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神천황 시절 백제가 장악하였던 일본열도는

 

영락대제 시절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인덕(仁德)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위하여

 

윤공(允恭)이전의 천황연대를 고무줄처럼 늘려 잡은 탓이다.

 

 

실제 인덕(仁德)천황은 서기 397년 즉위하여

 

419년 전사할 때까지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고사기의 응신(應神)사망 서기 394년은 정확한 기록이며

 

공위(空位)의 3년을 계산에 넣으면 인덕 원년은 서기397년이 된다.

 

 

따라서 인덕(仁德) 55년이나 78년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劉宋의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한다.

 

 

서기 404년 仁德천황은 야마토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신왕의 백제군과 연합작전으로 대방땅을 공격한다.

 

 

仁德천황은 근구수(應神王)의 아들이고 아신왕은 근구수의 손자로 침류왕의 아들이다.

 

 

서기 407년 고구려의 응징이 따르는데

 

서기 400년 정벌한  한반도를 넘어 큐유슈유(九州)로 작전지역이 확대된다.

 

 

고구려는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일거에 장악하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

 

 

영락대제는 왕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열도를 점차적으로 점령하도록하였다.

 

 

그 임무를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 온 왕자가 <진珍>이었고

 

구류미시(久留米市) 고랑산(高良山) 중턱에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 지금 고랑대사 (高良大社)가 자리잡고 있다.

 

 

후쿠오카현(福岡縣) 구류미시(久留米市)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였고

 

고랑산(高良山)은 고구려군의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이 된다.

 

 

야마토를 정복 할 때까지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이다.

 

 

광개토대왕의 왕자 <고진高珍>은 서기 410년경 久留米市 高良山에 들어 왔다.

 

 

그가 남송의 송서에 나오는 왜왕 진(珍)이다.

 

 

서기 412년 영락22년 10월 영락대제가 나이 39세로 사망한다.

 

 

서기 414년 9월 광개토경 호태왕비가 세워진다.

 

 

진(珍)이란 글자는 열도에서 “우즈”라고읽는데

 

이 “우즈”를 한자로 옥수(玉垂)라 표기하게 되고

 

옥수(玉垂)를 다시 일본식으로 “타마타레”로 읽어

 

<고진高珍>은 열도에서 타마타레(玉垂命)라 불렸다.

 

 

타마타레(玉垂命)는 이때 고구려에 들어가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417년 경 久留米市에 돌아왔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7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표적을 보내왔다.

 

8월 고구려의 사자를 환대했다.

 

 

위의 기사는 <고진高珍>이란 이름의 고구려군 사령관이

 

직접 야마토의 인덕(仁德)천황을 찾아와 고구려의 무기를 과시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하는 장면이다.

 

 

 

일본서기 윤공(允恭) 14년

 

천황이 담로도(淡路嶋)에서 사냥하였다.

 

 

큰 사슴, 원숭이, 멧돼지가 여기저기 흘러 넘치도록 많이 있는데도

 

파리처럼 잽싸게 도망가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을 쳐 보니 섬을 지키는 귀신의 심술 때문임을 알았다.

 

 

적석(赤石, 현 兵庫縣明石市)의 바닷속에 진주가 있는데

 

그 진주를 갖다 바치면 짐승을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신탁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해인(海人)을 모아 赤石의 해저로 내려보냈으나

 

수심이 깊어 아무도 바닥까지 잠수하지 못 하였다.

 

 

그러자 아파(阿波国) 장읍(長邑)에 사는 남협기(男狭磯)란 해인(海人)이

 

허리에 줄을 감고 잠수하였다.

 

 

한참만에 나온 그는

 

“해저에 커다란 전복이 있는데 뭔가 빛을 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남협기(男狭磯)는 다시 잠수하여 큰 전복을 안고 나왔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 전복을 쪼개자 뱃속에서 복숭아씨와 같은 커다란 진주가 나와,

 

그 진주를 신에게 바치고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또한 남협기(男狭磯)의 희생을 슬퍼하여 묘를 만들어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그 묘는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사카이(堺)의 거대한 仁德천황릉을 연상하면 된다.

 

 

위의 기사를 우리는 仁德천황의 사망기사로 이해한다.

 

 

仁德천황의 이름은 오호사자키(大鷦鷯)인데

 

위 기사는 오사시 (男狭磯)의 사망을 전한다.

 

 

담로도(淡路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전사하고

 

야마토는 패배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야마토로 진격하지 못하고 九州로 퇴각한다.

 

 

서기 419년 야마토의 <인덕仁德(337-419)>천황이 전사하고

 

인덕의 아들 <이중履中(369-432)>이 즉위하였다.

 

 

이번 전쟁에서 <고진高進>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고구려의 왕자 <고진高珍>은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 때 <고진高珍>이 머문 곳이 현 高良大社이다.

 

 

타마타레(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진좌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久留米로 퇴각하여 사령관이 완치될 때까지

 

공격에서 수비로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백제와 근기(近畿)의 야마토로부터 언제 반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가 개국 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의 뢰호내(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그 산성의 흔적을 지금 신총석(神籠石)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기 419년 부상으로 쓰러진 고구려군 총사령관 <고진高珍>은

 

병상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다.

 

 

고구려 최고의 무당을 불러 와 굿을 하고 신의 가호를 빌었으나

 

사령관은 완쾌되지 않았다.

 

 

서기 428년경 신라군의 <김무金武>가 신라에서 명의를 한 사람 데려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서 의사가 오고나서

 

곧 <고진高珍>의 병이 나은 것 같다.

 

 

<김무金武>는 이후 <고진高珍>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김무성(金武城)의 안라라(安羅羅) 국왕으로 봉해 진다.

 

 

현 福岡市 전체가 <김金武>의 안라라국(安羅羅國)이다.

 

 

안라라국(安羅羅國)은 이때 고구려의 가장 가까운 맹방인 것이다.

 

 

신라군의 <김무金武>가 윤공(允恭) 다음에 등장하는 안강(安康)천황이다.

 

 

 

<인덕>은 응신(應神)천황의 아들이니 야마토 황실은 백제의 혈통이다.

 

 

야마토가 패배하자 <이중履中>의 아들 <시변압반市押磐>황자는

 

근강(近江)의 문옥야(蚊屋野, 현 滋賀県蒲生郡)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피를 이은 <웅략雄略>은 서기 456년 10월

 

시변압반 (市押磐)황자의 거처를 찾아 살해하였다.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를 제거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인덕(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된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중(履中)天皇, 반정(反正)天皇, 윤공(允恭)天皇의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이중(履中)은 인덕(仁德)의 아들이고,

 

반정(反正)은 토도치랑자(兎道稚郞子){침류왕}의 아들이다.

 

 

윤공(允恭)천황은 고구려의 왕자 <고진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인덕(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28년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 상표문에

 

“고구려의 왕, 야마토국을 지도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태자 兎道稚郞子가 격노하여 고구려의 사자를 야단치고

 

상표문을 찢어 버렸다고 나온다.

 

 

우리는 이 기사가 서기 429년 高珍이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본다.

 

 

이 당시 야마토의 천황이란 반정(反正)을 말한다.

 

 

432년 반정(反正) 천황은 구마소로 후퇴한다.

 

 

서기 433년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서

 

高珍은 19대 인교우(允恭)천황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는 그가 닌토쿠(仁德)천황의 셋째 아들이라 기록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