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대제7년{AD420년}갑인,

 

3월, <전지>가 죽고 <구이신>이 섰기에 <연식淵息>을 보내서 조문하였다. 

<장수대제기>

 

 

전지왕 16년(420년) 봄 3월에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應神 25년 백제의 直支王이 죽었다.

 

그래서 久爾辛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木滿致가 국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王母 八須부인과 통정하는 등 횡포한 짓이 많았다.

 

천황이 이를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일본서기>

 

 

위의 기사에 이어서 일본서기는 “百濟記”를 인용한다.

 

“목만치(木滿致)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여성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 아비의 공적으로 임나(任那)의 업무를 담당했다.

 

백제에 온 뒤 귀국(貴國){야마토}을 왕래했다.

 

야마토 조정으로 부터 직제를 받아, 백제의 중책을 맡았다.

 

권세가 한창일 때 야마토 조정이 그 횡포함을 알고 소환하였다.”

 

 

 

 

의희(義熙) 12년(420년) 고조(高祖)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

 

<여영餘映>{전지왕}을 진동대장군(進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남송 少帝 景平二年 (424년) <영映>이 長史 <장위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원가(元嘉) 2년(425년)에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황제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알린다.

 

(백제)는 누대로 충순하고 바다를 건너 정성을 바치고.(후략)"

 

 

원가(元嘉)7년(430년) 백제왕 <여비餘毗>가 공물을 보내니

 

<여영餘映>에게 주었던 직함을 <여비餘毗>에게 주었다.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 일본서기는 전지왕이 420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송서 백제전은 전지왕이 424년에 조공하였다고 기록하였고,

 

425년에는 전지왕에게 조서를 내린 것으로 보아

 

전지왕은 <목만치>와 <팔수八須>의 모반으로 잠시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423년에 복위하여 427년 <비유毗有(412-455)>에게 선위하고 산으로 들어간다.

 

 

전지왕은 제왕의 길보다 철학적 사유를 더 사랑했던 왕이었다.

 

 

전지왕의 왕후 <팔수> 부인은 스님같은 제왕보다 신하인 <목만치>의 매력에 빠져

 

그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그녀의 아들인 <구이신>을 세우고 정권을 오로지하다

 

3년 후인 423년 전지왕과 해씨 세력에 의하여 다시 전지왕이 복위 하게된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전지왕은 해씨 부인의 소생인 <비유>에게 선위하고

 

奈良縣 葛城市에 치은사(置恩寺)를 세우고 승려로 살았다.

백제 腆支王의 일본이름이 큰 부처라는 뜻의 오오호도(意富富杼)이며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제왕의 자리보다 승려를 원하였다.

 

 

그는 왕좌를 버리고 奈良의 치은사(置恩寺)에서 승려로 살았으나

 

서기 432년 고구려의 允恭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한 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윤공(允恭)천황은 개인적으로 큰 부처님 오오호도意富富杼의 매제가 된다.

 

404년 백제의 아신왕은 맏딸 인판대중(忍坂大中女命)을 고구려에 바쳤다.

 

그녀는 腆支王 (意富富杼王) 의 친 누이이다.

 

고구려는 그녀를 고구려의 왕자 <고진高珍>의 배필로 삼았는데

 

<고진>이 일본을 점령하고 윤공(允恭)천황이 된 것이다.

 

 

백제의 인덕(仁德)천황과 이중(履中)천황 부자가 전사하였고

 

<고진高珍>은 난파(難波)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다.

 

 

매제(妹弟) <고진高珍>이 입성한 서기 432년,

 

奈良에 있는 치은사(置恩寺)의 큰 부처 오오호도意富富杼王는 사망했다.

 

 

 

혁명적인 역사의 현장에 있던 황후 인판대중(忍坂大中女命)의 힘으로도

 

친 오빠 오오호도意富富杼王를 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腆支王의 “腆支”라는 단어가 역사의 침식을 견디고 錢取塚의 “錢取”로 남아 있다.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이총고분(二塚古墳)이 있다. 보통 전취총(錢取塚)으로 불린다.

 

 

전취총(錢取塚)으로 불리나 전지총(腆支塚)일 것이다.

 

고분 규모는 전장 60m, 후원부경 36m, 전방부폭 41m로 높이 10m의 전방후원분이다.

 

1개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3개나 설치된 것이 이 고분의 특징이다.

 

 

423년 <구이신久尓辛(405-480?)>은 <목만치木滿致>와 <팔수八須>부인의

 

몰락과 함께 실각되어 남송으로 피신했다가 467년 일본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실각된 뒤 4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도 이미 노령이었다.

 

 

일본서기 雄略 11년 秋七月 (477년) 백제국에서 도망해 온 자가 있다.

 

구이신(貴信)이라 하며 吳나라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 백제의 중원 진출

 

 

1. 도이((島夷) 유유(劉裕)의 남송(南宋) 건국

 

 

서기 420년 남송(南宋)의 高祖 <유유劉裕>가 황제가 되자

 

백제왕의 관직을 진동장군(鎭東將軍)에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올렸다.

 

 

송(宋)은 <유유劉裕>동진(東晋)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로서,

 

입국(立國)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된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5 도이(島夷) 유유전(劉裕傳)에는

 

<유유劉裕>를 도이(島夷)로 적었는데,

 

위서(魏書)에 <유유劉裕>를 도이(島夷)로 적은 것은

 

<유유劉裕>의 출신을 왜(倭) 또는 백제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기(史記) 하본기( 夏本紀)에는 회수(淮水) 방면에서 강남까지

 

양자강하류 남북쪽에 걸쳐 거주한 무리가 도이(島夷)로 적혀 있고,

 

그 문구를 주석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백제 서남 발해 중에 있는 큰 섬 15개소 읍락에 사는 백제에 속한 동이족이

 

3강으로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무리라고 적혀 있고,

 

또 일본열도 왜도 도이(島夷)로 적혀 있다.

 

 

즉 도이(島夷)는 백제와 일본열도 왜 무리가

 

양자강하류 남북쪽에 들어와 거주한 무리라고 적혀 있다.

 

 

도이(島夷)가 거주한 3강(三江) 지역에 대하여 사기(史記) 색은(索隱)에서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송강(松江), 전당강(錢唐江), 포양강(浦陽江)이라고 주석하였다.

 

 

이곳은 중국의 동해안지방인 양자강 하류 방면이고

 

중국의 사서에는 강좌(江左)로 적혀 있다.

 

 

 

상서(尙書) 요전(堯典)에는 양주(揚州)에는 풀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는데,

 

이는 양주(揚州) 동쪽의 여러 섬으로부터 강회(江淮) 사이에 옮겨와

 

거처하는 사람들이라고 적혀 있다.

 

 

위에 나온 내용을 종합하면, 도이는 회수(淮水)와 양자강하류 방면에 거주한 무리이다.

 

 

이 무리는 양주(揚州) 동쪽 여러 섬에 거주하던 동이족 무리

 

즉 백제나 왜(倭) 무리가 3강 방면으로 이동하여 거주한 무리이다.

 

 

중국 사서에는 양자강하류 방면이 강좌(江左)로 적혀 있는데,

 

위서(魏書)에 <유유劉裕>, <소도성蕭道成>, <소연蕭衍>이

 

도이(島夷)로 비하되어 적혀 있는 것은

 

북위 쪽에서 이들의 출신을 백제(百濟)나 왜(倭)로 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 백제와 송의 연합

 

 

A.D 458년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송(宋) 나라에 이미 파견한

 

<여기餘紀>, <여곤餘昆>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재임명하고

 

송(宋)에 통보하여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 그대로 송(宋)에서도 재임명하게 하였다.

 

 

이때 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 중에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백제 연합군의 주임무는 북위(北魏) 정벌을 담당하는 것이었고,

 

백제 장군들을 宋 장군으로 다시 임명한 것은 연합군에 편성된 백제장군들이

 

宋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의 직위대로 宋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것이다.

 

 

대명(大明)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臣)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餘昆>, 정로장군 <여훈餘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餘都>, <여예餘乂>를 보국장군에,

 

용양장군 목금<沐衿>, <여작餘爵>을 용양장군에,

 

영삭장군 <여류餘流>, <미귀麋貴>를 영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于西>, <여루餘婁>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위 표문(表文)은 백제왕이 임명한대로 송(宋) 황제도 그대로 임명하라는

 

백제왕의 통보서 성격을 띈 표문(表文)이다.

 

 

송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송 나라의 관작(官爵)을 백제왕이 미리 마음대로 제수(除授)하고

 

송 황제보고 그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되는데,

 

그런데도 송 황제는 백제왕이 요청한 그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때 겸직 임명된 백제장군들은 여씨(餘氏) 성(姓)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우씨(于氏), 목씨(沐氏) 등 성(姓)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직위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冠軍將軍)을 비롯하여

 

북위(北魏) 정벌을 담당하는정로장군(征虜將軍)과 그외 보국장군(輔國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등이다.

 

 

 

 

 

3. 백제의 요서 경영

 

 

그 후 송.백제 연합군은 북위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점령하였고,

 

A.D 465년경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 등을 두었다.

 

 

이후 백제와 송은 불화관계에 빠졌는데,

 

이는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에

 

백제가 단독으로 군현을 설치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송과 백제 간의 불화는 그뒤 A.D 471년경에

 

고구려가 송과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 거점을 포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楊茂>,

 

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를 보내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太始){A.D465-471년} 중에도 宋朝에 사자로 갔습니다. (후략).

 

 

그러나 송서(宋書)에는 <고달高達>, <양무楊茂> 등이

 

송으로부터 장군이나 태수 등 관작을 받은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A.D 463년경 백제, 송 연합군이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백제가 설치한 군현이나 백제왕이 임시로 임명한 장군, 태수 등이

 

송 황제로부터 정식 재가를 받지 못하고, 백제 단독으로 군현을 두고

 

고달(高達), 양무(楊茂), 회매(會邁) 등을 태수(太守) 등으로 두었음을 의미한다.

 

 

 

 

 

4. 한성백제의 멸망 

 

 

A.D 471년경에 고구려는 백제와 송(宋)이 불화관계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위(北魏)와 같이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남(南)으로 송(宋),

 

북(北)으로 유유(蠕蠕), 서(西)로 북위(北魏), 동(東)으로 고구려로,

 

사방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이 포위되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여태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북위(北魏)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치려고 

 

사신을 북위에 보내어 표문을 올렸으나 북위가 불응하여 실패하였다.

 

 

개로왕(蓋鹵王) 18년(A.D 472년) 왕은  사신을 북위에 보내어 조회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길은 승낭이와 이리(고구려 지칭)에 막혀

 

비록 대대로 신령의 교화는 받았으나, 번방의 예를 닦을 길이 없었으매,

 

운궐을 쳐다 볼수록 쏠리는 정이 그지없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옵서는 천명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심정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餘禮>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張茂> 등을 보내

 

배를 띄우고 아득한 바닷길을 더듬으며 목숨을 자연의 운에 맡기고

 

만분지 일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과 땅 신이 감응하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펴서

 

(사자가)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소식을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에서 또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세 때는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 : 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나라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으므로 신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보아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고구려 지칭)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신의 나라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신의 나라는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 미친다면

 

속히 장수 한명을 신의 나라에 보내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치의 땅도 한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금 련(璉 : 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를 스스로 으깨어,

 

대신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마다하지 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듯

 

황제 폐하께 솔리는 정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의 제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매

 

황위가 한번 거동하면 성토만 있을 뿐이요 싸움은 없을 것이며

 

신도 비록 불민하오나 갖은 힘을 다하여 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람을 받아 향응할 생각입니다.

 

 

고구려의 불의와 반역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번국으로 받드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마음을 품어,

 

혹은 남으로 劉씨(劉宋)와 통하고 혹은 <유유蠕蠕>와 약속하여

 

함께 입술과 이 마냥으로 되어 왕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성인이었지만 단수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진 사람이라 일컬어지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체하지 않았습니다.

 

 

시냇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 이후에 신의 나라 서쪽 경계 소석산 북국 해중에서

 

10여명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기와 안륵을 주워 살펴 본 결과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들은 즉 바로 왕사가 신의 나라로 찾아오는데 도둑이 길을 가로막고.

 

큰 뱀(고구려 지칭)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백제는 요서분국이 고구려 등에게 포위됨으로써 국력이 약해졌다.

 

고구려는 그 기회를 틈타서 A.D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한다.

 

 

 

 

5. 동성왕의 재기(再起)

 

 

그 후 A.D 477년에 백제는 고구려 등의 포위를 뚫고

 

백제본국으로 온 요서분국 군사의 도움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고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후국(侯國)으로 만든다.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백제는 그 해 백제 군사와 왜(倭) 군사의 주력을

 

요서와 중국동해안 지방으로 이동시켰다.

 

 

왜(倭) 군사와 백제 군사의 주력이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이동하자

 

이에 당황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씩 보내던 북위(北魏) 사신을

 

이 해부터 일년에 3번 보내며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 

 

 

같은 해 북위는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패하였다.

 

 

북위의 공격을 물리친 남제.백제 연합군은

 

다음해 A.D 489년에 북위의 변두리 지역을 공격하였다.

 

 

 

 

6. 백제와 남제(南齊)의 연합

 

 

남제(南齊)는 백제계(百濟系) 장군인 <소도성蕭道成>에 의하여

 

宋을 이어 건국되었는데, <소도성蕭道成>은 북위(北魏) 정벌에 공훈을 세운 장군이다.

 

 

남제(南齊)는 입국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註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6 도이(島夷) 소도성전(蕭道成傳)에는

<소도성蕭道成>이 도이(島夷)로 적혀 있다.]

 

 

백제는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국력을 다시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운 후,

 

같은 해 백제군의 주력과 왜(倭) 군사를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으로 보내었다.

 

 

백제군이 증강되자 A.D 488년부터 489년 사이에

 

남제.백제 연합군과 북위.고구려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東城王 十年(A.D 488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永明六年(A.D 488年)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太和十二年(A.D 488年) 夏 四月 高麗吐谷渾國並遣使朝貢 蕭將陳顯達等寇邊

<北魏書>

 

 

太和十三年(A.D 489年) 春 正月 戊辰 蕭遣衆寇邊

<北魏書>

 

 

이 전쟁에서 남제.백제 연합군은 북위.고구려 연합군을 패배시키고,

 

백제는 강소성과 산동성 방면 중국 동해안지방을 점령하여

 

중국 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확장하였다.

 

 

그후 A.D 490년에 백제왕 모대(牟大)는 남제에 표문(表文)을 올려

 

A.D 488-489년 전쟁의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하여

 

남제에서도 선례(先例)대로 백제왕이 임시로 임명한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장사(長史) <고달高達>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관작을,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사마(司馬) <양무楊茂>는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관작을,

 

선위장군(宣威將軍) 참군(參軍) <회매會邁>는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관작을 남제로부터 각 제수받았다.

 

 

<모대牟大>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

 

건위장군 겸 조선태수를 사마 신 <양무楊茂>,

 

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를 보내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泰始 A.D465-471년) 중에도 宋朝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임시로 직을 내렸습니다.

 

 

천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온 세상이 바라는 바 입니다.

 

 

하물며 몸소 천자의 뜰을 밟고 있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하늘이 살피듯

 

우리를 특히 가엽게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달高達>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楊茂>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會邁>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를 내리고 태수를 제수하였다.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竭者) 복야(僕射) <손부孫副>를 시켜 책명을 내려

 

죽은 조부(祖父)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았다.

 

 

말하기를

 

"아 아!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이어받아

 

성실한 마음을 멀리까지 들어내었도다.

 

 

바닷길이 차갑지만 조공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규정에 따른 법을 잘 지키고 내리는 명령을 잘 받들지어다.

 

 

조서를 내려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牟大>는

 

이제 죽은 조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는다.

 

 

즉위 글과 인수 등과 옥,구리,범,대나무 4 부신(符信)을 보내

 

왕은 그것을 절하고 받아라.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했다.

 

 

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北岸부근을 말한다.

 

廣陽군은 북경 서남부에 위치한 上谷지방이다.

 

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중국내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A.D 490년에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반격을 받아 다시 패배하였다.

 

 

490년 경오년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수도를 평성{지금의 대동}에서

 

백제의 세력에 밀려 낙양으로 천도한다. (493년). 

 

 

백제가 취득한 산동반도와 제남지역은

 

북제北齊의 연대까지 70여년간 백제가 보유하게 된다.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 전열을 정비한 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정남장군 <설진도薛眞度>,대장군 <유창劉昶>,

 

서주자사(徐州刺史) <원연元衍>,평남(平南)장군 <유조劉藻>를 4방면으로 나누어

 

양양(襄陽),의양(義陽),종리(終離),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2달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終離)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등, 결국 위군은 총퇴각을 하게된다.

 

 

그 후 A.D 495년에 <모대牟大>는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한

 

관작(官爵) 제수(除授)를 요청하는 표문(表文)을 또 올려

 

공훈장령들이 남제로부터 장군(將軍), 태수(太守) 등 관작를 각 받았다.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부와 부월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쳤습니다.

 

 

<저근姐瑾> 등이 가서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았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와 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된 것은 <사법명沙法名> 등의 지략에 의한 것이니

 

마땅히 그 공훈을 밝혀내어 표창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임시로 <사법명沙法名>을 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에,

 

<찬수류贊首流>를 안국장군 벽중왕(辟中王)에,

 

<해례곤解禮昆>을 무위장군 불중후(弗中侯)에,

 

<목간나木幹那>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신이 보내는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王茂>,

 

참군 겸 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업드려 원하오니

 

각 직을 내린대로 성조(聖朝){남제}에서도 내려 주십시요."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註 그 전까지 <양무>가 조선태수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때 <장새>를 조선태수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도 태화 21년 6월 (497년)

 

또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태화 22년 4월)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魏는,

 

이로써 제남, 회수지방을 완전히 백제-남제에 상실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498년)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그러나 이 백제, 魏 전쟁은 魏나라만의 약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외국 정복전쟁은, 백제 내부에서도 염전사상을 자라게 했다.

 

 

젊은 영웅 동성대왕은

 

당대의 중국 최강의 강국 魏를 10년동안 5회에 걸쳐 패퇴시키면서 자만감이 싹텄다.

 

 

그래서 그는 500년(동성대왕 22년)에는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로운 새로운 궁궐을 지으니 높이가 5길이(丈)가 넘었으며,

 

또 궁내에 연못을 파고 이상한 새들을 길렀으며,아름다운 여인들에 취해 지냈다.

 

 

 

일이 이렇게되자 웅진의 토착호족들은

 

위사좌평(衛士佐平)겸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苩可>를 대표로 하여

 

동성대왕에게 내정에 충실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있던 동성대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백가>는 돌연 칼을 들어 동성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501년 12월의 일이다.

 

 

이로써 중국대륙내에 세력을 확대하던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나이 불과  36세, 재위 23년만에 최후를 맞이하게된다.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다.

 

 

백제 동성대왕의 묘는 산동성 청도 북쪽에 있다고 임승국 교수는 주장하였다.

 

 

 

 

7. 백제의 요서 상실

 

 

양(梁) 나라 역시 백제계 장군 출신인 <소연蕭衍>에 의하여 502년에 건국되었다.

 

[註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6  도이(島夷) 소연전(蕭衍傳)에는

<소연蕭衍>이 도이(島夷)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양(梁) 나라가 백제장군들을 양(梁) 나라 장군으로 임명한 내용이 나오지 않고,

 

또 동성왕(東城王)이 죽은 후 요서(遼西)나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의 태수나

 

장군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송서(宋書)나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 장군들에 대한 관작(官爵) 수여(授與)는

 

백제왕이 중국 황제에게 공적(功積)을 기록한 표문(表文)을 올려

 

재가(裁可)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양서(梁書)에는 양(梁) 황제가 백제 장군들에게 관작을 내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백제가 양(梁) 나라 초기에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을 모두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A.D 502-503년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齊, 魯, 吳, 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明治)년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부진(不振)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로 돌아왔다.

 

 

先是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

<桓檀古記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는 명치(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齊, 魯, 吳, 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遼西).진평(晋平)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梁) 나라 초기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을 빼앗긴 것은

 

무령왕(武寧王)이 정변을 일으켜

 

동성왕과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들을 제거하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이에 반발하여

 

백제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천감원년(天監元年 : A.D 502년)에

 

백제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기(古記)) 내용과 일치한다.

 

 

天監元年(A.D 502年) 進太號征東將軍 尋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

<梁書 百濟傳>

 

 

 

8. 북제(北齊), 수(隋), 당(唐) 때 백제분국 상황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威德王) 17년조와 1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70-571년경에 북제(北齊)로부터

 

대방(帶方)과 동청주(東靑州) 지방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위덕왕 17년(A.D 570년) 고제 후주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시중차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十七年高齊後主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위덕왕 18년(A.D 571년) 고제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十八年高齊後主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대방(帶方)은 보정시(保定市)방면이고, 동청주(東靑州)는 산동반도 방면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威德王) 2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81년에 수(隋) 나라로부터 대방(帶方)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위덕왕(威德王) 28년(A.D 581년) 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수 고조가 조서로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으로 봉하였다.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위덕왕(威德王) 45년(A.D 598년) 가을 9월

 

왕은 수나라가 요동의 역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장사 <왕변나王辯那>를 수나라에 보내어 표를 올려 군도가 되기를 청하니(후략)

 

秋九月王聞隋遼東之役遣 使長史王辯那入隋奉表請爲軍道.後略

 

 

 

A.D 598년에 백제가 수(隋)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군도(軍道)가 되겠다고

 

표(表)를 올린 것을 보면,

 

백제는 A.D 598년경에도 대방((帶方)을 영유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25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당(唐) 나라로부터도 대방(帶方)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무왕 25년(A.D 624년) 봄 정월 대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고조는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대방군왕백제왕"을 삼았다.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唐高祖嘉其誠款遣使就冊王爲帶方郡王百濟王

 

 

 

동쪽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마한의 추장 <제시영발鯷是英髮>은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옛 고죽국 땅을 도둑질하여 神에게 죄를 지어 오다가

 

神이 노하여 위기에 처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와 항복하였다.

 

馬韓尊長鯷是英髮分義景於扶桑數種天厭竊封疆於孤竹自貽神怒臨危轉禍率衆來降

<책부원귀冊府元龜>

 

[註 백제를 무시하기 위하여 마한(馬韓)이라 적고,

백제인을 무시하기 위하여 "鯷(메기)"로,

백제장군을 무시하여 英髮(털난 짐승)"으로 각 비하(卑下)하였고,

부유(扶桑)은 해 돋는 곳 즉 동쪽에 위치한 백제를 가리킨다.]

 

 

당(唐) 나라는 백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는 백제의 대방(帶方) 영유를 인정해주었다.

 

이는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통전(通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곳에 남은 무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성 부근에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수가 약해지자 흩어져서

 

돌궐이나 말갈에 투항하였고,

 

그 군장인 <부여숭夫餘崇>은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城傍餘衆 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 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

 

 

 

 

 

<490년경 백제의 중원진출과 북위의 천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