)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군의 후예는 모든 종족의 심부름꾼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根本)이, 다른 나라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태워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옳다.”

 

 

이에 국론(國論)이 크게 바로잡히고 조정이 숙연해져, 왕위(王位)가 바로잡혔다.

 

 

이로써 가히 징심록(澄心錄)의 유래를 추측할 수 있으니,

 

소위 입언(立言)이란 것은 반드시 금척(金尺)의 수리(數理)에 있으며,

 

그 근본은 곧 천부(天符)의 법이다.

 

 

금척(金尺)을 금으로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尺]로써 제작한 것은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금척(金尺)의 형상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선 것 같으며,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節)로 된 다섯 치이다.

 

 

그 허실(虛實)의 수(數)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數)다.

 

 

능히 천지조화의 근본을 재고, 인간 만사에 이르기까지 재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죽은 사람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신기(神器)이다.

 

 

금척(金尺)을 가지고 있던 박혁거세 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능히 왕으로 추대된 것은,

 

그 혈통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있었기 때문이며,

 

금척(金尺)이 오래 된 전래물임을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꿈에 금척(金尺)을 얻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으며,

 

세종대왕이 박제상공의 후예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은 당연한 바가 있는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하였음에랴!

 

 

아, 변하지 않는 진리(眞理)의 법(法)이 안개에 싸여,

 

인간세상의 풍파 중에 엄마 뱃속 아기처럼 감추어져 있어진 징조가 있어,

 

백성이 태어난 시원(始原)의 역사가 누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비밀스럽게 전해져 고요하고 적막한 채 아무 소리도 없으니,

 

박제상 선생의 집안은 참으로 오랜 옛날 별천지의 씨족이라.

 

 

대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니,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로써 가히 백결선생의 도풍(道風)과 가법(家法)을 볼 수가 있으며,

 

상고(上古)에 있었던 도(道)가 이어 내려온 세상 일부분의 모습을 엿보기에 족하니,

 

읍루씨가 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혼탁한 세상에서 이름을 끊어버린 것이 역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