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6년은 수구(水狗:임술422)의 해이다.

 

 

정월에 포석사(鮑祠)에 한 쌍의 물개(水狗)를 만들어 나제(裸祭)를 행하니

절하는 무리가 만여 명이었다.

 

7일에 왕이 대궁(大宮)에서 조례를 받고 종신(宗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말했다.

 

“내가 고구려의 제도를 씀으로써 그를 비난함이 많다.

 

내 어찌 우리 조법(祖法)의 신성함을 모르고

헛되이 실성(實聖)의 초정(初政)을 본받겠는가?

 

강해지지 않으면 욕을 당하니 강해지고자 한다면 취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 우리의 조법(祖法)과 골정(骨政)을 문란케 하랴!

 

대소공경들은 마땅히 내 마음을 상세히 알아 쓸데없이 기우하지 말라.”

 

 

왕녀 <국사菊思>를 아찬 <패흔貝昕>의 처로 하였다.

 

 

3월에 금관(金官)의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제상堤上(363-422)>이 목도(木島)에서 불에 타죽었음을 보고했다.

 

 

애초에 <보미宝美>가 <제상堤上>의 (목숨을) 구하여 목도(木島)에 유배되었었다.

 

 

야인(野人)들이 미색(美色)과 금은보화(寶貨)로써 그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나,

 

<제상堤上>은 충심(忠心)을 변치 않고,

 

불에 타 죽음에 이르러서도 다만 입으로 계림(鷄林)의 신하라 칭할 뿐

 

야왕(野王)에게는 칭신(稱臣)하지 않았다.

 

 

야인(野人)들이 그 뼈를 바다위에 내던져서 뼈가 모두 서쪽으로 흘러가 없어졌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그를 위하여 국중(國中)에 발상(發喪)하고

 

해상(海上)에서 초혼하여 사당을 세웠다.

 

 

<제상堤上>의 작위를 대아찬(大阿湌)으로 더하고

 

왕이 <자아紫我>와 함께 친히 제주(祭主)가 되었다.

 

 

병관(兵官)에게 명하여 제상사(堤上祠)에서 군사훈련(鍊武)을 하게했다.

 

 

<양척眻尺>大母가 훙(薨)하니 나이 113세였다.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왕이 늘 장사택(長沙宅)에 머물음으로써 치술(鵄述)을 위로하였다.

 

 

치술(鵄述)은 (평소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웃으며 우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4월, 치술궁(鵄述宮)은 <청아靑我> <자아紫我> <녹아綠我>의 세 딸과 함께

해발령(海發岺)에 올라 동쪽의 목도(木島)를 향해 통곡하다가

기운이 다하여 훙(薨)하였다.

 

왕이 애통하고 상심하여 상궁(上宮)의 예(禮)로써 장사지내고,

봉우리 위에 사당을 세워 치술신모사(鵄述神母祠)라 하였다.

 

애초에 기림왕(基臨王)의 딸 <윤황閏凰>이 꿈에 솔개(鵄)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서

실성(實聖)과 몰래 잠통하여 낳았다.

 

<윤황閏凰>은 당시 영묘정주(靈廟淨主)가 되어서 색(色)을 통할 수 없었으나,

원래 실성과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여서 몰래 <영술英述>을 낳고

신전(神前)에서 태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시 이에 이르러 <치술鵄述>을 낳게 되자 죄가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암암리에 <제상堤上>의 어머니 <지황志皇>에게 맡겨서 길렀던 것이다.

 

이로써 <치술鵄述>은 어려서부터 <제상堤上>과 좋아하여

두 남편을 갖지 않을 것을 약속했는데,

꿈에 7색 무지개를 보고서 딸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낳을 수가 없었다.

 

<제상堤上>이 고구려에 사절을 받들고 가게 됨에 이르자,

성안에 저택을 하사받고, 야연(夜宴)에 입시하였는데

<내류內留>가 술에 취하여 <치술鵄述>을 이끌며 남편이 없음을 노래하자

왕이 취하여 <치술鵄述>을 안고 그를 욕구하였다.

 

<치술鵄述>은 두 남편을 갖지않는다는 약속을 들어 사양하고 귀가했는데,

 

꿈에 <제상堤上>이 나타난즉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신첩(臣妾)이 임금(君)을 거절함은 불충(不忠)이다.”라고 하였다.

 

<치술鵄述>은 즉시 일어나 목욕하고 궁(宮)으로 들어가 행(幸)을 받았는데,

일방(一房)에 문득 <황아皇我>공주를 임신하였으니 거의 하늘의 뜻이었다.

 

이로부터 총행(寵幸)이 심히 깊어지고, 다시 <부리富理>전군(殿君)을 낳게 되자

왕을 섬김이 남편과도 같아서, <제상堤上>의 출행을 근심으로 삼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그 불에 타죽음을 듣고는 상심이 심하여 훙(薨)한 것이다.

 

궁(宮)은 자색이 아름답고 정(情)이 난숙하여 왕이 그를 깊이 애통해 하였으니

두터히 예우함도 또한 진실로 옳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부도지 追記등에 의하면

<제상堤上>은 왜왕이 <미해美海>를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먼저 왜왕의 신하가 되어 신임을 얻은후 <미해>를 탈출시킨 것으로 나온다.

 

그 거짓 때문에 왜왕이 노하여 여러 가지 회유와 협박, 고문을 가한 것이고,

<제상> 역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 백결선생 박문랑(朴文良)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414~?)>은 거문고가 경지에 다달아,

일체의 희로애락을 모두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섣달그믐 세밑이 되어 남들은 다 떡방아를 찧는데, 쌀이 없어 아내가 슬퍼하자,

 

백결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사람의 생사(生死)는 명(命)에 있는 것이고,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린 것이오.

오는 것은 거절할 수 없고, 가는 것은 잡을 수 없는 바인데,

그대는 어찌 마음 상해 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주리다.”

 

그리고 거문고를 뜯어 방아 찧는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진짜 방아 찧는 소리와 똑같았다.

 

이에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가 세상에 전해져 ‘방아타령’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백결선생을 음악가로만 알 뿐, 모르는 사실들이 많다.

 

백결선생은 집안 대대로 대를 이은 연리지가(硏理之家)로서,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의 전수자 가문(家門)이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 8월,

 

경주 낭산(狼山)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이에 왕은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선령(仙靈)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지(福地)이다.”

라 말하고 그 누구도 그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실성왕 13년(414년) 에 백결선생이 태어났으니,

행정지명으로는 양산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이었다.

 

아버지 충렬공(忠烈公) <박제상朴堤上(363-422)>과 어머니 국대부인(國大夫人)

사이에서 3녀 1남 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관설당(觀雪堂)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의 충신으로,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이며,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영해(寧海)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왜국으로 간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왜국에 잡힌 몸이 되었다.

 

발바닥 가죽을 벗기우고 베어낸 갈대 위를 걷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계림의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왜국의 신하 되기를 끝내 거부하였다.

 

이때 백결선생은 9살이었다.

 

그후 누이를 따라 같이 궁으로 들어갔으나, 조정에 아첨하는 무리가 많음을 보고는,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빈하게 살았다.

 

“빽빽한 숲속에 나무가 있으면 묶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빽빽한 가시덤불 속에 난초가 있으면 베지 않아도 저절로 시든다.”

 

백결선생은 낭산(狼山) 기슭에 살았는데,

집이 가난해서 옷을 백 번이나 기워 입어 마치 메추리를 거꾸로 매단 것 같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동쪽 마을,

즉 동리(東里)에 사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고 불렀다.

 

낭산은 경주 동쪽에 있었다.

 

낙향한 백결선생은 아버지 박제상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인 징심록(澄心錄)을 연구하였다.

 

징심록(澄心錄)은 3교(敎) 15지(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제1지가 오늘날 전해 내려오고 있는 부도지(符都誌)이다.

 

세종대왕 당대 천재 지식인이었던 김시습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28자를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하였으며,

박제상 선생의 후손인 영해(寧海) 박씨(朴氏) 들을 각별히 보살폈다고 하였다.

 

나이 5세에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은 김시습은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를 직접 읽고 추기를 붙였다.

 

금척지(金尺誌)는 백결선생이 저술한 고대(古代)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이다.

 

영해 박씨들과 김시습의 인연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조상들로부터 비롯되니,

박제상 선생이 고구려에서 구해온 복호공(卜好公)은

바로 김시습 선생의 직계 조상이었다.

 

그리고 세종대왕께서는 영해(寧海) 박씨(朴氏)들을 두루 보살피어

서울 반궁(半宮,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살게 하며 벼슬을 주었는데,

김시습도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영해 박씨 종가집을 내 집같이 드나들며 한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영해 박씨들은 벼슬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

강원도 철원 복계산 금화현(金化縣)으로 들어갔는데,

김시습도 세한지맹(歲寒之盟)으로 이들을 따라 같이 갔다.

 

김시습은 영해 박씨 종가집에 전해지는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를 읽고,

고대어인 원본을 당시의 문장으로 적었다.

 

그리고 금척(金尺)에 관한 유래와 형상, 논평 등을 기록하여

징심록 추기(澄心錄追記)를 썼다.

 

금척(金尺)은 국가 통치권의 상징으로 천부경(天符經)의 이치를 본떠 만들었는데,

그것을 금(金)으로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尺]로 제작한 것은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렇듯 금척(金尺)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권(王權)의 상징물로서,

단군 고조선 부루단군 때도 있었고,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 왕이 지니고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금척(金尺)을 꿈에 본 후 조선을 개국했으며,

대한제국 때의 고종 또한 가장 큰 훈장을 금척대훈장으로 삼았다.

 

하늘의 소명을 받아 이 금척(金尺)을 보유하고 있는 집안이 백결선생의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도산에 살고 있는 <마령麻靈>간(干){백결선생의 자손}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으며,

고려의 현종은 거란이 침략했을 때 강감찬 장군을 보내 방책을 물었으며,

조선 세종대왕은 영해 박씨들을 궁궐 가까이 불러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이다.

 

사록에 의하면 박혁거세 왕이 38개의 똑같은 무덤을 만들어

금척(金尺)을 그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니 38개 중 어느 한곳에 금척이 묻혔을 터인데,

지금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는

도로 공사로 인해 훼손된 것 말고도 30여 개의 고분이 남아 있다.

 

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척(金尺)을 탐내어 금척리 일대를 파내고자 하였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제1설. 조정에서 일심단결로 “공사한 사람이 죽어서 어느 무덤에 묻혔는지 모른다.

왕실의 무덤을 다 파 제낄 수는 없다.”며 소정방을 제껴 버렸다.

 

제2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금척을 찾으려고 금척원 지역을 파내었다.

 

이때 최씨라는 사람이 금척을 몰래 감춰가지고 바다 건너 가 땅 속에 묻었다가

몇 년 뒤에 다시 가지고 돌아와 그 스승에게 반환하니,

스승이 금강산 바위굴 속에 깊이 감춰버렸다.

 

아무튼 금척(金尺)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비(神秘)한 신기(神器)라 하였다.

 

백결선생의 시(詩) 1편을 보자.

 

하늘이 사람을 내었으니, 모든 것이 하늘에 매였노라.
임금을 잃고 또 얻음, 그 역시 하늘이 할 일이러다.
얻거나 잃거나가 모두, 한갓 나를 위함이 아니려니.
오거나 가거나를 탓하여 무엇 하리.
세상에 별한 낙 없나니, 한갓 내 천명(天命)을 따르리라.

 

 

 


 

 

Posted by 띨빡